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27,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72, 7. 남조의 침공-39)

상 상 2017. 5. 31. 20:37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27,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72, 7. 남조의 침공-39)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2) 해설(남조의 침공)

 

 

2) 남조의 침공(해설)- 8

< 871>

 

문하시랑 노암과 위보형은 서로 표리를 이루었는데 그 형세는 천하를 기울였다.

그렇게 되고나자 권력을 다투게 되고 점차 틈이 생겼으며 위보형은 드디어 황상에게 노암이 모자라다고 하였다.(1) 병부시랑 위보형이 문하시랑 노암을 서천절도사로 좌천시키고, 국정을 장악하였다.(427)

그리고 노암을 산남동도절도사에 충임하였다(7)

이렇게 당나라 관료들의 붕당정치가 여전하였던 것이다

 

< 872>

 

진무절도사 이국창(사타족 주야적심). 방자·전횡하여 관리들을 죽였으나 평정할수없어, 대동군(大同軍) 방어사 삼았는데, 부임하지 않았다(12)

 

< 873>

 

남조가 서천과 검남을 노략질하니 검중경략사 진광모가 군사가 적어 성을 버리고 형남으로 도주하여 형남절도사 두종이 그를 잡아 가두었다(5)

 

당의종 사망, 당 희종 즉위(8737)

당 의종의 병환이 아주 위독해지니, 좌군중위(환관) 유행심과 우군중위(환관) 한문약은 나이 어린 보왕 이엄을 세우고(716) 이엄을 황태자로 삼았다.(718).

41세 의종 사망. 위보형을 섭총재로 하였고 12세 희종 이엄 즉위하였다.(719)

이렇게 환관이 황제의 후계를 제멋대로 결정하는 환관의 시대는 여전하였다.

 

서천절도사 노탐을 형남절도사로 옮겼다(117)

 

(이 아래 873년 기사는 구당서 남조전의 기사를 채택한 것임)

 

탄작이 다시 촉에 침입하였다. 배를 연결하여 대도하를 건넜는데, 여주자사 황경복이 이를 공격하여 물리쳤다. 그들 무리가 대도하를 따라 남하하여, 밤에 상류를 뗏목으로 건넌 군대와 함께 물가의 여러 둔영을 협공하니, 황경복이 패주하여 여주로 돌아왔다. 남조가 뒤를 밟아 추격하다가 복병에게 대패하니, 황경복은 대도하 남쪽까지 갔다가 돌아와 성의 목책을 수리하고 지켰다.

 

남조는 지라곡에서 후속부대와 합류, 다시 대도하에서 황경복과 접전하였는데, 남조가 기()를 누이고 북소리를 멈추며 청하여 말하기를, “탄작이 천자에게 글을 올려 억울한 일을 아뢰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둔영의 병사들이 이를 믿고 싸우지 않았다. 다리가 완성되어 남쪽에 있던 남조가 대도하를 건너와 여주가 함락되다.

남조가 이긴 기세를 타고 공래관으로 들어와 아주를 공격하였다. 황경복은 서천에서 구원군이 오지않고 남조는 무리가 날로 많아지니 지탱할 수 없어 드디어 붕궤되어 사졸들이 공주로 들어갔다.(11)

이 소식으로 성도가 크게 놀라고 시끄러워졌으며, 사람들은 도망하여 옥루관으로 들어갔고 병사들은 다시

공성전을 준비하였다.(12)

 

탄작이 사자 왕보성 등 40인을 보내 남조왕 표신의 서한을 가지고 가서 서천절도사 우총에게 전하였는데,

길을 빌려 입조하고자 하니, 촉왕의 옛 궁궐에서 쉬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서천절도사 우총이 허락하려 하자, 양경이 간하여 말하기를, “남조는 신의가 없으니, 저들이 예를 낮추고 말을 달콤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속이려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그 사자를 베고, 두 사람만 남겨 서찰을 돌려보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서천절도사 우총이 남조의 사자를 책망하며 남조를 위협하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서천절도사 우총은 오히려 근교의 민가와 누각을 불태우고 군대를 엄중하게 단속하여 굳게 지키는 계책을 썼다.

그러자 탄작이 신진에 이르렀다가 군대를 돌려 검중을 침략하였다. 경략사 진광모는 두려워 형남으로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조가 여주를 공격하였는데, 여주자사 황경복이 이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