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8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25, 9. 절도사의 시대-3)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9. 절도사의 시대
1) 연표
1) 연표-3
년 | 내용(출처: 자치통감- 요약) |
886 | 진해(절서) 아장 장욱이 난을 일으켜 상주(常州)를 함락(1월) 이극용이 군사를 하중으로 돌려 왕중영과 함께 표문을 올려, 환관 전령자의 주살을 주청
◎ 환관 전령자, 당 희종 겁박해 보계로 감(886년 1월8일)
전령자는 당 희종에게 흥원으로 행차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좆지 않았다.(1월8일) 이날 밤 환관 전령자는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 당 희종을 겁탈하여, 보계(寶雞)로 행차하게 했는데 조정대신들은 아무도 몰랐다.(1월8일) : ⇒ 환관 전령자의 희종 겁박
조정의 인사 가운데 당 희종을 뒤쫒아 온 사람들이 주질(盩厔)에서 어지러운 군사들에 약탈당하여 의복과 보따리가 거의 없었다.
◎ 토벌군 측의 주매와 이창부, 왕중영과 합침(886년 1월)
이때 전령자가 권력을 부리면서 파천하기에 이르게 하자 전국에서 함께 그것을 분노하고 미워하였는데 주매와 이창부 역시 그에게 쓰인 것을 수치로 여겼으나 이극용이 강한 것을 꺼려 그들과 다시 합쳤다.
빈녕(주매)과 봉상(이창부)의 군사들이 당 희종을 뒤쫒아가, 신책(금군)지휘사 양성을 반지(潘氏)에서 격파하였다.
전령자는 당 희종을 데리고 보계를 떠나며, 금병에게 석비(石鼻)를 지키게 하고, 감의군(感義軍)을 흥주와 봉주에 설치하고 양성을 절도사로 삼아 산관(散關.대산관)을 지키게 함.
전령자는 당 희종 데리고 대산령(大散嶺)을 넘어 겨우 산관(대산관)들어갔다. 당 희종이 산관에 들어가니 주매는 산관을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사양왕(양왕을 이을 사람) 이온은 당 희종을 좆았으나 따라잡지 못하여 준도역에 머물다가 주매에게 잡혀 봉상으로 돌아왔다.
◎ 이극용, 태원으로 회군(886년 1월30일)
이극용이 태원(太原)으로 돌아갔다.(886년 1월30일)
하중절도사 왕중영, 빈녕절도사 주매, 봉상절도사 이창부가 다시 전령자를 주살하라고 청하였다.(2월)
주매와 이창부가 산남서도절도사 석군섭으로 하여금 험하고 중요한 곳을 목책으로 끊게 하고 우역에 불지르니 당 희종(과 전령자)는 다른 길로 나갔는데 빈주의 군대가 그 뒤를 압박하였으나 겨우 산남에 도착하였다.(2월)
석군섭이 진을 버리고 주매에게로 도주(3월3일)
◎ 당 희종. 흥원 도착(886년 3월17일)
전령자와 당 희종. 흥원(興元)에 도착(3월17일). 보란도장 이연 등이 봉주(鳳州)에서 빈군에게 패배하였다.
◎ 당 희종의 명 하중절도사 왕중영 거절(886년 3월?)
당 희종이 하중절도사 왕중영에게 곡식 15만 곡을 바치라고 하였으나 왕중영이 전령자를 주살하지 않아 거절한다고 하였다.
노악을 산남서도유후에 충임하였다. 왕건으로 하여금 삼천(三泉)을 지키게 하고, 진휘와 장조로 하여금 흑수(黑水)에 주둔하여 잔도를 수리하여 길을 통하게 하였다.
◎ 왕건을 벽주자사로(886년 3월)
왕건에게 벽주(壁州)자사의 업무를 멀리서 관장하게 하였다. (주석: 직접 관할로 가지 않고 멀리서 해당 주의 자사 업무를 관장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장군으로 자사를 겸직하게 된 실마리를 연 것이다.)
서천절도사 진경선이 동천절도사 고인후를 의심하여 제거하려 하였다.. 수주(遂州)자사 정군립(정군웅)이 군사를 일으켜 한주(漢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도(成都)로 진격하다가 진경선이 그의 장수 이순지를 파견하여 맞아 싸우니 정군립이 패하여 죽었다. 진경선은 또 유(維), 무(茂)의 강(羌)족을 발동하여 동천절도사 고인후를 쳐서 죽였다.
빈녕절도사 주매는 전령자가 황제 옆에 있어 제거할 수 없자(3월) 봉상에 있는 백관들을 위협하여 양왕 이온을 권감군국사로 추대하고, 승제하여 책봉하였다.(4월3일)
◎ 주매, 양왕 이온을 황제로 하여 장안 입성(886년 4월6일)
주매가 스스로 좌우신책십군사를 겸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양왕 이온을 황제로 받들어, 장안(長安)에 입성(4월6일) : ⇒ 당 조정 장안과 흥원(興元)으로 분열
전령자는 민심 이반을 알고 권력을 내놓았다. 양복공을 좌신책중위·관군용사로 삼고, 스스로 서천감군사가 되어, 형인 서천절도사 진경선에게 의지하였다.
관군용사 양복공은 전령자 무리인 왕건을 내보내어 이주(利州)자사로 삼고, 진휘를 집주(集州)자사로, 장조를 만주(萬州)자사로, 이사태를 충주(忠州)자사로 삼았다.(4월)
◎ 빈녕절도사 주매의 난(5월~12월)
주매는 스스로 시중· 제도염철 전운등사를 겸직하고, 번진들에게 크게 봉작하고 벼슬을 주어 번진을 기쁘게 하였다.(5月)
(회남)우도압아· 화주(和州)자사 여용지는 주매에게 영남동도절도사를 제수받자, 가지않고 막부열어 회남절도사 고병과 맞먹었다.
애초에 봉상절도사 이창부는 같이 양왕을 세우길 모의하였는데 빈녕절도사 주매가 혼자 권력을 장악하자, 흥원에 있는 당 희종에 붙었다.
빈녕절도사 주매는 왕행유를 파견하여 5만 군을 거느리고 당 희종을 뒤쫓게 하니 감의절도사 양성이 싸워 물리치다가 산관을 버리고 달아났고 왕행유는 (산남서도) 봉주(鳳州)에 주둔하였다.
이때 조세 대부분이 장안(長安)으로 들어가, 흥원(興元)의 관리와 위사들은 모두가 식량부족으로 위험하였는데 ⇒ 빈녕절도사 주매의 난(5月~12月)
◎ 당 희종, 왕중영 회유, 주매 토벌(886년 5월20일)
흥원(興元)의 당 희종이 하중절도사 왕중영을 회유하여, 빈녕절도사 주매를 토벌케 하였다.
◎ 이극용도 주매 토벌 선언(886년 5월20일)
장안의 양왕 이온도 이극용에게 사자를 보내고 주매도 이극용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이극용은 그 모의가 모두 주매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여, 하동절도사 이극용은 격문을 띄워 주매 토벌을 선언하였다.(5월20일)
진종권의 장수 진현이 송변을 노략질하니 선무절도사 주전충이 위지(尉氏)에서 격파하고 그의 장수 곽언을 파견하여 3만을 거느리고 채주(蔡州)를 쳤다(5월15일)
양수량을 금상절도사, 경기체치사로 삼으니,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금주(金州)를 나가서 하중절도사 왕중영, 하동절도사 이극용과 함께 주매를 공격하게 하였다.(6月)
이극용이 당 희종에게 사신을 보내 황하를 건너 주매를 제거하고 당 희종을 맞이할 테니 여러 도에 명령을 내려 자기와 협력하게 해달라고 하였다.(6월)
형주(衡州)자사 주악이 담주(潭州)를 공격하니. 흠화절도사 민욱이 회서장수 황호를 초대해 함께 지켰는데 황호는 민욱을 죽였다. 주악은 담주성을 공격하여 뽑고 황호를 죽였다.(6월)
진해(절서)절도사 주보가 아장 정종실을 파견하여, 상주(常州)를 습격하여 장욱을 축출하니, 장욱은 해릉(海陵)으로 달아나 진알사 고패에 의지하였다. 고패는 회남절도사 고병의 장수로, 백성 5만호, 군사는 3만명 이었다.(6월)
진종권이 허주(許州)를 함락시키고, 충무절도사 녹안홍을 죽였다.(7월) 빈녕군(軍)의 왕행유가 흥주(興州)를 공격하니 감의절도사 양성이 달아나 문주(文州)를 점거하였는데 보난도장 이연, 호필도장 이무정, 진패에게 대당봉(大唐峰)에 주둔하여 그를 막게 하였다. 흠화군(欽化軍)을 무안군(武安軍)이라 변경하고 형주자사 주악을 무안절도사로 삼았다(7월)
노룡절도사 이전충이 죽으니 그의 아들 이광위를 노룡유후로 삼았다.(8월)
광주(光州)의 반란군인 왕조가 천주(泉州)를 뽑고 자사 요언약을 죽였다. 왕조는 복건관찰사 진암에 항복하니, 진암이 왕조를 천주자사로 삼았다. 왕서를 유폐하니 자결하였다.(8월)
주매의 장수 장행실이 대단봉을 공격하니 이연 등이 쳐서 물리쳤다.(9월) 금오장군 만존이 빈주의 군사와 싸워 깨뜨리고, 흥주(興州)를 빼앗고 나아가 만인채(萬仞寨)를 지켰다.
서소의절도사 이극수가 동소의절도사 맹방립을 공격하였는데, 그 장수 여진을 초간에서 사로잡고 고진(故鎮), 무안(武安), 임명(臨洺), 한단(邯鄲), 사하(沙河)를 뽑았다.(9월18일) 대장 안금준을 형주자사로 삼았다.(9월)
◎ 양왕 이온.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886년 10월)
양왕 이온은 장안(長安)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흥원(興元)의 희종에게 '태상원황성제'라고 하였다.(10월)
항주자사 동창이 항주도지병마사 전류에게 "월주를 빼앗으면 항주를 주겠다"고 하자 전류는 군사를 거느리고 제기(諸暨)에서 평수(平水)로 나가, 산을 뚫고 길내며 5백리 진격하여 조아태(曹娥埭)로 나왔는데 절동의 장군 포군복이 투항하였다. 전류는 절동의 군을 연파하고, 풍산(豐山)에 주둔하였다.(10월)
감화 아장 장웅과 풍홍탁이 감화절도사 시부에게 죄를 짓자, 무리 3백을 모아 도망하여 장강을 건너 소주(蘇州) 습격하여 이를 점거하였다. 장웅은 스스로 소주자사라고 하고서 군사를 모으니 5만에 이르렀고 전함이 1천여 척이 되자 스스로 천성군(天成軍)이라 불렀다
하양절도사 제갈상이 죽자 대장 유경과 장전의가 그의 아들 제갈중방을 하양유후로 세웠다.(10월) 서소의절도사 이극수가 형주(邢州: 동소의절도)를 공격하였다가 실패하고 철수하였다.(10月)
절서의 항주도지병마사 전류가 월주(越州: 절동)에서 승리하고, 의승절도사 유한굉은 태주(台州)로 달아났다.(11월11일)
의성절도사 안사유가 정치를 양상도우후 하후안과 두표에게 맡겼는데, 이 둘이 교만 방자하여 소교 장효가 무리 2천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니 안사유는 하후안과 두표의 머리를 베고 유시하자 군대는 안정되었다. 천평절도사 주선이 활주(의성)를 빼앗으려고 복자자사 주유를 파견하여 장효를 유인하여 죽였다.(11월)
◎ 주전충 의성절도 장악(886년 11월)
그사이 선무절도사 주전충은 주신과 이당빈을 파견하여 활주(滑州: 의성의 치소)를 습격하여, 하루저녁에 성 아래에 도착하여 1백개 사다리로 올라가 의성절도사 안사유를 생포하고 돌아왔다. 주전충은 아장 호진을 知의성유후로 삼았다. ⇒ 주전충의 의성 장악(11月)
서천감군 전령자가 성도(成都)에 이르러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11월)
여러군대(만존, 이무정 등)가 봉주(鳳州: 산남서도)를 뽑고, 만존을 봉주방어사로 삼았다.(12월4일)
◎ 장안 왕조 멸망(886년 12월 10일)
양복공이 격문으로 주매의 머리를 가져오는 사람은 정난(빈주)절도사를 상으로 주겠다고 하자, 싸움에 자주 패한 왕행유가 주매에게 죄를 얻을까 두려워 그 아랫사람들과 주매를 죽여 빈녕절도사가 되자고 하였다. 빈녕도장 왕행유는 봉주(鳳州)에서 멋대로 장안(長安)으로 들어와, 빈녕절도사 주매 잡아 참수하고 그 무리 수백명을 죽였다.(12월10일) 장안에서 방화 약탈하니 백성들 중 옷을 갖지못해 얼어죽은 자가 땅을 덮었다
배철과 정창도가 백관 200명을 인솔하고 양왕 이온을 데리고. 하중으로 달아나니, 호국절도사 왕중영은 이를 받아들여 이온을 잡아 죽이고 배철과 정창도는 잡아 가두었으며 백관들 가운데 거의 반을 죽였다. ⇒ 장안 왕조 멸망
◎ 동창의 절동 장악(886년 12월)
태주(台州)자사 두웅이 의승절도사 유한굉을 유인하여, 항주자사 동창에 보내 참수되었다. 항주자사 동창은 월주(越州)로 진을 옮겨 스스로 知(지)절동군부사라고 하고 전류를 知(지)항주사로 삼았다. ⇒ 동창의 절동 장악(12월)
왕중영이 양왕 이온의 머리를 가지고 흥원에 갔다.
하양대장 유경이 동도(낙양)유수 이한지를 습격했다가 민지(澠池)에서 대패하여 도주하였다. 유경이 장전의를 파견하여 이한지를 막았다. 이때 하양절도사 제갈중방은 어리고 약하여 정사는 유경에게 있었지만, 제장들은 그에게 붙지 아니하니 장전의는 동도유수 이한지와 군사를 합쳐 하양을 공격했다가 유경에게 패배하여 이한지와 장전의는 회주(懷州)로 패주하였다.
◎ 마은의 등장(886년 12월)
애초에 충무 결승지휘사 손유는 용양지휘사 유건봉과 더불어 채주에서 수자리를 서면서 황소를 막았는데 무구 사람 마은이 예속되있었는데 재주와 용기로 소문나 있었다.
◎ 손유, 하양절도사 자칭(886년 12월)
진종권이 결승지휘사 손유를 파견하여 정주(鄭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자사 이번이 대량으로 달아났다. 손유가 나아가 하양을 함락시키자 하양유후 제갈중방은 대량으로 달아났다. 손유가 스스로 하양절도사를 칭하니 장전의는 화주를 점거하고 이한지는 택주(澤州)를 점거하여 이들을 막았다.
수주(壽州)자사 장고가 장수 위건을 파견하여 여주를 노략질하자 여주(廬州)자사 양행민이 장수 전군, 이신복, 장훈을 파견하여 이를 막았으며 저성(褚城)에서 위건을 패배시켰다. 저주(滁州)자사 허경이 서주(舒州)를 습격하니 자사 도이가 여주로 달아났다.
◎ 양행민, 양행밀로 개명(고병: 886년 12월)
[회남]절도사 고병은 려주(廬州)자사 양행민에게 양행밀로 바꾸도록 명령하였다.
이해에 천평 아장 주근이 태녕절도사 제극양을 축출하고 스스로 유후가 되었다 당 조정에서는 주근을 태녕절도사로 삼았다.(886년 말)
안륙(安陸)의 도적 주통이 악주(鄂州)를 공격하니 자사 노심중이 도망쳤으며 악주(岳州)자사 두홍이 빈틈을 타고 악주(鄂州)로 들어가 스스로 무창(武昌)유후라고 하니 당 조정은 그에게 무창유후를 제수. 그틈에 상음(湘陰)의 도적 등진사가 악주(岳州)를 함락시켰다.
황제에 오른 진종권의 장수 진종언이 형남을 포위한 지 2년 동안 형남절도사 장괴가 농성하며 지켰는데 진종언은 끝내 이길수 없자 떠났다. ※ [형남]강릉(江陵)의 2년간 농성중에 성내 쌀1말 40민이고 갑옷,·북의 가죽을 떼어먹어 다 없어졌다(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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