고구려 본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 28대 보장왕 (21)

상 상 2012. 3. 27. 19:09

< 제1차 고구려 당 전쟁, 당태종의 침입(18) 안시성 싸움 5) >

 

이튿날 [고]연수 등만은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군대를 통솔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황제가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깃발을 들 것을 명령하니,

여러 군대들이 북치고 소리 지르며 일제히 나아왔다.

[고]연수 등은 두려워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 군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용문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군진을 함락시키니,

[그가]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고, 우리 군사들은 쓰러졌다.

대군이 들이치니 우리 군사들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3만 여 명이었다.

황제가 [설]인귀를 바라보고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고]연수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으나,

황제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포위하고, 장손무기가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귀로를 끊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무리 3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고,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황제가 욕살 이하 장관 3천5백 명을 가려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3백 명을 잡아서 모두 파묻고, 말 5만 필과 소 5만 두와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하였다. 다른 기계들도 이만큼 되었다.

[황제가] 갔던 산 이름을 고쳐 주필산(駐蹕山)이라 하였다.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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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고연수가 속아서 방비를 안하는 동안 기습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3만 여명, 항복한 사람이 3만 6천 8백 명입니다.

 

2) 그리고 고연수를 홍려경,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고연수는 자기가 당태종의 말을 믿어 속아서 방비를 안하는 바람에

고구려군이 패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자책하여 병이 나서 죽습니다.

 

3) 따라서 중국사람들의 말은 설사 국정 최고 지도자(황제)의 말이라도 믿어서는 않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4) 이로써 안시성 싸움의 전초전(前哨戰)이 끝납니다

 

5) 오늘 기사와 관련된 구당서 동이열전

 

○ 이튿날 연수(延壽)가 이적(李勣)의 군사만 보고 출전하려 하였다.

태종(太宗)은 멀리 무기(無忌)의 군사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바라보고,

고각(鼓角)을 동시에 울리고 기치(旗幟)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적의 무리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그 진영은 이미 어지러워졌다. [이때] 이적(李勣)이 보병 1만명에게 장창(長槍)을 들려 공격하니, 연수(延壽)의 무리들은 패전하였다.

무기(無忌)가 군사를 놓아 그 후미를 치고, 태종(太宗)이 또 산에서 내려와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치자,

적들은 크게 무너져 참수(斬首)가 만여급(萬餘級) 이나 되었다.

연수(延壽)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굳게 지켰다. 이에 무기(無忌)·적(勣)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포위하게 하고, 동천(東川)의 다리를 철거하여 귀로(歸路)를 차단하였다.

태종(太宗)은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 적의 영루(營壘)를 보면서

시신(侍臣)에게,“고려(高[구,句]麗)가 나라를 기울여서 온 것은 존망(存亡)이 달려 있어서 인데,

[대장기(大將旗)를] 한번 흔들자 패전하고 말았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이다.”하였다.

이어 말에서 내려 하늘에 두번 절하며 사례하였다.

 

○ 연수(延壽)와 혜진(惠眞)이 15만 6천 8백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해 오자,[註102]

태종(太宗)은 원문(轅門)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연수(延壽) 등은 무릎으로 기어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명(命)을 청하였다.

태종(太宗)은 녹살(傉薩) 이하 추장(酋長) 3천 5백명을 가려내어 군직(軍職)을 주어서 내지(內地)로 옮겼다.

말갈(靺鞨)사람 3천 3백명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註103] 나머지 무리들은 평양(平壤)으로 돌려 보냈다.

노획물은 말이 3만필, 소가 5만두, 명광갑(明光甲)이 5천벌이고, 기타의 기계(器械)들도 이에 맞먹었다.

고려국(高[구(句)]麗國)이 크게 놀라서 후황성(后黃城) 및 은성(銀城)[註104]이 저절로 함락되니,

수 백리에 인가(人家)의 연기가 끊겼다. 이어서 거동하였던 산을 주필산(駐蹕山)[註105] 이라 이름하고,

장군(將軍)으로 하여금 파진도(破陳圖)를 작성하게 하고, 중서시랑(中書侍郞) 허경종(許敬宗)에게 명(命)하여 글을 지어

돌에 새겨 그 공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고연수(高廷壽)에게는 홍려경(鴻臚卿)을, 고혜진(高惠眞)에게는 사농경(司農卿)을 제수(除授)하였다.

 

6) 오늘 기사와 관련된 신당서 동이열전

 

○ 이튿날 고구려가 [이(李)]적(勣)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바로 싸움을 벌였다.

태종(太宗)은 [장손(長孫)]무기(无忌)의 군사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바라보고, 고각(鼓角)을 불고 병치(兵幟)를 사방에서 함께 들게

하였다. 고구려가 당혹하여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무리가 이미 어지러워졌다. [이(李)]적(勣)은 창을 든 보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그들을 무너뜨리고, 무기(无忌)는 그 후미를 쳤다. 태종(太宗)이 산에서 달려 내려오니, 고구려군은 크게 와해되어

2만급의 머리를 베었다.  [고(高)]연수(延壽)는 남은 무리들을 수습하여 산을 등지고 굳게 지켰다.

무기(无忌)와 적(勣)은 [군대를] 합세하여 포위하고, 냇물의 다리를 철거하여 귀로(歸路)를 차단하였다.

태종(太宗)은 말고삐를 잡고 고구려의 영루(營壘)를 살펴 보고,

“고(高)[구(句)]려(麗)가 온 나라를 기울여서 왔으나, [대장기(大將旗)를] 한번 흔들어 깨뜨렸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다.” 하고,

말에서 내려 하늘에 두번 절을 올려 감사하였다. [고(高)]연수(延壽) 등이 사세(事勢)가 궁함을 헤아리고 바로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원문(轅門)에 들어 와서 무릎으로 기어 앞에 나아가 절을 올리고 命을 청하였다. 太宗이, “이 뒤에도 감히 천자(天子)와 싸우겠는가?” 하자,

두려워서 땀을 흘리며 대답을 못하였다.

 

○ 태종(太宗)은 추장(酋長) 3천 5백명을 가려내어 모두 벼슬을 주어서 내지(內地)로 들여 보내고, 나머지 3만명은 [그 나라로] 돌려 보냈다.

말갈(靺鞨) 사람 3천여명은 목을 베었다. 노획물은 우마(牛馬) 십만필과 명광개(明光鎧) 1만벌이었다.[註094]

고(高)[구(句)]려(麗)가 크게 놀라서 후황(后黃)과 은(銀)의 두 성(城)[註095]이 스스로 빠져 달아나니, 수백리에 인가(人家)의 연기가 끊겼다.

이에 역(驛)을 통하여 태자(太子)에게 [소식을] 전하고, 아울러 여러 신하들에게 글을 내려, “짐(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니 이와 같다.

어떻게 보는가?” 하였다. 거동하였던 산을 주필산(駐蹕山)이라 이름하고, 파진도(破陣圖)를 그렸으며, 전공을 기념하는 글을 돌에 새겼다.

그리고 [고(高)]연수(延壽)에게는 홍려경(鴻臚卿)을 제수하고, [고(高)]혜진(惠眞)에게는 사농경(司農卿)을 제수하였다.

척후(斥候)를 하던 기병(騎兵)이 [고구려(高句麗)의] 첩자(諜者)[註096]를 잡아 왔는데,

태종(太宗)은 그 포박을 풀어 주었다. 그가 사흘동안 밥을 먹지 못하였다고 하자, 밥을 먹여 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신발까지 주어서 보내며, “돌아가거든 막리지(莫離支)에게 전하라. 만약 군사의 동정을 알려거든 부디 내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 가라.”고 하였다.

태종(太宗)은 모든 영루(營壘)에 참호를 파지 않고 척후(斥候)만 근엄히 할 뿐이었으나,

군사들이 군량을 운반할 적에 비록 단기(單騎)일지라도 고구려는 감히 약탈을 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