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에 발생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당 선종 사망, 당 의종 즉위(859년 8월) ◎ 당과 남조의 국교 단절(859년 12월) ◎ 구보의 난(859년 12월~)
◎ 남조의 안남 침공(860년 12월~) ○ 강승훈의 등장(863년 3월) ○ 안남도호부 철폐(863년 6월)
◎ 남조의 서천(성도) 침공(863년 12월) ○ 강승훈의 좌천(864년 8월?) ○ 고병의 등장(864년 8월?)
◎ 남조의 서천(성도) 재침공(865년 5월) ○ 고병의 안남 평정(866년 11월)
◎ 방훈의 난(868년 7월~) ○ 강승훈의 재등장과 그가 데려온 주야적심(이국창: 이극용의 아버지, 868년 11월) ○ 주야적심의 활약(869년 2월~)
◎ 남조의 성도 침공(869년 10월~) ◎ 당의종 사망, 당 희종 즉위(873년 7월)
◎ 남조의 성도 재침공(874년 11월~) ○ 고병의 남조 격퇴(874년 12월)
◎ 왕선지의 난(874년 12월~) 이를 좀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시기에도 황제를 제멋대로 세우는 환관의 시대와 관료들의 붕당정치(당쟁)이 이어지면서 서로 싸우고 절도사들은 계속 독립을 시도하여 전쟁이 계속되어 이에따른 전쟁비용에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드디어 민란이 일어난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남조가 황제국을 칭하니 이에 당이 국교를 단절하자 남조는 파주를 함락하여 점령한다. 민란은 구보의 난, 방훈의 난, 왕선지와 황소의 난으로 규모를 확대하며 당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 한편 구보의 난은 규모가 3만 명에 이르러 중원을 흔드니 당 의종은 절동관찰사를 왕식으로 교체하고 왕식이 구보군을 대파한다. 이어서 지루한 전투 끝에 구보가 항복하고 이를 참수하여 구보의 난은 끝났다. 구보의 난이 끝나니 당은 남조를 건드려 남조의 침공을 자초한다. 즉, 안남도호 이호가 다시 파주를 빼앗으니 안남의 만족이 남조의 군사를 합해 교지를 함락한다. 이에 당이 채습을 안남경략사로 삼고 군사를 채습에게 주어 막도록 하니 만족은 떠났다. 그러나 당의 내부적 암투로 안남이 비게 되자 남조가 다시 안남에 침입하여 교지를 함락시켰으며 안남도호 채습을 죽였다. 이에따라 당은 안남도호를 철폐하고 해문에 임시 교주(交州)를 두니, 남조는 군사를 돌려 서천(성도)를 침공하였는데, 양림의 수령이 남조군을 격파하고 옹주의 재물이 바닥난 것을 알고 남조는 다시 침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주자사 유사진이 양림의 만족을 약탈하니 남조가 다시 수주를 침입하여 수주자사 유사진은 남조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남조는 동성 등을 파견하여 성도에 갔는데 서천절도사 이복이 예절문제로 동성을 잡아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새로운 서천절도사 유동이 성도에 도착하여 그를 풀어주고 장안에 오도록 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위로하며 돌려보냈다. 이러할 즈음에 당은 고병을 투입하여 안남을 평정한다. 남조왕 추룡은 동성을 돌려 보내준데 대해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였는데 당나라 성도에서 이 사신을 죽였다. 이럴즈음 당에서는 남조가 안남을 침공할 때 군사 교대 때문에 생긴 문제로 또다시 민란이 일어난다. 바로 방훈의 난이다. 방훈의 난은 규모나 기간에서 구보의 난보다 훨씬 컸다. 당은 악전고투 끝에 방훈의 난을 평정하는데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주야적심이다.(이 사람의 아들이 이극용이고 그 아들이 이존욱이다. 뒤에 이존욱은 주전충의 후량을 무너뜨리고 후당을 세운다) 한편 방훈의 난이 끝나자 남조는 자기들의 사신을 죽인 일로 인하여 드디어 성도를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이래서 남조가 성도를 맹공격한다. 이에 당은 지원군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여 이를 막으니 남조가 돌아갔다. 그런 뒤에 남조가 다시 성도를 침공하였는데 당에서 고병을 서천절도사로 삼으니 고병이 남조를 격퇴하였다. 이렇게 남조가 겨우 돌아가자 이번에는 당나라에서 왕선지의 난과 그를 이어 황소의 난이라는 민란이 또 일어나 당을 뿌리째 뒤흔들어 결국은 당나라를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