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 동이전

14.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상 상 2012. 1. 29. 19:17

14.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차 례

 

1. 고구려(高句麗)

2. 백제(百濟)

3. 신라(新羅)

4. 사신(史臣)은 말한다.

 

○ 구당서(舊唐書)[註001]

동이열전(東夷列傳)[註002]

 

1. 고려(高[구,句)]麗)[註003]

 

1) ○고려(高[구(句)]麗)[註004]는 본래 부여(扶餘)[註005]의 별종(別種)이다.[註006]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註007]에 도읍(都邑)하였으니,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註008]의 옛 땅이다.

장안(長安)[註009]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註010]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百濟)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靺鞨)[註011]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註012]

 

2) ○ 그 나라의 관제(官制)에서 가장 높은 것은 대대로(大對盧)[註013]로서, 1품(品)과 비슷한데, 국사(國事)의 전반을 총괄한다.

3년(年)에 한번씩 바꾸는데, 적격한 자라면 연한(年限)에 구애받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에 더러는 서로 공경하여 복종하지 않고,

모두 병사를 이끌고 서로 공격하여 이긴 자가 대대로(大對盧)가 된다.

왕은 다만 궁문(宮門)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제어(制禦)하지 않는다.[註014]

그 아래는 태대형(太大兄)[註015]으로서 정(正)2품(品)과 비슷하다. 대로(對盧) 이하 관직은 모두 12등급이 있다.

지방에는 60여성(城)에 주(州)· 현(縣)을 두었다. 큰 성(城)에는 녹살(傉薩)[註016] 한명을 두는데 도독(都督)과 비슷하다.

[다른] 제성(諸城)에는 도사(道使)[註017]를 두니, 자사(刺史)와 비슷하다.

그 밑에 각각 요좌(僚佐)[註018]가 있어 일을 분담하여 관장한다.

 

3) ○ 의상(衣裳)과 복식(服飾)은 왕(王)만이 5채(綵)[註019]로 된 [옷을 입을 수 있으며,

흰 비단으로 만든 관(冠)을 쓰고, 흰 가죽으로 만든 소대(小帶)를 [두르는데,] 관(冠)과 대(帶)는 모두 금(金)으로 장식한다.

벼슬이 높은 자는 푸른 비단으로 만든 관(冠)을 쓰고, 그 다음은 붉은 비단 관(冠)을 쓰는데, 새깃 두개를 꽃고,

금(金)과 은(銀)으로 장식한다.

[註020] 저고리는 통소매이고 바지는 통이 크며, 흰 가죽띠를 두르고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백성들은 갈(褐)[註021]을 입고 고깔(변,弁)[註022]을 쓰며, 부인(婦人)은 머리에 건괵(巾幗)[註023]을 쓴다. [註024]

위기(圍棊)와 투호(投壺)의 놀이를 좋아하며, 사람마다 축국(蹴鞠)[註025]에 능하다.

그릇은 변두(籩豆)[註026]· 보궤(簠簋)[註027]· 준조(罇俎)[註028]· 뇌세(罍洗)[註029]를 쓰니,

자못 기자(箕子)의 풍습이 남아 있다.[註030]

 

4) ○ 주거(住居)는 반드시 산골짜기에 있으며, 모두 모초(茅草)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고,

오직 불사(佛寺)· 신묘(神廟)[註031] 및 왕궁(王宮)· 관부(官府)만이 기와를 쓴다.

가난한 사람이 많다. 겨울철에는 모두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덮힌다.

밭농사와 누에치기는 대개 중국과 같다.

 

5) ○ 법률(法律)은 반란을 음모한 자가 있으면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횃불을 들고 서로 다투어 지지게 하여,

온 몸이 진무른 뒤에 참수(斬首)하고, 가속(家屬)은 적몰(籍沒)한다.

성(城)을 지키다가 적에게 항복한 자, 전쟁에서 패배한 자, 사람을 죽이거나 겁탈한 자는 목을 벤다.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그 물건의] 12배를 물어 주게 한다. [註032]

우마(牛馬)를 죽인 자는 노비(奴婢)로 삼는다. 대체로 법(法)을 준엄하게 적용하므로 범하는 자가 적으며,

심지어는 길가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

 

6) ○ 풍속은 음사(淫祀)가 많고, 영성신(靈星神)· 일신(日神)· 하간신(可汗神)· 기자신(箕子神)[註033]을 섬긴다.

국성(國城) 동쪽에 큰 굴이 있어[註034] 신수(神隧)[註035]라고 한다. 해마다 10월에 왕(王)이 친히 제사를 지낸다.[註036]

습속은 서적(書籍)을 매우 좋아하여, 문지기· 말먹이 따위의 [가장 미천한] 집에 이르기까지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扃堂)[註037]」이라 부른다.

자제(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책은 5경(經)[註038] 및 『사기(史記)』·『한서(漢書)』·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

손성(孫盛)의 『진춘추(晋春秋)』·『옥편(玉篇)』[註039]·『자통(字統)』·『자림(字林)』[註040]이 있다.

또 『문선(文選)』[註041]을 대단히 귀중하게 여긴다.

왕(王)은 고건무(高建武)[註042]이니, 바로 전왕(前王) 고원(高元)[註043]의 이복동생이다.

 

7) ○ 무덕(武德) 2년(A.D.619; 高句麗 榮留王 2)에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註044]

[무덕(武德)] 4년(A.D.621; 高句麗 榮留王 4)에 또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註045]

고조(高祖)는 수말(隋末)에 많은 전사(戰士)들이 그 땅에 죽어 묻힌 것[註046]을 슬피 여겨

[武德] 5년 (A.D.622; 高句麗 榮留王 5) [註047]에 건무(建武)에게 글을 내려,

“짐(朕)은 보명(寶命)을 삼가 받들어 온 세상에 군림하매, 3령(靈)에 공손히 순응하고 만국(萬國)을 편안히 포용하고 있오.

온누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다 마찬가지이니, 일월(日月)이 비치는 곳에는 모두 편안하게 하였오.

왕(王)은 일찍이 요좌(遼左)를 통섭(統攝)한 이래 대대로 번복(藩服)에 살며,

정삭(正朔)을 받아 가고자 하여 멀리서 직공(職貢)에 순종하였오.

그러므로 사자를 파견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와 성간(誠懇)을 피력하니, 짐(朕)이 매우 가상히 여기오.

바야흐로 지금은 육합(六合)이 조용하고 사해(四海)가 편안하여, 옥백(玉帛)은 이미 서로 통하고 도로(道路)는 막힌 곳이 없오.

바야흐로 친목을 펴서 길이 우호를 돈독히 하고 저마다 강역(疆域)을 보전하고 있으니, 이 어찌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오.

다만 수씨(隋氏)의 말년에 병난(兵難)이 연달아 일어나니, 싸움터마다 각기 그 백성을 잃었으며,

끝내는 골육(骨肉)이 이별하고 집안이 흩어지게 하였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원한은 깊어진 채 풀지 못하였오.

이제 두나라가 서로 통화(通和)하여, 간격이나 차이를 둘 이유가 없기에, 이곳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이미 찾아 모으게 하여

찾는대로 곧장 돌려 보내라고 명령하였오. 그곳에 가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을 왕(王)은 석방하여 돌려 보내되,

아무쪼록 무육(撫育)의 방법을 다하여 함께 인서(仁恕)의 도리를 넓혀 가도록 하시오.”하였다.

이에 건무(建武)가 화인(華人)을 모두 찾아 모아 예우(禮遇)를 하여 보내 왔는데, 전후(前後)에 걸쳐 돌아 온 자가 1만명에 이르자, 고조(高祖)는 크게 기뻐하였다.

 

8) ○ [무덕(武德)] 7년(A.D.624; 高句麗 榮留王 7)[註048]에 전 형부상서(前刑部尙書) 심숙안(沈叔安)을 보내어

건무(建武)를 상주국(上柱國) 요동군왕(遼東郡王) 고려왕(高麗王)에 책봉하고,[註049]

아울러 천존상(天尊像) 및 도사(道士)를 대동하고 가서 『노자(老子)』를 강의하도록 하였다.

왕(王) 및 도가(道家)· 속인(俗人) 등 보고 듣는 자가 수천명이나 되었다.

고조(高祖)는 일찍이 시신(侍臣)에게,

“명분과 실제의 사이에는 모름지기 이치가 서로 부응하여야 되는 법이다.

고려(高[구(句)]麗)가 수(隋)에 칭신(稱臣)하였으나 마침내 양제(爆帝)에게 거역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신하이겠는가 !

짐(朕)은 만물(萬物) 중에 공경받으나 교귀(驕貴)를 피우고 싶지는 않고, 다만 살고 있는 영토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함께 힘쓸 뿐이지 무엇때문에 반드시 칭신(稱臣)하도록 하여 스스로 존대(尊大)함을 자처하여야 되겠는가.

즉시 짐(朕)의 이 심정을 조술(詔述)하라.” 하였다.

 

시중(侍中) 배구(裴矩)와 중서시랑(中書侍郎) 온언박(溫彦博)이,

“요동(遼東)의 땅은 주대(周代)의 기자국(箕子國)이요, 한대(漢代)의 현도군(玄莬郡)[註050]입니다.

위(魏)· 진(晋) 이전까지는 봉역(封域)안에 가까이 있었으니,[註051] 칭신(稱臣)하지 않는 것을 허락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또 중국(中國)에 있어서 이적(夷狄)이란 태양(太陽)에 있어서의 열성(列星)과 같으므로, 이치상 존(尊)을 격하시켜서

번국(藩國)과 같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조(高祖)는 그만 두었다.

 

9) ○ [무덕(武德)] 9년(A.D.626; 高句麗 榮留王 9)에 신라(新羅)와 백제(百濟)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건무(建武)를 탓하기를

[그 나라가] 길을 막아서 입조(入朝)를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註052] 또한 서로 틈이 생겨서 여러 차례 싸웠다고 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郎) 주자사(朱子奢)를 보내어 화해시켰다.[註053]

건무(建武)가 표문(表文)을 올려 사죄(謝罪)하면서 신라(新羅)의 사신(使臣)과 대좌(對坐)시켜 [신라(新羅)와] 회맹(會盟)할 것을

청하였다.

 

10) ○ [정관(貞觀)] 2년(A.D.628; 高句麗 榮留王 11)에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註054]을 무너뜨리니,

건무(建武)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축하하고 아울러 봉역도(封域圖)를 올렸다.[註055]

[정관(貞觀)] 5년(A.D.631; 高句麗 榮留王 14)에 광주도독부(廣州都督府) 사마(司馬) 장손사(長孫師)를 보내어

수대(隋代)에 전망(戰亡)한 해골(骸骨)을 거두어 묻어 주고,

고려(高[구(句)]麗)가 세워 놓은 경관(京觀)[註056]을 헐어버리게 하였다.[註057]

건무(建武)는 그 나라가 침입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는데,[註058]

동북으로 부여성(扶餘城)[註059]에서 서남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1천여리에 이르렀다.

 

[정관(貞觀)] 14년(A.D.640; 高句麗 榮留王 23)에 태자(太子) 환권(桓權)을 보내와 조근(朝覲)하고[註060]

아울러 방물(方物)을 바치니 태종(太宗)이 극진히 치하하였다.

 

11) ○ [정관(貞觀)] 16년(A.D.642; 高句麗 寶藏王 1)에 서부(西部)[註061] 대인(大人)[註062] 개소문(蓋蘇文)[註063]이

섭직(攝職)하여 [왕(王)을] 범하려 하자,[註064] 여러 대신(大臣)들이 건무(建武)와 의논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일이 [사전에] 누설되자, 이에 소문(蘇文)은 부병(部兵)을 모두 불러 모아 군병(軍兵)을 사열한다고 말하고,

아울러 성(城)의 남(南)쪽에다 주찬(酒饌)을 성대히 베풀어 놓았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모두 와서 보게 되었는데,

소문(蘇文)이 군사를 정비하여 대신(大臣)을 모조리 죽이니, 죽은 자가 백여명이나 되었다.

이어서 창고를 불사르고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建武)를 죽인 다음,[註065]

건무(建武)의 아우인 대양(大陽)의 아들 장(藏)[註066]을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

스스로 막리지(莫難支)[註067]가 되니, [이는] 중국(中國)의 병부상서(兵部尙書) 겸(兼) 중서령(中書令)에 해당하는 직(職)이다.

이로부터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소문(蘇文)의 성(姓)은 천씨(泉氏)이며, 수염과 얼굴이 매우 준수하고, 형체(形體)가 아주 걸출하였다.

몸에는 다섯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는데,[註069] 주위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언제나 그의 관속(官屬)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이를 밟고 말에 타며, 말에서 내릴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외출(外出)할 적에는 반드시 의장대(儀仗隊)를 앞세우고, 선도자(先導者)가 큰 소리로 행인(行人)을 피제(辟除)하는데,

백성들은 두려워 피하여 모두 스스로 갱곡(坑谷)으로 뛰어 들었다.

태종(太宗)은 건무(建武)의 죽음을 듣고 거애(擧哀)하였다. 사신(使臣)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어] 조제(弔祭)하였다.[註070]

 

12) ○ [정관(貞觀)] 17년(A.D.643; 高句麗 寶藏王 2)에 그 사왕(嗣王) 장(藏)을 책봉(册封)하여 요동군왕(遼東郡王)

고려왕(高[구,句]麗王)으로 삼았다.[註071] 또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어 새서(璽書)를 가지고 가서

고려(高[구,句]麗)를 설득하여 신라(新羅)를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註072]

개소문(蓋蘇文)이 현장(玄奬)에게 말하기를,

“고려(高[구,句]麗)와 신라(新羅)는 원수를 맺은 지가 이미 오래다.

지난날 수(隋)와 서로 싸울 적에 신라(新羅)는 그 틈을 타서 고려(高[구,句]麗) 땅 5백리를 빼앗고,

성읍(城邑)도 신라가 모두 차지하였다.[註073] 스스로 그 땅과 성(城)들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번의 싸움을 그만둘 수 없다.”라고

하였다. 현장(玄奬)이,“이미 지나간 일을 추론(追論)해서야 되겠는가?” 하였으나, 소문(蘇文)은 끝내 듣지 않았다.[註074]

이에 태종(太宗)은 시신(侍臣)들을 돌아보며

“막리지(莫離支)는 그의 군주(君主)를 시해하고 대신(大臣)을 다 죽였으며,

용형(用刑)이 함정과 같아서 백성을 움직이는대로 죽이므로, 원한이 가슴에 사무치어 길가에서도 눈짓을 한다.

무릇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친다는 것은 모름지기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임금을 시해하고 아랫사람을 학살한 구실을 내세운다면 무너뜨리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13) ○ [정관(貞觀)] 19년(A.D.645; 高句麗 寶藏王 4)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註075]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장군(將軍) 상하(常何) 등과 강(江)· 회(淮)· 영(嶺)· 협(硤)의 강한 군사

4만명· 전선(戰船) 5백척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平壤)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특진(特進)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註076]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예부상서(禮部尙書)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註077]을 부총관(副總管)으로 삼아서 장군(將軍) 장사귀(張士貴) 등과

보병(步兵)· 기병(騎兵) 6만을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나아가게 했다.[註078]

양군(兩軍)이 합세하도록 한 다음, 태종(太宗)은 친히 6군(軍)[註079]을 거느리고 가서 [전군을] 합류하기로 했다.[註080]

 

14) ○ [정관(貞觀) 19년(645)]여름 4월에 이적(李勣)의 군대가 요하(遼河)를 건너서[註081] 개모성(蓋牟城)[註082]으로 진격하여

성(城)을 빼앗고, 포로 2만명을 생포하였다.[註083] 그 성(城)에 개주(蓋州)를 설치하였다.

5월에는 장량(張亮)의 부장(副將) 정명진(程名振)이 사비성(沙卑城)[註084]을 공격하여 빼앗고,[註085] 남녀 8천명을 생포하였다.

이날 이적(李勣)의 군대가 요동성(遼東城)으로 진군하였다,

태종(太宗)은 요택(遼澤)에 이르러,[註086] “지난날 수(隋)의 군사가 요하(遼河)를 건널 적에 때를 잘못 타서,

종군한 사졸(士卒)들의 해골(骸骨)이 온 산야(山野)에 널렸으니,[註087] 참으로 슬프고 한심하다.

해골을 덮어주는 의리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니, [그들의 해골을] 거두어 묻도록 하라.”는 조서(詔晝)를 내렸다.

국내성(國內城)[註088]과 신성(新城)[註089]의 보병(步兵)· 기병(騎兵) 4만명이 요동(遼東)[성(城)]을 구원하러 나오는 것을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기병(騎兵) 4천명을 이끌고 역격(逆擊)하여 크게 무찌르고, 천여급(千餘級)의 목을 베었다.

 

15) ○ 태종(太宗)은 요수(遼水)를 건너자, 조서(詔書)를 내려 교량(橋梁)을 철거하게 하여 사졸(士卒)의 결의를 굳게 하였다.

태종(太宗)은 요동성(遼東城) 아래에 이르러서는[註091] 사졸(士卒)들이 짐을 지어다 구덩이를 메우는 것을 보았다.

태종(太宗)이 가장 무거워 보이는 짐을 나누어 친히 말 위에서 나르니, 따르던 관원들이 모두 송구스러워 허둥대며 앞을 다투어

[짐을] 날라서 성 밑으로 보냈다. 이 때 이적(李勣)은 이미 군사를 이끌고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고 있었다.

고려(高(구,句)麗)는 우리에게 포차(抛車)가 있어 3백근(百觔)의 돌을 1리 밖까지 날린다는 소문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성 위에 나무를 쌓아 전루(戰樓)를 만들어 날아드는 돌을 막았다. [이(李)]적(勣)이 포차(抛車)를 벌려 놓고 돌을 쏘아 성(城)을

공격하니, (돌에) 맞은 곳은 다 무너졌다. 또 당차(撞車)로 밀어 누각을 때려 부수니, 내려 앉지 않는 누각이 없었다.

 

16) ○ 태종(太宗)은 친히 갑기(甲騎) 1만여명을 거느리고 이적(李勣)과 합세하여 그 성(城)을 포위하였다.

조금 뒤 남풍이 강하게 불어오자, 서남쪽 누각에 불을 놓으라고 명하였다. 불길이 연이어 성중(城中)을 휩쓰니, 집들이 다 타버렸다.

전사(戰士)들이 성(城)에 오르자, 적(賊)은 크게 무너져 불에 타죽은 자가 1만여명이며, 포로가 된 정예병이 1만여 명이다.[註092]

그 성(城)에 요주(遼州)[註093]를 설치하였다.

당초 태종(太宗)은 정주(定州)에서부터 요성(遼[동(東)]城)까지 수십리마다 봉화(烽火)를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태자(太子)와 약속하기를, 요동(遼東)을 정복하면 봉화(烽火)를 들기로 하였다 이날 태종(太宗)은 봉화(烽火)를 들게 하여

새(塞) 안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진영을 백애성(白崖城)[註094]에 베풀고 성(城)의 공격을 명하였다.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이사마(李思摩)가 노시(弩矢)를 맞자, 태종(太宗)은 친히 피를 빨아 주었다.

장사(將士)들이 이를 듣고 감동하여 힘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성(城)은 산을 등지고 물가에 바짝 닿아 있는 데다

사면이 험하고 가파랐다. 이적(李勣)이 당차(撞車)로 때려 부수니, 돌과 화살이 성중(城中)에서 빗발치듯 쏟아졌다.

 

17) ○ [정관(貞觀) 19년(645)]6월에 태종(太宗)이 성(城)의 서북쪽으로 나아가니,

성주(城主) 손벌음(孫伐音)이 몰래 밀사(密使)를 보내어 항복을 청하면서,

“신(臣)은 벌써부터 항복을 원하였으나, 이 가운데 반대하는 자가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조서(詔書)하여 기치(旗幟)를 내려 주며, “반드시 항복을 하겠다면, 이 기를 성(城) 위에 꽂으라.” 하였다.

[손(孫)]벌음(伐音)이 성(城) 위에 기치(旗幟)를 꽂자, 고려(高[구,句]麗)는 당병(唐兵)이 [이미 성(城)에] 올라온 것으로 여기고, 모두 항복하였다. 당초 요동(遼東)[성(城)]이 함락될 적에 벌음(伐音)이 항복을 빌고 나서 다시 후회를 하자,

태종(太宗)은 그의 반복(反覆)에 분노하여 성(城)안의 사람과 물건을 전사(戰士)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다가 손벌음(孫伐音)이 다시 항복하려 하여 이를 취소하니,] 이 때 이적(李勣)은 태종(太宗)에게,

“전사(戰士)들이 시석(矢石)을 돌아보지 않고 힘을 다해 앞을 다투어 싸우는 것은 노획물을 탐내서입니다.

이제 성(城)이 막 함락되려 하는데 어찌하여 다시 항복을 허락하여 장사(將士)들의 뜻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태종(太宗)은 말하기를, “장군(將軍)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살육(殺戮)을 자행하고, 그들의 처노(妻孥)를 사로잡는 일을

짐(朕)은 차마 못하겠다. 장군(將軍)의 휘하(麾下)에 공(功)이 있는 자에게는 짐(朕)이 [내탕(內帑)]고(庫)의 물품으로 상을 주고, 장군(將軍)에게서 이 성(城) 하나를 살까 한다.”하였다. 마침내 항복을 받아 사녀(士女) 1만명과 군사 2천 4백명을 노획하였다.

그 성(城)에 암주(巖州)를 설치하고, 손벌음(孫伐音)을 암주자사(巖州刺史)에 제수(除授)하였다.

우리 군대가 요하(遼河)를 건널 적에 막리지(莫離支)는 가시성(加尸城)의 사람 7백명을 보내어 개모성(蓋牟城)을 지키게 하였다.

이적(李勣)이 모두 사로잡자, 그들은 함께 종군(從軍)하여 충성(忠誠)을 다하겠다고 청하였다.

태종(太宗)은, “누가 너희들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마는 너희들의 집은 모두 가시(加尸)에 있으니, 너희가 우리를 위하여

싸운다면 저들이 [너희의 집안을] 도륙하고 말 것이다. 한 집안의 처자(妻子)를 죽여가면서 한사람의 힘을 이용하는 것을 나는 차마

못하겠노라.” 하고, 모두 놓아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18) ○ 거가(車駕)가 안시성(安市城)[註095] 북쪽으로 진주하여[註096] 진영(陣營)을 벌려 놓고 군사를 내보내 성(城)을 공격하였다.

고려(高[구,句]麗)의 북부녹살(北部傉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누살(南部耨薩) 고혜정(高惠貞)[註097]이 고려(高[구,句]麗)·

말갈(靺鞨)의 무리 15만명을 이끌고 와서 안시성(安市城)을 구원하였다.

적(賊) 가운데 연로(年老)하고 경험이 많은 대로(對盧)[註098]가 있어 연수(延壽)에게,

“내가 듣건대, 중국(中國)이 크게 어지러우면 영웅(英雄)이 병기(並起)한다고 한다.

진왕(秦王)[註099]은 무덕(武德)이 뛰어나서 이르는 곳마다 상대할 적이 없으므로, 마침내 천하(天下)를 평정하고 황제의 자리에

군림하니, 북이(北夷)가 항복을 청하고 서융(西戎)이 충성을 바쳤다. 오늘날 국력(國力)을 기울여 와서 맹장(猛將)과 예졸(銳卒)이

다 이곳에 몰려 있으니, 그 예봉(銳鋒)은 당해낼 수가 없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싸움을 하지 말고 군사를 돈좌시켜 지구전으로

날짜를 끄는 한편, 날쌔고 용감한 장병(將兵)을 뽑아 보내어 그들의 양도(糧道)를 차단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열흘이 못되어 반드시 군량(軍糧)이 떨어져 싸우려 하여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고자 하여도 길이 없게 되므로,

이것은 싸우지 않고도 승리를 거두는 길이 된다.” 하였으나, 연수(延壽)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장 진격하였다.

 

19) ○ 태종(太宗)은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몸소 지휘를 하였다. 이적(李勣)을 보내 보병(步兵)·기병(騎兵) 1만 5천명을

거느리고 성(城) 서쪽 산고개에 진을 치게 하였다. 장손무기(長孫無忌)[註100]는 우진달(牛進達) 등 정병(精兵) 1만 1천명을

거느리고 기병(奇兵)으로 만들어 산(山)의 북쪽에서 협곡(狹谷)으로 나와 그 뒤를 공격하게 하였다.

태종(太宗) 자신은 보병(步兵)· 기병(騎兵) 4천명을 거느리고 고각(鼓角)을 숨기고 정기(旌旗)를 눕힌채 적의 진영 북쪽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기로 하였다. 제군(諸軍)에 명하여 고각(鼓角)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돌격을 하도록 하였다. 이어 해당 관부로

하여금 조당(朝堂)[註101] 곁에 수항막(受降幕)을 치게 하고, “내일 오시(午時)에 이곳에서 오랑캐의 항복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였다.

 

20) ○ 이튿날 연수(延壽)가 이적(李勣)의 군사만 보고 출전하려 하였다. 태종(太宗)은 멀리 무기(無忌)의 군사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바라보고, 고각(鼓角)을 동시에 울리고 기치(旗幟)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적의 무리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그 진영은 이미 어지러워졌다. [이때] 이적(李勣)이 보병 1만명에게 장창(長槍)을 들려 공격하니,

연수(延壽)의 무리들은 패전하였다. 무기(無忌)가 군사를 놓아 그 후미를 치고, 태종(太宗)이 또 산에서 내려와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치자, 적들은 크게 무너져 참수(斬首)가 만여급(萬餘級) 이나 되었다.

연수(延壽)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굳게 지켰다. 이에 무기(無忌)·적(勣)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포위하게

하고, 동천(東川)의 다리를 철거하여 귀로(歸路)를 차단하였다. 태종(太宗)은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 적의 영루(營壘)를 보면서

시신(侍臣)에게,“고려(高[구,句]麗)가 나라를 기울여서 온 것은 존망(存亡)이 달려 있어서인데, [대장기(大將旗)를] 한번 흔들자

패전하고 말았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이다.”하였다. 이어 말에서 내려 하늘에 두번 절하며 사례하였다.

 

21) ○ 연수(延壽)와 혜진(惠眞)이 15만 6천 8백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해 오자,[註102]

태종(太宗)은 원문(轅門)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연수(延壽) 등은 무릎으로 기어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명(命)을 청하였다.

태종(太宗)은 녹살(傉薩) 이하 추장(酋長) 3천 5백명을 가려내어 군직(軍職)을 주어서 내지(內地)로 옮겼다.

말갈(靺鞨)사람 3천 3백명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註103] 나머지 무리들은 평양(平壤)으로 돌려 보냈다.

노획물은 말이 3만필, 소가 5만두, 명광갑(明光甲)이 5천벌이고, 기타의 기계(器械)들도 이에 맞먹었다.

고려국(高[구(句)]麗國)이 크게 놀라서 후황성(后黃城) 및 은성(銀城)[註104]이 저절로 함락되니, 수 백리에 인가(人家)의 연기가

끊겼다. 이어서 거동하였던 산을 주필산(駐蹕山)[註105] 이라 이름하고, 장군(將軍)으로 하여금 파진도(破陳圖)를 작성하게 하고,

중서시랑(中書侍郞) 허경종(許敬宗)에게 명(命)하여 글을 지어 돌에 새겨 그 공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고연수(高廷壽)에게는 홍려경(鴻臚卿)을, 고혜진(高惠眞)에게는 사농경(司農卿)을 제수(除授)하였다. 장량(張亮)이 다시 고려(高(구,句)麗)와 건안성(建安城)[註106] 밑에서 싸워 성(城)을 다 함락시키니, 이때는 포위를 길게 늘여서 공격하였다.

 

22) ○ [貞觀 19년(645)]8월에 안시성(安市城) 동쪽으로 진영(陣營)을 옮겨 이적(李勣)이 드디어 안시(安市)를 공격하였는데,[註107] 연수(延壽) 등 항복한 무리를 옹위하여 성 밑에 진(陣)을 치고 그들을 불러내었다. 성(城)안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굳게

지키며, 태종(太宗)의 깃발을 볼 때마다 반드시 성(城)에 올라가 북치고 소리지르며 저항하였다.

태종(太宗)이 [이를 보고] 매우 노여워하자, 이적(李勣)은, “[성(城)을] 함락하는 날에 남자는 다 죽여 버리기 바랍니다.” 하였다.

성(城)안에서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이에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을 시켜 토산(土山)을 쌓아

성(城)의 동남쪽 모퉁이를 공격하였다. 고려(高[구(句)]麗)도 비성(埤城)에다 치첩(雉堞)을 증설하여 저항하였다.

이적(李勣)이 그 서쪽을 공격하여 포석(抛石)과 당차(撞車)로 성루(城樓)와 치첩(雉堞)을 무너뜨렸다.

성(城)에서는 그것이 무너지는대로 곧 목책(木柵)을 세웠다.

도종(道宗)이 나뭇가지로 흙덩이를 쌓아 올려 토산(土山)을 만들고, 그 중간에 다섯갈래의 길을 내어 나무를 걸치고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밤낮을 쉬지 않으며 [쌓아] 점점 성(城)으로 육박하였다. 도종(道宗)은 과의도위(果毅都尉) 부복애(傅伏愛)를 보내어 대병(隊兵)을 거느리고 산정(山頂)에서 적을 방어하게 하였는데, 토산(土山)이 자연 높아져서 그 성(城)을 밀어내니 성(城)이 무너졌다. 마침 복애(伏愛)가 사사로이 소관 부서를 떠나 있었으므로, 고려(高[구,句]麗) 군사 1백명이 무너진 성(城) 틈으로 싸움을 벌였다. 드디어 토산(土山)을 점거하여 참호를 파서 [길을] 끊은 다음, 불을 놓고 방패를 들러쳐서 방어를 굳혔다.

이에 태종(太宗)은 크게 노하여 복애(伏愛)의 목을 베어 [전군에] 돌렸다. 모든 장수들에게 명하여 성(城)을 쳐부수게 하였으나,

사흘동안 싸워도 이기지 못하였다.

 

23) ○ 태종(太宗)은 요동(遼東)의 창고에 군량(軍糧)이 거의 바닥이 나고, 사졸(士卒)들이 추위와 동상에 시달리자,

이에 반사(班師)를 명하였다. 그 성(城)을 지날 때 성(城)안에서는 일제히 소리를 죽이고 깃발을 눕혔으며, 성주(城主)[註108]는

성(城)위에 올라와 손을 모아 절을 하며 하직하였다. 태종(太宗)은 그들이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백필을 내려

주고, 임금을 섬기는 절의를 격려하였다.[註109]

이전에 요동(遼東)을 함락할 때에, 왕사(王師)에 저항하다가 잡혀 노비(奴婢)로 몰입(沒入)하게 된 1만 4천명을 모두 먼저

유주(幽州)로 보내어, 장차 장사(將士)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기로 하였었다. 태종(太宗)은 그들이 부모·처자(妻子)와 하루아침에

분산되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해당 부서로 하여금 그 값에 준하는 포백(布帛)을 속(贖)으로 받고 용서하여 백성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그들의 환호소리가 사흘동안 끊이지 않았다 고연수(高廷壽)는 항복한 뒤로부터 늘 한탄만 하다가 곧 죽었다.

혜진(惠眞)은 마침내 장안(長安)에 왔다.[註110]

 

24) ○ [정관(貞觀)] 20년(A.D.646: 高句麗 寶藏王 5)에 고려(高[구,句]麗)가 사신(使臣)을 보내와 사죄(謝罪)를 하고,

아울러 두 미녀(美女)를 바쳤다. 태종(太宗)은 그 사신(使臣)에게,“돌아가서 너의 군주(君主)에게 일러라. 미색(美色)이란

사람이 중하게 여기는 것이며, 너희가 바친 [미인(美人)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부모와 형제를 본국에 두고 온 것이 불쌍하고,

그의 몸을 머물러 두어 그의 어버이를 잊게 하고, 그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내가 하지 않으리라.”

하고 함께 돌려 보냈다.[註111]

 

25) ○ [정관(貞觀)] 22년(A.D.648; 高句麗 寶藏王 7)[註112]에 또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설만철(薜萬徹)[註113] 등을 보내어

청구도(靑丘道)[註114]로 가서 치게하니, 만철(萬徹)은 바다를 건너 압록수(鴨綠水)로 들어가서 박작성(泊灼城)[註115]을 함락하고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다. 태종(太宗)은 또 강남(江南)[註116]에 명(命)하여 큰 배를 건조하게 하는 한편, 합주자사(陜州刺史) 손복가

(孫伏伽)[註117]를 보내어 용감한 병사(兵士)를 모집시키고, 협주자사(莢州刺史) 이도유(李道裕)를 보내어 군량(軍糧) 및 기계(器械)

를 운반하여 오호도(烏胡島)[註118]에 쌓아두게 하는 등 장차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고려(高[구,句]麗)를 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시행하지 못하고, 태종(太宗)은 죽었다.

고종(高宗)이 위(位)를 이어받아서 또 병부상서(兵部尙書) 임아상(任雅相)·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註119]·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註120] 등에게 명하여 전후(前後)로 [보내어] 토벌케 하였으나,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註121]

 

26) ○ 건봉(乾封) 원년(A.D.666; 高句麗 寶藏王 25)에 고장(高藏)이 그의 아들을 보내와 입조(入朝)하여,

태산(太山) 밑에서의 [봉선(封禪)에] 배석(陪席)하였다.[註122]

이 해에 개소문(蓋蘇文)이 죽고,[註123] 그의 아들 남생(男生)[註124]이 대신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註125]

그의 아우 남건(男建)[註126]·남산(男産)[註127]과 화목하지 못하여 각자 붕당(朋黨)을 만들어 서로 공격하였다. 남생(男生)이

두 아우에게 쫓겨 달아나 국내성(國內城)에 웅거하여 [성(城)을] 사수(死守)하면서, 아들 헌성(獻誠)[註128]을 보내와 궁궐(宮闕)에

이르러 구원을 요청하였다.[註129] 조서(詔書)를 내려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응접(應接)케 하였다.[註130] 남생(男生)이 [국내성(國內城)에서] 몸을 빼 도망오자, 조서(詔書)를 내려 특진(特進)

요동대도독(遼東大都督) 겸(兼) 평양도안무대사平壤道安撫大使)를 제수(除授)하고, 현도군공(玄莬郡公)에 봉(封)하였다.

11월에 사공(司空)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에 임명하고 비장(裨將) 곽대봉(郭待封) 등을 거느리고 가서 고려(高[구,句]麗)를 정벌케 하였다.[註131]

 

27) ○ [건봉(乾封)]2년(A.D.667; 高句麗 寶藏王 26) 2월[註132]에 적(勣)은 요하(遼河)를 건너 신성(新城)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신성(新城)은 고려(高(구,句)麗) 서경(西境)의 진성(鎭城)으로서 가장 요해처(要害處)이다.

만약 [이 성(城)을] 먼저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나머지의 성(城)도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신성(新城) 서남쪽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산에 의지해서 책(柵)을 쌓아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하니,

성(城)안이 군박(窘迫)하여져서 항복하는 자가 자주 나왔다. 이로부터 이르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註133]

고장(高藏)과 남건(男建)이 태대형(太大兄) 남산(男産)을 보내어 수령(首領) 98명을 이끌고 백기를 들고 나아가 항복하게 하고

아울러 입조(入朝)를 청하였다. 이적(李勣)은 예(禮)를 갖추어 영접하였다.

그러나 남건(男建)은 오히려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註134]

 

28) ○ 총장(總章) 원년(A.D.668; 高句王 寶藏王 27) 9월에 [이(李)]적(勣)이 또 평양성(平壤城) 남쪽으로 진영을 옮기니,

남건(男建)이 자주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대패하였다. 남건(男建)의 밑에서 병사(兵事)를 총관(總管)하던

승(僧) 신성(信誠)이 비밀리 군중(軍中)으로 사람을 보내어, 성문(城門)을 열고 내응(內應)하겠다고 하였다.

5일이 지나서 신성(信誠)이 과연 성문을 열었다. [이(李))]적(勣)이 군사를 놓아 들여보내 성 위에 올라가서 북을 요란하게

두들기고, 성(城)의 문루에 불을 지르니 사면에서 불길이 일었다. 이에 남건(男建)은 다급한 나머지 스스로 몸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11월에 평양성(平壤城)을 함락시키고,[註135] 고장(高藏)· 남건(男建) 등을 사로잡았다.

12월에 경사(京師)에 이르러 함원궁(含元宮)[註136]에서 헌부(獻俘)[註137]를 하였다.

조서를 내려 고장(高藏)은 정사를 제 주관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여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註138]을 제수하였다.

남산(男産)은 남보다 먼저 항복하였다 하여 사재소경(司宰少卿)[註139]을 제수하였다. 남건(男建)은 검주(黔州)[註140]로 유배(流配)

시켰다. 남생(男生)은 향도(鄕導)한 공이 있다 하여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을 제수하고, 변국공(汴國公)에 봉하였으며, 특진(特進)

은 옛날과 같이 인정하였다.

고려국(高(구,句)麗國)은 지난 날에 5부(部)로 나뉘어져 1백 76성(城)· 69만 7천호(戶)가 있었다.

이에 그 땅을 나누어 9도독부(都督府)[註141]· 42주(州)· 1백현(百縣)으로 하고,

[註142] 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註143]를 두어 통관(統管)케 하였다.

추장(酋長)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뽑아 도독(都督)· 자사(刺史) 및 현령(縣令)을 제수하여 화인(華人)과 함께 백성을

참리(參理)하게 하였다. 이어서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설인귀(薜仁貴)를 보내어 군사를 통괄하고, 진무(鎭撫)케 하였다.[註144]

그 뒤에 흩어져 도망간 자가 상당히 있었다.

 

29) ○ 의봉(儀鳳) 연간(A.D.676∼678; 新羅 文武王 16∼18)에 고종(高宗)은 고장(高藏)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요동제독(遼東都督)을 제수(除授)하고 조선왕(朝鮮王)에 봉하여, 안동(安東)에서 살며 본번(本蕃)을 진무하는 주(主)로 삼았다.[註

145] 고장(高藏)은 안동(安東)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靺鞨)과 서로 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일이 [사전에] 발각되자, 소환하여 공주(邛州)[註146]로 유배(流配)시켰다.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河南)[註147]·농우(隴右)[註148]

의 여러 州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약(貧弱)한 자는 안동성(安東城)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고장(高藏)이 영순(永淳)(A.D.682; 新羅 神文王 2)초에 졸(卒)하자 위위경(衛尉卿)에 추증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경사(京師)로 운구케 하여 힐리(頡利)의 묘 좌측에 장지(葬地)를 하사하고, 비(碑)도 세워 주었다.

수공(垂拱) 2년(A.D.686; 新羅 神文王 6)에 또 고장(高藏)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봉(封)하였다.

 

30) ○ 성력(聖曆) 원년(A.D.698; 新羅 孝昭王 7)에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에 진수(進授)시키고, 충성국왕(忠誠國王)에

봉(封)하였다. 안동(安東)의 구호(舊戶)를 맡겨 통섭(統攝)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註149]

[성력(聖曆)] 2년(A.D.699; 新羅 孝昭王 8)에는 또 고장(高藏)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安東都督)[註150]에 제수하여

본번(本蕃)을 통솔하게 하였다.[註151] 이로부터 안동(安東)에 있는 고려(高[구,句]麗)의 구호(舊戶)가 점차 줄어들어

돌궐(突厥)· 말갈(靺鞨) 등에게로 흩어지자,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남생(男生)이 의봉(儀鳳)(A.D.676~678; 新羅 文武王 16~18)초에 장안(長安)에서 죽으니,[註152] 병주대도독(幷州大都督)에

추증하였다.[註153] 아들 헌성(獻誠)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제수(除授)하고, 우림위상하(羽林衞上下)[註154]를 겸임시켰다.

 

31) ○ 천수(天授) 연간(A.D.690~691; 新羅 神文王 10~11)에 측천(則天)[무후(武后)]는 일찍이 금(金)· 은(銀)· 보물(寶物)을

내어 놓고 재상(宰相) 및 남북위문(南北衛門)의 문무관원(文武官員)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사람 다섯명을 가려 내어 내기를 시켰다.

내사(內史) 장광보(張光輔)가 먼저 헌성(獻誠)에게 1등(等)을 양보하자, 헌성(獻誠)은 다시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벽토마지(薜吐摩支)에게 양보하였다. 마지(摩支)가 또 헌성(獻誠)에게 양보하니, 이에 헌성(獻誠)이 아뢰기를,

“폐하(陛下)께서 활을 잘 쏘는 사람 5인을 뽑으라고 하셔서 뽑힌 사람은 대부분 한관(漢官) 출신이 아닙니다. 신(臣)은 이 뒤로부터

한관(漢官)은 활을 잘 쏜다는 명예가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번의 활쏘기는 그만두옵소서.” 하였다.

측천(則天)이 가상히 여겨서 그대로 따랐다.[註155] 당시의 혹리(酷吏) 내준신(來俊臣)이 일찍이 헌성(獻誠)에게 재물을 요구하였는데, 헌성(獻誠)이 거절하여 답(答)을 아니한 적이 있었다. 드디어 준신(俊臣)의 원한을 사게 되어 모반(謀反)했다고 무고하므로,

목졸라 죽였다.[註156] 뒤에 측천(則天)은 그의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에 추증하고 예(禮)를 갖추어 개장(改葬)하였다.[註157]

 

 

 

2. 백제(百濟)[註001]

 

1) ○백제국(百濟國)도 본래는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이다.[註002] 일찍이 마한(馬韓)의 옛 땅[註003]으로서

경사(京師)[註004]에서 동으로 6,200리 밖에 있으며, 대해(大海)의 북쪽, 소해(小海)의 남쪽에 위치한다.[註005]

동북으로는 신라(新羅)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註006]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려(高[구,句]麗)에 이른다. 또 왕(王)이 사는 곳에는 동· 서로 두 성(城)이 있다.

[註007]

 

2)○ [그 나라에] 설치된 내관(內官)[註008]으로 내관좌평(內臣佐平)은 왕명출납(王命出納)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註009]

내두좌평(內頭佐平)은 고장(庫藏)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내법좌평(內法佐平)은 예의(禮儀)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위사좌평(衛士佐平)은 숙위군(宿衛軍)의 일을 맡아 보고, 조정좌평(朝廷佐平)은 형옥(刑獄)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병관좌평(兵官佐平)은 재외(在外)의 병마(兵馬)에 관한 일을 맡아 본다.

또 외관(外官)으로는 6대방(帶方)을 두어 10군(郡)을 총관(總管)케 하였다.[註010]

그 형법(刑法)을 적용함에 반역(叛逆)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적몰(籍沒)한다. 살인한 자는 노비(奴婢) 세명으로써 속죄(贖罪)케

한다. 관인(官人)으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한 자는 [그 물건의] 3배를 추징하고, 이어서 종신(終身)토록 금고(禁錮)에 처한다.

[註011] 모든 부세(賦稅) 및 풍토(風土)의 물산(物産)은 대개 고려(高[구,句]麗)와 같다.

그 나라의 왕(王)은 소매가 큰 자주색 도포에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오라관(烏羅冠)에 금화(金花)로 장식하며, 흰 가죽띠에 까만 가죽신을 신는다. 관인(官人)들은 다 비색(緋色) 옷을 입고 은화(銀花)로 관(冠)을 장식한다. 서인(庶人)들은 비색(緋色)이나 자주색

계통의 옷을 입을 수 없다.[註012] 세시(歲時)와 절기(節氣)는 중국(中國)과 같다. 서적(書籍)으로는 5경(經)과 제자서(諸子書) 및

사서(史書)가 있으며, 또 표(表)· 소(疏)의 글도 중화(中華)의 법(法)에 의거한다.[註013]

 

3)○ 무덕(武德) 4년(A.D.621; 百濟 武王 22)에 그 나라의 왕(王) 부여장(扶餘璋)이 사신(使臣)을 보내와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

[註014] [무덕(武德)] 7년(A.D.624; 百濟 武王 25) [註015]에 또 대신(大臣)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조공(朝貢)을 바쳤다.

고조(高祖)는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사신(使臣)을 보내어 대방군왕(帶方郡王)[註016] 백제왕(百濟王)으로 책봉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치니,[註017] 고조(高祖)는 수고로움을 위무하고 매우 후대(厚待)하였다.

이어서 고려(高[구,句]麗)가 길을 막고 중국(中國)과의 내왕(來往)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호소하므로,[註018] 조서(詔書)를 내려

주자사(朱子奢)[註019]를 보내어 화해시켰다. 또 신라(新羅)와는 대대로 서로 원수가 되어 자주 서로 침공하였다.[註020]

 

4)○ 정관(貞觀) 원년(A.D. 627; 百濟 武王 28)에 태종(太宗)이 그 나라 왕(王)에게,

“왕(王)은 대를 이은 군장(君長)으로서 동번(東蕃)을 무유(撫有)하였소, 바다 한모퉁이 머나먼 곳에서 풍랑(風浪)이 험난하게

가로 막는 데도 정성이 지극하여 직공(職貢)을 빼놓지 않으니, 그 아름다운 뜻은 생각할수록 가상하오. 짐(朕)이 삼가 총명(寵命)을

받들어 천하(天下)에 군림하고부터 생각하는 것은 왕도(王道)를 넓히고 여원(黎元)[註021]을 사랑하여 기르는 일이오. 주거(舟車)가

통하는 곳과 풍우(風雨)가 미치는 곳이라면 나의 본 뜻을 이루어 다같이 안녕을 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오. 신라왕(新羅王) 김진평

(金眞平)은 짐(朕)의 번신(藩臣)이며, 왕(王)의 인국(鄰國)이오. 매번 듣건대 군사를 보내어 쉬지 않고 정토(征討)하며, 무력만 믿어

잔인한 행위를 예사로 한다 하니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오. 짐(朕)은 이미 왕(王)의 조카 신복(信福)[註022] 및 고려(高[구,句]麗)

·신라(新羅)의 사인(使人)을 대하여 함께 통화(通和)할 것을 명(命)하고, 함께 화목할 것을 허락하였오. 왕(王)은 아무쪼록 그들과

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짐(朕)의 본뜻을 알아서 함께 인정(鄰情)을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기 바라오.”라는 새서(璽書)를

내렸다. 이에 장(璋)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사죄하였다. 비록 표면상으로는 명(命)을 따른다고 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예나 마찬가지로 원수 사이였다.

 

5)○ [정관(貞觀)] 11년(A.D.637; 百濟 武王 38)에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회(朝會)하고 철갑(鐵甲)과 조부(雕斧)를 바치니,[註023]

태종(太宗)은 융숭하게 대접하고, 명주 3천단(段)과 금포(錦袍) 등을 내렸다.

[정관(貞觀)] 15년(A.D.641; 百濟 義慈王 1)에 장(璋)이 졸(卒)하니,[註024] 그의 아들 의자(義慈)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슬픔을 알렸다. 태종(太宗)은 소복(素服) 차림으로 곡(哭)을 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였으며,

부물(賻物) 2백단(段)을 내렸다. 사신(使臣)을 보내어 의자(義慈)를 주국(柱國)[註025]으로 책명(冊命)하고,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에 봉하였다.[註026]

 

6)○ [정관(貞觀)] 16년(A.D.642; 百濟 義慈王 2)에 의자(義慈)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新羅)의 40여성(城)을 빼앗고[註027]

군대를 보내어 지키는 한편, 고려(高[구,句]麗)와 화친(和親)을 맺어 통호(通好)하고, 당항성(黨項城)[註028]을 탈취하여

신라(新羅)의 입조(入朝)길을 끊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新羅)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하니,

태종(太宗)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註029]에게 조서(詔書)를 보내어 화복(禍福)으로 양번(兩蕃)을 설득하였다.[註030]

태종(太宗)이 친히 고려(高[구,句]麗)를 정벌하자,[註031] 백제(百濟)는 두마음을 품고, 그 기회를 틈타 신라(新羅)의 10성(城)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정관(貞觀)] 22년(A.D.648; 百濟 義慈王 8)에 또 십여성(城)을 빼앗고,[註032] 수년 동안 마침내 조공(朝貢)이

끊어지고 말았다.[註033]

 

7)○ 고종(高宗)이 제위(帝位)를 이어 받자, 영휘(永徽) 2년(A.D.651; 百濟 義慈王 11)에 비로소 또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

을 바쳤다. 사신(使臣)이 돌아갈 적에 의자(義慈)에게 새서(璽書)를 내려 이르기를,[註034]“해동(海東)의 세나라는 개국한지

오래이며, 강계(疆界)가 나란히 있어 실로 견아(犬牙)의 형세처럼 국경이 서로 들쭉날쭉 서로 닿아 있오. 근래에 와서 드디어 국경을

다투고 침공을 하여 조금도 편안할 해가 없었오. 마침내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이 도마 위에 놓이게 하고, 창을 찾아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 저녁으로 거듭되니, 짐(朕)이 하늘을 대신하여 민물(萬物)을 다스림에 있어 깊이 안타까와 하는 바이오.

지난 해 왕(王)이 사신과 고려(高[구,句]麗)· 신라(新羅) 등의 사신(使臣)이 함께 입조(入朝)하였을 적에 짐(朕)은 서로의

수원(讎怨)을 풀고 다시 우호를 돈독히 하도록 명하였오. 신라(新羅)의 사신(使臣) 김법민(金法敏)은 주서(奏書)하여

‘고려(高[구,句]麗)와 백제(百濟)가 순치(脣齒)의 관계로 서로 의지하고 있으면서 앞을 다투어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침략하므로,

큰 성(城)과 요해처(要害處)의 진(鎭)들이 모두 백제에 병합되니, 강토(疆土)는 날로 줄어 들고 위력 또한 잃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백제(百濟)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침략한 성(城)을 돌려 주게 하옵소서. 만약 조명(詔命)을 받들지 않는다면 즉시 군사

를 일으켜 싸움으로 되찾겠습니다. 다만 옛 땅만 찾으면 바로 교화(交和)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소.

짐(朕)은 그 말이 조리에 맞으므로 불가불 윤허하였소.

옛날 제환공(齊桓公)은 제후(諸侯)의 자리에 있었으나 오히려 망하는 나라를 보존시켰소.

[註035] 하물며 짐(朕)은 만국(萬國)의 군주(君主)인데 어찌 위태로운 번국(藩國)을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王)은 빼앗은

신라(新羅)의 성(城)을 모두 본국에 돌려주시오. 신라(新羅)도 사로 잡아간 백제(百濟)의 포로를 모두 王에게 돌려 보내야 할 것이

오. 그런 뒤에야 서로의 사이에 불화가 풀리고 전쟁이 멎으니, 백성들은 쉬고 싶은 소원을 이루고 삼번(三蕃)에는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게 될 것이오. 이 어찌 변정(邊亭)에서 피를 흘리며 싸워 강토(疆土)에 주검이 쌓이고, 농사와 길쌈이 모두 폐지되어 사녀(士女)가

살 길이 없게 되는 것과 비교가 되겠는가? 왕(王)이 만약 나의 처분에 따르지 않는다면 짐(朕)은 이미 법민(法敏)이 청하는대로

왕(王)과 싸우게 놓아 둘 것이오. 또한 고려(高[구,句]麗)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돕지 못하게 할 것이오. 고려(高[구,句]麗)가

만약 이 명(命)을 받들지 않는다면 즉시 거란(契丹)의 제번(諸蕃)을 시켜 요택(遼澤)을 건너 쳐들어 가게 할 것이오.

왕(王)은 짐(朕)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고, 주도면밀하게 좋은 계획을 세워 후회를 남김이 없게 하오.”라고

하였다.

 

8)○ [영휘(永徽)] 6년(A.D.655; 百濟 義慈王 15)에 신라왕(新羅王) 김춘추(金春秋)가 또 표문(表文)을 올려, 백제(百濟)가

고려(高[구,句]麗) 및 말갈(靺鞨)과 함께 북계(北界)를 침공하여 벌써 30여성(城)이 함락되었다고 하였다.[註036]

현경(顯慶) 5년(A.D.660; 百濟 義慈王 20)에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 하니,

그 나라를 크게 깨뜨렸다.[註037] 의자(義慈) 및 태자(太子) 융(隆)[註038]· 소왕(小王) 효연(孝演)[註039]과 위장(僞將) 58명 등을

사로잡아 경사(京師)에 보내왔다. 황제는 이들을 꾸짖기만 하고 용서하였다.

그 나라는 본래 5부(部)[註040]로 나뉘어져 모두 37군(郡), 2백성(城)에 호구(戶口)는 76만이었다.[註041]

이때에 와서 그 땅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등 5도독부(都督府)[註042]를 두어 각각 주(州)와 현(縣)을 통괄케

하고, 백제 출신 추거(酋渠)로 도독(都督)· 자사(刺史) 및 현령(縣令)을 삼았다. 우위랑장(右衛郎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의자(義慈)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행(孝行)으로서 함이 널리 알려지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돈독하여, 당시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증자(曾子)· 민자(閔子)’[註043]라고 불렀다.

경사(京師)에 와서 며칠만에 죽었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하고, 특별히 구신(舊臣)의 부곡(赴哭)을

허락하였다. 손호(孫皓)· 진숙보(陳叔寶)[註044]의 묘 옆에 장사하고 아울러 비(碑)도 세워 주었다. 문도(文度)가 바다를 건너가서 죽었다.[註045]

 

9)○ 백제(百濟)의 승(僧) 도침(道琛)과 구장(舊將) 복신(福信)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周留城)[註046]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고왕자(故王子) 부여풍(扶餘豊)[註047]을 맞아다 왕(王)으로 세웠다.

서부(西部)와 북부(北部)가 모두 성(城)을 뒤집고 여기에 호응하였다. 이때에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註048]은 백제(百濟)의

부성(府城)에 머물러 있었는데, 도침(道琛) 등이 군사를 이끌고 포위하였다.[註049] 대방주자사(帶方州刺史) 유인궤(劉仁軌)[註050]

문도(文度)를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병(新羅兵)을 출동시켜 합세하여 인원(仁願)을 구원하고 계속하여 싸워

나가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다.

도침(道琛) 등이 웅진강(熊津江)[註051] 어귀에 두 개의 책(柵)을 세워 관군(官軍)에게 저항하자, 인궤(仁軌)는 신라병(新羅兵)과

함께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적들은 후퇴하여 책(柵) 안으로 달아났지만, 물에 막히고 다리는 좁아 물에 빠지거나 전사(戰死)한 사람

1만여명이나 되었다. 도침(道琛) 등은 이에 인원(仁願)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任存城)으로 물러나 보전하였다. 신라병(新羅兵)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때는 용삭(龍朔) 원년(A.D.661; 新羅 文武王 1) 3월이었다.[註052]

 

10)○ 이에 도침(道琛)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福信)은 스스로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며, 배반하고

도망간 무리들을 유인하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커졌다. 인궤(仁軌)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대당(大唐)이 신라(新羅)와 서약(誓約)하여 백제(百濟) 사람은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인 다음에 나라를 신라(新羅)에

넘겨 준다고 들었소. 죽음을 당할 바에야 어찌 싸우다 죽으려 하지 않겠소? [이것이] 무리를 모아 스스로 고수(固守)하는

이유이오.” 라고 고(告)했다. 인궤(仁軌)는 편지를 작성하여 화복(禍福)을 상세히 설명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설득하였다.

그러나 도침(道琛) 등은 무리들이 많은 것만 믿고 교만이 생겨서, 인궤(仁軌)의 사자(使者)를 외관(外館)에 머무르게 하고,

전하는 말로, “사자(使者)는 관직(官職)이 낮다. 나는 곧 일국(一國)의 대장(大將)인데, 스스로 참견함은 합당하지 않다.” 라고

하며, 답장을 써 주지 않고 사인(使人)을 돌려 보냈다. 얼마 아니되어 복신(福信)이 도침(道琛)을 죽이고 그의 군사들을 합병하니, 부여풍(扶餘豊)은 다만 제사나 주관할 뿐이었다.[註053]

 

11)○ [용삭(龍朔)] 2년(A.D.662; 新羅 文武王 2) 7월에 인원(仁願)· 인궤(仁軌) 등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이끌고, 웅진(熊津)

동쪽[註054]에서 복신(福信)의 무리들을 크게 무찔러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註055]·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의

책(柵)을 빼앗고, 많은 무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어서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福信) 등은 진현성(眞峴城)[註056]이 강에 바짝 닿아 있는 데다 높고 험하며, 또 요충(要衝)의 위치라 하여 군사를 증원시켜

지켰다. 인궤(仁軌)는 신라(新羅)의 군사를 이끌고 야음(夜陰)을 타 성(城)밑에 바짝 다가가서 사면에서 성첩(城堞)을 더위잡고

기어 올라 갔다. 날이 밝을 무렵 그 성(城)을 점거하여 8백명의 머리를 베어 마침내 신라(新羅)의 군량운송로를 텄다.

인원(仁願)이 이에 증병(增兵)을 주청(奏請)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치(淄)[주(州)]· 청(靑)[주(州)]· 내(萊)[주(州)]·

해(海)[주(州)][註057]의 군사 7천명을 징발하여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註058]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웅진(熊津)으로 가서 인원(仁願)의 무리를 도와주게 하였다.

이때 복신(福信)은 벌써 병권(兵權)을 모두 장악하여 부여풍(扶餘豊)과 점점 서로 시기하여 사이가 나빠지고 있었다.

복신(福信)은 병을 핑계로 굴방(窟房)에 누워서 부여풍(扶餘豊)이 문병오기를 기다려 덮쳐 죽일 것을 꾀하였다. 부여풍(扶餘豊)은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그의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福信)을 덮쳐 죽이고, 또 고려(高[구,句]麗)와 왜국(倭國)에 사자

(使者)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여 관군(官軍)을 막았다.[註059]

손인사(孫仁師)가 중도(中道)에서 [부여풍(扶餘豊)의 군대를] 맞아 쳐 무너뜨리고 드디어 인원(仁願)의 무리와 합세하니,

병세(兵勢)가 크게 떨쳤다. 이에 인사(仁師)· 인원(仁願) 및 신라왕(新羅王) 김법민(金法敏)은 육군(陸軍)을 이끌고 진군하고,

유인궤(劉仁軌) 및 별수(別帥) 사상(社爽)· 부여융(扶餘隆)은 수군(水軍) 및 군량선(軍糧船)을 이끌고 웅진강(熊津江)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陸軍)과 회합하여 함께 주류성(周留城)으로 진군하였다. 인궤(仁軌)가 백강(白江)어귀에서 부여풍(扶餘豊)

무리를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척을 불사르니, 적들은 크게 붕괴되고, 부여풍(扶餘豊)은 몸만 빠져 달아났다.

[註060] 위왕자(僞王子) 부여충승(扶餘忠勝)· 충지(忠志) 등이 사녀(士女) 및 왜(倭)의 무리를 이끌고 함께 항복하니,

백제(百濟)의 모든 성(城)이 다시 귀순하였다.[註061] 손인사(孫仁師)· 유인원(劉仁願) 등이 철군을 하여 돌아왔다.

조서(詔書)를 내려 [유(劉)]인원(仁願) 대신 유인궤(劉仁軌)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이에 부여융(扶餘隆)에게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제수(除授)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내어, 신라(新羅)와 화친(和親)을 맺고

남은 무리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註062]

 

12)○ 인덕(麟德) 2년(A.D.665; 新羅 文武王 5) 8월에 [부여(扶餘)]융(隆)이 웅진성(熊津城)에 이르러 신라왕(新羅王) 법민(法敏)과

백마(白馬)를 잡아 놓고 맹약하였다.[註063]

먼저 천신(天神)· 지신(地祇) 및 산천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나서 피를 마셨다. 그 맹서문(盟誓文)은 이러하다.

“지난날에 백제(百濟)의 선왕(先王)이 역리(逆理)와 순리(順理)에 혼미하여, 이웃과 우호가 돈독하지 못했으며,

친척[註064]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였다. 고려(高[구,句]麗)와 결탁하고 왜국(倭國)과 교통하여 그들과 함께 잔폭(殘暴)하였으며, 신라(新羅)에 침략하여 읍(邑)을 깨뜨리고 성(城)을 도륙하니, 잠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천자(天子)께서는 하나의 물건이라도

없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백성(百姓)이 무고(無辜)하게 [고통받는 것을] 가엾게 여기시어,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어 우호를

닦으라고 명(命)하였다. 그러나 [지세(地勢)가] 험준하고 [도로가] 먼 것만 믿고 하늘의 도리를 업신여겨 태만히 하였다.

황제(皇帝)께서 이에 분노하시어 [죄인을] 치고 [백성을] 위로하는 일을 삼가 거행하시니, 정기(旌旗)가 나가는 곳에 한번의

싸움으로 모두가 평정되었다. 진실로 궁궐은 못을 파고 집은 웅덩이를 파서 뒷날의 경계를 삼고, 폐단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 다음

사람에게 훈계를 남겨야 될 일이다. 그러나 약한 자를 감싸 주고 배반하는 자를 토벌하는 것이 전왕(前王)의 아름다운 법도요,

망한 자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나라를 이어주는 것은 옛 철인(哲人)의 통규(通規)이다.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 여러 사책(史冊)에 전하여 오고 있다. 그런 까닭에 전 백제태자(前百濟太子) 사가정경(司稼正卿)[註065] 부여융(扶餘隆)을 세워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서 제사를 받들고 그의 고장을 보존하게 하였다.

신라(新羅)에 의존하여 영원한 동맹국으로서 각자 묵은 감정을 버리고 굳고 화친(和親)하라. 조명(詔命)을 공손히 받들고 영원한

번국(藩國)이 되라. 그리하여 사신(使臣)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어 친림(親臨)하여

타이르고 깨우침과 아울러 짐(朕)의 뜻을 널리 펴게 하노니, 혼인으로 약속하고 맹서로 다짐한다.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는 것은 우호를 처음부터 끝까지 돈독히 하기 위함이니, 재앙은 나누어 갖고 충난(患難)을 당하여서는 서로

구제하여 은의가 형제와 같이 지내도록 하라. 윤언(綸言)을 공손히 받들어 함부로 저버리지 말며, 맹서를 하고 나서는 다같이

[송백(松柏)처럼] 언제고 변함이 없으라. 만약 [마음이 변하여] 신의를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다면,

신명(神明)께서 이를 보고 온갖 재앙을 내려서 자손이 번창하지 않게 되어 사직(社稷)을 지킬 사람이 없게 될 것이며, 제사는 끊이고

남아나는 유족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계(金書鐵契)[註066]를 만들어 종묘(宗廟)에 간직하는 것이니, 자손만대토록

행하여 범함이 없어야 한다. 신명이 듣고 있으니 이로서 누릴 복이 결정되리라.” [이것은] 유인궤(劉仁軌)의 글이다.

삽혈(歃血)을 마치고 나서 단하(壇下) 깨끗한 곳에 폐백을 묻고, 맹서문은 신라(新羅)의 종묘(宗廟)에 간직하였다.

인원(仁願)· 인궤(仁軌) 등이 돌아오자, 융(隆)은 신라(新羅)를 두려워하여 곧 경사(京師)로 돌아왔다.[註067]

 

13)○ 의봉(儀鳳) 2년(A.D.677; 新羅 文武王 17)에 [융(隆)에게] 광록대부(光祿大夫)[註068] 태상원외경(太常員外卿)

겸웅진도독(兼熊津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을 제수(除授)하여 본번(本蕃)에 돌아가 남은 무리들을 안집(安集)케 하였다.[註069]

이때 백제(百濟)의 옛 땅이 황폐하여 점점 신라(新羅)의 소유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융(隆)은 끝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채

죽었다. 그의 손자 경(敬)이 측천(則天)[무후(武后)] 때에 대방군왕(帶方郡王)에 습봉(襲封)되어 위위경(衛尉卿)을

제수(除授)받았다. 이로부터 그 땅은 신라 및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으며,[註070] 백제의 종족(種族)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3. 신라(新羅)[註001]

 

1) ○신라국(新羅國)은 본래 변한(弁韓)의 후예이다.[註002] 그 나라는 한대(漢代)의 낙랑(樂浪) 땅에 있으니,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 연하여 있고, 서쪽은 백제(百濟)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고려(高[구,句]麗)와 인접하였다.

동서로 1천리, 남북으로 2천리이다.[註003] 성읍(城邑)과 촌락(村落)이 있다. 왕(王)이 사는 곳은 금성(金城)으로,

둘레가 7·8리이다.[註004] 위병(衛兵)은 3천명으로,[註005] 사자대(獅子隊)[註006]를 설치하였다.

문무관(文武官)은 모두 17등급이 있다. 그 나라의 왕(王) 김진평(金眞平)은 수(隋) 문제(文帝) 때에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을 제수(除授)받았다.[註007] 무덕(武德) 4년(A.D.621; 新羅 眞平王 43)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다. 고조(高祖)는 친히 노고를 치하하고,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郞) 유문소(庾文素)를 사신(使臣)으로 보내어

새서(璽書) 및 그림병풍과 비단 3백단(百段)을 하사하였다.[註008] 이로부터 조공(朝貢)이 끊이지 않았다.[註009]

 

2)○ 풍속(風俗)· 형법(刑法)· 의복(衣服)은 고려(高[구,句]麗)· 백제(百濟)와 대략 같으나, 조복(朝服)은 흰색을 숭상한다.

산신(山神)에게 제사하기를 좋아한다. 식기(食器)는 버드나무 그릇을 쓰는데, 구리그릇과 질그릇도 있다.

국인(國人)은 김(金)· 박(朴) 두 성씨가 많으며, 다른 성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註010] 원일(元日)을 중히 여겨서

서로 [이 날을] 축하하고 연회를 베푸는데, 해마다 이 날에는 일월신(日月神)에게 절을 한다. 또 8월 15일을 중히 여겨서 풍악을

울리고 연회를 베풀며, 군신(群臣)을 모아 궁정(宮庭)에서 활쏘기를 한다. 부인들은 머리를 틀어 올려서 비단 및 구슬로 치장하는데,

머리털이 매우 길고 아름답다.

 

3)○ 고조(高祖)는 이미 해동(海東)의 세 나라가 오래전부터 원한이 맺혀 서로 번갈아 가며 공격을 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들은 같은 번국(藩國)으로서 힘쓸 것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라 하여, 이에 그 사신(使臣)에게 원한을 맺게 된 까닭을

물으니, [사신은,] “지난 날 백제(百濟)가 고려(高[구,句]麗)를 치러 갈 적에 신라(新羅)에게 구원을 청하였는데, 신라(新羅)는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국(百濟國)을 쳐부수었습니다.[註011] 이로 인하여 원수가 되어 늘 서로 공벌(攻伐)을 하게 되었으며,

[그후] 신라(新羅)가 백제(百濟)의 왕(王)을 잡아다 죽였으므로[註012] 원한은 이로 말미암아 비롯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4)○ [무덕(武德)] 7년(A.D.624; 新羅 眞平王 46)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김진평(金眞平)에게 주국(柱國)을 제수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에 책봉하였다.

정관(貞觀) 5년(A.D.631; 新羅 眞平王 53)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여악공(女樂工) 두사람을 바쳤는데,

모두 머리가 새까만 미인(美人)들이었다. 태종(太宗)이 시신(侍臣)에게,

“짐(朕)이 들으니 성색(聲色)을 즐기는 것은 덕(德)을 좋아함만 같지 못하다고 한다.

그리고 산천(山川)으로 가로 막혀 있으니, 고향을 그리워 할 것도 알 수 있다.

얼마 전에 임읍(林邑)에서 바친 흰 앵무새도 오히려 고향을 그리워할 줄 알아 제 나라로 보내 줄 것을 하소연하였다.

새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인정(人情)에 있어서랴! 짐(朕)은 그들이 멀리 떠나 와서 반드시 친척을 그리워할 것을 불쌍히

여긴다. 마땅히 사자(使者)의 편에 보내어 제 집으로 돌려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註013] 이 해에 진평(眞平)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그의 딸 선덕(善德)[註014]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註015] 종실(宗室)로서 대신(大臣)인 을제(乙祭)가 국정(國政)을

총괄하여 맡아 보았다.[註016] 조서를 내려 진평(眞平)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물(賻物) 2백단(段)을 내려

주었다. [정관(貞觀)] 9년(A.D.635; 新羅 善德女王 4)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가서 선덕(善德)을 주국(柱國)에

책봉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에 봉하였다.[註017]

 

5) [정관(貞觀)] 17년(A.D.643; 新羅 善德女王 12)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고려(高[구,句]麗)와 백제가 여러차례 번갈아 공습을 하여 수십성(城)을 잃었는데,

두 나라 군대가 연합하여 신(臣)의 사직(社稷)을 없애려 합니다. 삼가 배신(陪臣)을 보내어

대국(大國)에 보고를 하오니, 약간의 군사로나마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상언(上言)하였다.[註018]

태종(太宗)은 상리현장(相里玄獎)을 보내어 고려(高[구,句]麗)에, “신라(新羅)는 나의 명령에 따르는 나라로서[註019]

조헌(朝獻)[註020]을 빼놓지 않았소.[註021] 그대 나라와 백제(百濟)는 함께 마땅히 무기를 거두어 들여야 할 것이오.

만약 다시 공격을 한다면 내년에 군사를 내어 그대 나라를 칠 것이오.”라는 새서(璽書)를 내렸다.

태종(太宗)은 친히 고려(高[구,句]麗)를 치려고 신라(新羅)에 조서(詔書)를 내려,

군사와 말을 모집하여 대군(大軍)에 응접(應接)하라고 하였다. 신라(新羅)는 대신(大臣)을 파견하여 군사 5만명을 이끌고

고려(高[구,句]麗)의 남계(南界)로 들어가 수구성(水口城)을 쳐서 항복받았다.[註022]

 

6)○ [정관(貞觀)] 21년(A.D.647; 新羅 眞德女王 1)에 선덕(善德)이 졸(卒)하였다.[註023]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나머지의 관작(官爵)은 이전에 봉하여 준대로 하였다.

이어서 그의 여동생 진덕(眞德)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註024] 주국(柱國)을 가수(加授)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에 봉하였다.[註025] [정관(貞觀)] 22년(A.D.648; 新羅 眞德女王 2)에 진덕(眞德)이 그의 아우 국상(國相) 이찬간(伊贊干) 김춘추(金春秋)[註026] 및

그의 아들 문왕(文王)[註027]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 조서를 내려 춘추(春秋)에게는 특진(特進)[관(官)]을 제수(除授)하고,

문왕(文王)에게는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제수(除授)하였다.[註028] 춘추(春秋)가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釋奠) 및 강론(講論)

하는 의식을 구경하겠다고 청하므로, 태종(太宗)은 이로 말미암아 친히 지은 『온탕(溫湯)』·『진사비(晋祠碑)』 및 신찬(新撰)한『진서(晋書)』를 내렸다.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3품(品)이상의 관원을 시켜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 주는 등 예우가

극진하였다.

 

7)○ 영휘(永徽) 원년(A.D.650; 新羅 眞德女王 4)에 진덕(眞德)이 백제(百濟)의 무리를 대파(大破)한 뒤[註029]

그의 아우 법민(法敏)을 보내어 보고하였다. 이때 진덕(眞德)이

5언(言)의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비단에 짜서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당(大唐)이 큰 왕업(王業)을 연 것은

외외(巍巍)하신 황제(皇帝)의 훌륭한 지모(智謀).

간과(干戈)를 멈추어 세상은 큰 평정을 이루고

문치(文治)를 일으켜 백왕(百王)을 계승하였어라.

천하(天下)를 거느림에는 은혜를 높이 숭상하고

만물(萬物)을 다스림에는 공을 내세우지 않네.

깊은 인덕(仁德)은 일월(日月)과 짝할만 하고

대운(大運)을 타고 일어남은 도당(陶唐)의 세(世)를 초월하였네.

번기(幡旗)가 혁혁(赫赫)하던 그 날

정고(鉦鼓)는 어이 그리 굉굉(鍠鍠)하였던가.

외이(外夷)로 명(命)을 어긴 자는

천앙(天殃)을 입어 복멸(覆滅)하였네.

순박한 풍속이 유명(幽明)에 같이 엉기니

원근(遠近)에서 앞다투어 정상(呈祥)을 하네.

사시(四時)의 절기(節氣)는 옥촉(玉燭)처럼 순조롭고

칠요(七曜)의 빛이 만방(萬方)에 고루 돈다.

오직 제후(諸侯)라야 재보(宰輔)를 천거하고

오직 제후(皇帝)만이 충량(忠良)을 등용하는 법.

오제삼왕(五帝三王)의 덕(德)을 하나로 하여

우리 당(唐)나라 밝게 빛내리.”[註030]

고종(高宗)은 이를 가상히 여겨, 법민(法敏)에게 태부경(太府卿)을 배수(拜授)하였다.[註031]

 

8)○ [영휘(永徽)] 3년(A.D.652; 新羅 眞德女王 6) 에 진덕(眞德)이 졸(卒)하자,[註032] [고종(高宗)이] 거애(擧哀)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춘추(春秋)로 뒤를 이어 신라왕(新羅王)을 삼아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제수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에 봉(封)하였다.[註033]

[영휘(永徽)] 6년(A.D.655; 新羅 武烈王 2)에 백제(百濟)가 고려(高[구,句]麗)· 말갈(靺鞨)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신라(新羅)의 북계(北界)를 침입하여 3십여성(城)을 함락시켰다.

춘추(春秋)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구원을 청하였다.[註034]

 

 

9)○ 현경(顯慶) 5년(A.D.660; 新羅 武烈王 7)에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總管)에

임명하여 수군(水軍)과 육군(陸軍) 10만을 거느려 [출군(出軍)시켰다.]

이어서 [김(金)]춘추(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에 임명하여 정방(定方)과 함께 백제(百濟)를 토평(討平)하게 하니,[註

035] 그 나라의 왕(王) 부여의자(扶餘義慈)를 사로 잡아다 궐하(闕下)에 바쳤다. 이로부터 신라(新羅)가 점차로 고려(高[구,句]麗)·

백제(百濟)의 땅을 차지하게 되니, 그 땅은 더욱 넓어져 서쪽으로는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10)○ 용삭(龍朔) 원년(A.D.661; 新羅 文武王 1)에 춘추(春秋)가 졸(卒)하니,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태부경(太府卿) 법민(法敏)으로

뒤를 잇게 하여,[註036]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용삭(龍朔)] 3년(A.D.663; 新羅 文武王 3)에 조서를 내려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雞林州都督府)로 삼고,

법민(法敏)에게 계림주도독(雞林州都督)을 제수(除授)하였다.[註037]

법민(法敏)이 개요(開耀) 원년(A.D.681; 新羅 神文王 1)에 졸(卒)하니, 그의 아들 정명(政明)이 위(位)를 이어 받았다.[註038]

 

11)○ 수공(垂拱) 2년(A.D.686; 新羅 神文王 6)에 정명(政明)이 사신을 보내와 조근(朝覲)하며, 표문(表文)을 올려

『당례(唐禮)』1부(部)와 기타 문장(文章)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註039]

측천(則天)은 해당 관사에 명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와 『문관사림(文館詞林)』 가운데 규계(規誡)가 될만한 것을 골라 쓰게

하여, 모두 5십여권(卷)의 책을 만들어 내려 주었다.

 

12)○ 천수(天授) 3년(A.D.692; 新羅 孝昭王 1)에 정명(政明)이 졸(卒)하니, 측천(則天)은 거애(擧哀)를 하는 한편,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그의 아들 이홍(理洪)을 세워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작위인]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행표도위대장군(行豹韜衛大將軍) 계림주도독(雞林州都督)을 승습케 하였다.[註

040] 이홍(理洪)이 장안(長安) 2년(A.D.702; 新羅 聖德王 1)에 졸(卒)하니, 측천(則天)은 거애(擧哀)하고

이틀 동안 철조(輟朝)하였다. 그의 아우 흥광(興光)[註041]을 보내어 신라왕(新羅王)으로 삼고, 형의 장군(將軍)· 도독(都督)의

호(號)를 승습하게 하였다.

흥광(興光)은 본명이 태종(太宗)과 같아서 선천(先天) 연간(A.D.712; 新羅 聖德王 11)에 측천(則天)이 고쳐 준 이름이다.

 

13)○ 개원(開元) 16년(A.D.728; 新羅 聖德王 27) 에 사신(使臣)을 보내와 방물(方物)을 바치고, 또 표문(表文)을 올려

[신라(新羅)] 인(人)에게 중국의 학문과 경교(經敎)를 배우게 해 달라고 요청하니, 현종(玄宗)은 윤허하였다.[註042]

[개원(開元)] 21년(A.D.733; 新羅 聖德王 32)에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로 침입하였다.

이때 흥광(興光)의 친척 김사란(金思蘭)이 입조(入朝)하여 경사(京師)에 와 머물러 있으면서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註043] 본국으로 돌려 보내어 군사를 동원하여 말갈(靺鞨)을 토벌케 하고,[註044] 이어서 흥광(興光)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를 가수(加授)하였다.

[개원(開元)] 25년(A.D.737; 新羅 孝成王 1)에 흥광(興光)이 졸(卒)하니, 조서를 내려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추증하고,[註045]

이어서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형도(邢璹)를 홍려소경(鴻臚少卿)에 섭직(攝職)시켜 신라(新羅)로 보내어 조제(弔祭)하게 하였다.[註

046] 아울러 그의 아들 승경(承慶)[註047]을 책립(册立)하여 아버지의 [작위인]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新羅王)을

승습케 하였다. [형(邢)]도(璹)가 길을 떠날 적에 현종(玄宗)이 송별시(送別詩)를 지어 그 서문(序文)을 쓰고, 태자(太子) 이하 모든

관원들로 하여금 시(詩)를 지어 전송하게 하였다. 현종(玄宗)이 도(璹)에게,“신라(新羅)는 군자(君子)의 나라로 불리며, 자못 학문

을 알아서 중화(中華)와 유사한 데가 있소.[註048] 경(卿)의 학술이 강론에 능하기 때문에 이번의 사신(使臣)으로 선발하여 보내는 것이오. 그 나라에 가서 경전(經典)을 천양(闡揚)하여 대국(大國)의 유교(儒敎)가 성대함을 알게 하오.”하였다.

또 그 나라 사람들 중에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바둑에 능한 솔부병조(率府兵曹) 양계응(楊季鷹)을

[형(邢)]도(璹)의 부사(副使)로 삼아 보냈다. 도(璹) 등은 그 나라에 이르러 번인(蕃人)으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그 나라의 바둑 수준은 계응(季鷹)보다 낮았다. 그리하여 도(璹) 등에게 금보(金寶) 및 약물(藥物) 등의 푸짐한 선물을 주어 보냈다.

 

14)○ 천보(天寶) 2년(A.D.743; 新羅 景德王 2)에 승경(承慶)이 졸(卒)하니,[註049] 조서를 내려 찬선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를 보내어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그의 아우 헌영(憲英)[註050]을 책립(册立)하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고, 아울러 형의 관작(官爵)을

승습케 하였다.

 

15)○ 대력(大曆) 2년(A.D.767; 新羅 惠恭王 3)에 헌영(憲英)이 졸(卒)하니, 국인(國人)들이 그의 아들 건운(乾運)을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註051] 이어서 대신(大臣) 김은거(金隱居)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입조(入朝)하여[註052] 방물(方物)을 바치면서 책명(册命)을 청하였다.

[대력(大曆)] 3년(A.D.768; 新羅 惠恭王 4)에 대종(代宗)은 창부랑중(倉部郎中) 겸어사중승 (兼御史中丞)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귀숭경(歸崇敬)에게 부절(符節)과 책서(册書)를 주어 가서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건운(乾運)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新羅王)으로 삼고, 건운(乾運)의 어머니는 태비(太妃)로 책봉하였다.[註053] [대력(大曆)] 7년(A.D.772; 新羅 惠恭王 8)에 사신(使臣) 김표석(金標石)을 보내와 하정(賀正)하니,

위위원외소경(衛尉員外少卿)을 제수(除授)하여 돌려 보냈다.[註054]

[대력(大曆)] 8년(A.D.773; 新羅 惠恭王 9)에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근(朝覲)하고, 아울러 금(金)· 은(銀)· 우황(牛黃)·

어아주(魚牙紬)· 조하주(朝霞紬) 등을 바쳤다.[註055]

[대력(大曆)] 9년(A.D.774; 新羅 惠恭王 10)에서 12년(A.D.777; 新羅 惠恭王 13)까지는 해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는데, 혹은 한해에 두번도 왔다.[註056]

 

16)○ 건중(建中) 4년(A.D.783; 新羅 宣德王 4)에 건운(乾運)이 졸(卒)하였다.[註057] 아들이 없으므로[註058] 국인(國人)들이

그 나라의 상상(上相)[註059] 김양상(金良相)을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註060]

 

17)○ 정원(貞元) 원년(A.D.785; 新羅 元聖王 1)에 양상(良相)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 도독계림주자사(都督雞林州刺史)

영해군사(寧海軍使) 신라왕(新羅王)을 제수(除授)하였다.[註061] 이어서 호부낭중(戶部郎中) 개훈(蓋塤)에게 부절(符節)과

책명(册命)을 주어 보냈다. 그 해에 양상(良相)이 졸(卒)하니, 상상(上相) 경신(敬信)[註062]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註063]

그 관작(官爵)을 승습케 하였다. 경신(敬信)은 곧 [전왕(前王)과] 종형제(從兄弟)사이이다.

[貞元] 14년(A.D.798; 新羅 元聖王 14)에 경신(敬信)이 졸(卒)하였다. 그의 아들이 경신(敬信)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국인(國人)들이

경신(敬信)의 맏손자 준옹(俊邕)[註064]을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註065]

[정원(貞元)] 16년(A.D.800; 新羅 哀莊王 1)에 준옹(俊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신라왕(新羅王)을

제수(除授)하였다. 사봉랑중(司封郎中) 겸어사중승(兼御史中丞) 위단(韋丹)에게 부절(符節)과 책명(册命)을 주어 보냈다.

단(丹)이 운주(鄆州)에 이르렀을 때 준옹(俊邕)이 졸(卒)하고 그의 아들 중흥(重興)이 왕(王)이 되었다는 보고가 있어

조명(詔命)으로 단(丹)을 불러 들였다. 영정(永貞) 원년(A.D.805; 新羅 哀莊王 6)에 조서를 내려 병부랑중(兵部郎中)

원계방(元季方)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어 중흥(重興)을 왕(王)으로 책봉하였다.[註066]

 

18)○ 원화(元和) 원년(A.D.806; 新羅 哀莊王 7) 11月에 숙위(宿衛)로 와 있던 왕자(王子) 김헌충(金獻忠)을 본국에 돌려 보내고,

[註067] 이어서 시비서감(試秘書監)을 가수(加授)하였다. [元和] 3년(A.D.808; 新羅 哀莊王 9)에 사신(使臣) 김력기(金力奇)를

보내어 내조(來朝)하였다. 이 해 7월에 역기(力奇)가, “정원(貞元) 16년(A.D.800; 新羅 哀莊王 1)에 신(臣)의 고왕(故主)

김준옹(金俊邕)으로 신라왕(新羅王)을 삼고, 어머니 신시(申氏)로 태비(太妃)를 삼으며,[註068] 아내 숙씨(叔氏)로 왕비(王妃)를

삼는다는[註069] 조책(詔册)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책사(册使) 위단(韋丹)이 중도에서 준옹(俊邕)의 죽음을 알고 그 책명(册命)을

도로 가지고 돌아가서 중서성(中書省)에 두었습니다. 이번에 신(臣)이 본국으로 돌아가므로 신(臣)이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주시기를 엎드려 청합니다.” 라고 상언(上言)하니, 조칙(詔敇)하여, “김중옹(金俊邕) 등의 책명(册命)은 마땅히 홍려사(鴻臚寺)로 하여금

중서성(中書省)에서 수령해 오게 하여야 되니, [홍려(鴻臚)]사(寺)에 알려서 김력기(金力奇)에게 주어 받들고 돌아 가게 하라.

이어서 그의 삼촌 언승(彦昇)에게 문극(門戟)을 내려주니, 본국은 준례(準例)에 따라 내려 주라.” 고 하였다.[註070]

[원화(元和)] 4년(A.D.809; 新羅 憲德王 1)에 사신(使臣) 김륙진(金陸珍) 등을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

[원화(元和)] 5년(A.D.810; 新羅 憲德王 2)에는 왕자(王子) 김헌장(金獻章)이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19)○ [원화(元和)] 7년(A.D.812; 新羅 憲德王 4)에 중흥(重興)이 졸(卒)하니, [그 나라에서] 재상(宰相) 김언승(金彦昇)[註071]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註072] 사신(使臣) 김창남(金昌南) 등을 보내와 고애(告哀)하였다. 이해 7월에 언승(彦昇)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

겸지절충녕해군사(兼持節充寧海軍使) 상주국(上柱國) 신라국왕(新羅國王)을 제수(除授)하고, 언승(彦昇)의 아내 정씨(貞氏)를 왕비(王妃)로 책봉하였다.[註073] 아울러 재상(宰相) 김숭빈(金崇斌) 등 세사람에게 문극(門戟)을 내려주고,[註074] 역시 본국으로

하여금 준례(準例)대로 내려 주라고 하였다. 아울러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 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 최정(崔廷)에게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조제(弔祭)와 책립(册立)을 시행하게 하였는데, 그 질자(質子) 김사신(金士信)을 부사(副使)로 딸려 보냈다.[註075]

[원화(元和)] 11년(A.D.816; 新羅 憲德王 8) 11월, 입조(入朝)한 왕자(王子) 김사신(金士信)[註076] 등이 사나운 바람을 만나

초주(楚州) 염성현(鹽城縣) 지경에까지 표류하여 갔다는 사실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이용(李鄘)이 알려 왔다.

이 해에 신라(新羅)에 흉년이 들어 무리 1백 70명이 먹을 것을 찾아 절동(浙東)에까지 왔다.[註077]

[원화(元和)] 15년(A.D.820; 新羅 憲德王 12) 11월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註078]

 

20)○ 장경(長慶) 2년(A.D.822; 新羅 憲德王 14) 12월에 사신(使臣) 김주필(金柱弼)을 보내 조공(朝貢)하였다.

보력(寶曆) 원년(A.D.825; 新羅 憲德王 17)에 왕자(王子) 김흔(金昕)이 와서 조근(朝覲)하였다.[註079]

대화(大和) 원년(A.D.827; 新羅 興德王 2) 4월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대화(大和)] 5년(A.D.831; 新羅 興德王 6)에 김언승(金彦昇)이 졸(卒)하니,[註080] 그의 아들 김경휘(金景徽)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

겸지절충녕해군사(兼持節充寧海軍使)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註081] 경휘(景徽)의 어머니 박씨(朴氏)를 태비(太妃)로 삼고,

아내 박씨(朴氏)를 왕비(王妃)로 삼았다. 태자좌유덕(太子左諭德) 겸어사중승(兼御史中丞) 원적(源寂)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책립(册立)하게 하였다.

 

21)○ 개성(開成) 원년(A.D.836; 新羅 僖康王 1)에 왕자(王子) 김의종(金義琮)이 와서 사의(謝恩)하고 아울러 숙위(宿衛)하였다.[註

082] [개성(開成)] 2년(A.D.837; 新羅 僖康王 2) 4월에 [왕자(王子)에게] 물건을 하사하고 본국(本國)으로 돌려 보냈다.[註083]

[개성(開成)] 5년(A.D.840; 新羅 文聖王 2) 4월에 홍려사(鴻臚寺)가 신라국(新羅國)에서 국상(國喪)이 났다는 사실을 알려 왔다고

아뢰므로, 질자(質子) 및 기간이 차서 돌아가야 할 유학생 등 도합 1백 5명을 돌려 보냈다.[註084]

회장(會昌) 원년(A.D.841; 新羅 文聖王 3) 7월에 조칙(詔敇)하여, “신라(新羅)로 귀국한 관원(官員)으로서 이전에

선위부사(宣慰副使)로 신라(新羅)에 들어간 전충연주도독부사마(前充兗州都督府司馬) 사비어대(賜緋魚袋) 김운경(金雲卿)[註085]은 치주장사(淄州長史)에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4. ○ 사신(史臣)은 말한다.

 

북적(北狄)은 중국(中國)과 아주 가까워서 변방 침입이 예로부터 있어 왔다. 동이(東夷)는 영해(瀛海)[註051] 밖에 떨어져 있어서

분경(紛梗)을 일으켰다는 것은 듣기 드문 일이다. 이는 형세상 그러할 뿐만 아니라 아마 타고난 성격도 그러한 듯 하다.

태평지(太平地)의 사람은 어질고 공동산(空峒山)[註052]의 사람은 억세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수(隋) 양제(煬帝)가 만족을 모르는 끝없는 욕망으로 요좌(遼左)[註053]에 군사를 일으킬 적에 터질 듯한 욕망을 단번에 채우려는

야심이 여기에서 발단되었다. 그러나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들에게 구실을 주게 되어 스스로 제 몸을 불사르고 드디어는 나라까지 망치고 말았다. 우리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친히 융차(戎車)를 몰고 동으로 고려(高[구,句]麗)를 정벌한 것도 성공은

하였으나 잃은 바가 또한 많았다. 개선하여 돌아오던 날에 좌우(左右)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짐(朕)에게 위징(魏徵)[註054]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번의 정행(征行)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태종(太宗)도] 출사(出師)를 후회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찌하여서일까? 이적(夷狄)의 나라란 돌밭과 같아서 얻어도 보탬이 안되고, 잃어버린들 무엇이 손상될 것인가?

반드시 허명(虛名)을 힘써 추구하므로 [단지] 수고로움에나 쓸모가 있을 뿐이다. 다만 마땅히 문덕(文德)을 닦아서 이를 오게 하고, 성교(聲敎)를 입혀서 이를 복종시키며, 신실한 신하(왕,王)를 가려 이를 무마하고, 변경의 수비를 단속하여 방어해야 된다.

그리고 통역(通譯)을 거쳐서 조정에 오게 하고, 바다를 건너서 들어와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

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