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평군에서 보고하기를 장안 등을 파견하여 기주를 구원하고 돌아오다가 의교에 도착하였는데 북방 변경에 도적떼가 다시 일어나 남겨 막게 하였으나, 장인 등은 따르지 않고 운주로 향하였다고 하였다.(1월) 복건(福建), 강서(江西), 호남(湖南)의 관찰사와 자사들에게 사졸들을 훈련시키게 하고 전국의 향촌에 각기 활과 칼 북과 방패를 비치하고, 여러 도적들에 대비케 하였다.(876年1月) 연해(兗海)절도를 태녕군(泰寧軍)으로 부르도록 함.(1月) 노룡(盧龍)절도사 이무훈이 아들 유주사마 이가거를 지유후로 삼아달라고 청하고 자신은 사임하자 이가거를 노령유후로 삼았다.(3月) 남조가 사신을 파견하여 화의를 요구하면서, 계속 변경을 약탈하자 사신의 목을 베었다(3月). 원주(原州)자사 사회조가 탐욕, 포학해 군사들이 난을 일으켜 쫒아냄(4月) 선무(宣武)와 감화(感化)절도, 사주(泗州)방어사에게 비밀스럽게 명령하여, 조운 선대를 방위케 하고 바치는 전(錢: 돈)과 쌀이 평안한지 상황을 보고하게 하였다.(4月) 노룡유후 이가거를 노룡절도사로 삼았다.(5월) 암주자사였던 고걸을 연해수군도지병마사에 충임하여, 절서(浙西)에서 반란한 낭산진알사 왕영을 토벌케함(7月) 평로절도사 송위가 왕선지를 기주(沂州)성 아래에서 대파하니, 왕선지는 달아났다. 그러나 송위는 왕선지가 죽었다고 보고하고 여러 도의 군사를 돌려보내며 자신은 청주(靑州)로 돌아왔다.(7月) 3일 후 주현에서 왕선지가 살았다고 보고하였다. 이때 군사는 처음으로 쉬고 있었는데, 다시 군사들을 발동하니 군사들은 분하고 원망하여 난을 일으킬 생각을 하였다.(7월) 왕선지가 양적(陽翟)과 겹성(郟城)을 함락시키니, 충무절도사 최안잠에게 치게 하였다(8月) 소의절도사 조상은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의성군과 함께 낙양(洛陽)을 방어하게 하고, 산남동도절도사 이복에게는 군사 2천을 선발하여 여주(汝)와 등주(鄧州)의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왕선지가 전진하여 여주(汝州)를 압박하니, 빈녕절도사 이간과 봉상절도사 형호도에게 보병1천과 기병 5백으로 섬주(陝州)와 동관(潼關)을 지키게 하였다.(8월) 왕선지가 여주(州)를 함락시켰다(9월2일) 낙양(洛陽)에 대지진이 일어나 백성들 성밖으로 도주(9月2日) 당 조정이 왕선지와·상군장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관직을 제수하여 불러 타이르게 하였다(9月11日). 왕선지는 양무(陽武)를 함락시키고 정주(州)를 공격하였으나 소의감군판관 뇌은부가 중모(中牟)에서 왕선지를 깨뜨려 달아나게 하였다.(9월) 왕선지는 남쪽으로 당주(唐)와·등주(鄧州)를 공격하였다(10月) 검남서천절도사 고병. 성도(成都)성에 나성(羅城.2중성벽,外성)축조, 둘레 25리 완공 8월9일에 시작하여 11월15일에 공사가 끝났다. 왕선지가 영과 복, 2개 주를 함락시켰다(11월) 절서(浙西)의 반란군 왕영이 온주자사 노식을 통해 항복을 청하니, 궁궐까지 오라고 명을 내렸으나 미적거리면서 오지않고 망해진사(望海鎭使)를 시켜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왕영을 우솔부솔로 삼고 그가 노략질한 재물은 주게 하였다.(11月) 왕선지가 신(申), 광(光), 려(廬), 수(壽), 서(舒), 통(通: 기주-蘄州의 잘못이라고 함) 등의 주를 공격하였다(12월) 회남절도사 유업이 군사를 더 보태달라고 하자 감화절도사 설능에게 병사 수천을 선발하여 그를 도우라고 하였다.(12月) 정전의 계책에 따라 충무절도사 최안잠을 행영도통으로 삼고 이전을 초토사로 삼아서 송위를 대신하게 하고 장자면을 부사로 삼아 증원유를 대신하게 하였다(12월) 계관(桂管) 관찰감군(환관) 이유주가 수(戍)자리 서고 돌아가는 평로와 의창 군사들 끌어들여, 계관관찰사 이찬 쫒아냄(12월) ◎ 왕선지와 황소의 분열(876년 12월) 왕선지와 황소의 5천여 군이 기주성 들어가서 왕선지가 관직을 요구하여 받았는데, 황소가 반대하며 왕선지를 구타하여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그 무리들은 따르지 않고 화를 내니 왕선지는 기주를 크게 약탈하고 백성의 반쯤을 죽였다. 군대를 나누어 3천명은 왕선지와·상군장를 좆게하고 2천여 명은 황소를 좆게하여 각기 길을 나누어 갔다.(12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