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81,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26, 9. 절도사의 시대-4)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9. 절도사의 시대
1) 연표
1) 연표-4
년 | 내용(출처: 자치통감- 요약) |
887 | 왕행유를 정난(빈녕)절도사로 삼고, 호필도두 이무정을 영무정(武定)절도사로, 양수종을 금상(산남동도)절도사로, 고언랑을 동천절도사로, 양수량을 산남서도절도사로 삼았다.(1월)
의승(義勝)절도를 절동(浙東)관찰로 다시 격하하여, 동창을 절동관찰사에, 전류를 항주(杭州)자사로 삼았다.(1월7일)
진종권은 주전충 보다 10배의 병력으로도 자주 패하자, 온 전력을 기울여 변주(汴州)를 공격하려고 하였다.(1월) 주전충은 주진을 치주(淄州)자사로 삼아, 동부에서 군을 모집하게 함(2月)
◎ 이국창(주야적심: 이극용의 아버지) 사망(887년 2월)
대북절도사 이국창(주야적심: 이극용의 아버지) 사망(2月)
◎ 당 희종, 봉상 도착(887년 3월18일)
당 희종이 봉상에 도착하니, 봉상절도사 이창부가 머물게 하였다.(3월18일)
진해(절서)절도사 주보. 친위병 1천군(軍) 선발하여 '후루병(後樓兵)'이라고 부르며, 진해병보다 너무 우대하여 진해군사들은 원망하고, 후루병은 교만해졌다. 주보는 노래와 여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나성(羅城: 외성)을 20여리 쌓고, 동제(東第.부사와 절도사의 관저)를 세우니, 백성들이 그 부역을 고통스러워하였다
진해(절서)절도사 주보는 진해군(軍)의 장수 유호와 후루병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주(常州)로 도주하였고, 유호는 탁지최감사 설랑을 추대하여 진해유후로 삼았다.(3월19일)
회남절도사 고병은 주보의 소식을 듣고 축하를 받았다. 양주(揚州)에 해마다 기근이 들어 아사자 하루에 수천명, 재앙과 이변이 자주 보이자 고병은 모두 원수지간인 주보에게 갔다고 생각하였다.(3월)
◎ 왕건 스스로 낭주방어사가 됨(887년 3월)
산남서도절도사 양수량은 이주(利州)자사 왕건을 시기하였다. 왕건은 주상의 건의에 따라 산골자기와 동굴에 사는 추장과 호족을 모아 무리 8천이 되자 가릉강(嘉陵江)을 따라 내려가 낭주(閬州)를 습격하고 점거하여 스스로 방어사라고 하면서 망명한 사람들을 불러 받아들이니 산남서도절도사 양수량은 통제할 수 없었다.(3월)
애초에 진해절도사 주보는 회남의 육합(六合) 진알사 서약의 군사가 날카롭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유혹하여 소주(蘇州)를 치게 하였다.(3월)
서약이 소주(蘇州)자사 장웅을 내쫓자 장웅은 바다로 도주하였다.(4월1일)
◎ 고병의 부하 필사탁 봉기(887년 4월2일)
회남절도사 고병은 진종권이 회남을 침략한다는 소식을 듣고 좌상도지병마사 필사탁을 파견하여 고우에 주둔하게 하였다. 그때 여용지가 세력을 휘둘러 필사탁은 스스로 위태롭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정 등 때문에 필사탁은 회녕(淮寧)군사 정한장, 고우(高郵)진알사 장신검과 함께 고우(高郵)에서 봉기하였다.(4월2일)
장신검을 고우에 남기고 필사탁과 정한성이 고우를 떠났다.(4월5일) 염탐하는 기병이 고병에게 보고 하였는데 여용지가 그 일을 숨겼다(4월7일)
주진이 치청에 도착한 지 10일만에 1만여 군(軍) 모집하고, 청주(靑州)를 습격하여 말 1천필을 획득하였다. 돌아와 대량(大梁)에 이르자 주전충이 기뻐하였다.(4월8일)
당시 진종권 군(軍)이 변주를 침략하였는데 그곳의 장수 장질은 북쪽 교외에 주둔하고 있었고, 진현은 서쪽 판교(板橋)에 주둔하였는데, 각기 수만 군(軍)을 가지고 36개 영채를 늘어놓으니 20여 리나 이어졌다.
주전충이 진현의 영채를 선제 공격하여, 4개의 영채를 뽑고 1만여 급을 참수하였으며, 또 아장 곽언으로 하여금 하양, 섬, 괵에서 병사 모집하게 하여 1만여 명을 모집하여 돌아왔다..(4월)
필사탁이 광릉성(廣陵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광릉 북쪽 산광사(山光寺)에 주둔하고(4월9일), 선흡관찰사 진언에 구원을 요청하였다.(4월10일)
회남절도사 고병이 여용지를 불러 앞뒤의 일을 물어보니 여용지가 비로소 사실대로 대답하자 고병이 자기의 친필 편지를 가지고 가서 필사탁을 설득하라고 지시했다.
◎ 고병과 여용지가 갈라짐(887년 4월14일)
여용지가 부하 허감을 보내 고병의 친필 편지와 자기가 맹세한 글을 가지고 가서 필사탁을 위로하려고 했으나 필사탁이 도리어 분노를 분출하며 허감을 죽였다(4월11일) 여용지가 병사 100명을 데리고 고병을 알현하자 고병은 반란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몰아내라고 하였다. 이에 여용지가 나오면서 “내 다시는 이곳을 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고병과 여용지가 갈라졌다.(4월14일)
고병은 조카인 고걸을 도뇌성사로 임명하여 친위군(軍) 5백을 주었다.(4월15일). 고병이 대장 석양을 파견하여 필사탁을 설득하니 필사탁은 여용지와 장수일의 목을 베어 자기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선흡관찰사 진언이 진조를 보내 3천군(軍)을 거느리고, 양자(揚子)에서 필사탁을 돕게 하였다.(4월18일)
필사탁과 선흡군이 광릉성 남문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19일). 나성의 동남쪽 모서리를 공격하였는데 거의 함락할뻔 하였다(20일) 나성 서남쪽 모서리를 지키는 병사들이 전격을 불태우며 필사탁에게 호응하자 필사탁은 그 성을 허물어 그 무리들을 받아들였다.(21일) 여용지가 무리 1천을 거느리고 삼교의 북쪽에서 힘을 다해 싸우니 필사탁이 패배하게 되었는데 마침 고걸이 자신을 잡아 넘기려하자 북쪽으로 도주하였다.(21일)
회남절도사 고병이 수비군(軍)을 철수시키고, 필사탁과 회견, 필사탁을 절도부사·행군사마로 임명하고 좌복야를 덧붙여주고 정한장 등의 관직을 올려주었다.(22일)
◎ 필사탁, 고병 유폐(887년 4월 25일)
필사탁. 광릉성문에 병력을 배치하고, 여용지 무리 모두 주살하였다. [선흡]軍 진조는 1천군(軍)으로 사택과 창고를 지켰다(23日). 고병이 가족을 옮기면서 나와 남쪽에 있는 저택으로 나가서 머물게 하였으며 필사탁은 무장한 병사 100명으로 호위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상 그를 가둔 것이었다.(25일)
선흡의 군대가 구하는 것을 얻지못하자, 진봉(進奉)의 2개 누각 수십간 불태워, 고병이 산처럼 쌓아놓은 보물과 재화가 다 불타 없어졌다.
필사탁. 광릉성 함락후 밤낮으로 약탈하는 군사들 금지시켰다.(26일) 고병이 모아놓은 엄청난 재화가 반란군에게 약탈되었다. 제갈은을 잡아 몽둥이로 때려 죽여 길가에 버렸다(27일)
진종권 군(軍)의 장수 노당이 만승(萬勝)에 주둔하면서 변수(汴水:통제거)의 운송로를 끊었는데, 주전충의 습격에 거의 전멸되었다.. 이에 진종권의 군대는 장질에게 옮겨가서 적강(赤岡)에 주둔하였는데 주전충이 다시 공격하여 2만여 명을 죽였다. 주전충은 대량 돌아가 군사들 쉬게 하였다.
고병이 몰래 자기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금을 주니(28일) 필사탁이 도원에 고씨의 자제와 생질 등 10명을 유폐하였다.
예전에 소주(蘇州) 자사였던 장웅이 바다로부터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동당(東塘)에 주둔하고 아들 조휘를 보내 상원(上元.건강)을 점거하였다.(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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