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 동이전

10.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

상 상 2012. 1. 25. 18:44

10.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

 

차 례

 

1. 고구려(高句麗)

2. 백제(百濟)

 

○ 주서(周書)[註001]

이역열전(異域例傳)[註002]

 

1. 고려(高[구(句)]麗)[註003]

 

1) ○고려(高[구(句)]麗)[註004]는 그 선조가 부여(夫餘)에서 갈라져 나왔다.[註005]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는 주몽(朱蒙)인데,[註006] 하백(河伯)의 딸이 햇빛에 감응되어 잉태하였다’고 한다.

주몽이 장성하여 재주와 지략이 있자, 부여 사람들이 미워하여 쫓아버렸다. [이에 주몽은] 흘두골성(紇斗骨城)에 살면서

스스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어 고씨(高氏)로 성을 삼았다.[註007]

그의 손자 막래(莫來)[註008]가 점차 세력을 키우더니 부여를 쳐 복속시켰다.[註009]

막래의 후손 련(璉)이 처음으로 후위(後魏)와 사신을 통하였다.[註010]

 

2) ○ 그 지역은 동쪽으로는 신라(新羅)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遼水)[註011]를 지나니

[동서(東西)가] 이천리(二千里)요, 남쪽은 백제(百濟)와 인접하고 북쪽은 말갈(靺鞨)과 이웃하니

[남북(南北)이] 천여리(千餘里)이다.[註012]

국토(國都)는 평양성(平壤城)[註013]으로, 그 성은 동서(東西)가 6리(里)이며 남쪽으로는 패수(浿水)[註014]에 닿아 있다.

성안에는 오직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두었다가 적군이 침입하는 날에는 곧 성안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킨다.

왕은 따로 그 곁에 궁실(宮室)을 마련하였으나 평상시에는 거기에 살지 않는다.

그 밖에 국내성(國內城)[註015]과 한성(漢城)[註016]이 있으니, 별도의 도읍지이다.[註017]

그리고 다시 요동(遼東)과 현도(玄菟) 등 수십 개의 성이 있다. 모두 관사(官司)를 두어 관할 통치하였다.

 

3) ○ 가장 높은 벼슬로는 대대로(大對盧)[註018]가 있고, 그 아래에 태대형(太大兄)[註019]· 대형(大兄)[註020]· 소형(小兄)[註

021]· 의사사(意俟奢)[註022]· 오졸(烏拙)[註023]· 태대사자(太大使者)[註024]·대사자(大使者)[註025]· 소사자(小使者)[註026]

 욕사(褥奢)[註027]· 예속(翳屬)[註028]· 선인(仙人)[註029]· 욕살(褥薩)[註030]의 모두 열세 등급이 있어 안팎의 일을 나누어

관장한다.[註031]

대대로(大對盧)는 세력의 강약에 따라 서로 싸워 이기면 빼앗아 스스로 되고 왕의 임명을 거치지 않는다.[註032]

 

4) ○ 그 나라의 형법은 모반한 사람과 반역자는 먼저 불로 지진 다음 목을 베고, 그 집은 적몰하였다.

도둑질한 사람에게는 [도둑질한 물건의] 10여배를 징수하였다. 만약 가난하여 징수할 것이 없거나

공적· 사적으로 빚을 진 사람에게는 모두 그의 아들이나 딸을 노비로 주어 보상 할 수 있도록 하였다.[註033]

 

5) ○ 남자는 소매가 긴 적삼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흰 가죽띠와 누런 가죽신을 신는다.

그들의 관(冠)은 ‘골소(骨蘇)’라고 부르는데, 대부분 자주색 비단으로 만들었고 금은(金銀)으로 얼기설기 장식하였다.

벼슬이 있는 사람은 그 위에 새의 깃 두 개를 꽂아 뚜렷하게 차이를 나타낸다.

부인들은 치마와 속옷을 갖추어 입고 옷자락이나 소매에는 선을 둘렀다.[註034] 서적으로는 『오경(五經)』및 삼사(三史)와

『삼국지(三國志)』·『진양추(晋陽秋)』가 있다.[註035]

병기(兵器)는 갑옷· 쇠뇌· 활· 창붙이가 있다.[註036]

 

세금은 명주· 베 및 곡식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종류에 따라 빈부(貧富)의 차등을 헤아려 받아들였다.[註037]

땅은 척박하여 일상생활은 절제하며 검소하게 지내지만 몸치장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속임수가 많은 편이고, 말은 속되고 야하였다.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고 한 냇물에서 목욕하고, 같은 방에서 잠잔다.

풍속이 음란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유녀(遊女)가 있으니, [그녀에게는] 일정한 남편이 없다.[註038]

혼인(婚姻)에는 대체로 재물이나 폐백이 없어, 만일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계집종으로 팔아 먹었다’고 하여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부모와 남편 상(喪)에는 그 복제(服制)가 중국과 같으나 형제는 3개월로 한정한다.[註039]

 

6) ○ 불법(佛法)을 경신(敬信)하면서도 음사(淫祀)[註040]를 더욱 좋아한다. 또 두 곳에 신(神)을 모시는 사당이 있으니,

한 곳은 부여신(夫餘神)[註041]이라 하여 나무를 조각하여 부인(婦人)의 형상을 만들고,

한 곳은 등고신(登高神)[註042]이라 하여 그들의 시조이며 부여신(夫餘神)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모두 관사(官司)를 두고 관리를 파견하여 수호하는데 아마 하백(河伯)의 딸과 주몽(朱蒙)인 듯하다.[註043]

 

7) ○ 연(璉)의 5세손 성(成)[註044]이 大統 12년(A.D.546; 高句麗 陽原王 2)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註045] 성(成)이 죽고 아들 탕(湯)[註046]이 즉위하였다.

건덕(建德) 6년(A.D.577; 高句麗 平原王 19)에 탕이 또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바쳤다.

고조(高祖)가 탕(湯)을 상개부의동대장군(上開府儀同大將軍)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요동왕(遼東王)에 배수(拜授)했다.[註047]

 

 

 

 

2. 백제(百濟)[註001]

 

1)○ 백제(百濟)는 그 선조(先代)가 대체로 마한(馬韓)의 속국이며[註002] 부여(夫餘)의 별종인 듯하다.[註003]

구태(仇台)[註004]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우니,[註005]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新羅)에 닿고

북쪽으로 고구려(高句麗)와 인접하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큰 바다로 경계지어져 있다.

동서의 길이는 450리이고 남북은 900여리이다.[註006] 도읍은 고마성(固麻城)[註007]이다.

지방에는 다시 5방(方)[註008]이 있으니, 중방(中方)은 고사성(古沙城)[註009]· 동방(東方)은 득안성(得安城)[註010]·

남방(南方)은 구지하성(久知下城)[註011]· 서방(西方)은 도선성(刀先城)[註012]· 북방(北方)은 웅진성(熊津城)이다.

 

2)○ 왕의 성(姓)은 부여씨(夫餘氏)로 ‘어라하(於羅瑕)’[註013]라 부르며,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註014]라고 부르니 이는 중국 말로 모두 왕이라는 뜻이다.

왕의 아내는 ‘어륙(於陸)’이라 호칭하니, 중국 말로 왕비라는 뜻이다.

벼슬은 16품계(品階)가 있다. 좌평(左平)[註015]은 5명으로 일품(一品), 달솔(達率)[註016]은 30명으로 이품(二品),

은솔(恩率)은 삼품(三品), 덕솔(德率)은 사품(四品), 한솔(扞率)은 오품(五品), 내솔(柰率)은 육품(六品)이다.

육품(六品) 이상은 관(冠)을 은화(銀華)로 장식하였다. 장덕(將德)은 칠품(七品)으로 자대(紫帶)를 두르고,

시덕(施德)은 팔품(八品)으로 급대(皀帶), 고덕(固德)은 구품(九品)으로 적대(赤帶), 계덕(季德)은 십품(十品)으로

청대(靑帶)를 각각 둘렀다. 십일품(十一品) 대덕(對德)과 십이품(十二品) 문독(文督)은 모두 황대(黃帶)를 두르고,

십삼품(十三品) 무독(武督)[註017]과 십사품(十四品) 좌군(佐軍)[註018]· 십오품(十五品) 진무(振武)·

십육품(十六品) 극우(克虞)는 모두 백대(白帶)를 둘렀다. 은솔(恩率) 이하는 일정한 정원(定員)이 없고[註019] 각기 부서(部署)가

있어서 여러 가지 사무를 나누어 관장하였다.

내관(內官)[註020]으로는 전내부(前內部)· 곡부(穀部)· 육부(肉部)· 내략부(內掠部)· 외략부(外掠部)[註021]·

마부(馬部)· 도부(刀部)· 공덕부(功德部)· 약부(藥部)· 목부(木部)· 법부(法部)· 후관부(後官部)가 있고,

외관(外官)[註022]으로는 사군부(司軍部)[註023]· 사도부(司徒部)[註024]· 사공부(司空部)[註025]·사구부(司寇部)[註

026]· 점구부(點口部)· 객부(客部)· 외사부(外舍部)· 주부(綢部)· 일관부(日官部)·도시부(都市部)[註027]가 있다.

 

3)○ 도성에는 1만호가 거주하며 5부(部)[註028]로 나누었는데,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로서

거느린 군사는 5백명이다.

오방(五方)에는 각기 방령(方領) 1인을 두어 달솔(達率)로 임명하고, 군(郡)에는 장수(장-將) 3인이 있으니 덕솔(德率)로 임명하였다.

방(方)에서 거느리는 군사는 1천 2백명 이하 7백명 이상이었다. 도성(都城) 내외의 백성들과 기타 작은 성(城)들이 모두 여기에

예속되었다.

 

4)○ 그들의 의복이 남자는 대략 고려(高[구(句)]麗)와 동일하였다. 조회(朝會)나 제사 지낼 때에는 관(冠)의 양쪽 곁에 [새의] 깃을

달았으나, 군사(軍事)에는 그렇지 않았다.

절하고 뵙는 예는 두 손을 땅에 짚어 공경을 나타냈다. 부인 의복은 도포 같으면서 소매가 약간 컸다.

시집가지 않은 여자는 편발(編髮)[註029]로 머리 위에 또아리를 틀고 뒤로 한 가닥을 늘어뜨리는 것으로 꾸밈을 삼았고,

시집간 사람은 이를 두가닥으로 늘어뜨렸다.

병기로는 활· 화살· 칼· 창이 있다. 그들의 습속은 기사(騎射)를 숭상하고 아울러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애독하니,

뛰어난 사람은 제법 문장을 엮을 줄도 알았다.[註030] 또한 음양(陰陽)·오행(五行)도 이해하였다.

송(宋) 원가력(元嘉曆)[註031]을 채용하여 인월(寅月)로 세수(歲首)를 삼았다. 또 의약(醫藥)· 복서(卜筮) 및 점치고 관상보는 법도

알고 있었다. 투호(投壺)[註032]와 저포(樗蒲)[註033] 등의 여러 가지 놀이가 있으나

바둑이나 장기를 더욱 좋아한다. 중과 비구니, 절, 탑은 매우 많으나, 도사(道士)(도가류-道家類)는 없다.[註034]

세금은 베· 명주· 삼베 및 쌀 등으로 그 해의 풍흉을 헤아려 차등있게 바치게 하였다. 그 나라의 형벌은 모반하거나

전쟁에서 퇴각한 자 및 살인을 한 사람은 참수하였다.[註035] 도적질한 사람은 유배시키고 도적질한 물품의 배를 징수하였다.

부인으로서 간통죄를 범하면 남편 집의 계집종으로 삼았다. 시집 장가드는 절차는 대략 중국의 풍속과 같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동안 상복을 입고,[註036] 그 나머지 친척에게는 장례가 끝나면 상복을 벗었다.

토지는 낮고 습하였으며 기후는 따뜻하다. 오곡(五穀)과 각종 과일· 채소 및 술· 음식· 반찬· 의약품은 거의 중국과 같고,

낙타· 당나귀· 노새· 양· 거위· 오리 따위는 없다. 그 나라의 왕은 매 계절의 중월(仲月)[註037]에 하늘과 오제(五帝)의 신(神)

[註038]에게 제사지내고, 또 해마다 네 번씩 그의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에 제사드린다.[註039]

 

5)○ 진,송,제,양(晋·宋·齊·梁)[註040]이 강동(江東)[註041]에 웅거하고 후위(後魏)가 중원(中原)에 자리하였을 때부터

한결같이 사신을 보내어 번국(藩國)이라 칭하였고, 겸하며 봉작(封爵)도 받았다.

북제(北齊)[註042]가 중국의 동쪽에서 세력을 떨치자 그 나라의 왕 융(隆)[註043]이 또 사신을 보내왔다.

융이 사(死)하고 아들 창(昌)이 즉위하였다.[註044]

건덕(健德) 6년(A.D.577; 百濟 威德王 24)에 [북(北)]제(齊)가 멸망하자, 창은 처음으로 [주(周)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선정(宣政) 원년(A.D.578; 百濟 威德王 25)에도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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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