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82,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27, 9. 절도사의 시대-5)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9. 절도사의 시대
1) 연표
1) 연표-5
년 | 내용(출처: 자치통감- 요약) |
887 | ◎ 양행밀의 회남공략(887년 5월~10월)
필사탁이 강릉을 공격하면서 여용지가 거짓으로 고병의 첩서를 만들어 여주(廬州)자사 양행밀을 행군사마로 임명하고 병력을 보내 지원하게 하였다. 이 기회에 회남을 차지하라는 원습의 건의에 따라 양행밀이 여주의 병력을 발동하고 화주(和州)자사 손단의 병력을 빌려 수천으로 그곳에 갔는데(4월) 천장(天長)에 이르렀다(5월) ⇒ 양행밀의 회남공략(5月~10月)
정한장이 필사탁을 따르면서 회구를 지키게 하였는데 여용지가 그곳을 공격하였지만 열흘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고 정한장이 병력을 이끌어 그곳을 구원하였다. 여용지는 양행밀이 천장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양행밀에게 귀부하였다.
주전충이 진종권 군(軍)의 장질을 대파하니, 진종권이 정주(鄭州)에서 정예병을 끌고 장질과 만났다.(5월3일)
장신검이 필사탁에게 재화를 요구했다가 거부당하자, 양행밀에게 식량을 공급하며 귀부하였다. 해릉(海陵)진알사 고패, 곡계(曲溪) 사람 유금, 우이(盱胎) 사람 가령위도 양행밀에게 귀부하였다. 양행밀의 무리가 1만7천 명이 되었는데 장신검은 고우에 있는 양식을 그들에게 주었다.
주전충이 연과 운에 도움을 구하자 천평절도사 주선과 태녕절도사 주근이 모두 병사를 이끌고 그에게 갔고, 의성군(軍)도 역시 도착하였다.
◎ 주전충, 진종권 대파(887년 5월8일)
주전충이 네 진의 군대를 가지고 변효촌(邊孝村)에서, 진종권을 쳐서 대파하고 2만여 급을 베었는데 진종권이 밤중에 달아나자 양무교(陽武橋)까지 추격했다 되돌아 왔다(5월8일) 주전충은 주선이 깊이 은덕을 베푼 것으로 여겨 그를 형으로 섬겼다.
◎ 진종권군 낙양 등을 버리고 도주(887년 5월)
채주 사람들(진종권 군)이 동도(낙양), 하양(河陽), 허(許), 여(汝), 회(懷), 정(鄭), 섬(陝), 괵(虢) 등을 지켰는데 진종권이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버리고 도주하였다.
진종권은 정주(鄭州)에서 출발하고, 손유는 하양(河陽)에서 출발하면서 모두 살인과 방화를 하고 떠났는데 진종권의 세력은 이때부터 조금씩 쇠퇴하였다
당 조정에서는 호가도두(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따르는 장수) 양수종을 知(지)허주사로 삼았고 주전충은 그의 장수 손종일을 지(知)정주사로 삼았다.
◎ 전류의 절서공략(887년 5월~12월)
항주(杭州)자사 전류는 두릉, 완결, 성급을 보내, 진해유후 설랑을 치게하였다. ⇒ 전류의 절서공략(887年5月~12月)
선흡관찰사 진언이 선흡의 군대 3만여 명을 거느리고. 대나무 뗏목타고 장강을 내려가는데 조휘(장웅 군)가 상원(上元.건강)에서 맞아서 치니 절반이 죽었다.(5월21일)
◎ 진언의 회남 점거(887년 5월 23일)
진언이 광릉(廣陵)에 들어가 스스로 권지회남절도사라 하였고, 필사탁을 행군사마로 삼고 조횡을 선흡관찰사로 임명하였다.(23일) ⇒ 진언의 회남점거
양행밀이 광릉(廣陵)성으로 진격, 8개 영채를 꾸려 그곳을 지키자 진언이 성을 닫고 지켰다(5월25일)
천위도두(금軍) 양수립이 봉상절도사 이창부와 길을 가지고 다투다가 휘하의 병사들이 서로를 때리게 되자 황제가 중사(환관)에게 명하며 타일렀지만 그치지 않았다(6월6일)
이창부가 희종의 행궁을 불태우고(7일), 다시 대안문을 공격하였다(8일). 양수립은 이창부와 사거리에서 싸워 이창부의 병사가 패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농주(隴州)로 도주하였다. 양수립은 양공복의 수양아들이다. 호가도장·무정절도사 이무정이 농주초토사가 되어, 봉상절도사 이창부를 토벌하였다.(10일)
하중의 아장 상행유가 하중(호국)절도사 왕중영(榮)을 죽였다.(6월12일). 형인 섬괵절도사 왕중영(盈)을 호국(하중)절도사로 삼으니 부임하여 상행유를 죽였다 왕중영(盈)의 아들 왕공을 권지섬괵유후로 삼았다.
◎ 양행밀의 공격에 대한 진언의 반격 실패(887년 6월 16일)
(권지)회남절도사 진언이 필사탁과 진조를 보내 8천 군사를 이끌고 양행밀을 쳤지만, 진조는 패하여 죽고 사졸들도 7~8할이 죽었다. 선흡 군사들이 식량부족으로 사람을 먹기 시작하였다(16일)
박주(亳州)의 장군인 사은이 자사 송곤을 내쫒았다.
손유가 하양을 떠나자 이한지가 택주에서 장전의를 불러 그와 더불어 남은 무리를 합쳤다. 이한지는 하양을 점거하고 장전의는 낙양을 점거하여 함께 하동절도사 이극용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극용은 그의 장수 안근준을 택주자사로 삼아 기병을 거느리고 그를 돕고서, 이한지를 하양절도사로, 장전의를 하남윤(낙양)으로 삼게하였다(6월말)
◎ 하남윤 장전의의 낙양 재건(887년 6월)
당시 동도(東都.낙양)은 황소의 난후, 남은 백성들이 모여 3성(하남, 낙양, 중단)을 만들어 서로 지킬 수 있었지만 진종권과 손유가 휩쓸어 겨우 무너진 담장만 남아있었다. 장전의가 처음 이르렀을 때 흰 뼈가 땅을 덮었고, 가시밭은 넓게 퍼져있고, 남은 백성은 1백호를 넘지 못하였으며 장전의의 휘하에는 겨우 100명뿐이었는데 그중에서 18명을 둔장삼아, 도기도내 18개현에 보내 백성들 위무 다시 불러오게 하였다. 살인자만 죽이고, 조세를 없애니,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어, 장정 뽑아 전투와 진(陳)치는 법을 가르쳐 도둑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몇년후 옛 제도를 회복하고, 여러 현의 호구도 거의 모두 돌아와, 뽕과 삼배도 울창하여 들판에 노는 땅이 없어졌다. 그중 뛰어난 병사(勝兵.승병)는 큰 현에 7천명, 작은 현에 2천명을 보유하였다. 장전의는 밭이 있는데 농사짓지 않는 자는 곤장을 치고, 일할 자와 소가 부족하다고 호소하면 이웃 마을 사람들을 질책하였다. 모든 호구에는 저축한 것이 있어 흉년에도 굶지않고 드디어 부유함을 이루었다.
항주(杭州) 군의 두릉 등이 양선(陽羨)에서, 설랑의 장수 이군왕을 패배시켰다.(6월)
회남의 장수 오묘는 8천 명을 인솔하고 양행밀에게 투항하였다.(7월12일)
◎ 무정절도사 이무정, 봉상절도사 이창부 참수(887년 8월1일)
무정절도사 이무정은 농주(隴州) 자사 설지주가 항복하고, 봉상절도사 이창부를 참수하였으며 그의 가족을 죽였다고 보고 하였다. (8월1일).
[선무]절도사 주전충. 박주(亳州)를 지나가다, 곽존을 보내, 박주를 점거한 사은을 습격하여 참수
◎ 이무정을 봉상절도사로(887년 8월5일)
이무정을 봉상절도사 충임하였다.(8월5일)
주전충은 연과 운을 겸병하려 하였는데 주선 형제가 자기에게 공로를 세웠으므로 그를 공격할 명분이 없자 주선이 선무의 군대를 불러 꾀었다고 무고하고 편지를 보내 잘못을 꾸짖었다. 주선의 답장이 불손하자 주전충이 그의 장수 주진과 갈종주를 파견하여 조주(曹州)를 습격하였고 그곳을 뽑아서 자사 구홍례를 죽였다(8월11일) 또 복주(濮州)를 치고서 연, 운의 군대와 유교에서 싸워 수만 명을 죽이니, 주선과 주근은 겨우 죽음에서 벗어났다. 주전충은 연, 운과 비로소 틈이 생겼다.
진언은 전 소주자사 장웅의 군대가 강해서 그들이 쓰기를 바라고 북야의 고신을 장웅에게 주고 상서의 고신 3통을 비장 풍홍탁 등에 주었다. 광릉 사람들이 앞다퉈 주옥과 금 비단을 가지고 장웅의 군대로 가서 식량과 바꾸니, 장웅의 군대는 풍족하여 전투를 하지 않았고 양행밀을 도왔다.
진언은 성 안에 있는 군사 1만2천 명을 모두 내보내고 필사탁과 정한장을 보내 그들을 거느리도록 하여 성의 서쪽에 진을 치게 하였는데 그 군대의 기세가 매우 왕성하였다.
◎ 양행밀, 필사탁과 정한장군 전멸 시킴(887년 8월26일)
양행밀이 재화·식량 쌓아놓고 매복시켜, 필사탁과 절한장 1만2천軍 유인하여 거의 전멸시킴·시체가 10리에 가득하였다. 필사탁과 정한장은 단기로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8월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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