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2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70, 7. 남조의 침공-37)

상 상 2017. 5. 22. 19:12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2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70, 7. 남조의 침공-37)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2) 해설(남조의 침공)

 

 

2) 남조의 침공(해설)- 6

< 869>

 

서주행영도초토사 강승훈이 여러 도의 군사 7만 여명을 거느리고 유자의 서쪽에 주둔하고, 신흥에서 녹당까지 성벽과 보루가 이어지게 하였다.(8691)

 

주야적심(이국창: 이극용의 아버지)의 재등장

강승훈은 사타족 추장 주야적심으로 하여금 선봉에 서게 했는데 맹활약으로 방훈군 연파하였다.(2)

방훈군의 왕홍립은 부하 3만을 거느리고 강승훈을 격파하게 해달라고 요청, 방훈이 허락하였다.

왕홍립은 군사를 이끌고 수수를 건너 녹당채를 습격하였는데 사타족의 활약으로 왕홍립군이 대패하였다.

녹당에서 양성까지 시체가 50리에 널려있고 목을 벤 숫자가 2만여급이었다.(211)

강승훈은 왕홍립을 격파하고 유자를 압박하여 방훈군의 요주와 1달 동안 수십차례 싸웠다. 요주가 군사를 이끌고 물을 건너는데 강승훈군이 이를 치자 요주는 물러났고 강승훈 군이 이를 쫓아가서 유자를 포위하였다. 큰 바람이 불어 사방에서 불을 놓으니 요주군은 영채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사타가 정예의 기병을 가지고 이들을 도살하여 몰살하였다.(229) 요주가 숙주로 달아났는데 그 수장 양비가 그를 잡아서 참수하였다.

 

방훈이 요주가 몰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직접 나가 싸우는 문제를 논의 하게 하자 주중이 말하였다. “유자(柳子)는 지역적으로 중요하고 군사도 정예였으며, 요주는 용감하고 지모를 갖추었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엎어져 죽었으니, 위험하기는 달걀을 쌓아 놓은 것 같으며 드디어 대호를 세우고 군사를 다 모아 사방으로 나가서 죽을 결심으로 싸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방훈은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정장 3만을 선발하며, 천책장군 대회명왕이라 하였다.

 

강승훈이 팽성(彭城)을 포위하고 방훈군을 회유하니 성문을 열고 장현임군을 받아들이니,

방거직과 허길은 무리를 인솔하고 자성(내성)을 지켰는데 해가 지자 장현임은 군사를 파견하여 방거직과 허길을 참수하니 나머지 무리들은 대부분 물에 빠져 죽었으며 방훈군에 적극적인 사람 수천명을 참수하니 서주는 드디어 평정되었다 : 팽성(彭城) 탈환

방훈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석산(石山)의 서쪽으로 나와 주변을 약탈.

방훈은 송주(宋州)를 습격하여 그 남쪽의 성을 함락시켰는데 자사 정서충이 북쪽 성을 지키고 있을을 알자 변수(汴水)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박주(亳州)를 노략질 하였다(96)

강승훈 8만군은 사타족 주야적심으로 하여금 수천 기병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했는데

박주에서 방훈을 따라 잡았다. 방훈이 군사를 이끌고 환수(渙水)를 따라 동으로 내려가서 팽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사타에게 압박을 받아 마시거나 먹을 틈도 없이 기현()에 이르러 물을 건너려 하였으나 이곤이 다리를 파괴해 갈곳을 잃어 현의 서쪽에 이르렀는데 강승훈군이 크게 모여 멋대로 치니 방훈군이 죽은 것이 근 1만이고 나머지는 물에 빠져 죽었으며 항복한 사람은 겨우 1천명 뿐이었으며 방훈 역시 죽었다.(9)

방훈군이 있는 숙천(宿遷) 등 여러영채에서 모두 그들의 수장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서주서북면초토사 송위 역시 소현()을 빼앗았는데 오형은 홀로 호주()를 지켰다.(9)

 

장현임을 우위교대장군 아사대부로 삼았다.(10)

회남절도사 마거가 여름부터 겨울까지 호주(濠州)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지만 성을 포위하고 지켰다.

오형이 포위를 뚫고 달아나 마거는 그를 쫓아 죽이거나 붙잡아서 거의 다 없어졌고 오형은 초의에서 죽었다(1017)

방훈의 난이 끝남.(8687~8691017)

 

주야적심에게 이국창이라는 이름 하사

당 의종은 사타(沙陀)족 주야적심을 하동도 운주(雲州)의 대동(大同)절도사·좌금오상장군으로 삼고, '이국창' 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10)

결국 방훈군이 무너지고 방훈을 죽인 것은 사타족 주야적심(이극용의 아버지 이국창)

으로 방훈의 난이 끝난 것은 주야적심의 공로임.

 

이렇게 당나라를 뒤흔든 방훈의 난이 끝나자 당이 남조의 사신을 죽인 것 때문에 남조가 또다시 성도를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남조의 2차 성도 침공(86910~8702)

추룡은 그 사자를 죽인 것(867)을 원망하여 함통 10(869) 마침내 침입하였다.(10)

그는 군대를 청계관에 남겨둔 채로, 은밀히 무리를 모아 눈덮인 고개를 넘었다.

목원쪽으로 나와 가주를 넘보며, 당에 복속한 만()을 깨뜨리고, 설과를 넘어 마침내 목원에서

당군 500명을 전멸시켰디.(11)

 

정변절도사 두방은 연해의 병사 5백을 파견하여 가서 싸우게 하였는데, 모든 군대가 무너졌다.

추룡은 이에 몸소 장군이 되어 무리 5만을 거느리고 수주에 침입하여, 청계관을 공격하였다.

 

둔장(屯將) 두재영이 대도하를 버리고 달아나자, 모든 둔이 퇴각하여 북쪽 강변을 지켰다. 남조가 여주를 공격하였는데, 거짓으로 한인(漢人)의 복색을 하고 강을 건너 건위(犍爲)를 습격, 이를 격파하였다.(1214)

그리고 나서는 능주와 영주 사이를 오가며 건물을 불태우고 식량과 가축을 약탈하였다.

 

남조군이 가주에 임박하자, 가주자사 양민은 남조와 강을 사이에 두고 진영을 설치하고, 병사들이 화살을 집중하여 날리니, 남조가 감히 전진하지 못하자, 남조가 몰래 상류에서 강을 건너 배후에서 당의 군대를 공격하여 충무장(忠武將) 안경사를 죽이니,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붕괴되고 가주자사 양민은 달아났으며, 가주는 함락되었다.(1229)

정변절도사 두방이 대도하에서 남만군을 막았는데 남만이 이를 돌파하자 충무와 서숙 두 군()이 진을 치고 이들에 대항하였으며 정변절도사 두방은 목을 매었다가 서주의 장수 묘천서가 풀어주고

묘천서는 안재영과 충무의 장수들과 나가 싸우는데 정변절도사 두방은 밤에 도주하였다.

3명의 장수들도 남만군을 공격하여 놀라게 한 후 도주하였다.

남조군은 전진하여 여주와 아주를 함락시키니 정변절도사 두방은 다시 도강으로 달아났으며,

남조군은 텅빈 공주에 입성하였다.

이에 당은 좌신무장군 안령복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원조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