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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위서[魏書] 열전(列傳)
차 례
1. 고구려(高句麗) 2. 백제(百濟) 3. 물길(勿吉) 4. 찬자평(撰者評)
○ 위서(魏書)[註001] 열전(列傳)[註002]
1. 고구려(高句麗)[註003]
1) ○고구려[註004]는 부여(夫餘)에서 갈라져 나왔는데,[註005]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註006]이라 한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註007]의 딸[註008]로서 부여왕(夫餘王)에게 [잡혀] 방에 갇혀 있던중, 햇빛이 비치는 것을 몸을 돌려 피하였으나 햇빛이 다시 따라와 비추었다. 얼마 후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승-升)들이 만하였다. 부여왕이 그 알을 개에게 주었으나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다 버렸으나 소나 말들이 피해 다녔다. 뒤에 들판에 버려 두었더니 뭇새가 깃털로 그 알을 감쌌다. 부여왕은 그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게 되자, 결국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그 어머니가 다른 물건으로 이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사내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가 성장하여 자(字)를 주몽(朱蒙)이라고 하니, 그 나라 속언(俗言)에‘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2)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所生)이 아니기 때문에 장차 딴 뜻을 품을 것이라고 하여 그를 없애 버리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은 말마다 남모르게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이 있음을 알고, 준마는 먹이를 줄여 마르게 하고 굼뜬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뒤 사냥할 때 주몽에게는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한 마리를 잡는데] 화살 하나로 한정시켰으나, 주몽이 비록 화살은 적었지만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 모의를 꾸미자, 주몽의 어머니가 알아차리고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너를 해치려 하니, 너 같은 재주와 경략을 가진 사람은 아무데고 멀리 떠나는 것이 옳을 것이다.”하였다.
3) ○ 주몽은 이에 오인(烏引)·오위(烏違) 등 두 사람[註009]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중도에서 큰 강[註010]을 하나 만났는데, 건너려 하여도 다리는 없고, 부여 사람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강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註011]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길에 추격하는 군사가 바짝 쫓아오니,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자, 이 때에 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 올라와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넌 뒤 고기와 자라는 금방 흩어져버려 추격하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은 마침내 보술수(普述水)[註012]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무명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부들고 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註013]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인하여 성을 고씨(高氏)라 하였다.[註014]
4) ○ 지난 날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잉태하였었는데, 주몽이 도망한 뒤에 한 아들을 낳으니, 자(字)를 처음에는 여해(閭諧)라 하였다. 성장하여 주몽이 국왕(國王)이 되었음을 알고는 곧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이름을 여달(閭達)[註015]이라 하고, 나라 일을 그에게 맡겼다.[註016]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註017]이 왕이 되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莫來)[註018]가 왕이 되어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는 크게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통합·복속되었다.[註019] 막래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 후손 궁(宮)[註020]에 이르렀다.[註021]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았으므로 국인(國人)들이 미워하였다. 성장함에 흉악하고 사나워, 나라가 그로 말미암아 쇠잔해지고 파멸하게 되었다. 궁의 증손 위궁(位宮)[註022]이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니, 사람들은 그가 증조부 궁(宮)을 닮았다하여 이름을 위궁(位宮)이라 지었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 한다. 위궁도 용감하고 힘이 세며, 말과 활에 익숙하였다.[註023]
5) ○ 위(魏)나라 정시(正始) 연간(A.D.240~248; 高句麗 東川王 14~中川王 1)에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을 침략하였다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에게 격파당하였다.[註024] 그의 현손은 을불리(乙弗利)[註025]요, 리(利)의 아들은 쇠(釗)[註026]인데, 열제(烈帝)[註027] 때에 모용씨(慕容氏)와 서로 싸움을 벌였다.[註028] 건국(建國) 4년(A.D.342; 高句麗 故國原王 12)에 모용원진(慕容元眞)[註029]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였다. 남쪽 길로 침입하여 목저(木底)에서 전투를 벌여 쇠(釗)의 군대를 대파시키고 승승장구, 드디어 환도(丸都)까지 침입하니 쇠(釗)는 혼자서 도망쳤다.[註030] 원진(元眞)이 쇠(釗)의 아버지 묘를 파헤쳐서 시체를 싣고, 아울러 그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진귀한 보화와 남녀 오만(五萬)여명을 약탈하고, 그의 궁실을 불살라 환도성(丸都城)을 파괴한 뒤 귀환하였다. 그 후로 쇠(釗)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으나, 구적(仇敵)들에게 길이 막혀 혼자 힘으로는 도착하지 못하였다. 쇠(釗)는 뒤에 백제군에게 살해당하였다.[註031]
6) ○ 세조(世祖) 때에 쇠(釗)의 증손 [註032] 련(璉)이 처음으로 사신 안동(安東)을 파견하여 표를 올리고 방물을 마치면서 아울러 국휘(國諱)를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조명(詔命)으로 제계(帝系)의 이름 자(字)를 그 나라에 내려 주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파견하여 장(璋)을 도독요해제군사(都篤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註033]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註034]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註035] 고구려왕(高句麗王)에 배수(拜授)하였다.[註036]
오(敖)가 그들이 사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 나라의 여러 곳을 방문한 뒤 이렇게 말하였다. “[고구려(高句麗)는]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 떨어진 곳으로서, 동쪽으로는 책성(栅城),[註037] 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르고,[註038] 북쪽은 예전의 부여에 이른다.
민호(民戶)의 수는 전 위(魏)나라 때보다 3배가 많았다.[註039] 그 나라는 동서가 2천여리이며 남북은 1천여리나 된다. 백성은 모두 토착민으로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하고, 삼베와 비단 및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토질(土質)이 척박하여 양잠과 농업으로는 자급하기에 부족하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풍속이 음란하고 노래와 춤을 즐겨, 밤이면 남녀가 떼지어 어울려 노는데, 귀천의 구별은 없었지만 정결한 것을 좋아하였다. 그 왕은 궁실을 잘 지어 치장하였다.[註040]
7) ○ 그 궁명(宮名)은 알사(謁奢)[註041]· 태사(太奢)[註042]· 대형(大兄)[註043]· 소형(小兄)[註044]의 호(號)가 있다.[註045] 머리에는 절풍(折風)[건(巾)]을 쓰니 그 모양이 변(弁)과 흡사하였으며, 건(巾)의 모서리에 새의 깃을 꽂는데 귀천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일어서면 반공(反拱)을 하였고, 꿇어 앉아 절할 때는 다리 하나를 폈으며, 걸음걸이는 달음박질을 하듯 빨리 간다.
해마다 시월(十月)이면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인다.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모두 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고 금· 은으로 치장을 하였다.[註046] 쭈그리고 앉기를 좋아하고 밥 먹을 때는 조궤(俎几)를 사용한다. 키가 석 자 쯤 되는 말이 나는데, 옛날 주몽(朱蒙)이 탔던 말이라고 하며, 그 말의 종자가 바로 과하마(果下馬)이다.”[註047] 그 뒤에 공물과 사신이 자주 왕래하여 해마다 황금 200근·백은(白銀) 400근을 바쳤다.[註048]
그 때 풍문통(馮文通)이 무리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세조(世祖)가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파견하여 련(璉)에게 조서를 내려 문통(文通)을 보내라고 명령하자, 련(璉)은 상서(上書)하여 문통과 함께 왕화(王化)를 받들겠다고 하면서도 끝내 보내지 아니하였다. 세조가 화를 내어 그들을 토죄(討罪)하려 하였으나,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훗날을 기다려 거병(擧兵)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므로, 세조는 그만 두었다. 문통(文通) 역시 얼마 후 련(璉)에게 피살되었다.[註049]
8) ○ 뒤에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의 육궁(六宮)이 채워지지 못하였다 하여, 조칙으로 련(璉)에게 그의 딸을 보내라고 하였다. 공(公)이 표를 올려, “딸은 이미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딸 중에서 구하여 조칙에 응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이에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상서(尙書) 이부(李敷) 등을 보내 국경까지 가서 예물을 보내게 하였다.
그러나 련(璉)은,“위(魏)나라는 지난 날 풍씨(馮氏)와 혼인을 맺었다가 얼마 안되어 그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은감(殷鑑)이 멀지 아니하니 당연히 핑계를 대고 거절하여야 할 것입니다.” 라는 좌우 신하들의 말에 현혹되어, 마침내 글을 올려 그의 조카딸이 죽었다고 거짓말하였다. 조정에서는 속이는 것이라 의심하여 다시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엄중히 문책하고, “조카딸이 참으로 죽었다면 종친(宗親) 중의 어진 딸을 뽑아 줄 것을 허락한다.” 고 하였다. 련(璉)은“천자께서 이전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신다면 삼가 조칙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그 무렵 현조(懸祖)가 붕(崩)하여 그 일은 중지되었다.[註050] 고조(高祖) 때에 이르러 련(璉)이 바치는 공물은 전보다 배로 늘었고, 그 보답으로 내리는 물건도 역시 조금씩 더하여 주었다.[註051]
9) ○ 그 때 광주(光州)[註052]의 [관사(官司)가] 련(璉)이 파견하여 소도성(蕭道成)[註053]에게 가던 사신 여노(餘奴) 등을 해상에서 체포하여 대궐로 압송하여 왔다. 고조가 조서로 련(璉)을 꾸짖기를, “[소(蕭)]도성(道成)은 직접 자기의 군주를 죽이고 강좌(江左)에서 천자의 칭호를 참칭(僣稱)하므로, 짐이 바야흐로 망해버린 [송]나라를 옛 그 지역에 일으키어 끊어져 버린 유씨(劉氏)[註054]의 대(代)를 이으려고 하는데, 경은 월경외교(越境外交)하여 찬탈한 역적과 멀리서 통호(通好)하려 하니, 어찌 이것이 번신(藩臣)으로서 절의를 지키는 도리이겠느냐! 그러나 이제 한 가지의 허물을 가지고 옛날 정분을 묵살할 수 없어 잡혀온 사람들을 곧장 그대 나라에 돌려보내니, 용서하여 주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잘못을 생각하도록 하라. 공경히 나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대가 거느린 땅을 평안히 안정시키고, 그대가 하는 일은 보고토록 하라.”하였다.[註055]
10) ○ 태화(太和) 15년(A.D.491; 高句麗 長壽王 79)에 련(璉)이 죽은 나이가 100여세였다. 고조(高祖)는 동쪽 교외(郊外)에 나가 거애(擧哀)하고, 알자복사(謁者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 거기대장군태부(車騎大將軍太傅)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에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다.[註056] 또 대홍려(大鴻臚)를 보내 련(璉)의 손자 운(雲)[註057]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에 배(拜)하고, 의관(衣冠)과 복장· 기물(器物) 및 수레· 깃발 따위의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또 조서로 운(雲)에게 세자(世子)를 보내 입조하여 교구(郊丘)에서 지내는 제천(祭天) 행사에도 참석케 하라고 하였다. 운(雲)이 상서(上書)하여 [세자가] 병이 났다는 핑계로 그의 종숙(從叔) 승우(升于)를 보내 사신을 따라 대궐에 나아가게 하니, 준엄하게 질책하였다. 이 뒤에도 해마다 빠짐없이 공물을 바쳤다.[註058]
11) ○ 정시(正始) 연간(A.D.504~507; 高句麗 文咨王 13~16) 에 세종(世宗)이 동당(東堂)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인견(引見)하니, 실불(悉弗)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북위(北魏)에]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 여러 대에 걸쳐 충성하여 땅에서 나거나 거두어 들이는 것을 조공(朝貢)에 빠뜨리지 않았었습니다. 오직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珂)는 섭라(涉羅)[註059]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났고 섭라(涉)羅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 [고구려(高句麗)]국(國)의 왕(王)인 신(臣) 운(雲)은 끊어진 나라를 잇는 의리를 생각하여 [부여(夫餘)나 섭라(涉羅)의 사람들을] 모두 저희 나라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지금 두 가지 물건을 왕부(王府)에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하자, 세종(世宗)은, “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海外)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지난날 공물의 허물은 그 책임이 연솔(連率)[註060]에게 있소. [경은] 꼭 짐의 뜻을 경의 군주에게 전하여 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土産物)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 하였다.[註061]
12) ○ 신구(神龜) 연간(A.D.518~519; 高句麗 文咨王 27~安藏王 1)에 운(雲)이 죽어,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거애(擧哀)하였다. 사신을 보내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에 추증(追贈)하였다.[註062] 또 그의 세자(世子) 안(安)[註063]을 배(拜)하여 안동장군(安東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삼았다. 정광(正光)(A.D.520~524; 高句麗 安藏王 2~6)초에 광주(光州) 해상에서 숙연(肅衍)이 안(安)에게 주는 영동장군(寧東將軍)의 의관과 칼 및 패물(佩物) 그리고 사신으로 가던 강법성(江法盛) 등을 잡아 경사(京師)로 보냈다.[註064]
13) ○ 안(安)이 죽고 아들 연(延)이 즉위하였다. 출제(出帝) 초에 조서를 내려 연(延)에게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을 가수(加授)하고, 의관(衣冠)과 복물(服物) 및 수레와 깃발 따위의 물건들을 하사(下賜)하였다[註065] 천평(天平) 연간(A.D.534~537; 高句麗 安原王 4~7)에 조서를 내려 연(延)에게 시중(侍中)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을 가수(加授)하고, 나머지는 전부 과거의 예와 같이 하였다. 연(延)이 죽고 아들 [註067] 성(成)이 즉위하였다. 무정(武定)(A.D.543~549; 高句麗 安原王 13~陽原王 5) 말기까지 공물과 사신이 오지 않은 해가 없었다.[註068]
2. 백제(百濟) ○ 백제국(百濟國)[註001]
1)○ 백제국(百濟國)[註002]은 그 선조[註003]가 부여(夫餘)[註004]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는 북쪽으로 고구려(高句麗)와 천여리가 떨어져 있고,[註005] 소해(小海)[註006]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들은 토저생활(土著生活)을 하는데, 지대가 대부분 낮고 습하여 모두 산에서 산다.[註007] 오곡(五穀)이 생산되고, 의복과 음식은 고구려(高句麗)와 같다.[註008]
2)○ 연흥(延興) 2년(A.D.472; 百濟 개로왕,蓋鹵王 18)에 백제왕(百濟王) 여경(餘慶)[註009]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註010] 표(表)[註011]를 올려 말하기를, “신(臣)[註012]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워[註013] 승냥이와 이리들에게 길이 막히니,[註014] 비록 대대로 신령하신 교화를 받았으나 번신(藩臣)의 예를 받들 길이 없었습니다. 천자(天子)의 궁궐[註015]을 그려 우러러 보면서 달려가는 마음 끝이 없습니다. 소슬한 바람이 살며시 일어나는데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시절의 변화에 잘 조화하시는지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억누를 길 없습니다. 삼가 사서(私署)[註016]한 관동장군(冠軍將軍)[註017] 부마도위(駙馬都尉)[註018] 불사후(弗斯侯)[註019] 장사(長史)[註020] 여례(餘禮)[註021]와 용양장군(龍驤將軍)[註022]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註023] 등을 보내어 파도에 배를 던져 망망한 바닷길을 더듬게 하였습니다. 하늘에 운명을 맡기고 만분의 일이나마 조그만 정성을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귀신의 감응이 내리고 황제의 위령(威靈)이 크게 감싸주어 폐하의 대궐에 도착하여 신의 뜻이 퍼진다면, 아침에 그 말을 듣고서 저녁에 죽는다 하여도 영원히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3)○ 또 말하기를, “신(臣)은 고구려(高句麗)와 함께 부여(夫餘)에서 나왔으므로[註024] 선대(先代)에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조인 쇠(釗)[註025]가 이웃간의 우호를 가볍게 깨뜨리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註026] 그리하여 신의 선조(先祖)인 수(須)[註027]가 군사를 정돈하고 번개처럼 달려가서 기회를 타 돌풍처럼 공격하여, 화살과 돌이 오고 간지 잠깐만에 쇠(釗)의 머리를 베어 높이 매달으니,[註028] 그 이후부터는 감히 남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풍씨(馮氏)[註029]의 국운이 다하여 그 유민(遺民)이 [고구려(高句麗)로] 도망하여 온 후로부터 추악한 무리가 점점 강성하여져[註030] 끝내 침략과 위협을 당하여 원한이 얽히고 전화(戰禍)가 연이은 것이 30여년입니다. 물자도 다되고 힘도 떨어져서 자꾸만 쇠잔해지고 있습니다.[註031] 만일 천자(天子)의 인자(仁慈)와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라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면 급히 장수 한 사람을 보내어 신의 나라를 구원하여 주십시요.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굿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필부(匹夫)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하였다.
4)○ 또 말하기를 “지금 연(璉)[註032]의 죄로 나라는 어육(魚肉)이 되었고, 대신들과 호족(豪族)들의 살육(殺戮)됨이 끝이 없어 죄악이 가득히 쌓였으며,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註033] 이는 멸망의 시기이며 도움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또 풍씨일족(馮氏一族)[註034]의 사람과 말에게는 조축지련(鳥畜之戀)이 있고, 낙랑(樂浪) 등 여러 군(郡)[註035]은 수구지심(首丘之心)[註036]을 품고 있습니다. 폐하의 위엄을 한번 발동하면 정벌만이 있고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비록 명민하지 못하더라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당연히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르침을 받아 움직일 것입니다. 또 고려(高[구(句)]麗)의 불의와 잘못은 하나 뿐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隗囂)[註037]처럼 번병(藩屛)의 겸손한 말을 지껄이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짐승의 저돌적인 행위를 품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유씨(劉氏)[註038]와 통호(通好)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註039]과 맹약하기도 하여 서로 순치(脣齒)의 관계를 이루면서 왕략(王略)을 짓밟으려 하고 있습니다. 옛 요(堯)임금과 같이 더 없는 성군(聖君)도 남만(南蠻)을 단수(丹水)[註040]에서 쳐서 벌하셨고, 맹상군(孟嘗君)처럼 어질다는 사람도 비웃는 길손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한 방울씩 새어나오는 물이라도 마땅히 일찍 막아야 하니, 지금 취하지 않으실 것 같으면 뒷날 후회를 남기실 것입니다. 지난 경진(庚辰)년 이후, 신의 나라 서쪽 국경에 있는 소석산(小石山)의 북쪽[註041] 바다에서 10여구의 시체를 발견함과 아울러 옷과 기물·안장·굴레 등을 얻었사온데, 살펴보니 고구려(高[句]麗)의 물건들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들으니 이는 폐하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오는 것을 뱀처럼 흉악한 것 [註042]들이 길을 막고 바다에 침몰시킨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렇게 하였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깊이 분노를 느낍니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송(宋)나라에서 신주(申舟)를 살해하자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맨발로 뛰쳐 나갔고, 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덮치자 신릉군(信陵君)은 끼니를 굶었습니다. 적을 이겨 명예를 세움은 더할 수 없는 훌륭한 것입니다. 구구하게 외진 조그마한 나라에서도 만대(萬代)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운을 모으셨고 형세는 산해(山海)를 기울일 만한데, 어찌하여 조그마한 어린 아이[註043]가 폐하께 가는 길을 걸터앉아 막게 하십니까? 이제 주운 안장 하나를 올려 증거로 삼으려 합니다.”하였다.
5)○ 현조(顯祖)[註044]는 멀고 궁벽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朝貢)한 것을 생각하여 예우를 매우 정중히 하고, 사신 소안(邵安)[註045]을 파견하여 그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조서(詔書)[註046]에 이르기를, “표문(表文)을 받고 무양(無恙)하다 들으니 매우 기쁘오. 경은 동쪽 한 모퉁이의 오복(五服)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다 아니하고 위(魏)나라 대궐에 정성을 바치니, 지극한 뜻 기쁘게 여겨 가슴에 간직 하겠오. 짐은 만세(萬世)의 제업(帝業)을 이어받아 사해(四海)에 군림하여 뭇 생령들을 통치하고 있소. 이제 천하가 한결같이 평온하여지고 먼 곳[註047]에서 귀의(歸義)하니,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이르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소. 풍속의 온후함과 군사· 마필(馬匹)의 강성함은 모두 [사신] 여례(餘禮) 등이 직접 보고 들은 바이오. 그대의 나라가 고구려(高[句]麗)와 불화하여 여러 차례 침범을 당하였으나, 진실로 의(義)에 순응하고 인(仁)으로써 방비한다면 어찌 원수를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변방 밖 먼 곳의 나라[註048]를 위무케 하였는데,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나도록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아 생사와 도착 여부를 자세히 알지 못하였소. 그대 나라에서 보내온 안장을 그 때 사신이 탔던 안장인가 대조해 보니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소. 반신반의한 일을 가지고 꼭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소. 천하를 경략(經略)하는 중요방법은 이미 별지(別旨)에 갖추었소.” 하였다.
6)○ 또 조서(詔書)에 “고구려(高[句]麗)가 강함을 믿고 경의 국토를 침범하여 선군(先君)의 옛 원수를 갚는다면서 백성들을 쉬게 하는 큰 가르침을 저버리고, 여러 해 동안 전쟁을 벌여 온갖 어려움이 국경 사이에 맺혀 있음을 알고 있소. [그대 나라에서 온] 사신이 신서(申胥)의 정성[註049]을 겸하였고, 나라는 초(楚)나 월(越)의 급함이 있으니 응당 의리를 펴서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는 선대(先代)의 조정에 번신(藩臣)이라 칭하며 직공(職供)하여 온지 오래인지라,[註050] 그대들과는 오래 전부터 틈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아직 영을 어긴 허물이 없소.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여서 곧장 정벌하여 달라 요구하기에 얼마 동안 일의 시비를 따져 보았으나 사리에 역시 맞지 않았소. 그래서 지난 해[註051] 예(禮) 등을 평양(平壤)에 파견하여 그 사유를 조사하려 하였소. 그러나 고려(高[구,句]麗)의 빈번한 주청(奏請)이 사리에 합당하였기에 사신이 그들의 청을 억누를 수 없었고, 법을 집행하는 관리도 무엇으로 죄책할 수 없었소. 그리하여 그들의 계청(啓請)을 허락하고 조서(詔書)를 내려 예(禮) 등을 돌아오도록 명하였소. 이제 다시 짐의 뜻을 어길 것 같으면 과오와 허물이 더 더욱 드러날 것이오. 뒤에 변명한다 하더라도 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그 뒤에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는 것이 의리에 맞을 것이요. 구이(九夷)의 여러 나라들은 대대로 해외(海外)에 살면서 [중국에서] 도(道)가 융성하면 번신(藩臣)의 예로 받들고,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국경이나 지켜왔었소. 그 때문에 기미(羈縻)로서의 관계가 역사책에 씌여 있으나, 고시(楛矢)의 공물은 빠뜨린 해가 많았소. 그대는 강약의 형세를 갖추어 진술하고 지난 시대의 자취를 모두 열거하였으나, 풍속도 다르고 사정도 틀려 줄 말을 헤아려 보았지만 마음에 맞지 않으니, 큰 꾀나 책략은 이룰 때가 있을 것이오. 이제 중국이 평정 통일되어 천하에 근심이 없으므로, 늘 동쪽 지방에 위엄을 세워 변방에 깃발을 세우고, 궁벽한 곳의 변방 백성들을 구원하고 먼 지방에 제왕의 덕을 펴 보고자 하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高[句]麗)에 질서가 있으므로 아직 정벌을 계획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겠소. 이제 만일 조서(詔書)를 따를 것 같지 않으면 경이 보내온 계책이 짐의 뜻에 합치하니, 군대를 출동하는 일은 앞으로 멀지 않을 것이오. 군사를 미리 준비하여 함께 일어나도록 시기를 기다리면서, 때때로 사신을 보내어 저들의 정황을 속히 알려줘야 할 것이오. 군사를 일으키는 날 그대가 길을 인도하는데 앞장선다면 크게 승리를 거둔 뒤에는 원공(元功)의 상을 받게 되니 그 또한 좋지 않겠소. 보내온 비단과 해산물이 모두 다 도착되지는 않았으나, 경의 지극한 정성은 밝혀졌소. 이제 여러 가지 물품을 별지(別旨)와 같이 내리오.” 라고 하였다.
7)○ 또 연(璉)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안(安) 등을 호송하라고 하였다. 안(安) 일행이 고구려(高句麗)에 이르니, 연(璉)은 옛날 여경(餘慶)과의 원수관계가 있음을 말하며 동쪽으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안(安) 일행이 이로 말미암아 모두 되돌아왔다. 이에 [연(璉)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준절히 질책하였다. 연흥(延興) 5년(A.D.475; 百濟 文周王 1)에 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가 여경(餘慶)에게 새서(璽書)를 내려 그의 정성을 포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安) 등은 바닷가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 끝내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註052]
3. 물길(勿吉) ○ 물길국(勿吉國)[註001]
1)○ 물길국(勿吉國)[註002]은 고구려(高句麗)의 북쪽에 있으니, 옛 숙신국(肅愼國)의 지역이다.[註003] 읍락(邑落)[註004]마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으며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註005] 그들은 굳세고 흉폭하여 동이(東夷) 중에서 가장 강하며, 언어도 그들 만이 다르다.[註006] 두막루(豆莫婁)[註007]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여러 나라도 이들을 두렵게 여긴다. 낙양(洛陽)에서 오천리(五千理) 떨어져 있다. 화룡(和龍)[註008]에서 북으로 2백여리(百餘里)에 선옥산(善玉山)[註009]이 있고, 그 산에서 북으로 13일(日)을 가면 기려산(祁黎山)[註010]에 이른다. 다시 북으로 7일(日)을 가면 여락양수(如洛瓖水)[註011]에 이르니, 강 폭이 1리(里) 남짓이다. 다시 북으로 15일(日)을 가면 태로수(太魯水)[註012]에 이르고, 다시 동북으로 18일(日)을 가면 그 나라에 도달한다. 그 나라에는 큰 강이 있어, 폭은 3리(里) 남짓이며 이름은 속말수(速末水)[註013]이다.
2)○ 땅은 낮고 습하며 성을 쌓아 혈거(穴居)[註014]생활을 하는데, 집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으며 출구를 위로 향하게 내어 사다리를 놓고 드나든다. 그 나라에는 소는 없는데, 수레와 말은 있다. 밭갈 때는 사람 둘이서 끌고, 수레는 사람이 밀고 다닌다.[註015] 곡식은 보리와 기장이 있고 채소는 아욱이 있다. 물의 맛은 소금기가 배어 있으며, 소금은 나무에서 생산된다. 또 짠물이 고여 있는 못도 있다.[註016] 돼지는 많으나 양(羊)은 없다. 쌀을 씹어 술을 만드는데[註017] 마시기만 하면 취한다. 부인은 베로 만든 치마를 입고, 남자들은 돼지나 개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는다. 결혼 첫날 밤에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여자의 유방을 잡았다가 그만두면[註018] 곧 정혼이 되어 이내 부부가 된다. 오줌으로 세수하고[註019] 머리에는 호랑이나 표범의 꼬리를 꽂는다. 활로 사냥을 잘 하니 활의 길이는 3자요, 화살 길이는 1자 2치인데, 돌로 화살촉을 만든다. 부모가 봄이나 여름에 죽으면 세워서 묻고는 무덤 위에 지붕을 지어 비나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한다. 만약 가을이나 겨울에 죽으면 그 시체를 이용하여 담비를 포획하는데, 담비가 그 살을 뜯어먹다가 많이 잡힌다. 해마다 7,8월이면 독약을 제조하여 화살촉에 묻혀 두었다가[註020] 새나 짐승을 쏘는데, 맞기만 하면 바로 죽는다. 독약을 다리는데 그 약기운은 사람도 능히 죽게 한다. 나라 남쪽에는 도태산(徒太山)[註021]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대백(大白)」으로, 호랑이· 표범· 큰곰·이리가 사람을 해쳐 사람들이 산에서는 오줌이나 대변을 보지 못한다. 산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소변·대변을] 물건에 담아 가지고 간다.
3)○ 지난 연흥(延興)(A.D.471~475; 高句麗 長壽王 59~63) 중에 사신 을력지(乙力支)를 보내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註022] 태화(太和)(A.D.477~499; 高句麗 長壽王 65~文咨王 8) 초에 또 말 5백필을 바쳤다.[註023] 을력지(乙力支)[註024]는, “처음 나라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난하(難河)를 거슬러 서쪽으로 오르다가 태하(太河)에 이르러 배를 물속에 감추어 두고, 남으로 육로로 걸어서 낙고수(洛孤水)를 건너 거란의 서쪽 국경을 따라 화룡(和龍)에 이르렀다.”[註025] 고 말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길, “그 나라에서 먼저 고구려의 10부락을 함락하고, 은밀히 백제와 함께 물길을 따라 힘을 합쳐 고구려를 취할 것을 꾀하고, 을력지를 대국(大國)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 가부(可否)를 청한다.” 하였다. 이에 조칙으로, “세 나라를 똑같은 번신(藩臣)으로 마땅히 서로 화순(和順)해야 할 것이니, 서로 침입하지 말라.” 하였다. 을력지(乙力支)가 이에 돌아가는데, 그가 온 길을 따라 본래 가지고 온 배를 타고 그 나라에 이르렀다.[註026]
4)○ [태화(太和)] 9년(A.D.485; 高句麗 長壽王 73) 에 다시 사신 후니지(侯尼支)를 보내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 그 다음해에 다시 입공(入貢)하였다. 그 나라 근처에는 대막로국(大莫盧國)· 복종국(覆鍾國)· 막다회국(莫多回國)· 고루국(庫婁國)· 소화국(素和國)· 구불복국(具弗伏國)· 필려이국(匹黎尒國)· 발대하국(拔大何國)· 욱우릉국(郁羽陵國)· 고복진국(庫伏眞國)· 노루국(魯婁國)· 우진후국(羽眞侯國)이 있는데,[註027] 잇달아 각기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 태화(太和) 12년(A.D.488; 高句麗 長壽王 76)에 물길(勿吉)에서 다시 사신을 경사(京師)에 파견하여 고시(楛矢)와 방물을 바쳤다. 17년(A.D.493; 高句麗 文咨王 2)에 또 사신 파비(婆非)등 5백여명(百餘名)을 파견하여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
5)○ 경명(景明) 4년(A.D.503; 高句麗 文咨王 12) 에 다시 사신 사력귀(俟力歸) 등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註029] 이 때부터 정광(正光) 연간(A.D.520~524; 高句麗 安藏王 2~6)이 끝날 때까지 공물과 사신이 서로 왕래하였다.[註030] 그 뒤 중국이 어지러워지면서 한참 동안 오지 않다가, 흥화(興化) 2년(A.D.540; 高句麗 安原王10) 6월에 사신 석구운(石久云)등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으며,[註031] 무정(武定) 연간(A.D.543~549; 高句麗 安原王 13~陽原王 5)까지 끊이지 아니하였다.[註032]
4. 찬자평(撰者評) ○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적(夷狄)은 중국에 있어 기미(羈縻)일 따름이다. 고구려(高[句]麗)가 해마다 직공(職貢)을 닦음이 동번(東藩)의 으뜸이었으므로, 길흉사(吉凶事)에 중국 조정에서 보내는 것 또한 넉넉하였다. 기타의 녹록한 나라들도 모두 조공 바칠 줄을 알았으니, 아마 소나 말들이 중국을 향하고 동풍(東風)이 잘 불어 시절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 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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