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3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75, 8. 황소의 난-1)

상 상 2017. 6. 7. 20:40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3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75, 8. 황소의 난-2)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8. 황소의 난

1) 연표

 

 

1) 연표 - 1

내용(자치통감 요약)

875

고병이 서천절도사에 부임하자, 남조군은 아주(雅州)를 공격하다가 화의를 청하고 철수(8751). 이에 고병은 조정에서 이미 징발한 장무, 부방, 하동의 군사들의 철수를 청원하자 하동의 군사들만 그치게 하였다.

 

당 희종이 보왕이었을 때 소마방사 전령자가 총애를 입고 있었는데, 즉위하게 되자 지추밀로 삼고

드디어 발탁하여 중위(中尉: 신책군 중위)로 삼았다.

당 희종은 이때 나이가 14살이었고 하는 일은 오로지 노는 것이었으며

모든 일은 모두 전령사에게 위임하고 아부(阿父: 의부)라고 불렀다

고병이 군사 5천을 발동하여, 남조를 추격, 대도하(大渡河)에서 대파하고

공래관과 대도하의 여러 성책을 수리하고 융주 마호진에 성을 쌓아 평이군(平夷軍)이라 부르고,

목원천에도 성을 쌓으며 각기 군사 수천 명을 배치하여 수자리를 서게 하였다.

이로부터 남조는 다시 침구하지 아니하였다.

 

고병은 황경복을 불러 대도하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요참하였다.

또한 서천의 군사와 지원군을 합해 6만 군으로 남조를 치겠다고 청하였으나, 당 조정이 불허하였다.

 

위박유후 한간을 위박절도사로 삼았다(3)

 

돌장 해체와 반란

고병이 양경복의 '돌장(突將)'을 해체하니 돌장들은 모두 화를 내고 원망하였다(3)

게다가 형벌이 엄격하고 잔혹하니 이로 말마암아 촉인(蜀人)들은 모두 좋아하지 않았다.(3)

'돌장'들이 반란을 일으켜, 관부로 돌입하니 고병은 달아나 측간에 숨어 살아났다(4)

감군이 돌장(突將)의 직명과 품급을 회복시켜 준다고 허락하니 마침내 영채로 돌아갔다.

고병이 나와서 돌장들에게 사과하는 방문을 붙이고 직책과 명칭 의복과 양곡을 다 회복시키겠다고 하였다.(4)

 

왕영의 난(8754~877년 윤2)

 

절서(浙西) 낭산(狼山)의 진알사 왕영 등 69명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무리 1만을 거두어 소주()·상주(常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장강()에서 배 띄워 바다로 들어가서 절서와 절동 지역 약탈, 남으로 복건(福建)까지 진출하였다.(4)

영호도를 봉상절도사로 삼았다.(5)

 

돌장 진압(875620)

고병이 밤에 '돌장(突將)'들의 집을 습격하여 남녀노소 수천 명 전부 도륙, 강에 던져버렸다(620)

황소의 난(黃巢之亂.8756~8846)

 

왕선지와 그의 무리 상군장이 복주()·조주(曹州) 함락시키니,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는데,

천평절도사 설숭이 이들을 쳤으나 왕선지에게 패배되었다.

원구(冤句)사람 황소 역시 수천 명 모아 왕선지에 호응(6)황소가 난을 시작함.

왕선지와 황소는 사염업자

사염(私鹽) : 정부의 허가없이 밀매하는 소금.

황소는 진사시험 합격 못하자 도둑이 되어, 왕선지와 함께 주현을 공격하고 약탈하면서 산동(山東)을 횡행. 무거운 수탈로 곤란을 당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그들에게 귀부하여 몇 달 사이에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다.

노룡(盧龍)절도사 장공소가 대장 이무훈(본래 회골의 아포사족)의 반란에 패하여, 장안으로 도주하고, 이무훈은 계(: 북경)으로 들어가니 무리들이 노룡유후로 세워 당 조정에서 노룡유후로 삼았다(6).

 

황충 피해가 동에서 서로 번지다(7). 이무훈을 노룡절도사로 삼았다.(8)

 

소의(昭義)절도 대장 유광이 절도사 고식을 축출하고 스스로 소의유후가 되었다.

좌금오대장군 조산을 소의절도사로 삼았다.(9)

여러 도적들이 점차로 일어나서 10여개 주()를 약탈하여, 회남에 도착, 많은 것은 1천여명,

적은 것은 수백 명이었다.(11)

회남, 충무, 선무, 의성, 천평의 다섯군() 절도사에게 토벌케 함(11).

 

왕선지가 기주(沂州)를 침구하니, 평로절도사 송위에게 본군(本軍) 5천과 금병 3()을 주어 토벌케 하였다.(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