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28,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73, 7. 남조의 침공-40)

상 상 2017. 6. 2. 21:02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28,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73, 7. 남조의 침공-40)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2) 해설(남조의 침공)

 

 

2) 남조의 침공(해설)- 9

< 874>

 

 

남조의 성도 재침공(874~)

 

건부 원년(874) 남조는 수주와 아주 사이를 약탈하다가, 여주를 깨뜨리고, 공래관으로 들어와 성도를 약탈하였다. 성도성에서 3일간 문을 걸어 잠그자, 남조는 마침내 가버렸다.

조서를 내려 천평절도의 고병을 옮겨 서천절도사를 맡게 하였다.

 

고병이 서천에 당도하여 한 달도 머무르지 않고, 정예 기병 5천을 가려 뽑아 만을 추격하여 대도하에 이르렀다. 갑옷과 말을 탈취하였고, 추장 50인을 잡아 베었으며, 공래관을 수복하고, 여주를 다시 얻으니, 남조가 달아나 돌아갔다. 고병은 황경복을 불러 대도하의 패배에 대하여 질책하고 그를 베어 군중에 널리 보였다.

 

망성과 청계 등의 관에 수비병을 배치하였다. 남조가 두려워하여 고병에게 사자를 파견해 와 화약을 맺었으나, 뒤이어 군대를 내보내 변방을 노략질하였으므로 고병이 그 사자를 베었다.

 

추룡이 강화를 청하였으나 고병이 거절하고, 승려 경선을 보내 이에 맹약의 일을 정하고 돌아왔다. 이에 남조가 청평관 추망 조종정과 질자(質子) 30인을 보냈는데, 이들은 입조하여 맹약하기를 청하고, 형제나 구생(舅甥)의 관계가 되게 해달하고 하였다.

 

고병은 토번의 상연심과 올말의 노누월 등과 연계하여 남조를 정탐하였다. 그리고 융주의 마호, 목원천,

대도하에 세 개의 성을 쌓고 둔영을 늘어놓아 험요지를 방어하였다. 또 건장한 병졸을 선발하여

평이군(平夷軍)을 만드니, 남조의 기세가 꺾였다.

(이 부분도 자치통감에 없고 구당서 남조전에만 있으나 사건의 앞뒤 관계로 보아 이 내용이 맞으므로 여기에 인용하였음)

 

이렇게 하여 남조의 기세가 겨우 꺾이자 이번에는 당나라에서 왕선지의 난과 그를 이어 황소의 난이라는 민란이 또 일어나 당을 뿌리째 뒤흔들어 결국은 당나라를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

 

 

왕선지의 난(87412~8782)

 

당 희종이 나이가 어려 정치는 신하들에게 있었는데 정부관원과 환관이 서로 대립하고.

의종 때부터 사치가 날로 심하였고 군사활동은 쉬지 못하여 조세를 더 가혹하게 징수하여

관동(關東)에선 해마다 홍수와 가뭄이 들었지만, 주현(州縣)에선 보고하지 않고 덮어버렸다

백성들은 떠돌다 굶어도 호소할 곳이 없어, 서로모여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매번 도적과 만나면 당의 군대는 대부분 패배하였다.

이때에 복주사람 왕선지가 무리 수천을 모아 장원에서 일어났다(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