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 고려(高麗) 2. 발해(渤海) 3. 신라(新羅) 4. 흑수말갈(黑水靺鞨)
○ 신오대사(新五代史)[註001] 사이부록(四夷附錄)[註002]
1. ○고려(高麗)[註003]
○ 고려(高麗)는 본래 부여인(扶餘人)의 별종(別種)이다.[註004] 그 나라의 지리(地理)와 군왕(君王)의 세차(世次)는 『당서(唐書)』에 나타나 있으며,[註005] 다른 오랑캐에 비교하면 성씨(姓氏)도 있고,[註006] 그 관직의 이름도 뜻을 대략 알 수 있는 것들이다.[註007] 당(唐) 말엽에는 그 왕(王)의 성(姓)이 고씨(高氏)였다.[註008] 동광(同光) 원년(A.D.923; 高麗 太祖 6)에 [고려(高麗)에서] 정사(正使)로 광평시랑(廣評侍郞)[註009] 한신일(韓申一)[註010]과 부사(副使)로 춘부소경(春部少卿)[註011] 朴巖(박암)[註012] 등을 [후당(後唐)]에 보내 왔는데, 그 국왕(國王)의 성명(姓名)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잃어버리고 기록하지 못하였다.
○ 장흥(長興) 3년(A.D.932; 高麗 太祖 15) 에 권지국사(權知國事)[註013] 왕건(王建)이 사신을 보내오니, [후당(後唐)] 명종(明宗)은 즉시 건(建)을 현도주도독(玄菟州都督)으로 除拜(제배-제수)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충임(充任)하는 동시에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註014] [왕(王)]건(建)은 고려(高麗)의 대족(大族)이다.[註015]
○ 개운(開運) 2년(A.D.945; 高麗 惠宗 2)에 건(建)이 졸(卒)하자 아들 무(武)가 즉위하였다.[註016] 건우(乾祐) 4년(A.D.951; 高麗 光宗 2)에 무(武)가 졸(卒)하자 아들 昭(소)가 즉위하였다.[註017] 왕씨(王氏) 3대[註018]는 오대(五代)가 끝나도록 항상 조공(朝貢)하였으며, 그들이 즉위할 때에는 반드시 중국에 승인을 요청하였고, 중국에서는 언제나 정중하게 답하였다.
○ 그 땅에서는 동(銅)· 은(銀) 등이 생산되었다. 후주(後)[주,周] 세종(世宗) 때에는 상서수부원외랑(尙書水部員外郞)[註019] 한언경(韓彥卿)을 보내어 비단 수천필로써 고려(高麗)에서 동(銅)을 사다가[註020] 돈을 주조하였다. [후주(後周) 세종(世宗)] 6년에 소(昭)[註021]가 [후주(後周)에] 사신을 보내어 황동(黃銅) 5만근을 바쳤다.[註022]
○ 고려(高麗) 사람들은 문자(文字)를 알고 글읽기를 좋아한다. 소(昭)가 『別叙孝經(별서효경)』1권, 『월왕신의(越王新義)』8권, 『황령효경(皇靈孝經)』1권, 『孝經雌圖(효경자도)』1권 등을 바쳤다.[註023] 『별서(別叙)』는 공자(孔子)의 탄생 및 그 제자들의 사적을 서술하였고, 『월왕신의(越王新義)』는 『월왕(越王)』으로 문목(問目)을 삼았는데 지금의 『정의(正義)』와 같으며, 『황령(皇靈)』은 나이를 연장하고 곡식을 먹지 않는 것에 대하여 서술하였고, 『자도(雌圖)』는 일식(日食)과 성변(星變)을 기록하였는데, 모두 도덕에 어긋난 말들이었다.
2. ○발해(渤海)[註001]
○ 발해(渤海)[註002]는 본시 말갈(靺鞨)[註003]이라고 불렀는데 고려(高[구,句]麗)의 별종(別種)이다.[註004] 당(唐) 고종(高宗)이 고려(高[구,句]麗)를 멸망시키고 그 사람들을 이주시켜 중국에 흩어져 살게 하고, 평양(平壤)에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註005]를 설치하여 그들을 통치하였다. [측천(則天)]무후(武后) 때에 거란(契丹)이 북쪽 변방을 공격하자, 고려(高[구,句]麗)의 별종(別種)인 大乞乞仲象(대걸걸중상)[註006]이 말갈(靺鞨)의 추장(酋長)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달아나[註007] 고려(高[구,句]麗)의 옛 땅을 나누어 임금노릇을 하니, 무후(武后)가 장수를 파견하여[註008] 걸사비우(乞四比羽)를 공격하여 죽였고, 걸걸중상(乞乞仲象)도 병들어 죽었다. 중상(仲象)의 아들 조영(祚榮)이 즉위하여 比羽(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였는데, 그 무리는 40만명으로서 挹婁(읍루)에 웅거하여[註009] 당(唐)나라 신하가 되었다. [당(唐)] 중종(中宗) 때에 이르러서는 忽汗州(홀한주)를 설치하여 조영(祚榮)을 도독(都督)으로 삼고,[註010]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니, 그 후세에 마침내 발해(渤海)라고 부르게 되었다.[註011
○ [발해(渤海)] 귀족(貴族)의 성(姓)은 대씨(大氏)이다. 開平(개평) 원년[註012](A.D.907; 渤海 哀王 7)부터 [발해(渤海)] 국왕(國王) 大諲譔(대인선)이 사신을 파견하여 와, 현덕(顯德) 연간(A.D.954~959; 高麗 光宗 5~10)이 끝날 때까지 항상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그 나라의 토산물(土物産)은 고려(高[구,句]麗)와 같았다.[註013] 諲譔(인선)의 세차(世次)[註014]와 즉위년(即位年)· 졸년(卒年) 등은 사관(史官)이 그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3. ○신라(新羅)[註001]
○신라(新羅)는 변한(弁韓)의 후예들이다.[註002] 그 나라의 지리(地理), 군장(君長)의 세계(世系), 물산(物産)· 풍속(風俗) 등은 『당서(唐書)』에서 볼 수 있다. 그 [나라의] 대족(大族)으로는 김씨(金氏)· 박씨(朴氏)가 있는데,[註003] 당(唐) 고조(高祖) 때 김진(金眞)을 봉하여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삼았는데[註004] 그 후부터는 그 후손을 항상 임금으로 삼았다.[註005]
○ 동광(同光) 원년(A.D.923; 新羅 景明王 7)에 신라국왕(新羅國王) 김박영(金朴英)이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註006] 장흥(長興) 4년(A.D.933; 新羅 敬順王 7)에는 권지국사(權知國事) 김부(金溥)[註007]가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왔다.[註008] 박영(朴英)과 부(溥)의 세차(世次)와 즉위년(即位年)· 졸년(卒年) 등에 관한 것은 사관(史官)이 모두 그 기록을 빠뜨렸다. [후(後)]진(晋) 이후부터는 [신라(新羅)의 사신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
4. ○흑수말갈(黑水靺鞨)[註001]
○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본디 물길(勿吉)이라고 불렀는데, 후위(後魏)에 이르러 중국에 나타났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남쪽으로는 고려(高[구,句]麗)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돌궐(突厥)과 접경하고, 북쪽으로는 室韋(실위)와 인접하고 있었는데, 대개 肅愼氏(숙신씨)의 땅이다. 그 무리들은 나누어져 수십부(部)를 이루었는데,[註002]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가장 그 북쪽에 위치하여 제일 굳세고 사나웠으며, 문자(文字)로 기록한 것이 없다. 그들의 무기로는 각궁(角弓)과 楛矢(호시) 등이 있다.[註003]
○ 동광(同光) 2년(A.D.924; 渤海 哀王 24) 에 黑水[靺鞨의] 兀兒(올아)가 사신을 보내왔다.[註004] 그 이후로 항상 와서 조공(朝貢)하였는데, 등주(登州)에서 바다를 건너 청주(靑州)로 왔다. 그 이듬해에는 흑수(黑水)[말갈(靺鞨)의] 胡獨鹿(호독록)도 또 사신을 보내왔다.[註005] 올아(兀兒)와 호독록(胡獨鹿) 및 그 양부(兩部)의 酋長(추장)들이 각각 사신을 보내왔는데, 그 부족(部族)· 세차(世次)· 즉위년(即位年)· 졸년(卒年) 등을 사관(史官)이 모두 기록에서 빠뜨려 버렸다. 장흥(長興) 3년(A.D.932; 高麗 太祖 15)에 이르러 호독록(胡獨鹿)이 졸(卒)하자, 아들 桃李花(도이화)가 즉위하여 중국에 책봉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는 끝내 [중국에]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 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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