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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1)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연(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燕)나라 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군리(軍吏)를 두기 위하여 국경에 성을 쌓았다. 진(秦)나라가 연(燕)을 멸(滅)한 뒤에는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遼東)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2)○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에] 반(反)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亡命)하였다. 무리 천(千)여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에 살았다. 점차 진번조선(眞番·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제(齊)의 망명자(亡命者)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王)이 되었으며,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
3)○ 이 때는 마침 [한(漢)의] 효혜(孝惠)·고후(高后)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遼東太守)는 곧 만(滿)을 외신(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만이(蠻夷)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만이(蠻夷)의 군장(君長)들이 [중국에] 들어와 천자(天子)를 알현(謁見)코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天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만(滿)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財物)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小邑)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眞番)·임둔(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服屬)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右渠)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漢)나라의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천자(天子)에게 들어와 조현(朝見)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알현(謁見)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4)○ 원봉(元封) 2년(B.C.109) 에 한(漢)나라는 사신(使臣)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우거는] 끝내 천자(天子)의 명(命)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涉何)가 돌아가는 길에 국경인 패수(浿水)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자기를]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곧바로 [패(浿)]수(水)를 건너서 새(塞)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드디어 천자(天子)에게 ‘조선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天子)가 그 공(功)을 기려 꾸짖지 않고 [섭(涉)]하(何)에게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조선은 하(何)에게 원한을 품고 군사를 출동시켜 기습 공격하여 하(何)를 죽이니, 천자(天子)는 죄인(罪人)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어] 조선(朝鮮)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배를 타고 발해(勃海)를 건너가게 하고, 병력 5만으로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遼東)에서 출격하여 우거(右渠)를 주살(誅殺)하게 하였다. 우거(右渠)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5)○ 좌장군(左將軍)의 졸다(卒多)가 요동(遼東)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진병(進兵)하였으나 싸움에 패(敗)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다(多)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法)에 의하여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누선(樓船)[장군(將軍)]은 제(齊)나라 병사 7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험(王險)에 도착하였는데, 우거(右渠)가 성(城)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장군(樓船將軍)의 군사가 적은 것을 엿보아 알고, 곧바로 성(城)을 나와 누선(樓船)[군(軍)]을 공격하니 누선(樓船)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장군 [양(楊)]복(僕)은 그의 군사를 잃고 십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다시 모았다. 좌장군(左將軍)도 조선 패수(浿水) 서편의 군대를 공격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였다
6)○ 천자(天子)는 두 장군의 전세가 이로움이 없다고 여겨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右渠)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使者)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장군이 신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웠었는데,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태자(太子)를 보내어 들어가 사죄(謝罪)하게 하고 말 5천필을 바치며, 또 군량(軍糧)을 공급하였다. 무리 만여명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浿水)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左將軍)은 그들이 어떤 변(變)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太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휴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였다. 태자(太子)도 사자(使者)와 좌장군(左將軍)이 속이는게 아닌가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浿水)를 건너지 않고 다시 부하를 인솔하여 돌아갔다. [위(衛)]산(山)이 천자(天子)에게 보고하자, 천자(天子)는 산(山)을 주살(誅殺)하였다.
7)○ 좌장군(左將軍)은 패수(浿水)에서 군사를 격파하고 바로 전진하여 [왕험(王險)]성(城)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방면을 포위하였다. 누선(樓船)[장군(將軍)]도 가서 [좌장군(左將軍)과] 합세하여 성(城)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右渠)가 끝내 성을 굳게 지키니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좌장군(左將軍)은 본디 시중(侍中)으로 [천자(天子)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다가 연(燕)과 대(代)지방의 군사를 거느렸으므로 굳세었는데,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들이 더욱 교만해졌다. 누선(樓船)[장군]은 제(齊)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여러 번 패하고 군사를 잃었으며, 앞서 우거(右渠)와의 싸움에서 곤욕(困辱)을 치른 패잔한 군사들이므로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장군은 마음으로 부끄럽게 여겨 우거(右渠)를 포위하고서도 항상 화평을 유지했다.
8)○ 좌장군(左將軍)이 맹렬하게 성을 공격하니 조선(朝鮮)의 대신(大臣)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어 사사로이 누선(樓船)[장군(將軍)]에게 항복을 약속했으나, 말만 오고 갈 뿐 아직 확실한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 좌장군(左將軍)은 여러 차레 누선(樓船)[장군(將軍)]과 싸울 시기를 정하였으나, 누선(樓船)[장군(將軍)]은 [조선(朝鮮)과의] 약속을 성취시키려고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 좌장군(左將軍)도 사람을 보내어 조선이 항복해 올 때를 탐문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반기지 않고 누선(樓船)[장군(將軍)]에게로 마음을 두고 있었다. 이 까닭으로 두 장군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좌장군(左將軍)은 마음속으로 ‘누선(樓船)이 전번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는데다, 지금은 조선(朝鮮)과 사이가 좋으면서 [조선(朝鮮)은] 또한 항복하지 않으니 그에게 모반할 계획이 있지 않는가’ 의심은 하면서도 감히 발설하지는 못했다
9)○ 천자(天子)는 말하기를 “장수가 잘 전진하지 못하므로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우거(右渠)를 달래 항복하도록 하였더니 단독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左將軍)과 서로 일을 그르쳐서 끝내 약속이 깨어지고 말았다. 지금 두 장군이 성(城)을 포위하고서도 의견이 맞지 아니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결판이 나지 않는다.” 하고는, 전 제남태수(前 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이를 바로잡고 상황에 맞게 처리하도록 하였다. [공손(公孫)]수(遂)가 도착하니 좌장군(左將軍)은 말하기를, “조선(朝鮮)이 항복할 형편에 이른 지 오래되었는데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누선(樓船)이 여러 번 싸울 시기에 합세하지 않아서입니다.”하고는 평소에 품고 있던 생각을 [공손(公孫)]수(遂)에게 낱낱이 고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이와 같으니, [누선(樓船)을] 체포하지 않으면 큰 해(害)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樓船) 혼자만이 아니라 조선과 함께 우리 군대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라고 하니, [공손(公孫)]수(遂)도 이를 옳게 여기고 좌장군(左將軍)의 군영(軍營)에 들어와서 일을 의논하자고 부절(符節)로써 누선장군을 부르고는, 곧 좌장군(左將軍)의 부하(部下)에게 명령하여 누선장군(樓船將軍)을 붙잡아 결박한 뒤 그 군사를 [좌장군(左將軍)의 군사와] 합치고, 이를 천자(天子)에게 보고하자, 천자(天子)는 [공손(公孫)]수(遂)를 주살(誅殺)하였다.
10)○ 좌장군(左將軍)이 이미 두 군대를 합병한 뒤 맹렬히 조선(朝鮮)을 공격하였다. 조선(朝鮮)의 상(相) 로인(路人)· 한도(韓陶)와 니계상(尼谿相) 참(參)과 장군(將軍) 왕겹(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 누선(樓船)[장군(將軍)]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나 지금 누선(樓船)은 잡혀 있고, 좌장군(左將軍) 단독으로 장졸(將卒)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니, 맞아서 싸우기 두렵거늘 왕(王) 또한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하고 [한(韓)]도(陶)·[왕(王)]겹(唊)· 로인(路人)이 모두 도망하여 한(漢)나라에 항복하였다. 노인(路人)은 도중(道中)에서 죽었다.
11)○ 원봉(元封) 3년(B.C.108) 여름, 니계상(尼谿相) 참(參)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朝鮮王) 우거(右渠)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왕험성(王險城)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右渠)의 대신(大臣) 성이(成已)가 또 [한(漢)에] 반(反)하여 다시 군리(軍吏)를 공격하였다. 좌장군(左將軍)이 우거(右渠)의 아들 장(長)과 항복한 상(相) 로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이(成已)를 주살(誅殺)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朝鮮)을 평정하고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참(參)을 봉(封)하여 홰청후(澅淸侯)로 삼고, [한(韓)]도(陶)는 추저후(秋苴侯)로, [왕(王)]겹(唊)은 평주후(平州侯)로, 장(長)은 기후(幾侯)로 삼았다. 최(最)는 아버지가 죽은데다 자못 공이 있었으므로 저양후(沮陽侯)로 삼았다. 좌장군(左將軍)을 불러 들여 [그가] 이르자 공(功)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그러지게 한 죄로 기시(棄市)하였다. 누선장군(樓船將軍)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列口)에 이르렀다면 좌장군(左將軍)을 기다렸어야 당연한데, 함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 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속전(贖錢)을 받고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찬자평(撰者評) ○ 찬(贊)한다.
초(楚)·월(粤)의 선대(先代)는 대대로 국토가 있었다. 주(周)나라가 쇠미(衰微)할 즈음에는 초(楚)의 국토가 5천리나 되었으며, 구천(句踐)도 월(粤)에서 패업을 이루었다. 진(秦)이 제후(諸侯)를 멸(滅)하였으나 오직 초(楚)에만 전왕(滇王)이 있었으며, 한(漢)이 서남이(西南夷)를 베었으나 전(滇)만 홀로 사랑을 받았다. 동월(東粤)이 멸망되자 나라에서는 그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는데, 요왕(繇王) 거고(居股) 등은 오히려 만호후(萬戶侯)가 되었다. 세 지방의 개척은 모두 일 좋아하는 신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서남이(西南夷)는 당몽(唐蒙)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발의(發議)하였고, 양월(兩粤)은 엄조(嚴助)와 주매신(朱買臣)이 기의(起議)했으며, 조선(朝鮮)은 섭하(涉何)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전성기(全盛期)를 만나 출동하면 성공하였으나 너무나 수고스러웠다. 태종(太宗)이 위타(尉佗)를 진무(鎭撫)한 옛 일을 보면, 옛 사람의 이른바 ‘예(禮)로써 초치(招致)하며, 덕(德)으로써 먼 곳의 사람을 회유(懷柔)함’이 아닌가! ===================================================================================================================== 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한서 조선전은 사기 조선열전을 베꼈기 때문에 거의 똑같습니다. 차이점만 주의해서 보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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