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78,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23, 9. 절도사의 시대-1)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9. 절도사의 시대
1) 연표
1)연표-1
◎ 채주절도사 진종권, 선무절도사 주전충 공격(884년 6월~)
채주절도사 진종권이 이웃 도를 침입하여 선무절도사 주전충이 진종권의 공격을 받아 궁색하게 되자, 천평절도사 주선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천평절도사 주선은 사촌동생 주근을 파견하여, 합향에서 진종권 격파하니, 주전충은 주선과 의형제를 맺었다.
시부가 황소와 그 집안 사람의 수급과 그 희첩을 당 희종에게 바쳤다(7월24일)
주전충이 진종권을 은수(溵水)에서 격파하였다.(7월)
◎ 이극용의 주전충 토벌 주청과 당의 번진 통제력 상실(884년 7월)
이극용이 이승사를 파견하여 주전충 토벌을 주청하였으나 당 희종은 두려워 화해하게 하였다.
이때 번진들이 서로 공격하는 것을 당 조정에서 옳고 그름을 구별해 주지 않아,
이로부터 물고 씹어서 오직 힘만을 보고서 모두가 품신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7월)
⇒ 당이 번진들의 통제력을 상실함.
이극용이 인주(麟州)를 잘라 하동에 예속시켜 달라고 요청하고, 사촌동생 이극수를 소의(昭義)절도사로 삼아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를 모두 허락하였다.(8월)
소의(昭義)절도를 2개로 분리하여 소의절도사 맹방립은 형주·명주·자주를, 이극수는 노주·택주를 차지하였다.
◎ 이극용을 농서군왕으로(884년 8월?)
이극용을 농서군왕으로 삼았다.
이극용이 운울(雲蔚)방어사(대동절도사)를 철폐하여 하동절도에 예속받았다.
주전충이 항복하면서 의성절도사 왕탁이 도통이었는데, 주전충의 군사가 점점 강해지자 왕탁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청하니
왕탁을 의창절도사로 삼았다.(10월)
◎ 왕건의 등장(884년 11월)
산남서도유후 녹안홍이 하중을 떠나면서 왕건, 한건, 장조, 진휘, 이사태는 함께 성도(成都)로 도주하여
환관 전령자의 양자(養子))가 되었다.(11월)
환관 전령자는 이들을 여러 위(衛)의 장군으로 삼고 ‘수가오도’라고 불렀다.
※ 수가5도(隨駕五都) : 거가를 좆는 5도라는 말로 환관 전령자가 왕건 등 5명을 위(衛)장군으로 삼아,
1도(都)가 1천군(軍)을 거느린 전령자의 개인 사병.
관군용사 전령자는 금병을 보내, 녹안홍을 토벌케 하니, 녹안홍은 흥원을 버리고 달아났다.(11월)
◎ 환관 전령자의 전횡(884년 11월)
환관 조지각이 장안에서 황소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내상시가 되고, 당 희종이 돌아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를 가려서 받겠다는 말을 하자 환관 전령자가 조지각을 미워하여, 빈녕의 장수 왕행유에게 그를 죽이라고 하자,
차아산(嵯峨山)에서 전멸시켰다. 환관 전령자는 더욱 교만하고 횡포해져 황제를 금하거나 통제하니 황제는 주가 되어 결단할 수 없었다.
황제는 그가 전횡하는 것을 걱정하고 때로는 죄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다.(11월)
◎ 녹안홍의 난(884년 11월)
충무의 반란자 녹안홍이 군사를 이끌고 양주(襄州)를 나와, 채주(蔡州) 반란군 진종권과 연합하여 양주(양양)을 함락시켰으며
산남동도절도사 유거용은 성도로 달아났다. 녹안홍이 양(襄), 등(鄧), 균(均), 방(房), 여(廬), 수(壽) 주(州)를 돌아다니며
약탈하다가 허주(許州)로 돌아오자, 충무절도사 주급이 달아나니, 녹안홍이 허주를 점거하고, 스스로 유후라고 하였지만
조정에서는 토벌할 수 없어 녹안홍을 충무절도사로 삼았다.(11월)
황소의 난 때 복건(福建)의 건주(建州) 사람 진암이, 무리 수천명 모아 '구룡군(九龍軍)'을 조직, 향리를 지킨 공이 있어
진암을 단련부사로 삼았다.
천주(泉州)자사 이련이 죄를 짓고 계동으로 들어가자 진암이 쳐서 패배시켰다.
진암의 압박 받을 것을 두려워한 복건관찰사 정일이 자리를 내놓자, 진암을 복건관찰사로 삼았다.(12월16일)
의창절도사 왕탁이 위주를 지나가자 위박절도사 낙언정의 아들 낙종훈이 장남(漳南)에 있는 고계박(高雞泊)에서 포위하여 죽이고 약탈하였다.
낙언정은 왕탁이 도적들에게 살해되었다고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물을 수가 없었다.(12월)
빈녕군(邠寧軍)을 정난군이라고 불렀다.
여항진사(餘杭鎭使) 진성이 목주(睦州)자사 유초를 축출하고, 영주도지병마사 왕경요가 그 자사를 내쫓으니
조정에서는 그들을 각각 자사로 삼았다.(12월)
균주(均州)의 도적 손희가 주성(州城)을 공격하자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도장(都將) 풍행습이 손희를 쳐서 죽이니
풍행습을 균주(均州)자사로 삼았다.
풍행습의 토벌로 양주(襄)와 등주(鄧州)에서 촉(蜀)으로 가는 길목인 장산(長山)이 다시 개통되었다
봉상(鳳翔)절도사 이창언 사망하니 동생 이창부를 봉상절도사로 삼았다.
◎ 진종권의 하남지역 대약탈(884년 12월)
이때 황소는 평정되었지만 황소에게 투항하였던 진종권이 여러 도(道)를 약탈하였는데 진언은 회남을 침략하고,
진현은 강남을 침입하며, 진호는 양주, 당주, 등주를 함락시키고,
◎ 손유의 등장(884년 12월)
손유는 낙양, 맹주, 섬주, 괵주를 함락시켰고, 장질은 여주, 정주를 함락시켰으며, 노당은 변주, 송 주를 공격하였는데 이르는 곳에서 도륙하고
모두 불을 지르니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 잔인하고 포학함이 황소보다 심하여, 처음부터 양식을 운반하지 않고 수레에 소금에 절인 시체를 싣고 다녔다.
북쪽으로 위(衛), 활(滑)에 이르고 서쪽으로 관보(關輔.관중지역)에 닿았으며, 동으로 청(靑), 제(齊)에 이르렀으며,
남으로 장강과 회수를 나가니, 주진(州鎭)가운데 남은 것은 겨우 1개의 성뿐이니, 눈을 끝까지 들어 1천리를 보아도
다시는 연기와 불때는 곳이 없었다.
⇒ 진종권의 하남지역 대약탈
당 희종은 장안(長安)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지만 진종권이 두려웠다.(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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