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삽)가한의 아장 가까이 있던 30개의 부락은 특근 오개를 가한(15대 가한)으로 삼고 남쪽으로 내려와 중국에 내부했다. 이전에 힐알사가 회골을 격파하고 태화공주를 사로잡았다. 힐알사는 이릉(李陵)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중국과 같은 성이라고 했으며 마침내 달간 열 명을 시켜 공주를 보내려고 장성 근처까지 왔다. 오개[가한]이 도중에 힐알사 사신과 마주쳐 달간 등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태화공주가 오히려 오개가한(烏介可汗:15대 가한)에게 되돌아오니 바로 [가한이 태화]공주를 인질로 삼아 [그녀와] 동행을 했고, 남쪽으로 고비[大磧]을 넘어 천덕[군] 경계까지 와서 천덕성(天德城)을 태화공주의 거주지로 줄 것을 주청했다. 태화공주 역시 사신을 보내 오개가한이 이미 즉위했으니 그를 책봉해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대신 힐우가사 등이 표문을 올려 진무[성]을 빌려주어 [태화]공주와 가한을 거주하게 해달라고 했다. 황제가 이에 조칙을 내려 우금오위대장군 왕회에게 부절을 갖고 그 백성을 안무하게 하면서 식량을 2만 곡(斛)을 주었으나 진무[성]을 빌려주는 것은 허가하지 않으며 중인(환관)에게 명령해 좋은 말로 타이르게 했고, 또한 조칙을 내려 사자에게 부절을 갖고 책봉하러 가서 몰래 그들의 행동을 살피며 [회골의] 변고를 기다리게 했다.(841년) 842년 3월 장작소감 묘진을 파견하여 오개가한(15대 가한)을 책명하게 하였는데 서서히 가도록 하면서 하동에서 머무르게 하여 가한의 위치가 정해지도록 기다린 후에 나아가도록 하였다. 이미 그렇게 하도록 하였으나 가한이 변경을 자주 침입하고 시끄럽게 하니 묘진은 끝내 가지 못하였다. ⇒ 당은 끝내 오개가한을 책봉하지 않았음 회골의 올몰사는 적심이 교활하여 알기 어려운 까닭에 먼저 전모에게 알리어 적심이 변방을 침범하기를 꾀한다고 하고 마침내 적심을 유혹하여 복고와 나란히 죽이자 (특륵) 나힐철이 적심의 무리 7천장(帳: 세대)을 거두어가지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4월 갑신일(20일), 올몰사는 그 나라의 특륵과 재상 등 2,200여 명을 인솔하고 와서 항복하였다. 5월 무신일(14일), 올몰사를 좌금오대장군 회화군왕으로 삼고, 그 부락의 무리에게 쌀 5천곡과 비단 3천필 내렸다. 나힐철이 그의 무리를 인솔하고 진무와 대동으로부터 동쪽으로 가서 실위와 흑사(黑沙)를 경유하고 남쪽으로 웅무군을 향하면서 유주를 엿보았다. 노룡절도사 장중무는 그의 동생 장중지를 파견하여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맞서 치도록 하여 그들을 대패시키고 머리를 베고 포로로 잡은 것이 이루다 헤아릴수 없었으며 그 7천장(帳)을 다 거두어 항복시키고 여러 도(道)에 분배하였다. 나힐철은 달아났으나 오개 가한이 그를 잡아서 죽였다. 이 당시에 오개(15대 가한)의 무리가 비록 쇠약해지고 줄었으나 아직 10만이라고 불리고, 아장을 대동군(大同軍) 북쪽 여문산에 머물게 하고 있었다. 6월 갑신일(21일), 올몰사가 거느리는 것을 '귀의군(歸義軍)'으로 삼고, 올몰사를 좌금오대장군으로 삼아·군사에 충임하였다. 7월, 오개가한이 다시 그의 재상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군사를 빌려 나라를 되찾는데 돕도록 하고, 또 천덕성을 빌려달라고 하자 조서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8월, (오개)가한은 무리를 인솔하고 파두봉의 남쪽을 지나 대동천大同川)으로 갑자기 들어와서 하동의 여러 오랑캐와 우마(牛馬) 수만을 몰아서 노략질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싸우다가 운주(雲州) 성문에 도착하였다. 자사 장헌절이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고, 토욕혼과 당항은 모두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 그들을 피하였다. 8월 경오일(9일)에 조서를 내려서 진, 서, 여, 양양 등에 있는 병사를 발동하여 태원과 진무, 천덕에 주둔하도록 하고, 봄이 오기를 기다려 회골을 몰아서 내쫓도록 하였다. 정축일(16일), 올몰사는 그의 동생인 아력지, 습물철, 오라사 모두에게 성을 하사하여 이씨로 하고 이름을 (이)사충, (이)사정, (이)사의, (이)사례로 하였으며, 그 나라의 재상인 애야물의 성을 애로 하고 이름을 (애)홍순으로 하였으며 애홍순을 귀의군부사로 삼았다. 9월, 유면에게 초무회골사를 겸하도록 하여 만약 몰아서 내쫓아야 한다면 각 도의 행영군사를 임시로 지휘토록 하고, 장중무를 동면초무회골사로 삼고 해당 도의 행영병과 해, 거란, 실위 등을 나란히 스스로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사충(올몰사)를 하서당항도장과 회골 서남면초토사로 삼았는데 그 모두를 태원에서 군대를 모으게 하였다. 유면으로 하여금 안문관(雁門關)에 주둔하게 하였다. 하동, 유주, 진무, 천덕에 조서를 내려 각기 대병을 내보내도록 하고 병영을 옮겨 조금씩 전진하여 회홀을 압박하였다. 이사충은 글필(契苾), 사타(沙陀), 토욕혼 출신의 6천 기병과 세력을 합쳐서 회골을 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을사일(14일) 은주자사 하청조와 울주자사 글필통으로 하동의 번병을 나누어 거느리게하고 지눔에 가서 이사충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11월 기미일(29일), 유면과 장중무는 혹한으로 군사를 나가게 할수 없으므로 새해 초까지 기다리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진무절도사)이충순만이 홀로 이사충과 함께 전진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12월 병인일(7일), 이덕유가 주문을 올려서 이사충(올몰사)을 파견하여 보대책(保大柵)으로 나아가 주둔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좆았다. 정묘일(8일) 이후, (진무절도사)이충순이 주문을 올려서 회골을 공격하여 이를 깨뜨렸다고 하였다. 843년 또 이홍순에게 패배를 했다. 유면과 천덕행영부사 석웅이 용감한 기병과 사타, 계필 등의 여러 다른 족속을 정돈해 밤에 운주를 나가 마읍(馬邑郡)까지 말을 달려갔다가 안중새(安衆塞)에서 회골과 만나 싸워 [회골을] 대패시켰다. 오개[가한]이 바야흐로 진무[성]을 압박하며 힘차게 말을 몰아 들어왔다가 밤에 성벽에 판 구멍에 숨어 있었던 정예 병사가 튀어 나오자 오개[가한]이 놀라 물러나 갔고, [석]웅이 북쪽으로 쫓아 살호산까지 가자 오개[가한]은 부상을 입고 도망했다. [풍주자사 석]웅이 [태화]공주를 만나 공주를 모시고 돌아오자 특근 이하 백성 수만 명이 항복을 했고, 짐수레와 물자, 그리고 내려준 조서 등을 모두 거두어 들였다. [오개]가한이 나머지를 거두어 흑거자(黑車子)에게로 가서 의지하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이]홍순, [하]청조에게 끝까지 쫓게 했다. [이]홍순이 흑거자를 많은 재물로 유혹해 오개[가한]을 죽일 것을 도모했다. 이전에 [오개]가한을 따라 망명한 사람들이 [궤멸되어] 군대를 조직하지 못했다. ⇒ 당은 끝까지 오개가한을 책봉하지 않았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