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 동이전

17. 신당서[新唐書] 북적열전(北狄列傳)

상 상 2012. 2. 6. 20:41

 차  례

 

1. 흑수말갈(黑水靺鞨)

2. 발해(渤海)

3. 찬자평(撰者評)

 

 

○ 신당서(新唐書)[註001]

북적열전(北狄列傳)[註002]

 

1. 흑수말갈(黑水靺鞨)[註003]

 

1)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숙신(肅愼) 땅에 있는데, 또한 읍루(挹婁)라고도 하며, 후위(後魏) 때에는 물길(勿吉)로도 불리었다.[註004] 경사(京師)에서 동북으로 6천리 밖에 있는데,[註005] 동쪽은 바다에 접하고, 서쪽은 돌궐(突厥)에 닿으며, 남쪽은 고려(高[구,句]麗)와, 북쪽은 실위(室偉)와 접해 있다.[註006]

 

2) ○ 수십부(部)로 나뉘어져 추장(酋長)들이 각기 자치(自治)를 한다.[註007] 그중 가장 두드러진 부(部)는 속말부(粟末部)로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註008] 태백산(太白山)에 이른다. [그 산은]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하는데, 고려(高[구,句]麗)와 서로 닿는다. 속말수(粟末水)의 연안에 의지하여 사는데, 이 물은 [태백(太白)]산(山) 서쪽에서 흘러 나와서 북으로 타루하(它漏河)에 들어간다. 조금 동북쪽에 있는 것이 골돌부(汨咄部)이고,[註009] 그 다음의 것이 안거골부(安居骨部)이며, 더 동쪽은 불열부(拂涅部)이다. [안(安)]거골(居骨)[부(部)]의 서북쪽에 있는 것이 흑수부(黑水部)이고, 속말(粟末)[부(部)]의 동쪽에 있는 것이 백산부(白山部)이다.[註010] 부(部)와 부(部)의 사이는 먼 것은 3~4백리이고, 가까운 것은 2백리이다. 백산(白山)[부(部)]는 본래 고려(高[구,句]麗)에 신속(臣屬)되어 있었는데,[註011] 왕사(王師)가 평양(平壤)[성(城)]을 공취(攻取)하자, 그 무리들이 대개 당(唐)으로 들어왔다. 골돌(汨咄)· 안거골(安居骨) 등도 모두 분산되어 점차 미약하여져 [뒤에는 활동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유민(遺民)들은 뿔뿔이 발해(渤海)로 들어갔다.[註012]

 

3)○ 풍속은 머리를 땋아[註015] 멧돼지의 어금니를 매달고, 꿩의 꼬리깃으로 관(冠)을 꾸며서 다른 여러 부(部)와 구별을 짓는다.[註016] 성질이 잔인하고 사나우며, 사렵(射獵)을 잘 한다. 걱정하고 두려워 하는 것이 없고, 젊은이를 귀(貴)하게 여기고 늙은 자는 천시(賤視)한다[註017] 거처하는 집이 없고 산수(山水)에 의지하여 움을 파서 그 위에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는데, 마치 무덤과 같다. 여름에는 수초(水草)를 따라 나오고, 겨울에만 움 안에 들어가 산다.[註018] 오줌으로 세수를 하니, 이적(夷狄) 중에서 가장 지저분하다[註019]

죽은 자를 묻을 적에는 관곽(棺椁)이 없고,[註020] 그가 타던 말을 잡아 제사한다. 추장은 ‘대막불만돌(大莫拂瞞咄)’이라 하는데, 대대로 [부자(父子)가] 세습하여 추장이 된다.[註021]

서계(書契)가 없다.[註022] 화살은 돌촉으로[註023] 길이가 2촌(寸)이니, 이는 고노(楛砮)의 옛 방법일 것이다. 가축은 돼지가 많고, 소와 양은 없다.[註024] 수레와 말이 있고, 밭은 우경(耦耕)을 하며,[註025] 수레는 밀고 다닌다.

조와 보리가 있다. 초서(貂鼠)· 백토(白兔)· 백응(白鷹)이 많이 난다. 염천(鹽泉)이 있어 기체로 증발하여 나무 끝에 소금이 엉긴다.[註026]

 

4)○ 무덕(武德) 5년(A.D.622; 高句麗 榮留王 5)에 추장 아고랑(阿固郞)이 처음으로 [당(唐)에] 왔다.[註027] 태종(太宗) 정관(貞觀) 2년(A.D.628; 高句麗 榮留王 11)에는 마침내 신부(臣附)하여 항상 공물(貢物)을 바쳐오므로, 그 땅을 연주(燕州)로 삼았다.[註028] 태종(太宗)이 고려(高[구,句]麗)를 토벌할 적에 그 북부(北部)가 반기를 들고 고려(高[구,句]麗)와 합세하였다. 고혜진(高惠眞)[註029] 등이 군사를 이끌고 안시(安市)[성(城)]을 구원할 적에 싸움마다 늘 말갈병(靺鞨兵)을 앞에 내세웠다. 태종(太宗)은 안시(安市)[성(城)]을 함락하고 혜진(惠眞)을 사로잡은 뒤, 말갈병(靺鞨兵) 3천여명을 모두 묻어 죽였다.

 

5)○ 개원(開元) 10년(A.D.722; 新羅 聖德王 21)에 그 추장 예속리계(倪屬利稽)가 조근(朝覲)을 오니, 현종(玄宗)은 그를 발리주자사(勃利州刺史)에 제수(除授)하였다.[註030] 이에 안동도호(安東都護) 설태(薛泰)가 흑수부(黑水府)를 두자고 청하므로,[註031] 부장(部長)으로 도독(都督) 또는 자사(刺史)를 삼고, 조정(朝廷)에서 장사(長史)를 두어 감리(監理)케 하였다. 부도독(府都督)에게 이씨(李氏)로 사성(賜姓)하고 이름은 헌성(獻誠)으로 하여,[註032] 운휘장군령흑수경략사(雲麾將軍領黑水經略使)로 삼아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예속시켰다. 현종(玄宗)의 말년(末年)까지 15번 조헌(朝獻)하였다. 대력(大曆) 연간(A.D.766~779; 新羅 惠恭王 2~15)에는 모두 7번, 정원(貞元) 연간(A.D.785~804; 新羅 元聖王 1~哀莊王 5)에는 한번 왔으며, 원화(元和) 연간(A.D.806~820; 新羅 哀莊王 7~憲德王 12)에는 두 번 [내조(來朝)하였다.]

 

6)○ 당초 흑수(黑水)[말갈(靺鞨)]의 서북쪽에는 사모부(思慕部)가 있는데, 더 북으로 10일(日)을 가면 군리부(郡利部)가 있고, 동북으로 10일(日)로 가면 굴설부(窟設部)가 있다. [굴설(窟設)은] 굴설(屈設)이라고도 부른다. 조금 동남으로 10일(日)을 가면 막예개부(莫曳皆部)가 있고, 또 불열(拂涅)[註033]· 우루(虞婁)· 월희(越喜)[註034]· 철리(鐵利)[註035]등의 부(部)가 있다. 그 땅은 남(南)으로는 발해(渤海)에 이르고, 북(北)과 동(東)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서(西)로는 실위(室韋)에 이른다. 남북(南北)은 2천리이고, 동서는 1천리에 뻗쳐 있다. 불열(拂涅)· 철리(鐵利)· 우루(虞婁)· 월희(越喜)는 때때로 중국(中國)과 통하였으나, 군리(郡利)· 굴설(屈設)· 막예개(莫曳皆)는 스스로 통할 수가 없었다.

 

7)○ 지금에까지 남아 있어 경사(京師)에 조근(朝覲)을 온 것을 좌(左)에 부기(附記)해 둔다.

불열(拂涅)은 대불열(大拂涅)로도 일컬으며, 개원(開元)(A.D.713~741; 新羅 聖德王 12~孝成王 5)· 천보(天寶) 연간(A.D.742~755; 新羅 景德王 1~14)에 여덟 번 와서[註036] 경정(鯨睛)[註037]· 초서(貂鼠)· 백토피(白兎皮)를 바쳤다.

철리(鐵利)는 개원(開元) 연간(A.D.713~741; 新羅 聖德王 12~孝成王 5)에 여섯 번 왔다.

월희(越喜)는 [개원(開元) 연간에] 일곱 번 오고, 정원(貞元) 연간(A.D.785~804; 新羅 元聖王 1~哀莊王 5)에 한번 왔다.

우루(虞婁)는 정관(貞觀) 연간(A.D.627~649; 高句麗 榮留王 10~寶莊王 8)에 두 번 오고, 정원(貞元) 연간(A.D.785~804; 新羅 元聖王 1~哀莊王 5)에 한번 왔다. 뒤에 발해(渤海)가 강성해지자, 말갈(靺鞨)은 모두 그들에게 역속(役屬)되어 다시는 왕(王)과 만나지 못하였다.[註038]

 

 

 

 

2. ○ 발해(渤海)[註001]

 

1)○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註002]로서 고려(高[구,句]麗)에 부속(附屬)되어 있었으며, 성(姓)은 대씨(大氏)[註003]이다. 고려(高[구,句]麗)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註004]의 동모산(東牟山)[註005]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營州)에서 동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新羅)와 맞닿아, 니하(泥河)[註006]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거란(契丹)과 [접하고 있다.] 성곽(城郭)을 쌓고 사니, 고려(高[구,句]麗)의 망명자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2)○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A.D.696; 新羅 孝昭王 5)에 거란(契丹)의 [이(李)]진충(盡忠)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註007] 걸걸중상(乞乞仲象)[註008]이라는 자가 말갈(靺鞨)의 추장(酋長)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려(高[구,句]麗)의 남은 종족과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遼水)[註009]를 건너서 태백산(太白山)[註010]의 동북을 거점으로 하여 오루하(奥婁河)[註011]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고 수비를 굳혔다. 무후(武后)는 걸사비우(乞四比羽)를 허국공(許國公), 걸걸중상(乞乞仲象)을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여 그 죄를 용서하였다. 비우(比羽)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자, 무후(武后)는 옥검위대장군(玉鈐衛大將軍)[註012]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中郞將) 색구(索仇)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쳐 죽였다. 이때에 중상(仲象)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대(大)]조영(祚榮)이 패잔병(敗殘兵)을 이끌고 도망쳐 달아났는데, 해고(楷固)는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註013]을 넘었다. 조영(祚榮)이 고려병(高[구,句]麗兵)과 말갈병(靺鞨兵)을 거느리고 해고(楷固)에게 저항하니, 해고(楷固)는 패전하고 돌아왔다. 이에 거란(契丹)이 돌궐(突厥)[註014] 에 붙으므로 왕사(王師)의 길이 끊겨서 그들을 치지 못하게 되었다. 조영(祚榮)은 곧 비우(比羽)의 무리를 합병하여 지역이 [중국과]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註015]이라 부르며, 돌궐(突厥)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통교(通交)하였다.

땅은 사방 5천리이며, 호구(戶口)는 십여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이다. 서계(書契)를 제법 안다.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註016]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

 

3)○ 중종(中宗) 때에 시어사(侍御史)[註017] 장행급(張行岌)을 보내어 초위(招慰)하니, 조영(祚榮)이 아들을 보내어 입시(入侍)케 하였다.

예종(睿宗) 선천(先天) 연간 (A.D.712~713; 渤海 高王 14~15)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영(祚榮)을 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에 배수(拜授)하고,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註018]로 삼아서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註019]을 겸임시켰다. 이로부터 비로소 말갈(靺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渤海)로만 불렀다

 

4)○ 현종(玄宗) 개원(開元) 7년(A.D.719; 渤海 武王1)에 조영(祚榮)이 죽으니, 그 나라에서 사시(私諡)[註020]로 고왕(高王)이라 하였다. 아들 무예(武藝)가 왕위(王位)에 올라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오랑캐들이 겁을 먹고 그를 섬겼으며, 또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쳤다. 현종(玄宗)이 전책(典冊)을 내려 왕(王) 및 도독(都督)을 세습시켰다.

 

5)○ 얼마 안되어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사자(使者)가 입조(入朝)하므로, 현종(玄宗)은 그 땅을 흑수주(黑水州)로 삼았다. 장사(長史)[註021]를 두어 총관(總管)케 하였다. 무예(武藝)가 그의 부하들을 불러다 모의하기를, “흑수(黑水)가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어서 당(唐)과 통하게 되었고, 지난번 돌궐(突厥)에게 토둔(吐屯)[註022]을 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려 왔다. 이제 당(唐)에게 벼슬을 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당(唐)과 더불어 앞뒤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곧 아우 문예(門藝) 및 구(舅) 임아(任雅)를 시켜 군사를 동원하여 흑수(黑水)를 치게 하였다. 문예(門藝)는 일찍이 볼모로 경사(京師)에 와 있었으므로 이해(利害)를 아는지라, 무예(武藝)에게, “흑수(黑水)가 벼슬을 청하였다 하여 우리가 그를 친다면 이는 당(唐)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당(唐)은 대국(大國)으로서 군사가 우리보다 1만배나 되는데, 그들과 원한을 맺는다면 우리는 곧 망합니다. 지난날 고려(高[구,句]麗)가 전성(全盛)할 적에 군사 30만으로 당(唐)과 맞서 싸운 것은 영웅스럽고 굳세다할만하지만, 당병(唐兵)이 한번 덮치매 땅을 쓴듯이 멸망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군사는 [당시의] 고려(高[구,句]麗)에 비한다면 3분의 1에 지나지 않으니, 왕이 그들을 어긴다는 것은 불가(不可)합니다.” 고 말하였으나, 무예(武藝)는 듣지 않았다. 군사가 국경에 이르렀을 적에 [문예(門藝)가] 또 글을 올려 굳이 간하자, 무예(武藝)는 화를 내어 종형(從兄) 일하(壹夏)를 보내어 대신 통솔케 하고, 문예(門藝)는 불러다 죽이려 하였다. 문예(門藝)가 두려워서 사잇길을 통하여 귀순해 오니, [현종(玄宗)은] 조칙으로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을 제수(除授)하였다. [얼마 후] 무예(武藝)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문예(門藝)의 죄악을 폭로하고, 죽이기를 청하였다. [현종(玄宗)은] 조서를 내려 그를 안서(安西)[註023]로 옮겨 보내고, “문예(門藝)가 곤공에 처하여 나에게 귀순해 왔으니, 의리상 죽일 수가 없어서 벌써 나쁜 곳으로 옮겨 보냈소.” 라고 좋게 말하여 답장을 보냈다. 아울러 사자(使者)는 머물러 있게 하여 보내지 않고, 별도로 홍려소경(鴻臚少卿)[註024] 이도수(李道邃)와 원복(源復)을 보내어 유지(諭旨)를 전하였다. 무예(武藝)가 사실을 [숨긴 것을] 알고 글을 올려 드러내놓고, “폐하(陛下)는 거짓을 천하(天下)에 보여서는 아니 되오.” 하니, 기어코 문예(門藝)를 죽이라는 뜻이었다. 현종(玄宗)은 [이(李)]도수(道邃)와 [원(源)]복(復)이 국가의 일을 누설한 데 대해 노하여 모두 좌천을 시키고, 거짓으로 문예(門藝)를 물리쳐서 회보하였다.

 

6)○ 10년 뒤에 무예(武藝)가 대장(大將) 장문휴(張文休)를 파견하여 해적(海賊)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치니, 현종(玄宗)은 급히 문예(門藝)를 파견하여 유주(幽州)[註025]의 군사를 동원시켜 이를 공격하는 한편,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註026]을 사신으로 신라(新羅)에 보내어 군사를 독촉하여 발해(渤海)의 남부를 치게 하였다. 마침 날짜가 매우 추운 데다 눈이 한길이나 쌓여서 군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으니, 공을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무예(武藝)가 그 아우에 대한 원한이 풀리지 않아서 자객(刺客)을 뽑아서 동도(東都)[註027]에 들여 보내어 길에서 저격케 하였으나, 문예(門藝)가 그들을 물리쳐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하남(河南)[註028]에서 자객(刺客)들을 체포하여 모두 죽였다.

 

7)○ 무예(武藝)가 죽자, 그 나라에서 사시(私諡)로 무왕(武王)이라 하였다. 아들 흠무(欽茂)가 왕위(王位)에 올라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고치니, [현종(玄宗)은] 왕(王) 및 도독(都督)을 세습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에 흠무(欽茂)는 경내(境內)에 사면령을 내렸다.

천보(天寶)(A.D.742~755; 渤海 文王 6~19) 말년에 흠무(欽茂)가 도읍을 상경(上京)[註029]으로 옮기니, 옛 도읍지[註030]에서 3백리 떨어진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이다. 현종(玄宗)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29번 조헌(朝獻)하였다.

 

8)○ 보응(寶應) 원년(A.D.762; 渤海 文王 26)에 [대종(代宗)은] 조서(詔書)를 내려 발해(渤海)를 나라로 인정하여 흠무(欽茂)를 왕(王)으로 삼고, 검교태위(檢校太尉)[註031]로 진수(進授)하였다. 대력(大曆) 연간(A.D.766~779; 渤海 文王 30~43)에 25번 조공(朝貢)하고, 일본(日本)의 무녀(舞女) 11명을 조정에 헌상하였다.[註032] 정원(貞元)(A.D. 785~804; 渤海 文王 49~康王 10) 때에 동남쪽 동경(東京)[註033]으로 [도읍을] 옮겼다.

 

9)○ 흠무(欽茂)가 죽으니, 사시(私諡)로 문왕(文王)이라 하였다. 아들 굉림(宏臨)은 일찍 죽고, 족제(族弟) 원의(元義)가 1년간 왕위(王位)에 올랐으나 의심이 많고 포학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굉림(宏臨)의 아들 화여(華璵)를 추대하여 왕(王)으로 삼았는데, 다시 상경(上京)으로 환도(還都)하고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쳤다. [화여(華璵)가] 죽으니, 시호는 성왕(成王)이다.

 

10)○ 흠무(欽茂)의 작은 아들 숭린(嵩隣)이 왕위에 올라 연호를 정력(正歷)으로 고치니, 조서(詔書)를 내려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註034]을 제수(除授)하고 왕(王)을 세습시켰다.[註035] 건중(建中)(A.D.780~783; 渤海 文王 44~47)· 정원(貞元)(A.D. 785~804; 渤海 文王 49~康王10) 사이에 모두 4번 [사신(使臣)이] 왔다. [숭린(嵩隣)이] 죽으니, 시호는 강왕(康王)이다. 아들 원유(元瑜)가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덕(永德)으로 고쳤다. [원유(元瑜)가] 죽으니, 시호는 정왕(定王)이다. 아우 언의(言議)가 왕위에 올라 연호를 주작(朱雀)으로 고치고, 아울러 모든 세습제도를 전례(前例)에 따랐다. [언의(言議)가] 죽으니, 시호는 희왕(僖王)이다.

아우 명충(明忠)이 왕위에 올라 연호를 태시(太始)로 고쳤다. 1년만에 죽으니, 시호는 간왕(簡王)이다. 종부(從父) 인수(仁秀)가 왕위에 올라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치니, 그의 4대 할아버지 야발(野勃)은 [대(大)]조영(祚榮)의 아우이다. 인수(仁秀)는 자못 바다 북쪽의 여러 부(部)를 토벌하여 국토를 크게 개척한 공이 있다. 조서(詔書)를 내려 검교사공(檢校司空)을 제수(除授)하고 왕(王)을 세습시켰다. 원화(元和) 연간(A.D.806~820; 渤海 康王 12~宣王3)에 모두 16번 조헌(朝獻)하였고 장경(長慶) 연간(A.D.821~824; 渤海 宣王4~7)에 4번, 보력(寶曆) 연간(A.D.825~826; 渤海 宣王 8~9)에 2번씩 각각 조공(朝貢)하였다. 대화(大和) 4년(A.D.830; 渤海 彛震1)에 인수(仁秀)가 죽으니, 시호는 선왕(宣王)이다. 아들 신덕(新德)은 일찍 죽고, 손자 이진(彛震)이 왕위에 올라 연호를 함화(咸和)로 고쳤다. 이듬해에 조서를 내려 작위(爵位)를 세습시켜 주었다. 문종(文宗)의 시대가 끝나기까지 모두 12번 내조(來朝)하였고, 회창(會昌) 연간(A.D.841~846; 渤海 彛震 12~17)에 모두 4번을 왔다. 이진(彛震)이 죽으니, 아우 건황(虔晃)[註036]이 왕위에 올랐다. [건황(虔晃)이] 죽으니, 현석(玄錫)[註037]이 왕위에 올랐다. 함통(咸通) 연간(A.D.860~873; 渤海 虔晃3~景王4)에 3번 조헌(朝獻)하였다.

 

11)○ 처음에 그 나라의 王이 자주 학생들을 경사(京師)의 태학(太學)[註038]에 보내어 고금(古今)의 제도를 배우고 익혀 가더니,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

국토는 5경(京)· 15부(府)· 62주(州)이다.

 

숙신(肅愼)의 옛 땅[註039]으로 상경(上京)을 삼으니, [부명(府名)은] 용천부(龍泉府)이며,[註040] 용(龍)[주,州][註041]· 호(湖)[주,州]· 발(渤)[주,州][註042]의 3주(州)를 통치한다.

 

그 남부로 중경((中京)을 삼으니, [부명(府名)은] 현덕부(顯德府)이며,[註043] 노(盧)[주,州][註044]· 현(顯)[주,州][註045]· 철(鐵)[주,州][註046]· 탕(湯)[주,州][註047]· 영(榮)[주,州][註048]· 흥(興)[주,州][註049]의 6주(州)를 통치한다.

 

예맥(Ꞑ貃)의 옛 땅[註050]으로 동경(東京)을 삼으니,[부명(府名)은] 용원부(龍原府)로,[註051]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한다. 경(慶)[주,州][註052]· 염(鹽)[주,州][註053]· 목(穆)[주,州][註054]· 하(賀)[주,州][註055]의 4주(州)를 통치한다.

 

옥저(沃沮)의 옛 땅[註056]으로 남경(南京)을 삼으니, [부명(府名)은] 남해부(南海府)이며[註057] 옥(沃)[주,州][註058]· 청(晴)[주,州][註059]· 초(椒)[주,州][註060]의 3주(州)를 통치한다.

 

고려(高[구,句]麗)의 옛 땅[註061]으로 서경(西京)을 삼으니, [부명(府名)은] 압록부(鴨淥府)이며,[註062] 신(神)[주,州]· 환(桓)[주,州][註063]· 풍(豊)[주,州][註064]·정(正)[주,州][註065]의 4주(州)를 통치한다.

 

장령부(長嶺府)[註066]는 하(瑕)[주,州][註067]· 하(河)[주,州][註068]의 2주(州)를 통치한다.

부여(扶餘)의 옛 땅[註069]에 둔 부여부(扶餘府)에는 늘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契丹)을 방어하는데, 부(扶)[주,州][註070]· 선(仙)[주,州][註071]의 2주(州)를 통치한다.

막힐부(鄚頡府)[註072]는 막(鄚)[주,州][註073]· 고(高)[주,州][註074]의 2(주)州를 통치한다.

읍루(挹婁)의 옛 땅에 둔 정리부(定理府)[註075]는 정(定)[주,州][註076]· 반(潘)[주,州][註077]의 2주(州)를 통치한다.

안변부(安邊府)[註078]는 안(安)[주,州]· 경(瓊)[주,州]의 2주(州)를 통치한다.

솔빈(率賓)의 옛 땅[註079]에 둔 솔빈부(率賓府)[註080] 는 화(華)[주,州][註081]· 익(益)[주,州]· 건(建)[주,州][註082]의 3주(州)를 통치한다.

불열(拂涅)의 옛 땅[註083]에 둔 동평부(東平府)[註084]는 이(伊)[주,州]·몽(蒙)[주,州]·타(沱)[주,州]· 흑(黑)[주,州]· 비(比)[주,州] 5주(州)를 통치한다.

철리(鐵利)의 옛 땅[註085]에 둔 철리부(鐵利府)[註086]는 광(廣)[주,州]· 분(汾)[주,州]·포(蒲)[주,州]· 해(海)[주,州]· 의(義)[주,州]· 귀(歸)[주,州]의 6주(州)를 통치한다.

월희(越喜)의 옛 땅[註087]에 둔 회원부(懷遠府)[註088]는 달(達)[주,州]· 월(越)[주,州]· 회(懷)[주,州]· 기(紀)[주,州]· 부(富)[주,州]· 미(美)[주,州]· 복(福)[주,州]· 사(邪)[주,州]· 지(芝)[주,州]의 9주(州)를 통치한다

안원부(安遠府)[註089]는 영(寧)[주,州]· 미(郿)[주,州]·모(慕)[주,州]· 상(常)[주,州]의 4주(州)를 통치한다.

또 영(郢)[주,州][註090]· 고(錮)[주,州][註091]· 속(涑)[주,州][註092]의 3주(州)를 독진주(獨秦州)[註093]로 삼았다.

속주(涑州)는 그 곳이 속말강(涑沫江)과 가까운데, [속말강(涑沫江)은] 이른바 속말수(粟末水)[註094]인 듯하다.

 

용원(龍原)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도(日本道)이고,[註095] 남해는 신라도(新羅道)이다.[註096] 압록(鴨湪)은 조공도(朝貢道)이고,[註097] 장령(長嶺)은 영주도(營州道)이며,[註098] 부여(扶餘)는 거란도(契丹道)이다.[註099]

 

12)○그 나라 사람들은 왕(王)을 일컬어 「가독부(可毒夫)」또는 「성왕(聖王)」 또는 「기하(基下)」라 한다. 명(命)은 「교(敎)」라 한다. 왕(王)의 아버지는 「노왕(老王)」·어머니는 「태비(太妃)」·아내는 「귀비(貴妃)」· 장자는「부왕(副王)」· 제자(諸子)는 「왕자(王子)」라 한다.

 

13)○ 관제(官制)에는 선조성(宣詔省)[註100]이 있는데, 좌상(左相)· 좌평장사(左平章事)·시중(侍中)· 좌상시(左常侍)· 간의(諫議)가 소속되어 있다.

중대성(中臺省)[註101]에는 우상(右相)· 우평장사(右平章事)· 내사(內史)· 조고사인(詔誥舍人)이 소속되어 있다.

정당성(正堂省)[註102]에는 대내상(大內相) 1명이 좌(左)· 우상(右相)의 위에 두어져 있고, 좌(左)·우사정(右司政) 각 1명이 좌(左)· 우평장사(右平章事)의 아래에 배치되어 있는데, 복사(僕射)[註103]와 비슷하다. 좌(左)· 우윤(右允)은 [좌(左)· 우(右)] 이승(二丞)[註104]과 비슷하다.

좌6사(左6司)에는 충부(忠部)[註105]· 인부(仁部)[註106]· 의부(義部)[註107]에 각각 1명의 경(卿)[註108]이 사정(司政)의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 지사(支司)인 작부(爵部)· 창부(倉部)·선부(膳部)에는 부(部)마다 낭중(郞中)과 원외(員外)가 있다.

우6사(右6司)에는 지부(智部)[註109]· 예부(禮部)[註110]· 신부(信部)[註111]와 지사(支司)인 융부(戎部)· 계부(計部)· 수부(水部)가 있는데, 경(卿)과 낭(郞)은 좌(左) [6사(司)]에 준한다. [이것은] 6관(官)과 비슷하다.

중정대(中正臺)[註112]에는 대중정(大中正) 1명이 있는데, 어사대부(御史大夫)와 비슷하며, 직위는 사정(司政)의 밑이다. 그리고 소정(少正)1명이 있다.

또 전중사(殿中寺)와 종속사(宗屬寺)를 두었는데, [사(寺)마다] 대령(大令)이 있다. 문적원(文籍院)은 감(監)을 두는데, 영(令)· 감(監) 밑에는 소령(少令)· 소감(少監)이 각각 있다.

태상사(太常寺)· 사빈사(司賓寺)· 대농사(大農寺)에는 사(寺)마다 경(卿)이 있다. 사장사(司藏寺)· 사선사(司膳寺)에는 사(寺)마다 영(令)과 승(丞)이 있다. 주자감(冑子監)에는 감장(監長)이 있다. 항백국(巷伯局)에는 상시(常侍) 등의 관원이 있다.

무관(武官)으로는 좌맹분(左猛賁)[위,衛]· 우맹분(右猛賁)[위,衛]· 태위(態衛)· 비위(羆衛)·남좌위(南左衛)· 남우위(南右衛)· 북좌위(北左衛)· 북우위(北右衛)가 있어 각각 대장군(大將軍) 1명과 장군(將軍) 1명씩을 둔다. 대개 이상과 같이 중국(中國)의 제도를 기준으로 하여 본받았다.

품계(品階)는 질(秩)로 쓰는데, 3질(秩) 이상은 자복(紫服)에 아홀(牙笏)과 금어(金魚)[註113]를 찬다. 5질(秩) 이상은 비복(緋服)에 아홀(牙笏)과 은어(銀魚)[註114]를 찬다. 6질(秩)과 7질(秩)은 여린 비의(緋依)를 입고, 8질(秩)은 녹의(綠衣)을 입는데, [홀(笏)은] 다같이 목홀(木笏)이다.

 

14)○ 그 나라가 귀중히 여기는 것은 태백산(太白山)의 토끼· 남해(南海)[註115]의 다시마·책성(柵城)[註116]의 된장[시,豉]· 부여(扶餘)의 사슴· 막힐(鄚頡)의 돼지· 솔빈(率賓)의 말·현주(顯州)의 베· 옥주(沃州)의 솜· 용주(龍州)의 명주· 위성(位城)의 철· 노성(盧城)의 벼·

미타호(湄沱湖)[註117]의 가자미이다. 과일로는 구도(九都)[註118]의 오얏과 낙유(樂游)[註119]의 배가 있다. 이밖의 풍속은 고려(高[구,句]麗)나 거란(契丹)과 대개 같다.

유주절도부(幽州節度府)[註120]와 서로 빙문(聘問)하였으나, 영(營)· 평(平)에서 경사(京師)까지는 8천리나 되는 먼 거리이므로, 그 뒤에 조공(朝貢)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사가(史家)들도 전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반부(叛附)에 대하여도 상고할 길이 없다

 

 

 

3. 찬자평(撰者評)

 

○ 찬(贊)한다.

당(唐)의 덕(德)은 크다. 하늘 밑에 살고 있는 자라면 다 신민(臣民) 노릇을 하고, 해(海)의 내외(內外)를 막론하고 당(唐)의 주현(州縣) 아닌 곳이 없어서, 드디어 천자(天子)를 높여 ‘천가한(天可汗)’[註121]이라 일컬었다. 3왕(王)[註122]이래로 이보다 더할 때가 없었다. 머나먼 오랑캐땅의 군장(君長)까지도 당(唐)의 새독(璽纛)[註123]을 받아야 나라 구실을 할 수 있고, 한번만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아도 당장에 무찌르거나 포박하여 오기 때문에 오랑캐의 보물들이 줄을 이어 조정(朝廷)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극도로 성하면 쇠하는 법이니 그 화가 안으로 옮겨져, 천보(天寶)(A.D.742~755; 渤海 文王 6~19)이후로는 중국(中國)이 깨어지고 상하여, 천자(天子)의 군대가 북으로는 황하(黃河)를 건너지 못하고 서쪽으로는 진(秦)[주,州][註124]· 빈(邠)[주,州][註125]에 그치고 말았다. 쇠퇴한 지 백년만에 멸망하고 말았으니, 이 아니 슬픈가! 그러므로 ‘자신을 다스리고 남을 다스리는 것은 성인이라야 할 수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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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