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2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68, 7. 남조의 침공-35)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2) 해설(남조의 침공)
2) 남조의 침공(해설)- 4
< 865년 >
◎ 남조의 서천(성도) 재침공 수주자사 유사진이 양림의 만족을 약탈하였는데 남조가 다시 수주를 침입하니 양림의 만족은 문을 열어 항복하였고, 남조는 수졸(戍卒)을 모두 죽였다. 수주자사 유사진은 마침내 만의 신하가 되었다.(5월)
안남도호 고병은 해문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아직 나가지 않았는데 감군 이유주가 그를 미워해 제거하려고 누차 진군하도록 재촉하며 고병이 5천으로 먼저 나가면 이유주가 군사를 데리고 응원하기로 약속해 놓고 이유주는 뒤를 잇지 않았다.(7월)
고병이 남정에 도착하니 붕주의 만족 무리 5만이 밭에서 수확하고 있어 고병이 엄습하여 대파하고 군사들을 먹였다.
< 866년 > 처음에 남조왕 추룡이 청평관 동성(董成) 등 19인을 보내 성도에 이르렀는데, 서천절도사 이복이 관청의 뜰에서 그들을 보려 하였다. 동성이 거절하며 말하기를, “황제가 천명을 받들어 정삭을 바꾸었으니, 대등한 나라의 예로써 보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서천절도사 이복이 허락하지 않았다. 통역을 인도하여 다섯 차례나 왕복을 하며, 해가 져서 사인들이 피로해지도록 논의가 결정되지 않았다. 서천절도사 이복이 노하여 무사에게 명하여 사자들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욕보이고, 형틀을 채워 관(館)에 매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동이 이복을 대신하여 서천절도사가 되었는데, 즉시 그 묶은 것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놓아주어 돌려보내자는 표를 올렸다. 조서를 내려 동성 등을 불러 경사(장안)에 오게 하였다. 황제가 별전에서 그들을 인견하고 물품을 좋은 것으로 후하게 내려준 다음 위로하여 돌려보냈다.(3월)
남조왕 추룡은 신천절도사 양집을 파견하여 안남절도사 단추천을 도와 교지를 지키도록하고 범닐사를 안남도통으로 삼고 조라미를 부야도통으로 삼았다.(6월) (이상의 866년 기사는 구당서 남조전의 내용임)
감진칙사 위중제가 7천을 거느리고 봉주에 도착하니 고병은 군사 수를 늘려 남조를 누차 깨뜨렸다. 승리를 알리는 주문이 해문에 도착하면 이유주는 이것을 숨겨서 몇 개월간 소식이 없었다. 당 의종은 그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이유주에게 물으면 이유주는 고병이 군대를 본주에 주둔시키고 도적과 노닐면서 전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당 의종이 화를 내고 왕안권으로 하여금 고병을 대신하게 하고 고병을 소환하여 관직을 깎아내리려고 하였다. 고병은 남조의 만족을 교지에서 크게 깨뜨리고 교지성을 포위하였다.(6월)
고병이 교지(交趾)를 포위한지 열흘 남짓되자 성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왕안권의 편지를 받고 군사에 관한 일은 위중제에게 주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위중제는 이유주가 오자 섬 사이에 숨었다가 이유주가 지나가자 장안에 갔다 당 의종은 상주문을 받고 고병을 다시 안남에 진수하도록 하였다. 이래서 고병은 해문에 도착했다가 돌아왔다. 왕안권은 이유주의 명령을 받았는데 드디어 포위를 푸니 만족 가운데 달아난 사람이 태반이었다. 고병이 도착하여 다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단추천과 주도고를 죽이고 목 벤 것이 3만 여급이 되자 남조는 숨어서 떠났다. 만족 2개동(洞)을 격파하니, 만족 1만7천명이 귀부해 왔다(10월)
○ 고병의 안남 평정(구당서 남조전과 자치통감을 섞은 내용임) 정해절도를 안남에 두고 고병을 정해절도사로 삼았다(11月) 남조의 이차룡(李溠龍)은 무리 만명을 데리고 항복하였으며, 파풍의 세 방벽을 점령하였다. 남조의 양집사가 나와 싸웠으나 패하여 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에 당의 병사들이 그 기세를 타고 성의 담장을 넘어 들어가, 추천, 범녜사, 조낙미를 베고 적의 수급 3만을 바치니, 안남이 평정되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안남이 평정되었다. 고병은 안남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3천보였고 건물 40여만 칸을 만들었다.(11월)
< 867년 > 이듬해(867년) 남조왕 추룡이 양추경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죄수를 풀어준 것에 대해 사례하였다. 처음에 봉상 소윤 이사망이 건의하기를 “성도에서 남조에 관련된 일을 모두 처리하는데, 여러 날을 소비하여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공(邛), 촉(蜀), 가(嘉), 미(眉), 여(黎), 아(雅), 수(雟) 7주를 떼어 내어 정변군(定邊軍)으로 삼고, 절도를 세워 긴요한 일들을 처리하게 하면, 거리가 가까워 일의 처리도 신속할 것입니다.” 천자가 그렇다고 말하고 즉시 조서를 내려 이사망을 정변절도사로 삼고 공주에 치소를 두었다.
공주는 성도에서 겨우 5사(舍: 1사는 30리)의 거리이며 수주는 최남단으로 공주에서 천리의 거리여서,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앞뒤가 서로 부응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사망은 멋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을 이롭게 여겨 이러한 문제를 속이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재물을 모으고 쌓는데 한이 없었고, 사사로이 뇌물을 챙긴 것이 백만을 헤아렸다.
또 남조의 노여움을 야기하여 공을 세우고자, 이에 양추경등을 죽였다. 이미 병사들이 분노하여 장차 이사망을 소금에 절여 분을 풀려 하였는데, 때마침 당 조정에서 소환하여 두방으로 교체하였다.
새로 정변절도사가 된 두방은 더욱 탐욕스럽고 더욱 법을 따르지 않아 잘못을 꾸짖고 벌주며 가혹하고 세세히 따지는 것이 이사망보다도 심하였다. 당시는 아직 만역(蠻役)이 일어나지 않은 때인데도, 정변군은 이미 곤경에 처하였다. (이상의 867년 내용은 구당서 남조전의 기사를 채택한 것임)
당 의종이 몸이 불편하여 신하들이 알현하는 일이 드물었다(4월) 당 의종의 병이 나았다(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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