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2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65, 7. 남조의 침공-32)

상 상 2017. 5. 10. 18:49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2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65, 7. 남조의 침공-32)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2) 해설(남조의 침공)

 

 

2) 남조의 침공(해설)- 1

 

 

< 859>

 

당 선종 사망, 당 의종 즉위

당 선종이 약을 먹고 6월에 등창이 생겼는데 8월에 등창이 심해지자 당 선종은 기왕(夔王)을 태자로 세우도록 하고 죽었는데 89일 환관 왕종실이 운왕(鄆王) 이온을 황태지로 세우고 운왕 이온이 당 의종으로 즉위하였다(813) 환관이 황제의 유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황태자를 세우고 황제로 세운 것이다. 즉 황제는 환관의 손아귀에 있었던 시대가 바로 이 당시 당나라였던 것이다.

 

당과 남조의 국교 단절

이렇게 당 선종이 죽자, 당의 사자가 남조에 가서 죽음을 알렸다. 이때 남조의 왕 풍우 또한 죽어서 탄작(坦綽) 추룡이 즉위하였다. 추룡은 당 조정이 문상하지 않은 것과 또 조서를 이전 왕에게 내린 것에 화가 나서, 거친 음식으로 사자를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마침내 황제를 참칭하고 건극이라는 연호를 세워 대예국(大禮國)을 자칭하였다. 당 의종은 그 명칭이 당 현종의 휘()에 가깝다고 하여 조공관계를 끊었다.(이것을 보면 조공관계란 국교관계, 외교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남조는 파주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일과 거의 같은 시기에 민란(구보의 난)이 일어난다.

 

구보의 난(85912~8607)

절동(浙東)의 도적 구보가 무리 100명으로 상산을 함락시키고 관군은 누차 패배하여 명주성은 낮에도 성문이 닫히니 도적은 나아가 섬현을 압박하였다.(12) 이에 절동관찰사 정지덕이 이를 토벌하였으나

 

 

< 860>

 

구보가 승리하여(14) 구보는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 무리가 수천명에 이르자 월주에서 크게 두려워 하였다.(114) 이에 절동관찰사 정지덕은 새로 모집한 병졸 5백으로 구보를 치도록 하였는데

구보는 절동군() 5백을 거의 전멸시켰다.(210)

이에 산과 바다에 있던 도적과 망명한 무리들이 사방에서 모여 3만명에 이르니 명성이 중원을 흔들었다.(2)

이렇게 되자 절동관찰사 정지덕이 누차 긴급한 것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니

당 의종은 절동관찰사를 왕식으로 교체하고(2).

왕식에게 충무, 의성, 회남 등 여러 도()의 병사를 징발하여 그에게 주었다(31)

 

한편 구보는 구주, 무주, 명주, 태주를 약탈하고 당흥(唐興)을 깨뜨렸으며,

상우, 여요, 자계를 깨뜨리고 봉화에 들어가 영해를 점거하였으며 상산을 포위하였다.

 

절동관찰사 왕식이 서릉(西陵) 도착하니 구보가 항복을 받아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면박을 하고 오라고 하여

사실상 거절하였다.(4)

절동관찰사 왕식은 군대를 동로군과 남로군으로 편성하여

남로군이 옥주채, 신장채, 당흥을 뽑고, 동로군은 영해를 깨뜨렸으며(52),

남로군이 다시 당흥의 남쪽 남곡에서 구보군을 대파하였다.(59).

이보다 앞서 왕식이 군사가 적다고 충무군, 의성군, 소의군의 증파를 요청하니 허락하였다.

 

3()의 군사가 도착하니

남로군이 해유진에서 구보군을 대파하자, 구보군은 용계동으로 도주하였는데(511),

남로군이 또다시 구보군을 격파하였다(519)

이로부터 왕식의 군대가 구보군을 19번 연파하였는데 고라예가 영해에서 승리하자 왕식은 해구(海口)에 진을 치고 바다로 들어가는 구보군을 막도록 하였다.

구보는 영해를 잃자 남진관에 주둔하였는데 아직 1만 군()이 있었다.

 

그러나 동로군이 구보군의 손마기를 상류촌에서 격파하고 구보를 남진관에서 대파하자(529)

구보군이 황한령으로부터 달아나 다시 섬현으로 들어왔다(65)

이에 절동관찰사 왕식이 동 남 양로군으로 섬현을 포위하였다.(612).

 

이로부터 양측이 83회 전투를 벌려 양군()모두 지쳐 구보가 항복을 청했으나 거절하고

다시 3회 전투를 한 뒤 구보가 항복한 것을 사로잡았다.(621)

그리고 구보를 장안에서 참수함으로써 구보의 난은 끝났다.(8)

 

이렇게 당나라 동쪽을 뒤흔든 구보의 난이 끝나자 당은 남조를 공격하여 남조의 침공이 시작된다.

쓸데없이 벌통을 건드려 남조의 침공을 자초한 것이다.

 

남조의 안남 침입

안남도호 이호가 다시 파주를 빼앗자(10)

안남의 만족이 남조의 군사를 합해 3만을 이끌고 교지(交趾)를 함락한다(123)

이에 안남도호 이호는 무주로 도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