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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북사[北史] 열전(列傳)
차 례
1. 고구려(高句麗) 2. 백제(百濟) 3. 신라(新羅) 4. 물길(勿吉) 5. 찬자평(撰者評)
○ 북사(北史)[註001] 열전(列傳)[註002]
1. 고구려전(高句麗傳)[註003]
1) ○고구려(高句麗)는 그 선조(先祖)가 부여(夫餘)에서 나왔다. [부여(夫餘)]왕(王)이 일찍이 하백(河伯)의 딸을 붙잡아 방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을 받게 되어 몸을 돌려 피했으나 햇빛이 다시 따라와 비추어 주었다. 얼마 후에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승,升)들이 만하였다. 부여왕(夫餘王)이 그 알을 개에게 주었으나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가에 버려 두었으나 소와 말들이 피해 다녔다. 들판에 버려두었더니 뭇새들이 깃털로 그 알을 덮어 주었다. 왕(王)은 그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게 되자, 결국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놓아 두었더니 사내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2)○ 그가 성장하여 자(字)를 주몽(朱蒙)이라고 하니, 그 나라의 속언(俗言)에 ‘주몽(朱蒙)’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夫餘) 사람들이 주몽(朱蒙)은 사람이 소생이 아니라고 하여 그를 없애버리자고 청하였다. 왕(王)은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주몽 (朱蒙)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朱蒙)은 남몰래 말들을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이 있음을 알고서, 준마는 먹이를 줄여 야위도록 하고 굼뜬 말은 잘 키워 살찌도록 하였다. 부여왕(夫餘王)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야윈 말은 주몽(朱蒙)에게 주었다. 그 후 사냥터에서 사냥할 적에 주몽(朱蒙)에게는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한 마리를 잡는데] 화살 한 개씩을 주었다. 주몽(朱蒙)이 비록 화살은 한 개씩이었지만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부여(夫餘)의 신하들이 또 주몽(朱蒙)을 죽이려고 모의를 꾸미자, 그의 어머니가 [그 음모를] 주몽(朱蒙)에게 알려 주었다.
3)○ 주몽(朱蒙)은 이에 언위(焉違)[註004] 등 두 사람과 함께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중도에서 큰 강(江)을 만났는데,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는 없고 부여(夫餘) 사람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朱蒙)이 물에 고(告)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지금 뒤쫓아 오는 병사들이 들이닥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자, 이에 고기와 자라들이 그를 위하여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朱蒙)이 [물을] 건너고 난 뒤 고기와 자라들은 곧바로 흩어져버려 뒤쫓아 오던 기병(騎兵)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朱蒙)은 마침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사람은 삼베옷을, 한사람은 무명옷을, 한사람은 부들로 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주몽(朱蒙)과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인하여 성(姓)을 고씨(高氏)라 하였다.[註005]
4)○ 주몽(朱蒙)이 부여(夫餘)에 있을 적에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었는데, 주몽(朱蒙)이 도망한 후에 아들을 낳으니, [자(字)를] 처음에는 여해(閭諧)라 하였다. 성장하여 주몽(朱蒙)이 국왕(國王)이 된 것을 알고는 곧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주몽(朱蒙)은] 그를 여달(閭達)이라 이름지어 주고, 국사(國事)를 그에게 맡겼다. 주몽(朱蒙)이 죽고 아들 여율(如栗)이 즉위하였다.[註006] 여율(如栗)이 죽고 아들 막래(莫來)[註007]가 즉위하여서 부여(夫餘)를 병합하였다.[註008]
5)○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B.C. 107)에는 조선(朝鮮)을 멸망시켜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고, 고구려(高句麗)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군(玄菟郡)에 예속시켰다. 한(漢)나라 때에 의책(衣幘)· 조복(朝服)· 고취(鼓吹)를 하사하면 항상 현도군(玄菟郡)을 통하여 받았다. 그 뒤 점차 교만하여져 다시는 [현도(玄菟)]군(郡)에 오지 아니하고, 동쪽지경에다 작은 성(城)_을 쌓아 놓고 [하사품을] 받았으니, 뒷날 이 성(城)의 이름을 책구루(幘溝漊)라 하였다. 책구(幘溝)란 [고]구려말로 성(城)이라는 뜻이다.[註009] 왕망(王莽) 초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高句麗) 병사들이] 가려 하지 않았다. [왕(王)]망(莽)이 그들을 위협하여 보내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하여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주(州)와 군(郡)이 그 허물을 구려후(句麗侯) 추(騶)에게 돌리자, 엄우(嚴尤)가 그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 [왕(王)]망(莽)은 크게 기뻐하여 고구려(高句麗)의 이름을 고쳐 고구려후(高句麗侯)로 하였다.[註010]
6)○ 광무(光武)[제(帝)] 건무(建武) 8년(A.D.32; 高句麗 大武神王 15)에 고구려(高句麗)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註011] 상제(殤帝)· 안제(安帝) 연간에 막래(莫來)의 후손 궁(宮)[註012]이 자주 요동(遼東)을 노략질하였다. 현도태수(玄菟太守) 채풍(蔡風)이 그를 토벌하였으나, 막을 수 없었다. 궁(宮)이 사(死)하고 그의 아들 백고(伯固)가 즉위하였다. 순제(順帝)·화제(和帝) 연간에 다시 요동(遼東)을 자주 침범하여 노략질하였다.
7)○ 영제(靈帝) 건영(建寧) 2년(A.D.169; 高句麗 新大王 5)에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고구려(高句麗)를 토벌하여 포로 수백급(級)을 참수(斬首)하니, 백고(伯固)가 마침내 항복하므로 요동(遼東)에 예속시켰다.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에서 웅거(雄據)하자, 백고(伯固)가 그와 통호(通好)하였다. 백고(伯固)가 사(死)하고 그의 아들 이이모(伊夷摸)가 즉위하였다. 이이모(伊夷摸)는 백고(伯固) 때부터 이미 요동(遼東)을 자주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족(胡族) 5백여호(戶)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연간(A.D.196~219; 高句麗 故國川王 18~山上王 23)에 공손강(公孫康)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 나라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 읍락을 불살라 버렸다. 항복하였던 [호(胡)]족(族) 또한 [이이모(伊夷摸)를] 배반하니, 이이모(伊夷摸)는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그 후에 이이모(伊夷摸)가 다시 현도(玄菟)를 공격하자, 현도(玄菟)는 요동(遼東)과 힘을 합쳐 반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8)○ 이이모(伊夷摸)가 사(死)하고 그의 아들 위궁(位宮)이 즉위하였다. 일찍이 위궁(位宮)의 증조(曾祖) 궁(宮)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았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장성해지자 흉악하고 사나워 나라가 그 때문에 피폐하였다. 위궁(位宮)도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고려(高[구(句)]麗)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하는데, 그의 증조(曾祖) 궁(宮)과 닮았기 때문에 이름을 위궁(位宮)이라 지었다.[註013] 위궁(位宮)도 굳세고 용맹스러웠으며, 말을 잘 타고 사렵(射獵)도 잘하였다. 위(魏) 경초(景初) 2년(A.D.238; 高句麗 東川王 12)에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공손문의(公孫文懿)를 토벌하니, 위궁(位宮)은 주부(主簿)·대가(大加)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위(魏)나라의] 군사를 도와주도록 하였다.
9)○ 정시(正始) 3년(A.D.242; 高句麗 東川王 16)에 위궁(位宮)이 [요(遼)]동(東) 서안평(西安平)을 노략질하였다.[註014] [정시(正始)] 5년(A.D.244; 高句麗 東川王 18)에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나와 위궁(位宮)을 공격하여 비류(沸流)에서 크게 싸웠다. [위궁(位宮)이] 패전하여 달아나자, [관구(毌丘)]검(儉)은 추격하여 현(峴)에 이르러, 수레를 달아 매고 말을 묶어 환도산(丸都山)으로 올라가 그 도성(都城)을 도륙하였다. 위궁(位宮)은 홀로 그의 아내와 자식들만 데리고 멀리 도망하였다. [정시(正始)] 6년(A.D.245; 高句麗 東川王 19)에 [관구(毌丘)]검(儉)이 다시 공격하니, 위궁(位宮)은 황급히 제가(諸加)만 거느리고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관구(毌丘)]검(儉)은 장군 왕기(王頎)로 하여금 그를 추격하도록 하여 옥저(沃沮) 천 여리를 횡단하여 숙신(肅愼)의 남쪽에 이르러 돌에 공적을 새겨 기록하였다. 또 환도산(丸都山)을 깎아서 불내성(不耐城)이라 새겨두고 돌아왔다. 그 후에 다시 중국과 왕래하였다.
10)○ [서(西)]진(晋) 영가(永嘉)(A.D.307~312; 高句麗 美川王 8~13)의 난(亂) 때에 선비(鮮卑) 모용외(慕容廆)가 창려(昌黎)의 대극성(大棘城)을 점거하니, 원제(元帝)는 평주자사(平州刺史)를 제수(除授)하였다. 위궁(位宮)의 현손(玄孫) 을불리(乙弗利)가 요동(遼東)을 자주 침범하였으나, [모용(慕容)]외(廆)는 제지하지 못하였다. 불리(弗利)가 사(死)하고 아들 쇠(釗)가 대를 이어 즉위하였다.
11)○ [북(北)]위(魏) 건국(建國) 4년(A.D.342; 高句麗 故國原王 12)에 모용외(慕容廆)의 아들 황(晃)이 그 나라를 정벌하였다. 남쪽 길로 쳐 들어가 목저(木底)에서 전투하여 쇠(釗)의 군사를 크게 쳐부수고, 추격하여 환도(丸都)까지 이르니 쇠(釗)는 혼자서 도망하였다. [모용(慕容)]황(晃)은 쇠(釗)의 아버지 무덤을 파헤치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진귀한 보화와 남녀 5만 여명을 노략질하였으며, 그의 궁실(宮室)을 불살라 환도성(丸都城)을 파괴한 뒤 돌아왔다. 쇠(釗)는 뒷날 백제(百濟)에게 죽음을 당했다.[註015]
12)○ [동(東)]진(晋)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0년(A.D.385; 高句麗 故國壤王 2)에 [고(高)]구려(句麗)가 요동군(遼東郡)· 현도군(玄菟郡)을 공격하니, 후연(後燕)의 모용수(慕容垂)가 그의 아우 농(農)을 파견하여 [고(高)]구려(句麗)를 쳐서 2군(郡)을 되찾았다. [모용(慕容)]수(垂)의 아들 보(寶)는 [고(高)]구려왕(句麗王) 안(安)을 평주목(平州牧)으로 삼아 요동(遼東)· 대방(帶方) 2국왕(國 王)으로 책봉하였다. [안(安)은] 처음으로 장사(長史)· 사마(司馬)· 참군(參軍)의 관직을 설치하였고, 뒤에는 요동군(遼東郡)을 경략하였다.[註016]
13)○ [북위(北魏)] 태무(太武)[제(帝)] 때에 쇠(釗)의 증손(曾孫) 련(璉)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안동(安東)에 이르러, 표(表)를 올리고 방물(方物)도 바치면서 아울러 국휘(國諱)를 지어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태무(太武)[제(帝)]가 그 성의를 갸륵하게 여겨, 조명(詔命)으로 제계(帝系)의 이름 자(字)를 그 나라에 보내 주도록 하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파견하여 련(璉)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동이중랑장(領東夷中郞將)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高句麗王)에 배수(拜授)하였다. [이(李)]오(敖)는 고구려(高句麗)에 이르러 평양성(平壤城)에 있으면서, 그 나라의 여러 곳을 탐방(探訪)한 뒤 말하기를, “요동(遼東)에서 남쪽으로 1천 여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책성(柵城), 남쪽으로는 소해(小海), 북쪽으로는 옛 부여(夫餘)에 이르며, 백성들의 호수(戶數)는 전 위(魏)나라 때보다 3배나 된다.” 고 하였다. 그 후 공물(貢物)을 바치는 사신이 자주 왕래하여 해마다 황금(黃金) 200근· 백금(白金) 400근을 바쳤다.
14)○ 그 때 풍홍(馮弘)이 무리를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로] 도망하니, 태무(太武)[제(帝)]가 산기시랑(散騎侍郞) 봉발(封撥)을 파견하여 련(璉)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풍(馮)]홍(弘)을 보내도록 하였다. 련(璉)은 상서(上書)하여 [풍(馮)]홍(弘)과 함께 왕화(王化)를 받들겠다고 하면서도, 끝내 보내주지 아니하였다. 태무(太武)[제(帝)]가 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토죄(討罪)하려 하였으나,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뒷날을 기다려 거병(擧兵) 하자고 건의하므로, 태무(太武)[제(帝)]는 중지하였다. [풍(馮)]홍(弘) 역시 얼마 후에 련(璉)에게 죽음을 당했다.
15)○ 후에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헌문(獻文)[제(帝)]의 육궁(六宮)이 채워지지 못하였다고 하여, 련(璉)에게 내서(勑書)를 내려 그의 딸을 바치도록 하였다. 련(璉)이 표(表)를 올려, “딸은 이미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딸 중에서 구하여 조칙에 응하겠습니다.” 하니, 조정에서는 [이를]허락하고, 곧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상서(尙書) 이부(李敷) 등을 파견하여 국경까지 가서 폐물(幣物)을 보냈다. 그러나 련(璉)은, “[북위(北魏)] 조정은 지난날 풍씨(馮氏)와 혼인을 맺었다가 얼마 후에 그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은감(殷鑑)이 멀지 않으니 마땅히 핑계를 대고 거절하여야 합니다.” 라는 좌우 신하들의 말에 현혹되어, 마침내 글을 올려 조카딸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속이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다시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엄중히 문책하고, “조카딸이 분명 죽었다면 종친(宗親) 중의 어진 딸을 다시 뽑아 줄 것을 허락하겠소.” 라고 하였다. 련(璉)은, “만약 천자(天子)가 이전의 잘못을 용서하여 준다면 삼가 마땅히 조서(詔書)대로 봉행하겠습니다.” 하였는데, 그 무렵 헌문(獻文)[제(帝)]가 붕어(崩御)하여 중지되었다. 효문(孝文)[제(帝)] 때에 이르러 련(璉)이 바치는 공물(貢物)은 전보다 배로 늘었고, 그 보답으로 내리는 것도 역시 조금씩 더하여 주었다.
16)○ 그 때 광주(光州)의 [관사(官司)가] 련(璉)이 파견하여 [남(南)]제(齊)로 가던 사신 여노(餘奴) 등을 해상(海上)에서 체포하여 대궐로 압송하였다. 효문(孝文)[제(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나무라기를, “[남제(南齊)의 소(蕭)]도성(都城)은 직접 자기의 임금을 시해하고 강좌(江左)에서 제왕(帝王)의 칭호를 참칭(僣稱)하므로, 짐(朕)은 지금 옛 나라의 땅에다 멸망한 [송(宋)]나라를 일으켜 유씨(劉氏)의 끊어진 대(代)를 이어주려고 하오. 그런데 경(卿)은 외방(外方)에 있으면서 국경을 넘어가 찬적(簒賊)들과 통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번신(藩臣)으로서 지절(志節)을 지키는 도의(道義)이겠소? 그러나 지금 한가지 잘못으로 옛날 정분을 묵살할 수 없어 [잡혀온 사람들을] 곧장 되돌려 보내니, 용서하여줌을 고맙게 여겨 잘못을 뉘우치시오. 공경히 나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대가 거느린 땅을 평안히 안정시키고, 그대가 하는 일을 보고토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17)○ 태화(太和) 15년(A.D.491; 高句麗 長壽王 79)에 련(璉)이 사(死)하니 나이가 100여세였다. 효문(孝文)[제(帝)]는 동교(東郊)에서 거애(擧哀)하고, 알자복사(謁者僕射) 이안상(李安上)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태부요동군공(太傅遼東郡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강(康)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大鴻臚)를 파견하여 련(璉)의 손자 운(雲)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高句麗王)에 배수(拜授)하고, 의관(衣冠)· 복물(服物)· 거기(車旗) 등의 의식물(儀式物)도 하사하였다. 또 운(雲)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세자(世子)를 보내 입조(入朝)시키되, 교구(郊丘)에서 지내는 제천(祭天) 행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운(雲)이 글을 올려 [세자(世子)가]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그의 종숙(從叔) 승우(升于)로 하여금 사신을 따라 대궐에 나아가게 하니, [효문제(孝文帝)는] 그를 준엄하게 질책하였다. 이 뒤에도 해마다 빠짐없이 공물(貢物)을 바쳤다.
18) ○ 정시(正始) 연간(A.D.504~507; 高句麗 文咨王 13~16)에 선무(宣武)[제(帝)]가 동당(東堂)에서 고구려(高句麗)의 사신 예실불 (芮悉弗)을 인견(引見)하니, [예실불(芮悉弗)이] 아뢰기를, “고려(高[구(句)](麗)는 [북위(北魏)에]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 여러 대에 걸쳐 충성하여 땅에서 나거나 거두어들인 것은 조공(朝貢)에 빠뜨리지 않았었읍니다. 다만, 황금(黃金)은 부여(夫餘)에서 생산되고, 가옥(珂玉)은 섭라(涉羅)의 소산물인데, 지금 부여(夫餘)는 물길(勿吉)에게 좇김을 당하였고 섭라(涉羅)는 백제(百濟)에게 병합당하였습니다. [고구려(高句麗)]국(國)의 왕(王)인 신(臣) 운(雲)은 끊어진 나라를 잇는 의리를 생각하여, [부여(夫餘)나 섭라(涉羅)의 사람들을]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경내(境內)로 이주시켰습니다. 지금 [황금(黃金)과 가옥(珂玉)의] 두 물건을 왕부(王府)에 바치지 못하는 것은 실로 [물길(勿吉)과 백제(百濟)의]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였다. 선무(宣武)[제(帝)]가 이르기를, “고려(高[구(句)]麗)는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海外)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구이(九夷)의 교활한 자들을 정벌하여 왔소. 지난날 조공(朝貢)이 빠뜨려졌던 것은 그 책임이 연솔(連率)에게 있소. [경은] 꼭 짐(朕)의 뜻을 경(卿)의 임금에게 전하여 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부여(夫餘)와 섭라(涉羅)의] 2읍(邑)으로 하여금 옛터를 되찾게 하고, 토산물을 실수없이 항상 바치도록 하오.”라고 하였다.
19)○ 신구(神龜) 연간(A.D.518~519; 高句麗 文咨王 27~安藏王 1)에 운(雲)이 사(死)하니, 영태후(靈太后)는 동당(東堂)에서 거애(擧哀)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공(遼東郡公) 고려왕(高麗王)으로 추증(追贈)하였다. 또 그의 세자(世子) 안(安)을 진동장군(鎭東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공(遼東郡公) 고려왕(高麗王)에 배수(拜授)하였다.
정광(正光)(A.D.520~524; 高句麗 安藏王 2~6) 초에 광주(光州)의 [관사(官司)가] 또 다시 해상(海上)에서 양(梁)나라가 안(安)에게 주는 영동장군(寧東將軍)의 의관(衣冠)과 패검(珮劍) 및 사신 강법성(江法盛) 등을 체포하여 경사(京師)로 압송해 왔다. 안(安)이 사(死)하고 아들 연(延)이 즉위하였다. 효문제(孝文帝) 초에 조서(詔書)를 내려 연(延)을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가봉(加封)하였다.
20)○ 천평(天平) 연간(A.D.534~537; 高句麗 安原王 4~7)에 조서(詔書)를 내려 연(延)을 시중(侍中)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가봉(加封)하고, 나머지는 구례(舊例)와 같이 하였다. 연(延)이 사(死)하고 아들 성(成)이 즉위하였다. 무정(武定)(A.D.543~549; 高句麗 安原王 13~陽原王 5) 말까지 공물(貢物)과 사신이 오지 아니한 해가 없었다.[註017]
21)○ 대통(大統) 12년(A.D.546; 高句麗 陽原王 2)에 사신을 서위(西魏)[註018]로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 [註019] [북(北)]제(齊)[註020]가 동위(東魏)로부터 선위(禪位)받은 해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북(北)]제(齊)에 조공(朝貢)하였다. [북(北)]제(齊) 선문(文宣)[제(帝)]는 성(成)을 사지절(使持節) 시중(侍中)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가봉(加封)하고, 영동이교위(領東夷校尉) 요동군공(遼東郡公) 고려왕(高麗王)은 그대로 인정하였다.[註021]
22)○ 천보(天保) 3년(A.D.552; 高句麗 陽原王 8)에 문선(文宣)[제(帝)]는 영주(營州)에 이르러, 박릉(搏陵) 최유(崔柳)를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보내어 위(魏)나라 말(末)에 [고구려(高句麗)로] 흘러 들어간 백성들의 [송환을] 요구케 하면서, [최(崔)]유(柳)에게 조칙(詔勑)하기를, “[고구려(高句麗)가]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라.” 고 하였다. [고구려(高句麗)에] 이르러 허락을 받지 못하자, [최(崔)]유(柳)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주먹으로 성(成)을 쳐 용상(龍床) 밑으로 떨어 뜨렸다. 성(成)의 좌우 [신하들은] 숨을 죽이고 감히 꼼짝도 못한 채 사죄하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최(崔)]유(柳)는 5천호(戶)를 돌려받아 복명(復命)하였다.[註022] 성(成)이 사(死)하고 아들 탕(湯)이 즉위하였다.[註023]
23)○ 건명(乾明) 원년(A.D.559; 高句麗 平原王 1)에 [북(北)]제(齊) 폐제(廢帝)가 탕(湯)을 사지절(使持節) 영동이교위(領東夷校尉) 요동군공(遼東郡公) 고려왕(高麗王)으로 삼았다.[註024] [북(北)]주(周) 건덕(建德) 6년(A.D.577; 高句麗 平原王 19)에 탕(湯)이 사신을 [북(北)]주(周)에 보내오니, 무제(武帝)는 탕(湯)을 상개부의동대장군(上開府義同大將軍) 요동군공(遼東郡公) 요동왕(遼東王)으로 삼았다.[註025] 수(隋) 문제(文帝)가 [북주(北周)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아 탕(湯)이 사신을 보내어 궁궐(宮闕)에 이르자, [문제(文帝)는 탕(湯)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진수(進授)하는 동시에 고려왕(高麗王)으로 고쳐 책봉하였다. 이 뒤로부터 해마다 사신과 조공(朝貢)이 끊이지 아니하였다.[註026]
24)○ 그 나라는 동쪽으로는 신라(新羅)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遼)[수(水)]에 닿으니 [동서(東西)가] 2천리이며, 남쪽으로는 백제(百濟)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말갈(靺鞨)과 인접하니 [남북(南北)이] 1천여리이다. 사람들은 모두 토착민으로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하고, 의복은 베옷· 비단옷 및 가죽옷을 입는다. 토지가 척박하여 양잠(養蠶)과 농사로써 충분히 자급하지 못하므로 음식을 절약하여 먹는다. [고구려(高句麗)]왕(王)은 궁실(宮室)을 잘 지어 치장한다. 도읍은 평양성(平壤城)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하는데, 동서의 거리가 6리로 산(山)을 따라 굴곡(屈曲)을 이루며, 남쪽으로는 패수(浿水)에 닿아 있다. 성 안에는 군량과 무기만을 저장하여 구적(寇賊)이 쳐들어 오는 날에 대비하였다가, [적이 쳐들어 오면] 곧 성 안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킨다. 왕(王)은 그 곁에 궁실(宮室)을 별도로 지어놓지만 평상시에는 거처하지 않았다. 그 외에 또 국내성(國內城) 및 한성(漢城)이 있는데, 역시 별도(別都)이다. 그 나라에서는 「삼경(三京)」이라 부른다. 또 요동(遼東)[성(城)]· 현도(玄菟)[성(城)] 등 수십성(城)이 있는데, 모두 관사(官司)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신라(新羅)와는 늘 서로 침탈하여 전쟁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25)○ 관직(官職)은 대대로(大對盧)· 태대형(太大兄)· 대형(大兄)· 소형(小兄)· 경후사(竟侯奢)· 오졸(烏拙)· 태대사자(太大使者)· 대사자(大使者)· 소사자(小使者)· 욕사(褥奢)· 예속(翳屬)· 선인(仙人)의 모두 12등급이 있어, 안팎의 일을 나누어 관장한다. 대대로(大對盧)는 세력의 강약(强弱)에 따라 서로 싸우다 이기면 빼앗아 스스로 되고, 왕(王)의 임명에 의하지 아니한다. 또 내평(內評)· 오부(五部)· 욕살(褥薩)등이 있다.[註027]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折風)을 쓴다. 그 모양은 고깔(변,弁)과 같은데, 사인(士人)은 두개의 새깃을 더 꽂는다. 귀(貴)한 사람들은 그 관(冠)을 소골(蘇骨)[註028]이라고 하는데, 대부분 자주빛 비단으로 만들어 금(金)이나 은(銀)으로 장식한다. 의복(衣服)은 소매가 긴 적삼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흰 가죽띠에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부인(婦人)들은 치마와 저고리에 선(襈)을 두른다. 서책은 오경(五經) 및 삼사(三史)와『삼국지(三國志)』·『진양추(晋陽秋)』가 있다. 병기(兵器)는 중국과 대략 같다. 봄·가을에는 사냥대회를 여는데, 왕(王)이 직접 참석한다.
26)○ [인두(人頭)]세(稅)[註029]는 포(布) 5필(疋)·곡(穀) 5석(石)을 바친다. 유인(游人)은 3년 만에 한번 세(稅)를 바치되, 10인이 공동으로 세포(細布) 1필을 바친다. 조(租)는 [상(上)]호(戶)는 1석(石), 다음은 7두(斗), 그 다음은 5두(斗)이다. 그 형법은 반역(叛逆) 및 모역(謀逆)한 자는 기둥에 묶어 불로 지진 다음 목을 베고, 그 집은 전부 몰수하였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0배[註030]를 배상해야 한다. 만약 가난하여 배상할 수 없는 자나 공사(公私)간에 빚을 진 자에게는 모두 그의 아들이나 딸을 노비(奴婢)로 주어 보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형벌을 시행함이 매우 엄준하므로, 법을 범하는 자가 드물다.
27)○ 악기는 오현(五絃)· 금(琴)· 쟁(箏)· 필율(篳篥)· 횡취(横吹)· 소(簫)· 고(鼓) 등이 있으며, 곡조에 맞추어 갈대로 [만든 피리로] 합주한다. 해마다 년초(年初)에는 패수(浿水)가에 모여 놀이를 하는데, 왕(王)은 요여(腰轝)를 타고 나가 우의(羽儀)를 나열해 놓고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王)이 옷을 물에 던져 넣는데, 좌·우의 두패로 나누어 물과 돌을 서로 [그 옷에다] 뿌리거나 던지고,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세번 하다가 끝낸다. 풍속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몸가짐을 소중히 여겨 종종걸음치는 것을 공경으로 여긴다. 절할 적에는 한쪽 다리를 끌고, 서있을 적에는 대개 반공(反拱)을 하며, [길을] 걸을 적에는 꼭 소매에 손을 꽂는다. 성질은 간사한 점이 많고, 말은 속되고 야하며 친소(親疎)를 구별하지 아니한다. 부자(父子)간에도 한 시냇물에서 목욕하며 한 방에서 잔다.
28)○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지낸다.[註031] 그 공회(公會) 때의 의복은 모두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다리를 쭈그리고 앉기를 좋아하고, 식사할 적에는 조궤(俎机)를 사용한다. 키가 3척(尺) 쯤 되는 말이 나는데, 옛날 주몽(朱蒙)이 탔던 말 종자라고 한다. 바로 과하마(果下馬)가 그것이다. 풍속은 음란하여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유녀(游女)가 많으니, [그녀에게는] 일정한 남편이 없다. 밤이면 남녀가 떼를 지어 모여 노는데, 귀천(貴賤)의 구분이 없다.
29)○ 혼인(婚姻)에 있어서는 남녀(男女)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킨다. 남자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만 보낼 뿐이지 재물을 보내 주는 예는 없다. 만일 여자 집에서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수치스럽게 여기며 ‘[딸을] 계집종으로 팔아 먹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 안치해 두었다가, 3년이 지난 뒤 길일(吉日)을 가려 장사지낸다. 부모(父母)와 남편의 상(喪)에는 모두 3년복(服)을 입고, 형제의 [상(喪)에는] 3개월간 입는다. 초상에는 눈물을 흘리며 곡(哭)하지만, 장사 지낼때는 북치고 춤추며 풍악을 울리면서 장송(葬送)한다. 매장(埋葬)이 끝나면 죽은 사람이 생존시에 썼던 의복· 노리개· 수레· 말 등을 가져다가 무덤옆에 놓아두는데,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투어 [그것을] 가져간다.
30)○ 불교(佛敎)를 믿고 귀신(鬼神)을 섬기어 음사(淫祠)가 많다. 신묘(神廟)가 두군데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夫餘神)이라 하여 나무를 조각하여 부인상(婦人像)을 만들었고, 하나는 고등신(高登神)[註032]이라 하여 그들의 시조이며 부여신(夫餘神)의 아들이라고 한다. [두 신묘(神廟)에는] 모두 관사(官司)를 설치해 놓고, 사람을 파견하여 수호하는데, [그 두 신(神)은] 대체로 [주몽(朱蒙)의 어머니인] 하백(河伯)의 딸과 주몽(朱蒙)이라고 한다.[註033] 수(隋)나라가 진(陳)나라를 평정한 뒤에는 탕(湯)이 대단히 두려워하여 군사를 배치하고 곡식을 저축하여 항거할 계책을 세웠다.
31)○ 개황(開皇) 17년(A.D.597; 高句麗 嬰陽王 8)에 문제(文帝)가 새서(璽書)를 내려 힐책하기를, “[고구려(高句麗)는] 매년 사신 을 보내어 해마다 조공(朝貢)하면서 번부(藩附)라고 자칭하고 있지만, 진정한 예절은 다하지 않고 있소. 말갈(靺鞨)을 못견디게 괴롭히고 거란(契丹)도 금고(禁固)시켰소. 여러해 전에는 비밀리 재물을 뿌려 [우리 나라의] 소인(小人)들을 선동하여 사사로이 노수(弩手)들을 데리고 그대 나라로 도망해 가도록 하였소. 이 어찌 나쁜 짓을 하기 위하여 [노수(弩手)들을] 훔쳐간 것이 아니겠는가? [수(隋)의] 사신을 빈 객관(客館)에 앉혀 놓고 삼엄하게 지켰으며, 또 자주 기마병(騎馬兵)을 보내어 변방 사람들을 살해하기도 하였고, 항상 의심하여 [수(隋)나라의] 사정을 비밀리 염탐하곤 하였소. 간절히 효유(曉諭)하여 개과천선(改過遷善)할 기회를 주겠소.” 라고 하였다. 탕(湯)은 이 글을 받고 황공(惶恐)하여 표(表)를 올려 사죄하려 하였지만, 마침 병으로 졸(卒)하였다.[註034]
32)○ 아들 원(元)이 즉위하자, 문제(文帝)는 사신을 [파견하여] 원(元)을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에 배수(拜授)하고, 요동공(遼東公)의 봉작(封爵)을 이어받도록 하면서 의복 한 벌도 하사 하였다. 원(元)이 표(表)를 올려 사은(謝恩)하고 아울러 상서(祥瑞)을 축하하면서, [고구려(高句麗)]왕(王)으로 책봉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문제(文帝)는 특별히 [원(元)을] 왕(王)으로 책봉하였다. 그 이듬해에 [원(元)이] 말갈(靺鞨)의 기병(騎兵) 1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 [지방]에 침략하니,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세충(韋世沖)이 이를 격퇴시켰다. [문(文)]제(帝)는 크게 노하여 한왕(漢王) 량(諒)을 원수(元帥)로 임명하고,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을 총동원하여 토벌하게 하는 한편, 조서(詔書)를 내려 그의 작위(爵位)를 삭탈하였다. 그 때 군량 수송이 중단되어 육군(六軍)의 군량이 결핍되었으며, 군사가 임유관(臨渝關)을 나와서는 전염병마저 번져 수(隋)나라 군대의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수(隋)나라 군대가] 요수(遼水)에 주둔하게 되자, 원(元) 역시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表)를 올려 ‘요동(遼東) 분토(糞土)의 신(臣) 원(元) 운운(云云)’하였다. 문제(文帝)는 이에 군사를 철수시키고, 고구려(高句麗)를 예전과 같이 대우하였다. 원(元)도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33)○ 양제(煬帝)가 즉위하여서는 천하가 전성(全盛)하여, 고창(高昌)[국(國)]왕(王)과 돌궐(突厥)의 계인가한(啓人可汗)이 친히 [수(隋)나라의] 대궐에 나아와 공헌(貢獻)하였다. 이때에 [양제(煬帝)가] 원(元)에게 입조(入朝)토록 명하니, 원(元)은 두려워하여 번국(藩國)의 예를 자못 소홀히 하였다. 대업(大業) 7년(A.D.611; 高句麗 嬰陽王 22)에 [양(煬)]제(帝)가 원(元)의 죄를 물어 토벌하고자 친히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遼東) 지방에 군영을 설치하고,[註035] 길을 나누어 군사를 출동시켜 각각 [요동(遼東)]성(城) 아래에 군사를 집결시키도록 하였다. 고려(高[구(句)]麗)는 [요동성(遼東城)에서] 나와 싸우다가 매우 불리하자, 모두 성(城)을 굳게 지켰다. [양(煬)]제(帝)는 제군(諸軍)에 공격을 명령하였다. 또 제장(諸將)에게 조칙(詔勑)를 내려, "고(高)[구(句)]려(麗)가 만약 항복하면 즉시 항복을 받아들이고, 함부로 군사를 풀어 [성 안으로] 쳐들어 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요동(遼東)]성(城)이 함락될 즈음 적(賊: 고구려,高句麗)이 곧 항복하겠다고 하였으나, 제장(諸將)은 칙지(勑旨)에 따라 함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치지 못하고, 먼저 [양제(煬帝)에게] 달려가서 상주(上奏)하였다. 답보(答報)가 도착할 무렵이면, 적군(賊軍)의 방어 역시 정비되어 다시 성(城)을 나와 항전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되풀이 하였으나, [양(煬)]제(帝)는 깨닫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군량은 떨어지고 군사는 지친데다가 군량 수송마저 계속되지 못하니, 제군(諸軍)에서 패전이 속출하였다. 이에 [양제(煬帝)는] 군사를 철수시켰다. 이 전쟁에서는 단지 요수(遼水) 서쪽에서 적(賊: 고구려,高句麗)의 무려라(武厲邏)만을 함락시켜 요동군(遼東郡) 및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여 놓고 돌아 왔을 뿐이다.
34)○ [대업(大業)] 9년(A.D.613; 高句麗 嬰陽王 24)에 제(帝)가 또 다시 친정(親征)하였다. 제군(諸軍)에 조칙(詔勑)을 내려 상황에 따라 적절히 [전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제장(諸將)이 길을 나누어 [요동(遼東)]성(城)을 총공격하니, 적(賊)[군(軍)]의 기세가 날로 위축되었다. 이 때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煬)]제(帝)는 크게 두려워하여 즉시 그날로 육군(六軍)을 이끌고 돌아왔다. [이 때]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고려(高[구(句)]麗)로 망명하여 들어갔다. 고려(高[구(句)]麗)는 [수(隋)나라의] 정보를 낱낱이 알고서 정예병(精銳兵)을 모두 출동시켜 추격하니, 후속 부대가 대부분 패전(敗戰)하였다.
35)○ [대업(大業)] 10년(A.D.614; 高句麗 嬰陽王 25)에 또 다시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때마침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곳곳마다 교통이 두절되니, 군사들이 대부분 기한(期限)에 맞추어 오지 못했다. [수군(隋軍)이] 요수(遼水)에 이르자, 고려(高[구(句)]麗)도 피폐되어졌기 때문에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청하면서 곡사정(斛斯政)을 압송하여 속죄하였다. [양(煬)]제(帝)는 이를 허락하고 회원진(懹遠鎭)에 주둔하면서 항복을 받았다. 아울러 포로와 노획한 군기(軍器)들을 가지고 돌아 왔다. [양제(煬帝)는] 경사(京師)에 이르러 고려(高[구(句)]麗)의 사신으로 하여금 친히 태묘(太廟)에 고(告)하도록 한 뒤 그를 구류시켰다. 이어서 원(元)에게 입조(入朝)하라고 불러들였으나, 원(元)이 끝내 오지 아니하였다. [양(煬)]제(帝)가 또 다시 [고구려에 대한]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때마침 천하가 어지러워져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註036]
2. 백제(百濟) ○ 백제(百濟)[註001]
1) ○ 백제국(百濟國)은 [그 선대(先代)가] 대체로 마한(馬韓)의 족속이며,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註002] 그 왕(王)이 출행(出行) 중에 시녀(侍女)가 후(後)[궁(宮)]에서 임신하였다. 왕(王)은 환궁(還宮)하여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시녀(侍女)는, “앞서 하늘에서 큰 달걀만한 기운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감응(感應)되어 임신하였습니다.”고 아뢰었다. 왕(王)은 그 시녀(侍女)를 살려 주었다. 뒷날 아들을 낳으매 왕(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가 입김으로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뒤에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왕(王)은 [이를] 신령스럽게 여겨 그 아이를 기르도록 명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장성하면서 활을 잘 쏘자, 왕(王)은 그의 용맹스러움을 꺼려 또 다시 죽이려고 하였다. 동명(東明)이 이에 도망하여 남쪽의 엄체수(淹滯水)[註003]에 다다라,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東明)은 그것을 딛고 물을 건너 부여(夫餘)에 이르러 왕(王)이 되었다.
2)○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註004]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信義)가 두터웠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帶方)에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註005] 한(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는 딸을 [구태(仇台)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强國)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百家)가 건너 왔다(제,濟)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고 불렀다.[註006] 그 나라는 동쪽으로는 신라(新羅)에 닿고 북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와 접한다.[註007] 서남쪽으로는 모두 대해(大海)로 경계 지어져 있고 소해(小海)의 남쪽에 위치하는데,[註008] 동서의 거리는 450리이며 남북의 거리는 900여리이다.[註009
3)○ 그 도성(都城)은 거발성(居拔城)으로 고마성(固麻城)이라고도 부른다.[註010] 지방에는 또 5방(方)[註011]이 있다. 중방(中方)은 고사성(古沙城)[註012], 동방(東方)은 득안성(得安城),[註013] 남방(南方)은 구지하성(久知下城),[註014] 서방(西方)은 도선성(刀先城),[註015] 북방(北方)은 웅진성(態津城)[註016]이라 한다. 왕(王)의 성(姓)은 여씨(餘氏)[註017]로서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며,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르는데, 이는 중국말로 모두 왕(王)이라는 뜻이다. 임금의 아내는 [어륙(於陸)]이라고 부르는데,[註018] 중국말로 왕비라는 뜻이다.
4)○ 관직은 16품이 있다. 좌평(左平)[註019]은 5명으로 1품(品), 달솔(達率)[註020]은 30명으로 2품(品), 은솔(恩率)은 3품(品), 덕솔(德率)은 4품(品), 우솔(杅率)[註021]은 5품(品), 내솔(奈率)은 6품(品)인데, [6품(品)] 이상(以上)은 관(冠)을 은화(銀華)[註 022]로 장식하였다. 장덕(將德)은 7품(品)으로 자대(紫帶)를, 시덕(施德)은 8품(品)으로 조대(皂帶)를, 고덕(固德)은 9품(品)으로 적대(赤帶)를, 계덕(季德)은 10품(品)으로 청대(靑帶)를 둘렀다. 11품(品)인 대덕(對德)과 12품(品)인 문독(文督)[註023]은 모두 황대(黃帶)를 둘렀다. 13품(品)인 무독(武督)과 14품(品)인 좌군(佐軍)· 15품(品)인 진무(振武)와 16품인 극우(剋虞)[註024]는 모두 백대(白帶)를 둘렀다. 은솔(恩率) 이하의 관직에는 일정한 정원(定員)이 없고, 각각 부사(部司)가 있어 여러 가지 사무를 나누어 관장한다. 내관(內官)[註025]으로는 전내부(前內部)· 곡내부(穀內部)[註026]· 내략부(內掠部)· 외략부(外掠部)· 사구부(司寇部)· 마부(馬部)· 도부(刀部)· 공덕부(功德部)· 약부(藥部)· 목부(木部)· 법부(法部)· 후궁부(後宮部)가 있다. 외관(外官)[註027]으로는 사군부(司軍部)· 사도부(司徒部)· 사공부(司空部)· 점구부(點口部)· 객부(客部)· 외사부(外舍部)· 주부(綢部)·일관부(日官部)· 시부(市部)[註028]가있다.[註029] 장리(長吏)[註030]는 3년마다 한번씩 교체한다.
5)○ 도성에는 1만호(戶)가 거주하고 5부(部)[註031]로 나뉘었는데, 상부(上部)·전부(前部)·중부(中部)·하부(下部)·후부(後部)가 있으며, 부(部)에는 5항(巷)이 있어 사(士)와 서인(庶人)이 거주한다. 부(部)마다 병사 5백명씩을 통솔한다. 5방(方)에는 각각 방령(方領)[註032] 1명씩을 두었는데 달솔(達率)로 임명하며, 방좌(方佐)가 그를 보좌하였다. 방(方)마다 10군(郡)이 있고, 군(郡)에는 장수(장,將) 3명씩을 두는데, 덕솔(德率)로 임명하였다. [각군(各郡)에서] 거느리는 군사는 1천 2백명 이하 7백명 이상이었다.[註033] 도성(都城) 안팎에 사는 서인(庶人) 및 기타 조그마한 성(城)들이 모두 나뉘어 여기에 예속되었다. 사람들은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왜(倭) 등이 섞여 있고, 또 중국 사람도 있다.[註034]
6)○ 그들의 음식과 의복은 고구려(高[句]麗)와 대략 같다.[註035] 조배(朝拜)나 제사지낼 때에는 관(冠)의 양쪽곁(양상,兩廂)에 [새의] 깃을 꽂았으나, 군사(軍事) 때는 그렇지 않았다. 절하고 뵙는 예는 양 손을 땅에 짚는 것으로 예의(禮儀)를 나타냈다. 부인(婦人)들은 분을 바르거나 눈썹을 그리지 아니하며, 처녀 적에는 머리를 땋아 뒤로 드리웠다가 시집가면 두갈래로 나누어 머리 위로 틀어 올린다. 옷은 도포(道袍)와 비슷하면서 소매가 약간 컸다.
7)○ 무기로는 활· 화살· 칼· 창이 있다. 풍속이 말 타고 활쏘기를 숭상하고, 아울러 고서(古書)와 사서(史書)를 애독(愛讀)하여 뛰어난 사람은 제법 문장을 엮을 줄도 알며[註036] 관청(官廳) 사무에도 능숙하였다. 또 의약(醫藥)· 시구(蓍龜) 및 상술(相術)·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대해서도 알았다. 중과 비구니가 있고 사탑(寺塔)은 많아도 도사(道士)는 없다. 고각(鼓角)· 공후(箜篌)· 쟁간(箏竿)· 호적(箎笛) 따위의 악기가 있고, 투호(投壺)· 저포(摴蒲)· 농주(弄珠)· 악삭(握槊) 등의 여러 가지 오락이 있었는데, 특히 바둑을 좋아한다. 송나라 원가력(元嘉曆)을 사용하여 인월(寅月)을 세수(歲首)로 삼았다. 세(稅)는 포(布)·견(絹)· 사(絲)· 마(麻) 및 쌀 등으로 부과하는데, 그 해의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어 징수하였다. 그 나라의 형벌은 반역한 자·퇴각한 군사 및 사람을 죽인 자는 목을 베었다. 도둑질한 자는 귀양보내는 동시에 그 장물(臟物)의 2배를 징수하였다. 부인(婦人)으로서 간통죄를 범하면 남편 집의 계집종 으로 삼았다.
8)○ 결혼하는 예절은 중국의 풍속과 대략 같다. 부모상(父母喪)이나 남편 상(喪)에는 3년동안 복을 입고,[註037] 그 나머지 친척들에 대해서는 장례가 끝나면 복을 벗게 하였다. 토지는 낮고 습하였으며,[註038] 기후가 따뜻하여 사람들이 모두 산에서 산다. 굵은 밤이 생산되며, 오곡(五穀)· 잡과(雜果)· 채소 및 술· 안주 등은 대체로 중국과 같다. 다만 낙타·노새·당나귀·양·거위·오리 따위는 없다.[註039] 나라 안에는 여덟 씨족의 대성(大姓)이 있으니,[註040] 사씨(沙氏)[註041]· 연씨(燕氏)[註042]· 이씨(刕氏)[註043]· 해씨(解氏)[註044]· 진씨(眞氏)[註045]· 국씨(國氏)[註046]· 목씨(木氏)· 묘씨(苗氏)[註047]이다. 그 나라의 왕(王)은 해마다 매 계절의 중월(仲月)에 하늘 및 오제(五帝)의 신(神)에게 제사지낸다. 그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도 도성(都城) 안에 건립해 놓고, 해마다 네차례씩 제사지낸다.[註048] 백제(百濟)의 서남쪽에 사람이 사는 섬이 15군데 있는데, 모두 성읍(城邑)이 있다.[註049]
9)○ [북(北)]위(魏) 연흥(延興) 2년(A.D.472; 百濟 蓋鹵王 18)에 그 왕 여경(餘慶)[註050]이 처음으로 관군장군(冠軍將軍)[註051] 부마도위(駙馬都尉)[註052] 불사후(弗斯侯)[註053] 장사(長史)[註054] 여래(餘禮)[註055]와 용양장군(龍驤將軍)[註056] 대방태수(帶 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註057] 등을 파견하여,[註058] 표(表)를 올려[註059] 자신의 의사를 알리기를, “신(臣)은 고구려(高[句]麗)와 더불어 부여(夫餘)에서 나왔으므로,[註060] 선대(先代) 적에는 정분을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조(先祖)인 쇠(釗)는 이웃 나라간의 우호를 경솔히 폐기하고, 신(臣)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註061] 그리하여 신(臣)의 선조(先祖)인 수(須)[註062]가 군대를 정돈하고 맹렬히 돌격하여 쇠(釗)의 머리를 베어 효시(梟示)하였더니,[註063] 그 뒤로는 감히 남쪽을 넘보지 못하였습니다. 풍씨(馮氏)[註064]의 국운이 다하여 그 유민(遺民)들이 [고구려(高句麗)로] 도망해 오면서 추악한 무리(추류醜類)가 점차 강성하여져, 끝내 [백제(百濟)도 그들의] 침략과 위협을 당하여 원한이 얽히고 전화(戰禍)가 연이은 것이 30여년입니다.[註065] 만일 천자(天子)의 인자(仁慈)와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라도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면 속히 장수 한 사람을 파견하여 신(臣)의 나라를 구원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後宮)에서 청소나 하게 하고,[註066] 아울러 자제(子弟)들도 보내어 마굿간에서 말을 기르도록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라도 감히 저의 소유라 여기지 않겠습니다.[註067] 지난 경진년(庚辰年)[註068] 이후 신(臣)의 나라 서쪽 바다 가운데에서[註069] 시체 10여구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衣服)· 기물(器物)· 안장· 굴레 등을 얻었사온데, 살펴보니 고구려(高[句]麗)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들으니 이는 바로 폐하(陛下)의 사신이 신(臣)의 나라로 내려오던 중에, 뱀처럼 흉악한 것들이 길을 막고 바다에 침몰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註070] 이제 습득한 안장 하나를 바쳐 실증(實證)해 보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10)○ [북위(北魏)] 헌문(獻文)[제(帝)][註071]는 [백제가] 매우 먼 곳에서 험난함을 무릅쓰고 들어와 조공(朝貢)하였기 때문에 예우(禮遇)를 매우 후하게 하고, 사신 소안(邵安)을 파견하여 그 사신과 함께 돌아가도록 하였다.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표(表)를 받고 무양(無恙)함을 알았소. 그대가 고구려(高[句]麗)와 화목하지 못하여 침범을 당하게 되었지만, 진실로 의리(義理)에 순응하고 인(仁)으로써 지킨다면, 어찌 구수(寇讎)를 걱정할 것이 있겠소? 전에 파견한 사신은 바다를 건너가 변방 밖의 먼 곳의 나라를 위무하도록 하였던 것이오. 그로부터 지금까지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여, 생사와 도착 여부를 자세히 알지 못하였소. 그대가 보낸 안장이 사신이 탔던 안장인가 비교하여 보았더니,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소. 반신반의한 일을 가지고 꼭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소. 천하를 경략(經略)하는 중요 방법은 별지(別旨)에 갖추어져 있소.” 라고 하였다.
11)○ 또 조서(詔書)에, “고려(高[구(句)]麗)는 선대(先代)부터 번국(藩國)으로 자칭하며 직공(職供)하여 온 지 오래인지라, 그대 나라와는 옛날부터 틈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 대해서는 아직 명령을 거역한 잘못이 없소. 그런데 그대가 사신(使臣)을 처음으로 통교(通交)하면서 곧장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여 달라고 요구하는지라 얼마동안 사안(事案)을 검토하여 본 즉 이유 역시 충분하지 못하였소. [그대가] 바친 비단과 해산물이 모두 다 도착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정성은 알겠소. 지금 여러 가지 물품을 별지(別旨)와 같이 하사하오.” 하였다. 또 연(璉)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소(邵)]안(安) 등을 호송하라고 하였다. [소안(邵安)등이] 고구려(高[句]麗)에 이르자, 연(璉)은 과거에 여경(餘慶)과 원수진 것이 있다는 핑계로 [소안(邵安) 일행이] 동쪽 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소(邵)]안(安) 일행은 이로 말미암아 모두 되돌아 왔다. 이에 [연(璉)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몹시 나무랐다.
12)○ [연흥(延興)] 5년(A.D.475; 百濟 文周王 1)에 [소(邵)]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백제로 가] 여경(餘慶)에게 새서(璽書)를 하사하고, 그 성절(誠節)을 포상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邵)]안(安) 등은 바닷가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 끝내 [백제(百濟)에] 가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백제(百濟)는] 진(晋)· 송(宋)· 제(齊)· 양(梁)나라[註072]가 강동(江東)[註073]에 웅거할 때부터도 사신을 보내어 번국(藩國)으로 자칭하고 아울러 봉작(封爵)도 받았다. 또 위(魏)나라와도 [사신이] 끊이지 아니하였다.[註074] [북(北)]제(齊)가 동위(東魏)로부터 선위(禪位)받았을 때에도 그 왕(王) 융(隆)[註075]은 사신을 파견하였다. [융(隆)이] 갑자기 사(死)하자,[註076] 아들 여창(餘昌)이 역시 [북(北)]제(齊)에 사신을 파견하였다.[註077]
13)○ 무평(武平) 원년(A.D.570; 百濟 威德王 17)에 [북(北)]제(齊)의 후주(後主)는 여창(餘昌)을 사지절(使持節) 시중(侍中)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대방군공(帶方君公) 백제왕(百濟王)으로 예전처럼 책봉하였다.[註078] [무평(武平)] 2년(A.D.571; 百濟 威德王 18)에 또 여창(餘昌)을 지절(持節) 도독동청주제군사(都督東靑州諸軍事)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삼았다.[註079] [북(北)]주(周) 건덕(建德) 6년(A.D.577; 百濟 威德王 24)에 [북(北)]제(齊)가 멸망하자, 여창(餘昌)이 비로소 사신을 파견하여 [북(北)]주(周)와 통하였다.[註080] 선정(宣政) 원년(A.D.578; 百濟 威德王 25)에 또 사신을 파견하여 와 [공물(貢物)을] 바쳤다.[註081]
14)○ 수(隋)나라 개황(開皇)(A.D.581~600; 百濟 威德王 28~武王 1)초에 여창(餘昌)이 또 [수(隋)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方物)을 바치니, [여창(餘昌)을] 상개부(上開府) 대방군공(帶方君公) 백제왕(百濟王)으로 제수(除授)하였다.[註082] [수(隋)나라가] 진(陳)나라를 평정한 해에 [수(隋)의] 전선(戰船)이 표류하여 해동(海東)의 탐모라국(躭牟羅國)[註083]에 닿았다. 그 전선(戰船)이 돌아가면서 백제(百濟)를 통과하게 되자, [여(餘)]창(昌)은 필수품을 매우 후하게 주어 보내고 아울러 사신도 보내어 표(表)를 올려 진(陳)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문제(文帝)는 이를 갸륵하게 여겨 조서(詔書)를 내려, “그대 나라는 매우 멀리 동떨어져 있어 왕래하기가 지극히 어려울 터이니, 지금부터는 해마다 조공(朝貢)할 필요가 없소.” 라고 하였다. 이에 [백제(百濟)] 사신이 춤을 추고 돌아 갔다.[註084] [개황(開皇)] 18년(A.D.598; 百濟 惠王 1)[註085]에 여창(餘昌)이 그의 장사(長史) 왕변나(王辯那)를 사신으로 보내와 방물(方物)을 바쳤다. 때 마침 [수(隋)나라가] 요동지역(遼東之役)을 일으키자, [백제(百濟)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군사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자청하는 표를 올렸다. [문(文)]제(帝)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高[句]麗)가 대략 그 사실을 알고는, 군사를 내어 백제(百濟)의 국경을 침범하였다. 여창(餘昌)이 사(死)하고 아들 여장(餘璋)이 즉위하였다.[註086]
15)○ 대업(大業) 3년(A.D.607; 百濟 武王 8)에 여장(餘璋)이 사신 연문진(燕文進)[註087]을 [수(隋)나라로]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그 해에 또 사신 왕효린(王孝隣)[註088]을 파견하여 조공(朝貢)하고, 고구려(高[句]麗)를 토벌하자고 요청하므로, 양제(煬帝)는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高[句]麗)의 동정을 엿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여장(餘璋)은 안으로는 고구려(高[句]麗)와 우호(友好)를 통하면서, 간사한 마음을 가지고 중국을 엿본 것이었다. [대업(大業)] 7년(A.D.611; 百濟 武王 12)에 [양(煬)]제(帝)가 친히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려 하자, 여장(餘璋)은 그의 신하 국지모(國智牟)를 사신으로 보내와 출군(出軍) 시기를 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註089] [양(煬)]제(帝)는 대단히 기뻐하여 상(賞)을 후하게 하사하고, 상서(尙書) 기부랑(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百濟)에 보내어 [출군(出軍) 시기를] 서로 알고 있도록 하였다.
16)○ 이듬 해에 [수(隋)나라] 6군(軍)이 요수(遼水)를 건너자, 여장(餘璋) 역시 국경에다 군사를 엄중히 배치하여 놓고, [수(隋)나라의] 군사를 돕는다고 공공연히 말만 하면서 실제로는 양단책(兩端策)을 쓰고 있었다. 얼마 후 [백제(百濟)는] 신라(新羅)와 틈이 생겨 자주 전쟁하였다. [대업(大業)] 10년(A.D.614; 百濟 武王 15)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그 뒤로는 천하가 어지러워져 사신이 마침내 끊어졌다. 그 나라의 남쪽에서 바다로 석달동안 가면 탐모라국(躭牟羅國)이 있다. 남북으로는 천여리이고 동서로는 수백리이며, 토산물로는 노루와 사슴이 많은데, 백제(百濟)에 부용(附庸)되어 있다. 서쪽으로 사흘을 가면 맥국(貊國)에 닿는데, [그 나라는] 천(千)여리가 된다고 한다.
3. 신라(新羅) ○ 신라전(新羅傳)[註001]
1) ○신라(新羅)[註002]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었다. 그 땅은 고구려(高[句]麗) 동남쪽에 있는데, 한(漢)나라 때의 낙랑(樂浪) 지역이다.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대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 유망민(流亡人)들이 역(役)을 피하여 [마한(馬韓)으로] 가자, 마한(馬韓)에서는 그 동쪽 지경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진(秦)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고한다.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궁,弓)을 호(弧), 도둑(적,賊)을 구(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행주,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도(徒)라고 하여 마한(馬韓)과 같지 아니하다. 또 진왕(辰韓)의 왕(王)은 항상 마한(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가고, 진한(辰韓)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한(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진한은 처음 6국(國)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註003] 신라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2)○ 일설에 의하면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옥저(沃沮)로 쫓겨 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중국· 고[구]려· 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註004]· 불내(不耐)[註005]· 한(韓)[註006]· 예(濊)[註007]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왕(王)은 본래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당초에는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군역(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그리하여 백제를 습격하고, 가라국(迦羅國)[註008]을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았다.
3)○ 왕위가 대대로 전하여져 30세(世)인 진평(眞平)[註009]에 이르렀는데, 수(隋)나라 개황(開皇) 14년 (A.D.594; 新羅 眞平王 16)에 견사(遣使)하여 방물(方物)을 바쳤다. 문제(文帝)는 진평(眞平)을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에 배수(拜授)하였다. 그 나라의 관직은 17등급이 있다.[註010] 1등급은 이벌간(伊罰干)이니 존귀하기가[중국의] 상국(相國)[註011]과 같다. 다음은 이척간(伊尺干)· 영간(迎干)· 파미간(破彌干)[註012]· 대아척간(大阿尺干)[註013]· 아척간(阿尺干)· 을길간(乙吉干)[註014]· 사돌간(沙咄干)[註015]· 급복간(及伏干)[註016]· 대내마간(大奈摩干)[註017]· 나마(奈摩)· 대사(大舍) ·소사(小舍)[註018]· 길사(吉士)· 대오(大烏)· 소오(小烏)· 조위(造位)[註019]의 차례이다. 지방에는 군(郡)과 현(縣)이 있다. [註020]
4)○ 문자(文字)와 갑병(甲兵)은 중국과 같다. 건장한 남자는 선발하여 모두 군대에 편입시켜 봉수(烽燧)· 변술(邊戌)· 순라(巡邏) 로 삼았으며, 둔영(屯營)마다 부오(部伍)가 조직되어 있다. 풍속(風俗)· 형정(刑政)· 의복(衣服)은 대략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와 같다. 매달 초하룻날[註021]에는 서로 하례(賀禮)하는데, 왕은 연회를 베풀어 뭇 관원의 노고를 치하한다. 이날에는 일신(日神)과 월신(月神)에게 제(祭)를 올린다. 8월 15일에는 풍악을 베풀고 관인(官人)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말과 베를 상으로 준다.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뭇 관원(官員)들을 모아 자세히 의논한 다음에 결정한다.[註022]
5)○ 복색(服色)은 흰 빛을 숭상한다. 부인(婦人)들은 변발(辮髮)하여 머리 위로 감아 올려 갖가지 비단 및 구슬로 장식한다. 혼인 의식에는 술과 음식 뿐인데, 잘 차리고 못차리는 것은 빈부(貧富)에 따라 다르다. 신혼날 저녁에 신부는 먼저 시부모에게 절을 올린 다음 대형(大兄)과 남편에게 절한다. 사람이 죽으면 감습(歛襲)하여 관(棺)에 넣고, 시체를 땅에 묻고는 봉분을 세운다. 왕(王)과 부모 및 처자의 상(喪)은 1년간 복(服)을 입는다.
6)○ 땅이 매우 비옥하여 논곡식과 밭곡식을 모두 심을 수 있다. 오곡(五穀)· 과일· 채소· 새· 짐승 등 물산(物産)은 대략 중국과 같다. 대업(大業) 연간(A.D.605~616; 新羅 眞平王 27~38) 이후로 해마다 [수(隋)나라에] 조공(朝貢)을 바쳤다.[註023] 신라는 지리상 산이 많고 길이 험하므로, 백제와 사이가 나빠도 백제 역시 그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4. 물길(勿吉) ○ 물길(勿吉)[註001]
1) ○물길국(勿吉國)은 고구려(高句麗)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靺鞨)이라고도 한다.[註002] 읍락(邑落)마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으며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그들은 굳세고 흉폭하여 동이(東夷) 중에서 제일 강하며, 언어(言語)도 그들만이 다르다. 두막루(豆莫婁)[註003]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여러 나라도 이들을 두렵게 여긴다. 낙양(洛陽)에서 5천리 떨어져 있다. 화룡(和龍)[註004]에서 북쪽으로 2백여리에 선옥산(善玉山)이 있고, 그 산(山)에서 북쪽으로 13일(日)을 가면 기려산(祁黎山)에 이른다. 다시 북쪽으로 7일(日)을 가면 낙괴수(洛瓌水)[註005]에 이르는데, 강(江)의 폭이 1리(里) 남짓이다. 또 북쪽으로 15일(日)을 가면 태악로수(太岳魯水)[註006]에 다다르고, 다시 동북쪽으로 18일(日)을 가면 그 나라에 도달한다. 그 나라에는 큰 강이 있는데, 폭은 3리(里) 남짓이며 이름은 속말수(速末水)[註007]이다.
2)○ 그 부류(部類)는 통틀어 7종(種)이 있다.[註008] 첫째는 속말부(粟末部)로서 고구려(高[句]麗)와 접경하고 있는데, 승병(勝兵)이 수천명으로 용감한 병사가 많아, 항상 고구려(高[句]麗)를 침입하곤 하였다. 둘째는 백돌부(伯咄部)로서 속말(粟末)[부(部)]의 북쪽에 있으며, 승병(勝兵)이 7천명이다. 세째는 안거골부(安車骨部)로서 백돌(伯咄)[부(部)]의 동북쪽에 있다. 네째는 불열부(拂涅部)로서 백돌(伯咄)[부(部)]의 동쪽에 있다. 다섯째는 호실부(號室部)로서 불열(拂涅)[부(部)]의 동쪽에 있다. 여섯째는 흑수부(黑水部)로서 안거골(安車骨)[부(部)]의 서북쪽에 있다. 일곱째는 백산부(白山部)로서 속말(粟末)[부(部)]의 동남쪽에 있다. 승병(勝兵)은 모두 3천명에 불과한데, 흑수부(黑水部)가 제일 굳세고 건장하였다.[註009]
3)○ 불열(拂涅)[부(部)]에서부터 동쪽 지방은 화살이 모두 돌화살(석족,石鏃)[註010]인데, 바로 옛 숙신씨(肅愼氏)의 [땅이기 때문이다.]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强國)이다. [물길(勿吉) 사람들의] 거주는 대부분 산수(山水)에 의지하며, 우두머리 (거수,渠帥)를 대막불만돌(大莫弗瞞咄)[註011])이라고 한다. 그 나라 남쪽에 종태산(從太山)이 있는데, 중국말로 태황(太皇)이라는 뜻이다. 풍속에 그 산을 매우 공경하고 무서워하여[註012] 사람들이 산(山) 위에서 소변이나 대변을 보지 못하고, 그 산을 경유하는 사람은 [소변이나 대변을] 물건에다 담아 가지고 간다. 산(山) 위에는 곰· 말곰(비,羆)· 표범· 이리가 있으나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아니하며, 사람 역시 그들을 함부로 죽이지 아니한다.[註013]
4)○ 땅이 낮고 습하며 흙을 둑과 같이 쌓고 구덩이를 파서 거처하는데, 출입구를 위로 향하게 내어 사다리를 놓고 드나든다.[註014] 그 나라에는 소는 없고 말은 있다. 수레는 [사람이] 밀고 다니며, 두사람이 짝지어 밭을 간다.[註015] 땅에서는 조(粟)· 보리· 검은 기장이 많이 생산되고, 채소로는 아욱이 있다.[註016] 물 맛은 소금기가 배어 있으며, 나무 껍질 위에서 소금이 나오고,[註017] 또 짠 물이 고여 있는 못도 있다. 가축으로는 돼지가 많고 양(羊)은 없다.[註018] 쌀을 씹어서 술은 만드는데, 마시기만 하면 취한다.[註019]
5)○ 결혼할 적에는 신부는 베로 만든 치마를 입으며, 남자는 돼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머리에는 용맹스러운 표범의 꼬리를 꽂는다.[註020] 오줌으로 손이나 얼굴을 씻는데, 모든 오랑캐 중에서도 제일 깨끗하지 못하다.[註021] 결혼 첫날 밤에는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서 여자의 유방을 만져 보는 것으로 끝낸다. 질투하여 그 아내가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을 어떤 사람이 그 남편에게 알려 주면, 남편은 즉시 아내를 죽이는데, 죽이고는 후회하여 알려준 사람도 반드시 죽인다. 이로 말미암아 간음한 사건은 끝내 발설되지 아니한다.
6)○ 모두 활을 잘 쏘아 사냥을 업(業)으로 삼는다.[註022] 각궁(角弓)[註023]의 길이는 3자이고 화살의 길이는 1자 2치로서, 해마다 7∼8월에 독약을 제조하여 화살촉에 발라 새나 짐승을 쏘는데 명중되면 즉사한다. 독약을 끓인 기운은 사람도 능히 죽일 수 있다.[註024] 부모(父母)가 봄이나 여름에 죽으면 세워서 매장(埋葬)하고, 무덤 위에 지붕을 만들어 비에 젖지 않도록 한다. 만약 가을이나 겨울에 죽으면 그 시체를 이용하여 담비를 잡는데, 담비가 그 살을 뜯어 먹다가 많이 잡힌다.[註025]
7)○ 연흥(延興) 연간(A.D.471~475; 高句麗 長壽王 59~63)에 [북위(北魏)에] 을력지(乙力支)를 파견하여 조헌(朝獻)하였다. 태화(太和)(A.D.477~499; 高句麗 長壽王 65~文咨王 8) 초에 또 말 5백필을 바쳤다. 을력지(乙力支)는,“당초 나라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난하(難河)를 거슬러서 서쪽으로 오르다가, 태려하(太沵河)에 이르러서 배를 물 속에 감추어 두고, 남쪽으로 육로로 걸어 낙고수(洛孤水)를 통과하여 거란(契丹)의 서쪽 국경을 따라 화룡(和龍)에 도달하였다.” 하고 말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길, “그 나라에서 먼서 고구려(高句麗)의 10부락(部落)을 쳐부수고, 비밀리 백제(百濟)와 함께 모의하여 물길을 따라서 힘을 합쳐 고구려(高[句]麗)를 취하기로 하고, 을력지(乙力支)를 대국(大國)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 가부(可否)를 도모한다.”하였다. 조clr(詔勑)을 내려, “삼국(三國)은 똑 같은 번부(藩附)이니, 마땅히 함께 화친하여 서로 침입하지 말아라.”고 하였다. 을력지(乙力支)가 이에 돌아가는데, 그가 온 길을 따라 [전에 감추어 두었던] 본선(本船)을 찾아 타고서 그 나라에 도달하였다.
8)○ [태화(太和)] 9년(A.D.485; 高句麗 長壽王 73) 에 [물길(勿吉)에서] 또 사신 후니지(侯尼支)를 파견하여 조회(朝會)하였다. 그 이듬 해에 다시 입공(入貢)하였다.[註026] 그나라 근처에는 대막로국(大莫盧國)[註027]· 복종국(覆鍾國)· 막다회국(莫多回國)· 고루국(庫婁國)· 소화국(素和國)· 구불복국(具弗伏國)· 필려이국(匹黎尒國)· 발대하국(拔大何國)·욱우릉국(郁羽陵國)· 고복진국(庫伏眞國)· 노루국(魯婁國)· 우진후국(羽眞侯國)이 있는데, 연이어 각각 사신을 보내어 조헌(朝獻)하였다. 태화(太和) 12년(A.D.488; 高句麗 長壽王 76)에 물길 (勿吉)이 또 사신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고시(楛矢)와 방물(方物)을 바쳤다.[註028] [태화(太和)] 17년(A.D.493; 高句麗 長壽王 文咨王 2)에 또 사신 파비(婆非) 등 5백여명을 보내어 조공(朝貢) 하였다.
9)○ 경명(景明) 4년(A.D.503; 高句麗 文咨王 12)에 또 사신 후력귀(侯力歸)를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註029] 이로 부터 정광(正光) 연간(A.D.520~524; 高句麗 安藏王 2~6)까지 조공(朝貢)하는 사신이 계속 이어졌으나, 그 뒤 중국이 어지러워지자 한참 오지 아니하였다. 흥화(興和) 2년(A.D.540; 高句麗 安原王 10) 6월에 석문운(石文云) 등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북(北)]제(齊)에 이르러서도 보공(朝貢)이 끊이지 아니하였다.[註030]
10)○ 수(隋)나라 개황(開皇)(A.D.581~600; 高句麗 平原王 23~嬰陽王 11) 초에 [여러 부족(部族)들이] 서로 어울려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문제(文帝)가 사신에게 조칙(詔勑)하여 이르기를, “짐(朕)은 그 곳의 사람들이 용맹스럽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실로 짐(朕)의 마음에 부응된다. 너희들을 자식처럼 볼 터이니 너희들은 짐(朕)을 아버지처럼 공경할지어다.”하니, [물길(勿吉)사신들이]“신(臣)들은 궁벽하게 한쪽 지방에 있지만, 중국에 성인(聖人)이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와서 조배(朝拜)한 것입니다. 이미 성안(聖顔)을 직접 뵈었으니, 원컨대 영원히 노복(奴㒒)이 되도록 하여 주옵소서.” 라고 대답하였다.
11)○ 그들의 나라가 서북쪽으로 거란(契丹)과 접경하고 있어서 항상 서로를 침략하곤 하였다. 뒤에 그 사신이 오자, [수(隋)] 문제(文帝)가 그들을 타일러 서로 공격하지 말도록 하니, 사신이 사죄하였다. 문제(文帝)가 그들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어전(御前)에서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도록 하니, 사신이 그의 무리들과 함께 일어나서 춤을 추는데, [팔다리를] 구부리는 것이 전투하는 모습이 많았다. 문제(文帝)는 시신(侍臣)들을 돌아보면서, “천지(天地) 사이에 이런 물건들이 있어, 언제나 전쟁할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수(隋)나라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오직 속말(粟末)[부(部)]와 백산(白山)[부(部)]만이 가깝게 있었다.[註031]
12)○ [수(隋)] 양제(煬帝) 초에 고구려(高[句]麗)와의 전쟁[註032]에서 그들을 자주 물리치자, 거수(渠帥) 돌지계(突地稽)[註033]가 그 부(部)를 거느리고 항복해 왔으므로,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에 제수(除授)하여 유성(柳城)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그가] 변방 사람들과 왕래하면서도 중국의 풍속을 좋아하여 관(冠)과 대(帶)를 착용하겠다고 청하니, [양(煬)]제(帝)는 그를 갸륵하게 여겨 금기(錦綺)를 상으로 내리고 총애(寵愛)하였다. 요동지역(遼東之役)에서는 돌지계(突地稽)가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종군(從軍)하였는데, 전공(戰功)을 세울 때마다 상(賞)을 매우 후하게 내렸다. [대업(大業)] 13년(A.D.617; 高句麗 嬰陽王 28)에 [돌지계(突地稽)는 양제(煬帝)가] 행행(幸行)한 강도(江都)로 호종하였는데, 얼마 후에 유성(柳城)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도중에] 이밀(李密)이 병사를 파견하여 요격(邀擊)하니,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하였다. 고양(高陽)에 이르러서는 왕수발(王須拔)에게 함락당하였다. 얼마 안되어 나예(羅藝)로 도망하여 돌아갔다.[註034]
5. 찬자평(撰者評) ○ 사신(史臣)은 말한다.
넓은 계곡과 큰 시내는 생김 자체가 다르므로 그 사이에서 사는 사람들의 풍속도 다르다. 기욕(嗜欲)이 똑같지 않고 언어(言語)도 통하지 아니한다. 성인(聖人)이 시의(時宜)에 따라 교육을 베푼 것은 그 뜻을 전달하고 습속을 유통시키려고 한 것이다. 구이(九夷)가 사는 곳은 중국과 아주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횡폭(橫暴)한 기풍이 없기 때문에, 비록 산과, 바다로 멀리 막혀 있지만 쉽게 인도하고 제어할 수 있다. 하(夏)· 은대(殷代)에도 이따금 조근(朝覲)을 왔고,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피하여 가고부터는 비로소 팔조(八條)의 금법(禁法)을 두니, [그법(法)이] 성글면서도 빈틈이 없고 간촐하면서도 오래 갈 수 있어, 교화(敎化)의 영향이 천년토록 끊이지 않았다. 이제 요동(遼東)의 여러 나라들이 혹은 의복(衣服)에 관면(冠冕)의 모양을 갖추고, 혹은 먹고 마심에 조두(俎豆)의 그릇이 있기도 하며, 경술(經術)을 숭상하고 문사(文史)를 좋아하여 [중국의] 경도(京都)에 유학(游學)하는 자 가 길에 끊이지 않고 왕래하면서 더러는 일생을 마치도록 귀국하지 않기도 하니, 선철(先哲)의 유풍(遺風)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이런 일을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말이 진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행실이 돈독하고 공경스러우면,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참되도다. 그 말씀이여! 그 풍속의 취택할 만한 것이 어찌 고시(楛矢)의 조공(朝貢) 뿐이겠는가? [북(北)]위(魏)에서부터 수(隋)나라까지 네 나라가 바뀌면서 때 마침 한창 전쟁하느라고 겨를이 없어 외국(外國)을 정벌하지 못하였다. 개황(開皇)(A.D.581~600; 高句麗 平原王 23~嬰陽王 11)말기에 이르러 바야흐로 요좌(遼左)를 정벌하였는데, 천시(天時)가 불리하여 군사가 마침내 전공(戰功)을 세우지 못하였다. 이대(二代)가 제위(帝位)를 계승하여서는 우주(宇宙)를 포옹할 뜻으로 자주 삼한(三韓)의 땅을 짓밟고 천균(千鈞)의 쇠뇌(노,弩)를 발사하니, 조그마한 [고구려(高句麗)]국(國)은 멸망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하였고, 중단없는 싸움에 천하가 어지러워져 마침내는 흙더미처럼 무너져, [양제(煬帝)] 자신도 죽고 나라도 멸망되었다. 「병지(兵志)」에 ‘덕(德)을 넓히는 데 힘쓰는 자는 번창하고, 땅을 넓히는 데 힘쓰는 자는 멸망한다’고 하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요동(遼東)의 땅이 [중국(中國)의] 군(郡)· 현(縣)에 들지 못한 지는 오래지만, 모든 나라들이 조근(朝覲)과 조공(朝貢)을 세시(歲時)에 빠뜨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대(二代)는 나만한 사람은 없다고 여기고 떠들썩하게 으시대느라, 문덕(文德)으로 회유 하지 못하고 갑자기 전쟁을 일으켰으니, 안으로는 부강(富强)한 것을 믿고 밖으로는 국토의 확장만을 생각하여, 교만으로 원망을 사고 분노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렇게 하고서도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옛날부터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이(四夷)가 준 경계(警戒)를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막루(豆莫婁)· 지두간(地豆干)· 오락후(烏洛侯)는 제(齊)· [북(北)]주(周)에서 수(隋)나라에까지 조공(朝貢)이 끝내 끊어진 까닭으로, 그에 대한 일들은 나타난 데가 없다.[註035] ============================================================================================= 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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