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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송서[宋書] 이만열전(夷蠻列傳)
차 례 1. 고구려(高句驪) 2. 백제(百濟)
○ 송서(宋書) 이만열전(夷蠻列傳)
1. 고구려국(高句驪國)
1)○동이(東夷) 고구려국(高句驪國)은 현재 한대(漢代)의 요동군(遼東郡)을 지배하고 있다. 고구려왕 고련(高璉)이 진(晋) 안제(安帝) 의희(義熙) 9년(A.D.413; 高句麗 長壽王 1)에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자백마(赭白馬)를 바쳤다. [안제(安帝)는] 고련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영주(都督營州) 제군사(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고구려왕(高句驪王) 낙랑공(樂浪公)으로 삼았다. 고조(高祖)가 왕위에 오른 뒤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사지절(使持節) 도독영주제군사(都督營州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고구려왕(高句驪王) 낙랑공(樂浪公) 련(璉)과 사지절(使持節) 독백제제군사(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 영(映)은 함께 해외에 있으면서 바른 도리를 지키어 멀리서 공물(貢物)을 보내 오고 있소. 이제 [송(宋)나라의] 개국(開國)을 알리어 기쁨을 나누어 가지려 하오. 련(璉)은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영(映)은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삼고, 지절(持節)· 도독(都督)· 왕(王)· 공(公)의 칭호는 그대로 인정하겠오.” 라고 하였다. [영초(永初)] 3년(A.D.422; 高句麗 長壽王 10)에 [고(高)]련(璉)에게 산기상시(散騎常侍)와 독평주(督平州) 제군사(諸軍事)라는 벼슬을 더해 주었다.
2)○ 소제(少帝) 경평(景平) 2년(A.D.424; 高句麗 長壽王 12)에 [고(高)]련(璉)이 장사(長史) 마루(馬婁) 등을 송(宋)의 왕궁으로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이에 [송(宋)의 황제는] 사신을 파견하여 그 수고를 치사(致謝)하였다. “황제는 고하오.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영평이주제군사(都督營·平二州諸軍事)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고구려왕(高句驪王) 낙랑공(樂浪公) 그대는 왕위를 동방(東方)에서 이어 선인(先人)의 공적을 계승하였오. 순종하는 마음은 이미 뚜렷하고 충성 또한 드러나 요하(遼河)를 넘고 바다를 건너 공물(貢物)을 본조(本朝)에 바쳤오. 짐(朕)이 부덕한 몸으로 분에 넘치게 대통(大統)을 이어 받아 길이 선인(先人)의 자취를 생각함에 이르러서는 그 끼친 은택에 깊이 감사하는 바이오. 지금 알자(謁者) 주소백(朱邵伯)과 부알자(副謁者) 왕소자(王邵子) 등을 보내어 짐의 뜻을 전하고 수고로움을 치사(致謝)하오. 그대는 어진 정치를 힘쓰고 닦아 그 공을 길이 융성케 하고 왕명(王命)을 본받아 짐의 뜻에 맞게 하오.”
앞서 선비(鮮卑)의 모용보(慕容寶)가 중산(中山)에 도읍하였다가 색로(索虜)에게 격파되어 동쪽의 황룡(黃龍)으로 달아났다. 의희(義熙) 초에 [모용]보의 아우 [모용(慕容)]희(熙)가 그의 부하인 풍발(馮跋)에게 피살되었다. [풍]발은 스스로 군주가 되어 자신을 연왕(燕王)이라 하였는데, 그 도읍지가 황룡성(黃龍城)이어서 그 나라를 황룡국(黃龍國)이라 불렀다. [풍]발이 죽고 그의 아들 홍(弘)이 선 뒤 자주 색로(索虜)의 공격을 받았으나 함락되지는 않았다. 태조 때에는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3)○ 원가(元嘉) 12년(A.D.435; 高句麗 長壽王 23)에는 [풍홍]에게 더 높은 벼슬을 제수하였다. [원가(元嘉)] 15년(A.D.438; 高句麗 長壽王 26)에 다시 색로(索虜)의 공격을 받은 풍[홍]은 패하여 고[구]려의 북풍성(北豊城)으로 달아나서 [송(宋)나라에] 표문을 올려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고 하였다. 태조는 왕백구(王白駒)와 조차흥(趙次興)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이들을 맞이하게 하고, 아울러 고[구]려에게 [풍홍을 송나라로] 보내 주도록 하였다. 련(璉)은 [풍]홍이 남쪽(송나라)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손수(孫漱)· 고구(高仇) 등을 보내 기습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왕]백구 등은 휘하의 7천여명을 거느리고 [손(孫)]수(漱) 등을 몰래 공격하여 [손(孫)]수(漱)를 사로잡고 고구(高仇) 등 2명을 살해하였다. [고]련은 [왕]백구 등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 하여, 그들을 체포해서 송나라로 압송하였다. 황제는 멀리 떨어진 나라(고구려)의 뜻을 거슬리고 싶지 않아, [왕]백구 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놓아 주었다. [고(高)]련(璉)이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였다. [원가(元嘉)] 16년(A.D.439; 高句麗 長壽王 27) 태조가 북(北)[위(魏)]를 토벌하고자 [고(高)]련(璉)에게 말을 바치라 조서(詔書)를 내리자, 련(璉)이 말 8백필을 바쳤다.
4)○ 세조(世祖) 효건(孝建) 2년(A.D.455; 高句麗 長壽王 43)에 [고(高)]련(璉)은 장사(長史) 동등(董騰)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국상(國喪) 3주기(周忌)에 대한 조문과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대명(大明) 3년(A.D.459; 高句麗 長壽王 47)에 또 다시 숙신씨(肅愼氏)의 고시(楛矢)와 석노(石砮)를 헌상(獻上)하였다.
5)○ [대명(大明)] 7년(A.D.463; 高句麗 長壽王 51)에 이렇게 조서(詔書)를 내렸다. “사지절 산기상시 독평영이주제군사 정동제장군 고구려왕 낙랑공 련(使持節 散騎常侍 督平·營二州諸軍事 征東大將軍 高句驪王 樂浪公 璉)은 대대로 충의로 섬기어 바다 밖의 번병(藩屛)이 되었오. 짐의 조정에 충성을 다하여 포악 잔인한 무리를 없애는데 뜻을 두었고, 사막의 나라와 교류하여 짐의 덕화를 크게 떨치었오. 마땅히 벼슬을 더하여 절의(節義)를 드러내려 하오. 이에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과 개부의동삼사(開府義同三司)로 삼고, 지절 상시 도독 왕 공(持節·常侍·都督·王·公)의 칭호는 그대로 인정하오.” 태종(太宗) 태시(泰始) 연간(A.D.465~471; 高句麗 長壽王 53~59)에서 후폐제(後廢帝) 원휘(元徽) 연간(A.D.473~476;高句麗 長壽王 61~64)까지도 공물의 헌상이 끊어지지 않았다.
2. 백제(百濟)
○ 백제국(百濟國) 1)○백제국(百濟國)은 본래 고(高)[구(句)]려(驪)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 1천여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晋平郡) 진평현(晋平縣)이라 한다.
2)○ 의희(義熙) 12년(A.D.416; 百濟 腆支王 12) 백제왕 여영(餘映)을 사지절(使持節) 도독(都督) 백제제군사(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고조(高祖)가 즉위한 뒤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벼슬을 올려 주었다. 소제(小帝) 경평(景平) 2년(A.D.424; 百濟 久爾辛王 5)에 영(映)이 장사(長史) 장위(張威)를 파견하여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3)○ 원가(元嘉) 2년(A.D.425; 百濟 久爾辛王 6) 태조(太祖)가 다음과 같은 조서(詔書)를 내렸다.“황제는 고하노라.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제장군 백제왕(使持節 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은 대대로 충성하고 순종하여 바다 건너에서 정성을 다 하였오. 먼 지방의 왕위를 계승하고 조상의 덕을 이어 받아 닦음에 의(義)를 사모함이 이미 드러났고 가슴에는 붉은 정성을 품었오.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와 보물과 폐백을 조정에 바쳤오. 그러므로 왕위를 잇게 하여 그 지방을 맡기노니, 동방에서 우리 조정의 번병(藩屛)이 되어 정사(政事)를 부지런히 하여 선대(先代)의 공업(功業)을 떨어뜨리지 말도록 하시오. 지금 겸(兼) 알자(謁者) 여구은자(閭丘恩子)와 겸(兼) 부알자(副謁者) 정경자(丁敬子) 등을 파견하여 칙지(勅旨)를 펴고 노고를 위로하고자 하니 짐의 뜻에 맞도록 하시오.” 그 후 백제는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4)○ 원가(元嘉) 7년(A.D.430; 百濟 毗有王 4) 백제왕 여비(餘毗)가 다시 공물(貢物)을 바치므로 여영(餘映)의 작호(爵號)를 이어 받게 하였다. 원가(元嘉) 27년(A.D.450; 百濟 毗有王 24) 여비(餘毗)가 방물(方物)을 바치며, 국서(國書)를 올려 사사로이 대사(臺使) 풍야부(馮野夫)를 서하태수(西河太守)로 삼을 것을 추인해 주고, 표문으로 역림(易林)·식점(式占) 및 요노(腰弩)를 요구하자 태조(太祖)는 모두 들어 주었다. [여(餘)]비(毗)가 죽고 그의 맏아들 경(慶)이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5)○ 세조(世祖) 대명(大明) 원년(A.D.457; 백제-百濟 개로왕-蓋鹵王 3) 사신을 보내어 벼슬을 내려 줄 것을 요구하자 조칙(詔勅)으로 허락하였다. 대명(大明) 2년, 여경(餘慶)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의 나라는 대대로 특별한 은혜를 입고 문무의 훌륭한 신하들이 대대로 조정의 관작을 받았습니다. 행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등 11명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높은 지위에 나아감이 마땅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가엾게 여기시어 모두 관직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행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를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삼고,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과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여훈(餘暈)을 모두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행보국장군(行輔國將軍) 여도(餘都)와 여예(餘乂)를 모두 보국장군(輔國將軍)으로, 행용양장군(行龍驤將軍) 목금(沐衿)과 여작(餘爵)을 모두 용양장군(龍驤將軍)으로, 행영삭장군(行寧朔將軍) 여류(餘流)와 미귀(麋貴)를 모두 영삭장군(寧朔將軍)으로, 행건무장군(行建武將軍) 우서(于西)와 여루(餘婁)를 모두 건무장군(建武將軍)으로 삼았다. 태종(太宗) 태시(泰始) 7년(A.D.471; 百濟 개로왕-蓋鹵王 17) 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 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2. 백제의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이라는 우현왕, 좌현왕의 기록은 매우 중요합니다 3. 한자(漢字)를 한글로 바꾸는데는 아래한글 프로그램의 도움을 대단히 많이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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