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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진서[晋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차 례
1. 부여(夫餘) 2. 마한(馬韓) 3. 진한(辰韓) 4. 숙신(肅愼)
○ 진서(晋書)[註001] 동이열전(東夷列傳)[註002]
1. 부여국(夫餘國)[註003]
1) ○부여국(夫餘國)[註004]은 현도(玄菟)의 북쪽 천여리에 있는데, 남쪽은 선비(鮮卑)[註005]와 접해 있고,[註006]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2천리이고, 호수(戶數)는 8만이다. 성읍(城邑)과 궁실(宮室)이 있으며, 토질은 오곡(五穀)이 자라기에 적당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굳세고 용감하며, 회동(會同)하거나 읍양(揖讓)하는 예의에 있어서는 중국(中國)과 비슷하다. 외국에 사신으로 갈 때에는 비단이나 모직물로 만든 옷을 입고, 금이나 은으로 만든 장신구로 허리를 장식한다. 그 나라의 법률은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을 몰수하며, 도둑질을 한 사람은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갚도록 하고, 남년(男女)가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하면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혹 전쟁이 있게 되면 소를 잡아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합해지면 길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으면 산 사람으로 순장(殉葬)을 하며, 곽(椁)은 있으나 관(棺)은 없다.[註007] 상(喪)을 치르는 동안은 남녀가 모두 흰 옷을 입는데, 부인은 베로 만든 면의(面衣)를 착용하며 옥(玉)으로 만든 패물은 차지 않는다.[註008] [그 나라에서는] 좋은 말과 담비(貂)·삵괭이(豽)와 좋은 구슬이 산출되는데, 그 구슬의 크기는 대추만 하다. 그 나라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先代)로부터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일이 없다.[註010] 그 왕(王)의 인장에는 「예왕지인(穢王之印)[註011]」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나라 가운데에 옛 예성(穢城)이 있으니, 그것은 본래 예맥(穢貊)의 성이다.[註012]
2)○ [서진(西晋)]의 무제(武帝) 때에는 자주 와서 조공(朝貢)을 바쳤는데,[註013] 태강(太康) 6년(A.D.285; 高句麗 西川王 16)에 이르러 모용외(慕容廆)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부여(夫餘)]왕(王) 의려(依慮)는 자살하고,[註014] 그의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註015] 무제(武帝)는 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부여왕이 대대로 충성과 효도를 지키다가 몹쓸 오랑캐에게 멸망되었음을 매우 가엾게 생각하노라. 만약 그의 유족으로서 복국(復國)할만한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방책을 강구하여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하게 하라.” 이에 유사(有司)가 보고하기를,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註016]인 선우영(鮮于嬰)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아서 기민하게 대응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고 하였다. [무제(武帝)는] 조서를 내려 [선우]영을 파면시키고 하감(何龕)으로 교체하였다.
3)○ 이듬 해에 부여후왕(夫餘後王) 의라(依羅)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하]감은 전열(戰列)을 정비하고 독우(督郵)[註017] 매침(買沈)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부여(夫餘)의 사자를]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가]침이 [모용]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모용]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의]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註018] 그 후에도 [모용]외는 매번 [부여의]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아 먹었다.[註019] 황제는 그것을 가엾게 여기어 다시 조서를 내려 국가의 비용으로 속전(贖錢)을 주고 [그들을 부여로] 되돌려 보내었으며, 사주(司州)와 기주(冀州)에 명하여 부여 사람의 매매를 금지시켰다.
2. 마한(馬韓) ○ 마한(馬韓)[註001]
1)○한(韓)에는 세 개의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대방(帶方)[군(郡)]의 남쪽에 있는데,[註002]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는다.
2)○ 마한은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데 성곽(城郭)이 없다. 모두 56개의 작은 나라가 있는데,[註003] 큰 나라는 1만호(萬戶), 작은 나라는 수천호(數千家)로서, 각각 거수(渠帥)가 있다. 마한의 풍습은 기강이 낮아 궤배(跪拜)하는 예(禮)가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들어 거처하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문은 위쪽으로 나있다.[註004] 온 가족이 그 속에 함께 살기 때문에 장유(長幼)와 남녀(男女)의 분별이 없다.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가축을 기르는 것은 단지 장사지내는 데 쓰기 위해서이다. [그 나라의] 풍속에는 금·은·비단·모직물 따위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귀중하게 여겨서 옷에 꿰어 차기도 하고 또는 머리를 장식하거나 귀에 달기도 한다. 남자들은 머리를 틀어묶고 상투를 드러내놓으며,[註005]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용감하고 굳세다. 국가에 부역이 있거나 성황(城隍)을 수축(修築)할 적에[註006] 용감하고 건강한 젊은이는 모두 등가죽을 뚫고 그 구멍에 큰 밧줄을 꿰어, 막대기로 그 줄을 흔들며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면서 힘껏 일하는데, [이를]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註007] [그 나라 사람들은] 활·방패·창·큰 방패를 잘 쓰며, 비록 남과 다투거나 전쟁을 할 때에도 굴복한 상대를 서로 귀하게 여긴다. [마한의] 풍습은 귀신을 믿으므로 해마다 5월에 씨뿌리는 작업을 마친 뒤, 떼지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신(神)에게 제사지낸다. 10월에 이르러 추수를 마친 뒤에도 역시 그렇게 한다. 국읍(國邑)에는 각각 한 사람을 세워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재하게 하는데, 그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별읍(別邑)을 설치하여 그 이름을 ‘소도(蘇塗)’[註008]라 하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단다. 소도(蘇塗)의 뜻은 서역(西域)의 부도(浮屠)와 흡사하지만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차이가 있다.
3)○ [서진(西晋)의]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元年)(A.D.280; 百濟 古爾王 47)과 2년(A.D.281; 百濟 古爾王 48)에 그들의 임금이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조공하였고, [太康] 7년(A.D.286; 百濟 責稽王 1)·8년(A.D.287; 百濟 責稽王 2)· 10년(A.D.289; 百濟 責稽王 4)에도 자주 왔다.[註009] 태희(太熙) 원년(元年)(A.D.290; 百濟 責稽王 5)에는 동이교위(東夷校尉) 하감(何龕)에게 와서 조공을 바쳤다. 함녕(咸寧) 3년(A.D.277; 百濟 古爾王 44)에 다시 [사절이] 왔으며, 이듬해에 또 내부(內附)하기를 청하였다.[註010]
3. 진한(辰韓) ○ 진한(辰韓)[註001]
1)○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진한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註002] [진(秦)의]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韓)에 들어왔는데, 한(韓)이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성책(城柵)을 세웠으며, 언어는 진(秦)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점이 있어 이로 말미암아 혹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6국(國)이 있었으나, 그 뒤 점점 나뉘어 12국(國)이 되었다. 또 변진(弁辰)이 있는데 그 역시 12국으로 도합 4~5만호(萬戶)[註003]이며, 각각 거수(渠帥)가 있고 모두 진한(辰韓)에 속해 있다. 진한은 언제나 마한 사람을 임금으로 삼아 비록 대대로 계승하지만 [진한 사람이] 스스로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으니,[註004]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이 분명한 까닭에 마한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진한의] 토질은 오곡(五穀)이 자라기에 적당하며, 양잠이 성행하고 비단을 잘 짜며, 소도 부리고 말도 탄다. 그 풍속은 마한과 비슷하며, 병기도 역시 마한과 같다. 아기가 처음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한다. 춤추기를 좋아하며 비파 연주를 잘 하는데, 비파의 모양은 축(筑)과 비슷하다.
2)○ [서진(西晋)]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元年)(A.D.280; 新羅 味鄒王 19)에 [진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태강(太康)] 2년(A.D281; 新羅 味鄒王 20)에 다시 와서 조공하였으며, [태강(太康)] 7년(A.D.286; 新羅 儒禮王 3)에도 또 왔다.[註005]
4. 숙신(肅愼) ○ 숙신씨(肅愼氏)[註001]
1)○숙신씨(肅愼氏)[註002]는 일명 읍루(挹婁)[註003]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註004] 북쪽에 있으며, 부여(夫餘)에서 60일 쯤 가야하는 거리에 있다.[註005] 동(東)쪽으로는 큰 바다에 연해 있고, 서(西)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註006]과 접해 있으며, 북(北)쪽은 약수(弱水)에까지 이른다.[註007] 그 땅의 경계는 사방 수천리에 뻗쳐 있다.[註008] [사람들은] 심산궁곡(深山窮谷)에 살며, 그 길이 험준하여 수레나 말이 통행하지 못한다.[註009] 여름철에는 나무 위에서 살고[註010] 겨울철에는 땅굴에서 산다.[註011]
2)○ [그 나라에서는] 부자(父子)가 대대로 [세습하여] 군장(君長)이 된다.[註012] 문자(文字)가 없기 때문에 언어(言語)로 약속을 한다.[註013]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 단지 재산으로 여길 뿐이다.[註014] 소와 양은 없고[註015] 돼지를 많이 길러서,[註016]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며 털은 짜서 포(布)를 만든다. 낙상(雒常)[註017]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중국(中國)에 성제(聖帝)가 새로 제위(帝位)에 오르면 그 나무에 껍질이 생겨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다고 한다. 우물이나 부엌이 없으며, 와격(瓦鬲)[註018]을 만들어 4~5되의 밥을 담아서 먹는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뻗고 앉으며,[註019] 발에 고기를 끼워 놓고 씹어 먹는다. 언 고기를 얻으면 그 위에 올라 앉아서 [체온으로] 녹인다.
3)○ [그 지방에서는] 소금과 철(鐵)이 생산되지 않으므로,[註020]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고 [물을] 부어 즙(汁)을 받아서 먹는다. 그 사람들은 모두 편발(編髮)[註021]을 하고, 포(布)로 지름이 한자 쯤 되는 가리개를 만들어 앞과 뒤를 가리운다.[註022] 혼인하러 갈 때에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에 깃털을 꽂아주는데,[註023] 여자가 [결혼을] 승락하면 그 깃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음에 예를 갖추어 맞아 온다.[註024] 부인(婦人)은 정숙한 반면 처녀는 음란하며,[註025] 건강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늙은이는 천하게 여긴다.[註026] 죽은 사람은 죽은 그 날에 곧 바로 들에다 장사를 지내는데,[註027] 나무를 짜 맞추어 작은 곽(椁)을 만들고 돼지를 잡아서 그 위에 쌓아 놓고는 죽은 사람의 양식이라고 한다. 그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사나우며,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을 서로 숭상하므로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곡(哭)하지 않는데,[註028] 곡(哭)하는 사람은 씩씩하지 못하다고 한다. 도둑질을 한 사람은 물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두 죽인다. 그 때문에 비록 들에다 놓아 두어도 훔쳐가지 않는다.[註029] [숙신(肅愼)에는] 돌로 만든 살촉(석노,石砮)[註030]과,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註031]과, 석자 다섯치의 단궁(檀弓)[註032]과, 한 자(尺) 몇 치(咫)쯤 되는 길이의 고시(楛矢)[註033]가 있다. 그 나라의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산출되는 돌은 쇠를 자를만큼 날카로운데, [그 돌을] 채취하려면 반드시 먼저 신(神)에게 기도하여야 한다.
4)○ 주(周) 무왕(武王)때에 그 고시(楛矢)와 석노(石砮)를 바쳤다.[註034]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하던 때에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하(朝賀)하였다.[註035] 그 뒤 천여년 동안은 비록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강성한 세력으로도 그들을 오게 하지 못하였다.[註036]
5)○ 문제(文帝)가 [위(魏)의] 정승이 되었을 때[註037]인 위(魏)나라 경원(景元)(A.D.260~263; 高句麗 中川王 13~16)말경에 고시(楛矢)· 석노(石砮)· 궁갑(弓甲)· 초피(貂皮) 따위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위제(魏帝)는 [그 물건들을] 승상부(丞相府)에 보내도록 명(命)하고, [숙신(肅愼)의] 왕(王) 녹(傉)에게는 닭· 비단 모직물· 솜을 하사하였다.
6)○ 무제(武帝)의 원강(元康)(A.D.291~299; 高句麗 西川王 22~烽上王 8) 초에 다시 와서 공물을 바쳤다. [동진(東晋)의] 원제(元帝)가 [진(晋)나라를] 중흥(中興)시키자, 또 강좌(江左)에 와서 그 석노(石砮)를 공물(貢物)로 바쳤다.
7)○ 성제(成帝) 때에 이르러서는 [후조(後趙)의] 석계룡(石季龍)에게 통호(通好)하여 조공(朝貢)하였는데,[註038] 4년만에 비로소 도달하였다. 석계룡이 [사신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언제나 소와 말이 항상 서남쪽으로 향하여 잠자는 것을 3년간 보고서, 대국(大國)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왔습니다.” 하였다 한다. ======================================================================================================================= 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2. 진서 동이열전은 한마디로 사료적 가치가 낮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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