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0년 > 이듬해(870년) 정월 남조가 두재영을 공격하자, 정변절도사 두방이 스스로 군대를 독려하여 싸움에 나섰다. 남조왕 추룡이 사자 십여 명을 보내 강화를 청하니, 정변절도사 두방이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회담이 반도 진행되기 전에 남조의 뗏목들이 이쪽 강기슭으로 다투어 몰려와 소리를 지르며 진격하니, 정변절도사 두방이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자살하려 하였다. 무령장(武寧將) 묘전서가 그를 말리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니, 남조가 조금씩 물러났다. 이 틈을 타서 정변절도사 두방이 도망쳤고, 묘전서는 나중에서야 뒤따라갔다. 여주가 함락되자, 사람들은 산과 골짜기로 달아나 숨었으며 남조가 약탈한 금과 비단은 지고 가지 못할 정도였다. 남조의 군대가 또 공래관으로부터 들어와 아주를 에워싸고, 마침내 공주를 공격하였다. 이해 겨울 정변절도사 두방은 공주성을 버리고 도강에 방벽을 쳤는데, 쌓아 두었던 물자와 병장기는 모두 잃고 말았다. 남조왕 추룡이 성도로 공격을 진행하여, 미주에 이르렀다.(1월5일) 탄작 두원충이 밤낮으로 추룡에게 촉 전체를 취하게 했다. 이때 서천절도사 노탐이 그 부관 왕언과 환관 장사광을 보내 강화를 요구하였다. 남조가 강제로 사자들에게 남면하여 절하게 하였을 뿐, 끝내 추룡은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 왔다. 남조가 신진에 이르자, 서천절도사 노탐은 다시 부관 담봉사를 보내 좋은 말로 거듭 화약을 맺고자하였으나, 남조는 그를 억류하였다. 서천절도사 노탐은 원군이 아직 모이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여 즉시 천자에게 급히 청하기를, 대사(大使)를 내려보내 저들과 우호를 통하게 하여 적이 깊이 침입하는 것을 늦추자고 하였다. 이에 당 의종이 태복경 지상을 화만사(和蠻使)로 삼아 급파하였다. 전 노주자사 양경복은 서천절도사 노탐을 위하여 공격용 기구와 투석용 돌을 만들고 성의 병장기를 견고하게 설치하였으며, 여덟 명의 장수가 각각 이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 참빗처럼 촘촘한 울타리를 세우고, 밤에는 횃불을 늘어놓아 성을 비추니 수비를 위한 설비들이 웅장하고 새로웠다. 또 날랜 병사 3천을 가려서 돌장(突將)이라 이름 붙이고, 장도(長刀)와 거과부(巨檛斧)를 사용하게 하였다. 좌우로 나누어 번갈아 쉬게 하면서 날마다 군대에 예속시키니, 병사들의 마음에 투지가 넘쳐흘렀다. 추룡은 쌍류로부터 천천히 행군하였는데(1월11일), 속으로는 동성의 치욕을 갚고자 하여, “상개(上介)를 자신의 군영에 보내와 일을 의논했으면 한다”라고 서천절도사 노탐을 속였다. 이에 서천절도사 노탐이 절도부사 유반을 보내 두원충과 만나 강화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결렬되었다. 남조가 조금씩 전진하여 성도의 외성에 이르렀다.(1월20일) 그 전날 서천절도사 노탐은 선봉유혁사 왕주를 파견하여 한주(사천성 광한시)로 가서 원군을 찾아 재촉하였다. 이때 흥원절도의 구원군 6천명과 봉상절도의 구원군 4천명은 이미 한주에 도착하였다. 이때에 유혁사 왕주가 원병 3천을 거느리고 비교(毗橋)에 진을 쳤다. 선봉유혁사 왕주는 흥원절도 등의 구원군 3천으로 비교에서 남조와 싸웠으나, 남조군 선봉에 패하여 한주로 후퇴하였다.(1월24일) 그때에 마침 정변절도사였다가 도망한 두방은 충무, 의성, 서숙의 4천명을 가지고 한주로 도망왔다. 그래서 정변절도사 두방 또한 그 군대를 거느리고 도강으로부터 와서 장차 대군과 팽팽히 맞서려 하였다. 그러나 싸우는데 힘을 다하지 않았으며 조금 이기지 못할 듯 싶자 즉시 후퇴하여 광한을 지켰다. 정변절도사 두방은 자기가 정변절도를 잃은 것 때문에 성도가 함락되기를 바랐는데,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서천절도사 노탐의 부장 이자효란 자는 수주자사 유사진과 친하였다. 유사진이 남조에 신속하자(865년), 이자효가 몰래 적과 내통하여 성 아래에 갈대와 벼를 심자고 서천절도사 노탐을 설득하였다. 이는 물을 고이게 하여 성을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는데, 부내의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남조가 성을 공격하자, 이자효가 성의 한쪽 담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대장기를 세워 스스로를 표시하였다. 대장기가 서있는 곳마다 남조가 번번이 공격하니, 결국 부하들에게 발각되었으며 서천절도사 노탐은 이자효를 죽여 군중에 널리 알렸다. 성의 왼쪽에는 누각으로 된 민간의 상가건물이 있었는데, 남조가 그 위에 올라가 성안을 굽어보며 활을 쏘아댔다. 서천절도사 노탐이 용사를 모집하여 불태우니 병장기도 함께 타버렸다. (이상의 ‘남조의 2차 성도 침공’ 내용은 신구당서 남조전을 바탕으로 쓴 것임) 당 조정에서 파견한 전권대사(화만사) 지상은 남조군과 화의를 하기로 약속하였다(2월3일) 이에따라 남조군이 군사를 거두고 화의를 청하고(2월5일) 남조군이 사신을 파견하여 지상을 영접하였다. 이때 화만사 지상은 원군이 곧 도착할 것으로 생각하고 거짓말을 하며 때를 넘겼다. 남만군은 화의하는 사자가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나아가 성을 공격하였다(2월8일) 이에 성도성에서 군사를 내보내 남조군을 쳤다(2월9일) 한편 당 조정은 정변절도사 두방의 벼슬을 깎아 강주사호로 삼고 안경복을 동천절도사로 삼아 촉을 원조한 여러 군대는 모두 안경복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그리하여 동천절도사 안경복이 신도에 도착하니 남조군이 그를 막았다.(2월11일) 다음날 남조군이 안경복과 다시 만났는데 안경복이 남조군을 대파하여 2천여 명을 죽였다(2월12일) 만족의 군사 수만이 다시 도착하였는데 우무위상장군 송위가 충무의 2천여 명을 데리고 도착하여 같이 싸워 남조군을 대파하여 죽은 사람이 5천여 명이 되니 성숙산으로 물러나 지켰다(2월13일) 송위는 타강역으로 진군하였는데 성도와의 거리가 30리였다. 남조가 양정보를 파견하여 화만사 지상에게 화의를 청하니 지상이 먼저 포위를 풀고 군사를 물리라고 하였으나 양정보가 돌아갔는데도 남조가 성을 포위하는 것은 예전과 같았다. 화만사 지상이 남조의 사자에게 말하기를, “천자가 남조와 화해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도, 군대가 여전히 성도를 핍박하니 어찌된 일인가? 30리 밖으로 물러가 방비를 거둔 뒤에, 수호(修好)의 조약을 맺자”고 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화만사 지상에게 권하기를, “만은 속임수가 많으니, 사지에 들어가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지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남조의 군사들이 다시 성도를 포위하고 밤에 서북쪽 모퉁이에 땅굴을 팠는데, 동틀 무렵에 이를 발견하여 즉시 빈 구멍에다 건초를 떨어뜨리고 불을 놓으니, 만들이 굴 안에서 모두 죽었다. 철끈으로 운붕(雲輣:공성용 사다리)을 끌어당겨 넘어뜨리고 불을 놓았는데, 잠깐 사이에 다 타버렸으며, 더욱 수비를 굳게 하였다. 남조가 다시 화의를 청하였지만 성도에서는 어그러진 대답만하니 남조군은 성도를 더욱 급하게 공격하였다.(2월16일) 이때 황제가 동천절도사 안경복을 대도하제치 검남절도사로 삼아 보냈다. 원병이 신도에 이르렀고, 박야의 장수 증원유가 남조의 군대를 깨뜨리고 2천 급을 베었다. 남조의 기병 수만이 새벽에 관군을 압박하고 활개를 쳤는데, 대장 송위가 충무병(忠武兵)을 이끌고 싸워 5천을 참수하고 말 4백 마리를 노획하였다. 당의 원조군이 성 아래 도착하여 남조군과 싸워 승천교를 빼앗자, 남조군은 공격도구 불태우고 후퇴하였다 (2월18일) 남조가 물러나 성숙산에 주둔하자, 송위가 진격을 하여 타강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추룡이 추망을 화만사 지상이 있는 곳에 보내 강화를 요청하자, 지상이 거절하였다 서천절도사 노탐이 정예장수들을 보내니, 남조의 방벽에 이르러 공격용 도구들을 불사르고 2천인을 죽였으나, 남조에게 뒤를 밟혀서 퇴각하다가 궤멸하였다. 남조가 봉상절도와 산남절도의 군대가 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비교에서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타강쪽으로 가다가 복병의 공격을 받아 또 패하였다. 성안에서 돌장을 내보내, 밤에 남조의 진영에 불을 놓게 하니, 추룡과 탄작이 몸소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 3일 뒤에 당의 군사가 승천량을 탈취하니 남조가 크게 패하였다. 남조가 밤을 틈타 정(亭)과 역(驛)에 불을 놓고 불길이 향하는 곳을 따라 당의 군사에게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댔다. 송위는 군대를 나누어 가도록 하고 화살이 발사되는 곳을 향하여 집중 사격하게 하였다. 양군이 결판을 내지 못하자, 각자 진영을 해산하고 가버렸다. 추룡이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밤에 진영을 거두어 남쪽으로 달아났다. 동천절도사 안경복은 성도에 먼저 도착하여 남조군을 깬 송위를 시기하여 첩지를 보내 그의 군대를 빼앗고 한주로 돌아가게 하였다. 남조군은 쌍류에 이르렀지만 신천수에 막혀 3일만에 다리 만들어 건넌 뒤 다리를 부수고 갔다. 남조군이 공주를 포위하였으나 이틀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자 버리고 떠났다. 남조들은 한인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귀와 코를 베고 놓아주었다. 이미 거주민 가운데 나무를 깎아서 귀와 코를 만들어 붙인 자가 열에 여덟은 되었다. 동천절도사 안경복은 옹문성(壅門城)을 쌓게 하고 해자와 녹각을 세우고 정사를 담당하는 기구를 만들어 나누니 남조는 이로부터 다시는 성도를 침범하지 않았다. (이상의 내용은 신구당서 남조전과 자치통감의 년도가 달라 자치통감의 년도에 맞춰 남조전의 내용을 자치통감의 기사에 붙여 쓴 것임) 좌금오상장군 이국창(주야적심)을 진무절도사로 삼았다(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