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골의 보의가한(제10대 가한)이 죽었다. 4월 병술일, 회골의 사군(嗣君)인 등라우록몰밀시구주비가숭덕가한(제11대 가한)에게 책서를 내렸다.(821년 2월) 회흘은 함안공주가 죽은(808년 2월) 이후 여러 번 귀부해 과거의 우호 관계를 이어가기를 청했으나 오래 동안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다. 원화 연간 말에 이르러 그 요청이 더욱 간곡하게 되자 헌종이 회골[北虜]이 왕실에 공을 세운 바가 있고, 또한 토번이 매년 변경의 걱정거리가 된다고 하면서 마침내 시집보낼 것을 허락했다. 이미 허락했으나 헌종이 붕어해버렸다. 목종(穆宗: 제12대)이 즉위해 해를 넘겨 열 번째 누이를 태화공주로 삼아 장차 시집을 보내려고 하자 회흘 등라골몰밀시합비가가한(제11대 가한)이 사신으로 이난주 구록도독사결병외재상 부마 매록사마, 그리고 공주 한 사람, 엽호공주 한 사람, 그리고 달간과 낙타와 말 천여 마리를 보내 맞이하게 했다.(821년 5월) 토번이 821년 6월에 청새보(靑塞堡)를 침입하였는데, 이는 우리(당나라)와 회흘이 화친한 까닭이었다. 염주자사 이문열이 발병하여 이를 물리쳤다. 9월에 토번이 사신을 보내 회맹을 청했고, 황상이 이를 허락했다. 장안회맹(장경회맹)-토번과 당의 마지막 회맹(821년 10월) 822년 2월 회흘에 말 값으로 비단 5만 필을 내려주었다. 3월에 또 말 값으로 비단 7만 필을 내려주었다. 이달에 배도가 유주와 진주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는데, 회골이 군대를 이끌고 배도와 함께 토벌하기를 청했다. 조정의 의론에서 보응 년간 초기에 회흘이 두 서울을 수복한 공을 믿고 교만하게 굴어 행동을 제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모두가 불가하다고 하자 결국 사신에게 명령해 회흘에게 멈추고 돌아가라고 명령을 했다. 회흘이 마침 이미 풍주 북쪽 경계에 와있어서 멈추라는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비단을 7만 필을 징발해 주라고 하자 비로소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