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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차 례
1. 서(序) 2. 고구려(高句驪) 3. 백제(百濟) 4. 신라(新羅) 5. 찬자평(撰者評)
1. 서(序)
1)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 중에서 조선(朝鮮)이 제일 강대하였는데, 기자(箕子)의 교화를 입어 그 문물(文物)이 예악(禮樂)에 합당하였다고 한다.[註003] 위(魏)나라 때는 조선 동쪽의 마한(馬韓)· 진한(辰韓) 등이 대대로 중국과 왕래하였다.[註004] 진(晋)나라가 양자강(揚子江)을 건너 간 후부터 바다를 건너온 동방의 사신으로는 고구려(高句驪)· 백제(百濟) 등이 있었는데,[註005] 송(宋)· 제(齊) 시대에도 항시 직공(職貢)하였으며[註006] 양(梁)나라가 흥기하자 더욱 빈번히 내왕하였다.[註007]
2) 부상국(扶桑國)[註008]이란 옛날에는 듣지 못하던 나라이다. 보통(普通) 연간(A.D.520~526; 高句麗 安藏王 2~8)에 그곳에서 왔다는 도인(道人)이 있었는데,[註009] 그의 말이 사리에 매우 합당하므로 함께 기록한다.
2. 고구려(高句驪) ○ 고구려(高句驪)[註001]
1) ○고구려(高句驪)[註002]는 그 선조가 동명(東明)[註003]으로부터 나왔다. 동명(東明)은 본래 북이(北夷) 고리왕(櫜離王)의 아들이다. 리왕(離王)이 출행(出行)한 사이에 그의 시녀가 후(後)[궁(宮)]에서 임신하였다. 리왕(離王)이 돌아와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앞서 하늘 위에 큰 달걀만한 기(氣)가 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이 저에게 내려와서 임신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그녀를 가두어 두었더니 뒤에 사내 아이를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내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이를] 신령스럽게 여겨 거두어 기르도록 허락하였다.
2)○ 장성하면서 활을 잘 쏘니, 왕은 그의 용맹함을 꺼리어 다시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동명(東明)이 도망하여 남쪽의 엄체수(淹滯水)[註004]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떠올라 다리를 놓아 주었다. 동명(東明)은 이들을 밟고 강을 건너 부여(夫餘)에 이르러 [그 나라의] 왕이 되었는데, 그 후손의 한 지파(支派)가 구려(句驪)의 종족이 되었다.[註005] 그 나라는 한 대(漢代)의 현도군(玄菟郡) [지역]에 있다.[註006] 요동(遼東)의 동쪽에 있으며, 요동으로부터 천리 쯤 떨어져 있다. 한(漢)· 위(魏) 시대에는 남쪽으로는 조선(朝鮮)· 예맥(穢貊), 동쪽으로는 옥저(沃沮), 북쪽으로는 부여(夫餘)와 인접해 있었다. 한(漢)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B.C. 107)에는 조선(朝鮮)을 멸하여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거기에 소속시켰다.
3)○ 구려(句驪)의 국토는 사방 약 2천리이다. 국토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고, 요수(遼水)가 [그 산에서] 흘러 나온다.[註007] 그 나라의 왕도(王都)는 환도(丸都)[산(山)]의 아래에 있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판이 없어서, 백성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고 시냇물을 식수로 한다.[註008]
비록 토저생활(土著生活)을 하고 있지만 좋은 토지는 없어 그들의 습속에 음식을 아껴 먹고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왕의 궁실 왼편에 큰 집을 지어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또한 영성(零星)과 사직(社稷)에도 제사지낸다. 사람들의 성질은 포악하고 성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註009]
벼슬아치로는 상가(相加)[註010]· 대로(對盧)[註011]· 패자(沛者)[註012]· [註013]고추가(古鄒加)· 주부(主簿)[註014]· 우태(優台)[註015]· 사자(使者)[註016]· 조의선인(皁衣先人)[註017]이 있어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언어나 생활 관습은 부여(夫餘)와 같은 점이 많았으나, 그들의 기질 및 의복은 서로 달랐다.
4)○ 본래 5족(族)[註018]이 있으니,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雚奴部)· 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본래는 소노부(消奴部)에서 왕이 나왔으나 미약하여지자 계루부(桂婁部)에서 왕위(王位)를 차지하였다.[註019] 한(漢) 나라 때에 의책(衣幘)· 조복(朝服)· 고취(鼓吹)를 하사하면 항상 현도군(玄菟郡)을 통하여 받았다. 그 뒤에 점점 교만하여져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고, 단지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서 [하사품을]받았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幘溝婁)[註020]라 부른다. 구루(溝婁)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城)’을 부르는 말이다. [그 나라는] 관리를 설치할 적에 대로(對盧)가 있으면 패자(沛者)를 두지 않고, 패자(沛者)가 있으면 대로(對盧)를 두지 않는다.
5)○ 그들의 습속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국중(國中)의 부락마다 남녀가 밤마다 떼지어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유희를 즐긴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경우 한쪽다리는 펴며, 길을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하듯 빨리 간다.[註021]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대회(大會)가 있으니 이를 ‘동명(東明)’[註022]이라 한다. 그들의 공식(公式)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金)과 은(銀)으로 장식한다. 대가(大加)· 주부(主簿)의 머리에 쓰는 것은 [중국(中國)의] 책(幘)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註023]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변,弁)과 같다. 그 나라에는 감옥이 없고,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 평의(評議)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몰수한다.[註024] 그 나라의 습속은 음란하여 남녀가 서로 야합(野合)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을 한 뒤에는 곧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데에 곽(椁)은 쓰지만 관(棺)은 사용하지 않는다. 후장(厚葬)의 풍속이 있어서 금은과 재화를 모두 장례에 소비한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註025] 그 나라의 말은 모두 작아 산에 오르기 편리하다. 나라 사람들은 기력(氣力)을 숭상하여 활· 화살· 칼· 창을 잘 쓰고, 갑옷이 있으며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沃沮)· 동예(東穢)를 모두 복속시켰다.[註026]
6)○ 왕망(王莽) 초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가지 않으려 하여 위협하여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주(州)· 군(郡)에서 구려후(句驪侯) 추(騶)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嚴尤)가 꾀어내어 베어 죽였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여 고구려(高句驪)의 이름을 고쳐 하구려(下句驪)라 하였다. [고구려는] 이 때 후(侯)[국(國)]이 되었다.[註027]
7) ○ 광무(光武)[제(帝)] 8년(A.D.32; 高句麗 大武神王 15)에 고구려왕((高句驪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면서 비로소 왕호(王號)를 칭하였다.[註028] 상제(殤帝)· 안제(安帝) 연간에 그 왕의 이름이 궁(宮)이었는데, 자주 요동(遼東)을 침범하였다. 현도태수 [註029]채풍(蔡風)이 그들을 토벌하였으나 막을 수 없었다.[註030] 궁(宮)이 죽고 그의 아들 백고(伯固)가 왕위에 올랐다.[註031] 순제(順帝)· 환제(桓帝) 때 다시 요동(遼東)을 자주 침범하여 노략질하였다.[註032]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A.D.169; 高句麗 新大王 5)에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백명을 죽이니, 백고(伯固)는 항복하여 요동(遼東)에 복속되었다.[註033] 공손도(公孫度)[註034]가 해동(海東)에서 웅거하자, 백고(伯固)가 그와 더불어 통호(通好)하였다.[註035] 백고(伯固)가 사(死)하고 그의 아들 이이모(伊夷摸)가 왕위에 올랐다.[註036] 이이모(伊夷摸)는 백고(伯固)때부터 이미 요동(遼東)을 자주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胡)[족(族)] 5백여호를 받아들였다.
8) ○ 건안(建安) 연간(A.D.196~219; 高句麗 故國川王 18~山上王 23)에 공손강(公孫康)[註037]이 군대를 출동시켜 그들을 공격하여 그 나라를 격파하고 읍락을 불살랐다. 항복한 호(胡)[족(族)] 또한 이이모(伊夷摸)를 배반하니, 이이모(伊夷摸)는 새로운 나라를 다시 만들었다.[註038] 그 후 이이모(伊夷摸)가 다시 현도(玄菟)를 공격하자, 현도는 요동과 힘을 합쳐 반격하여 크게 쳐 부수었다.[註039] 이이모(伊夷摸)가 사(死)하고 그의 아들 위궁(位宮)이 왕위에 올랐다. 위궁(位宮)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위(魏)나라 경초(景初) 2년(A.D.238; 高句麗 東川王 12) 태부(太傅)인 사마선왕(司馬宣王)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니, 위궁(位宮)이 주부(主簿)와 대가(大加)를 보내어 병사 천명을 거느리고 위(魏)나라 군사를 도왔다.
9) 정시(正始) 3년(A.D.242; 高句麗 東川王 16) 위궁(位宮)이 서안평(西安平)을 노략질하였다.[註040] 5년,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이 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나와 위궁(位宮)을 공격하였다. 위궁(位宮)은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2만을 거느리고 관구검(毋丘儉)의 군대를 역습하여 비류(沸流)에서 크게 싸웠다. 위궁(位宮)이 싸움에 져 달아나니, 검(儉)의 군대는 추격하여 현(峴)에 이르러, 수레를 달아매고 말을 묶어 환도산(丸都山)에 올라 그 나라의 왕도(王都)를 격파하고 1만여명을 목베어 죽이니, 위궁(位宮)은 홀로 처자식을 거느리고 멀리 달아나 숨었다. 6년(A.D.245; 高句麗 東川王 19)에 [관구(毋丘)]검(儉)이 다시 공격하니, 위궁(位宮)은 겨우 제가(諸加)만 이끌고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검(儉)은 장군 왕기(王頎)에게 추격하도록 하여 옥저(沃沮) 천여리를 지나 숙신(肅愼)의 남쪽 지경에까지 이르러 돌에 공(功)을 새겨 기록하였다. 또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이라 명명(命名)하고 돌아왔다. 그 후 다시 중국(中國)과 왕래하였다.[註041]
10) ○ 진(晋) 영가(永嘉)(A.D.307~312; 高句麗 美川王 8~13)의 난리[註042] 때에 선비족(鮮卑族)의 모용외(慕容廆)[註043]가 창려(昌黎)[註044]의 대극성(大棘城)[註045]을 점거하니, 원제(元帝)는 평주자사(平州刺史)를 제수(除授)하였다. [고(高)]구려왕(句驪王) 을불리(乙弗利)[註046]가 자주 요동(遼東)을 침범하였으나 외(廆)는 막을 수 없었다.[註047] 불리(弗利)가 사(死)하고 그의 아들[註048] 쇠(釗)가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강제(康帝) 건원(建元) 원년(A.D.343; 高句麗 故國原王 13)에 모용외(慕容廆)의 아들 황(晃)[註049]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쇠(釗)는 더불어 싸우다 크게 패하여 단신으로 말을 타고 달아났다. 황(晃)은 승리한 기세로 계속 추격하여 환도(丸都)에 이르러 궁실을 불지르고 남자 5만여구(萬餘口)를 노략질하여 돌아왔다.[註050]
11)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0년(A.D.385; 高句麗 故國壤王 2) [고(高)]구려(句驪)가 요동군(遼東郡)과 현도군(玄菟郡)을 공격하니, 후연(後燕)의 모용수(慕容垂)[註051]가 아우 농(農)을 보내어 구려(句驪)를 쳐서 2군(郡)을 되찾았다.[註052] 수(垂)가 사(死)하고 그의 아들 보(寶)가 왕위에 올랐다. [고(高)]구려왕(句驪王) 안(安)[註053]을 평주목(平州牧)으로 삼고, 요동(遼東)· 대방(帶方)의 2국왕(國王)에 봉하였다. 안(安)은 처음으로 장사(長史)[註054]· 사마(司馬)[註055]· 참군(參軍)[註056]의 관직을 설치하였고, 후에는 요동군(遼東郡)을 경략하였다.
12) ○ 그 후손인 고련(高璉)[註057]이 진(晋) 안제(安帝) 의희(義熙) 연간(A.D.405~418; 高句麗 廣開土王 15~長壽王 6)에 비로소 표문을 올리고 공물(貢物)을 바쳤다. 그는 송(宋)· 제(齊) 시대(時代)를 거치면서 한결같이 작위를 받았고, 나이 백여세에 죽었다.[註058] 그의 아들 [고(高)]운(雲)을 제(齊) 융창(隆昌) 연간(A.D.493; 高句麗 文咨王 4)에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낙랑공(樂浪公)으로 삼았다. [註059] 고조(高祖)가 즉위하여 운(雲)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올려 주었다.[註060] 천감(天監) 7년(A.D.508; 高句麗 文咨王 17)에 이렇게 조서(詔書)를 내렸다. “고려왕(高[구(句)]驪王) 낙랑군공(樂浪郡公) 운(雲)은 충성심이 두드러져 공물과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소. 이에 벼슬을 더 주노니 우리 조정의 뜻을 널리 펴시오. 무동대장군(撫東大將軍)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허가하고, 지절(持節)· 상시(常侍)· 도독(都督)· 왕(王)의 칭호는 모두 종전과 같이 하시오.”[註061] 천감(天監) 11년(A.D.512; 高句麗 文咨王 21)과 15년(A.D.516; 高句麗 文咨王 25)에 거푸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註062] 17년(A.D.518; 高句麗 文咨王 27)에 운(雲)이 사(死)하고, 그의 아들 [고(高)]안(安)[註063]이 왕위에 올랐다.
13) ○ 보통(普通) 원년(A.D.520; 高句麗 安藏王 2)에 안(安)에게 조서를 내려 지절(持節) 독영평이주제군사(督營·平二州諸軍事) 영동장군(寧東將軍)의 봉작을 승습케 하였다.[註064] 7년(A.D.526; 高句麗 安藏王 8)에 안(安)이 졸(卒)하고,[註065] 그의 아들 [고(高)]연(延)이 왕위에 올랐다. [註066]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므로, 조서를 내려 연(延)에게 작위를 승습케 하였다.[註067] 중대통(中大通) 4년(A.D.532; 高句麗 安原王 2)과 6년(A.D.534; 高句麗 安原王 4)· 대동(大同) 원년(A.D.535; 高句麗 安原王 5)과 7년 (A.D.541; 高句麗 安原王 11)에 거푸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註068] 태청(太淸) 2년(A.D.548; 高句麗 陽原王 4)에 연(延)이 졸(卒)하니[註069] 조서를 내려 그의 [註070]아들로 하여금 연(延)의 작위를 승습케 하였다.[註071]
3. 백제(百濟)
1)○ 백제(百濟)[註002]는 그 시초가 동이(東夷)의 삼한국(三韓國)인데 [삼한국(三韓國)의] 하나는 마한(馬韓)이요, 다른 하나는 진한(辰韓)이요, 또 하나는 변한(弁韓)이었다.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은 각각 12국(國)이 있었고 마한(馬韓)은 54국(國)이 있었다. 대국(大國)은 1만여가(萬餘家), 소국(小國)은 수천가(數千家)로서 모두 10여만호(餘萬戶)가 되었는데, 백제(百濟)는 곧 그 중의 한 나라였다. 뒤에 점점 강대하여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합쳤다.
그 나라는 본래 [고(高)]구려(句驪)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에 있었다. 진(晋)나라 때에 이르러 [고(高)]구려(句驪)가 이미 요동(遼東)을 경략하자, 백제(百濟) 역시 요서(遼西)· 진평(晋平) 2군(郡)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註003]
2) ○ 진(晋) 태원(太元) 연간(A.D.376~396; 百濟 近仇首王 2~阿莘王 5)에는 [백제]왕 수(須)[註004]가, 의희(義熙) 연간(A.D.405~418; 百濟 腆支王 1~14)에는[註005] [백제]왕 여영(餘映)[註006]이, 송(宋) 원가(元嘉) 연간(A.D.424~453; 百濟 久爾辛王 5~毗有王 27)에는 [백제]왕 여비(餘毗)[註007]가 각각 [사신을] 파견하여 생구(生口)[註008]를 바쳤다. 여비(餘毗)가 죽고 그의 아들 경(慶)[註009]이 왕위에 올랐다. 경(慶)이 죽고 그의 아들 모도(牟都)[註010]가 왕위에 올랐다. 도(都)가 죽고 그의 아들 모태(牟太)[註011]가 왕위에 올랐다. 제(齊) 영명(永明) 연간(A.D.483~493; 百濟 東城王 5~15)에 태(太)에게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의 벼슬을 제수하였다.[註012] 천감(天監) 원년(A.D.502; 百濟 武寧王 2)에 태(太)의 [장군(將軍)]호(號)를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올려 주었다.[註013] 얼마 뒤 고구려(高句驪)에게 격파되어[註014] 날로 [국력이] 쇠약해지더니, 남한(南韓)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다.[註015]
3) ○ 보통(普通) 2년(A.D.521; 百濟 武寧王 21)에 [백제]왕 여융(餘隆)[註016]이 비로소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註017] “여러 번 [고(高)]구려(句驪)를 무찌르며 [싸웠으나] 이제 비로소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니, 백제(百濟)가 다시 강국이 된 것이다. 그 해 고조(高祖)가 이렇게 조서를 내렸다. “행도독백제제군사(行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 여륭(餘隆)은 바다 밖에서 번방(藩方)을 지키며 멀리서 직공(職貢)의 예를 닦아 그 충성심이 환히 드러났으니, 짐(朕)이 이를 가상히 여기는 바이오. 마땅히 전례(前例)에 따라 영예로운 관직을 내리노니,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註018] 백제왕(百濟王)의 관직을 허락하오.” 보통(普通) 5년(A.D.524; 百濟 聖王 2)에 융(隆)이 죽었다.[註019]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명(明) [註020]을 지절(持節) 독백제제군사(督百濟諸軍事) 수동장군(綏東將軍)[註021]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4) [백제는] 도성(都城)을 고마(固麻)[註022]라 하고 읍(邑)을 담로(檐魯)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담로(檐魯)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宗族)에게 나누어 웅거케 하였다. 백제인(百濟人)의 키는 크며 의복은 깨끗하다. 그 나라 가까이에 왜(倭)가 있어서, 문신(文身)[註023]한 사람들도 꽤 있다.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고(高)[구(句)]려(驪)와 거의 같지만,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는 것과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 것은 다르다. 모(帽)를 관(冠)이라 부르고, 유(襦)를 복삼(複衫), 고(袴)를 곤(褌)이라 한다. 그 나라 말에는 중국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 또한 진(秦)나라와 한(韓)나라의 습속(習俗)이 남은 때문이라고 한다.[註024]
5) ○ 중대통(中大通) 6년(A.D.534; 百濟 聖王 12)과 대동(大同) 7년(A.D.541; 百濟 聖王 19) 에 거푸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註025] 아울러 열반경(涅盤經) 등에 대한 의소(義疏)와 모시박사(毛詩博士) 및 공장(工匠)· 화사(畫師) 등을 구하므로 모두 공급하여 주도록 조칙(詔敕)하였다.[註026] 태청(太淸) 3년(A.D.549; 百濟 聖王 27)에 경사(京師)가 적에게 침범당한 것을 모르고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다. 사신이 [국도(國都)에] 이르러 궁성이 황폐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자, 후경(侯景)이 노하여 사신을 잡아 가두었다. 경(景)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4. 신라(新羅) ○ 신라(新羅)[註001]
1)○ 신라(新羅)[註002]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었다.[註003] 진한(辰韓)[註004]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데, [양(梁)나라와는] 서로 1만리 쯤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 유망인(流亡人)들이 역(役)을 피하여 마한(馬韓)으로 가니, 마한에서는 동쪽 땅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진(秦)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궁,弓)을 고(孤), 도둑(적,賊)을 구(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행주,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도(徒)라고 하여 마한과 같지 아니하다. 또 진한(辰韓)의 왕(王)은 항상 마한(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 가고,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한(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2)○ 진한은 처음 6국(國)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져 12국(國)이 되었는데,[註005] 신라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그 나라는 백제(百濟)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큰 바다와 연(沿)해 있고, 남북으로는 [고(高)]구려(句驪) · 백제(百濟)와 접하고 있다. 위(魏)나라 때는 신로(新盧)라 불렀고, 송(宋)나라 때는 신라(新羅) 또는 사라(斯羅)라 하였는데,[註006]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普通) 2년(A.D. 521; 新羅 法興王 8)에 성(姓)은 모(募), 이름은 태(秦)인 [신라]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註007]
3)○ 그 습속에 왕성을 건모라(健牟羅)[註008]라 부르며 그 읍(邑)이 [건모라(健牟羅)의] 안에 있는 것은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邑勒)이라 하니,[註009] 이것은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은 말이다. 나라 안에는 6군데의 탁평(啄評)과 52군데의 읍륵(邑勒)이 있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五穀)[註010]을 심기에 적합하다. 뽕나무와 삼이 많아[註011] 비단과 베를 생산한다. 소는 수레를 끌리고 말은 탄다. 남녀간의 구별이 엄격하다. 그 나라의 관직 이름에는 자분한지(子賁旱支)[註012]· 제한지(齊旱支)[註013]· 알한지(謁旱支)[註014]· 일고지(壹告支)[註015]· 기패한지(奇貝旱支)[註016]가 있다. 그들은 관(冠)을 유자례(遺子禮)라 하며, 저고리(유,襦)를 위해(尉解), 바지(고,袴)를 가반(柯半), 신(화,靴)을 세(洗)라 한다. 그들의 절하는 방법과 걷는 모양은 고구려(高[句]驪)와 비슷하다. 문자(文字)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5. 찬자평(撰者評) ○ 사신(史臣)은 말한다. [註017]
바다 남쪽의 동이(東夷)와 서북쪽 융족(戎族)의 여러 나라는 멀리 떨어진 변방의 종족으로서 각자 자기의 강역을 가지고 있다. 산과 바다가 다르고 무리와 종자가 괴상하고 특이하여, 일찍이 들어보지 못하였으며 과거의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중국의 바깥 먼 지방의 산물(産物)과 풍토(風土)를 분별하여 그 사물의 지극히 미묘한 것을 궁구할 수 없다. 고조(高祖)가 그들을 덕으로 어루만져 편안케 하였으므로, 조공이 해마다 이르니 훌륭하도다. =============================================================================================================== 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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