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 고구려(高句麗) 2. 백제(百濟) 3. 신라(新羅) 4. 찬자평(撰者評)
○ 동이열전(東夷列傳)[註001]
1. 고려(高[구,(句)]麗)[註002]
1) ○ 고(高)[구(句)]려(麗)는 본래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이다.[註003] 국토는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에 이르고, 남으로는 역시 바다를 건너 백제(百濟)에 이른다. 서북으로는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하고, 북은 말갈(靺鞨)과 접한다. 그 나라의 임금이 살고 있는 곳은 평양성(平壤城)[註004]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부르는데, 한대(漢代)의 낙랑군(樂浪郡)으로 장안(長安)[註005]에서 5천리 밖에 있다. 산(山)의 굴곡을 따라 외성(外城)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浿水)[註006]와 연해 있다. 왕(王)은 그 좌측에 궁궐(宮闕)을 지어 놓았다.[註007] 또 국내성(國內城)[註008]과 한성(漢城)[註009]이 있는데 별도(別都)라 부른다.[註010]
물은 대요(大遼)와 소요(少遼)가 있다. 대요(大遼)는 말갈(靺鞨)의 서남쪽 산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안시성(安市城)[註011]을 거쳐 흐른다. 소요(少遼)는 요산(遼山)의 서쪽에서 흘러나와 역시 남으로 흐르는데, 양수(梁水)[註012]가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와 합류한다. 마자수(馬訾水)[註013]가 있어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흘러 나오는데, 물빛이 압두(鴨頭)와 같아서 압록수(鴨淥水)로 불리운다. 국내성(國內城)의 서쪽을 거쳐 염난수(鹽難水)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으로 [흘러] 안시(安市)[성(城)][註014]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 간다. 평양(平壤)은 압록강(鴨淥江)의 동남쪽에 있는데, 큰 배로 사람이 건너 다니므로, 이를 해자(天塹)로 여긴다.
2) ○ 관직(官職)은 모두 12등급이 있다.[註015] [가장 높은 것은] 대대로(大對盧)인데 혹은 토졸(吐捽)이라고도 하며 국정(國政)을 총괄한다. 3년(年)에 한번씩 바꾸는데, 직책을 잘 수행하면 바꾸지 않기도 한다. 무릇 교체하는 날 불복(不服)하는 자가 있게 되면 서로 싸움을 한다. 왕(王)은 궁문(宮門)을 닫고 지키다가 이긴 자를 인정하여 준다.[註016] 그 아래는 울절(鬱折)[註017]로, 호적과 문서를 관장한다. 다음은 태대사자(太大使者)[註018]이다. 다음은 백의두대형(帛衣頭大兄)[註019]으로서 이른바 백의(帛衣)라는 것은 선인(先人)을 말한다.[註020] 다음은 대사자(大使者)[註021]이다. 다음은 대형(大兄),[註022] 다음은 상위사자(上位使者),[註023] 다음은 제형(諸兄),[註024] 다음은 소사자(小使者), 다음은 과절(過節), 다음은 선인(先人),[註025] 다음은 고추대가(古鄒大加)[註026]이다. 60개의 주현(州縣)이 있으며, 큰 성(城)에는 녹살(傉薩)[註027] 한명을 두는데, 도독(都督)과 비슷하다. 나머지의 성(城)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註028]를 두는데, 도사(道使)라고도 하며, 자사(刺史)와 비슷하다. 그리고 보좌하는 속료(屬僚)를 두어 일을 분담시킨다.[註029] 대모달(大模達)[註030]은 위장군(衛將軍)과 비슷하고, 말객(末客)[註031]은 중랑장(中郞將)과 비슷하다. 5부(部)[註032]로 나뉘어 있다. 내부(內部)는 곧 한대(漢代)의 계루부(桂婁部)로서 황부(黃部)라고도 한다. 북부(北部)는 곧 절로부(絶奴部)로서 후부(後部)라고도 한다. 동부(東部)[註033]는 곧 순노부(順奴部)로서 좌부(左部)라고도 한다. 남부는 곧 관노부(灌奴部)로서 전부(前部)라고도 한다. 서부(西部)는 곧 소노부(消奴部)이다.
3) ○ 왕(王)은 5채(采)로 된 옷을 입고 백라(白羅)로 만든 관(冠)을 쓰며,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두른다. 대신(大臣)은 청라관(靑羅冠)을 쓰고, 다음은 강라관(絳羅冠)을 쓰고, 두개의 새깃을 꽂고 금테와 은테를 섞어 두른다. 저고리는 통소매이고 바지는 통이 크며, 흰 가죽띠를 두르고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서인(庶人)은 갈(褐)을 입고 고깔(변,弁)을 쓴다. 여자는 머리에 건괵(巾幗)을 쓴다. 풍속은 바둑·투호·축국(蹴鞠)을 즐긴다. 식기(食器)는 변(籩) ·두(豆)· 궤(簋)· 보(簠)· 뢰(罍)·세(洗)를 쓴다. 주거(住居)는 산골짜기에 있으며, 모초(茅草)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고, 왕궁(王宮)· 관부(官府)· 불사(佛寺)만이 기와를 쓴다. 가난한 백성들은 한겨울에 긴 구덩이를 파고 불을 지피어 방을 덮힌다.
4) ○ 그들의 정치는 엄격한 법률로서 아랫사람을 다스리기 때문에 법을 범하는 자가 적다. 반란을 일으킨 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횃불로 몸을 지진 다음 목을 베고, 그 가속(家屬)은 적몰(籍沒)한다. [적에게] 항복한 자· 패전(敗戰)한 자· 사람을 죽인 자 및 표겁(剽劫)한 자는 목을 벤다. 도둑질한 자는 [그 물건의] 열배를 갚아야 하며,[註034] 소나 말을 죽인 자는 노비(奴婢)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길가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 혼인할 적에는 폐백을 쓰지 않으며, 받는 자가 있으면 수치로 여긴다.[註035] 부모상(父母喪)에는 3년복(年服)을 입고, 형제(兄弟)의 [상(喪)에는] 다음달에 [상복을] 벗는다.[註036] 풍속은 음사(淫祠)가 많고, 영성(靈星) 및 해(日)· 기자(箕子)· 하간(可汗)[註037] 등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린다. 국(國)[성(城)] 왼편에 큰 굴이 있어 신수(神隧)라고 한다. 해마다 10월이면 왕(王)은 항상 몸소 제사를 올린다.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가난한 마을이나 미천한 집안까지도 서로 힘써 배우므로, 길거리마다 큼지막한 집을 지어 「경당(扃堂)」이라 부른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子弟)들을 이곳에 보내어 글을 외고[註038]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5) ○ 수말(隋末)에 그 나라의 왕(王) 고원(高元)[註039]이 죽고, 이복동생인 건무(建武)[註040]가 뒤를 이었다. 무덕(武德)(A.D.618~626; 高句麗 榮留王 1~9) 초(初)에 두 번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근(朝覲)하였다.[註041] 고조(高祖)는 조서(詔書)를 내려 우호(友好)를 닦고, 고(高)[구(句)]려인(麗人)으로 중국(中國)에 있는 자들을 호송할 것을 약속하고, 중국인(中國人)으로 고(高)[구(句)]려(麗)에 있는 자들을 돌려 보내도록 칙유(敇諭)하였다.[註042] 이에 건무(建武)가 망명한 중국(中國) 사람을 모두 찾아서 해당 관사에 돌려 보냈는데, 그 수가 무려 1만이었다. 3년 뒤[註043]에 사신(使臣)[註044]을 보내어 [건무(建武)를] 상주국(上柱國) 요동군왕(遼東郡王) 고려왕(高麗王)에 배수(拜授)하였다.[註045] 도사(道士)에게 명(命)하여 상법(像法)을 가지고 가서『노자(老子)』를 강의시켰더니, 건무(建武)가 크게 기뻐하며 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함께 들었다. [듣는 사람의] 수효는 날마다 1천명에 달하였다.
6) ○ 高祖가 주위 신하들에게, “명분과 실제는 모름지기 서로 [이치가] 부응하여야 되는 법이다. 고(高)[구(句)]려(麗)가 비록 수(隋)에 칭신(稱臣)을 하였으나 끝내 양제(煬帝)에게 저항하였으니, 어찌 신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짐(朕)이 힘쓸 바는 인민(人民)을 평안(平安)히 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신하로 받아 들여야 되겠는가?” 하니, 배구(裴矩)[註046]와 온언박(溫彥博)[註047]이 간(諫)하기를,[註048] “요동(遼東)은 본래 기자(箕子)의 나라이며, 위(魏)·진(晋) 때까지는 봉역(封域)안에 있었으니, 칭신(稱臣)하지 않는 것은 불가합니다. 중국(中國)과 이적(夷狄)은 태양(太陽)과 열성(列星)과의 관계와 같으니, [나라의 격(格)을] 낮추어서는 아니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그만 두었다.
7) ○ 이듬해에 신라(新羅)와 백제(百濟)가 글을 올려, 건무(建武)가 길을 막아서 사신(使臣)이 입조(入朝)를 할 수가 없고, 또 자주 침입한다고 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산기시랑(散騎侍郞) 주자사(朱子奢)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어] 화해하도록 설득하니, 건무(建武)가 사죄(謝罪)하고 두나라와 화평할 것을 청하였다. 태종(太宗)이 돌궐(突厥)의 힐리(頡利)를 사로 잡자, 건무(建武)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하례(賀禮)하고 아울러 봉역도(封域圖)를 올렸다.[註049] 태종(太宗)은 조서(詔書)를 내려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에게 [고구려(高句麗)에] 가서 수(隋)나라 군사의 전망(戰亡)한 해골(骸骨)을 거두어 묻고, 고(高)[구(句)]려(麗)가 세워 놓은 경관(京觀)을 헐어 버리게 하였다. 이에 건무(建武)가 두려워하여 천리의 장성(長城)을 쌓으니, 동북으로 부여(扶餘)에서 서남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얼마 뒤 태자(太子) 환권(桓權)을 보내와 조근(朝覲)하고 방물(方物)을 바치니, 태종(太宗)이 후히 보답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사자(使者) 진대덕(陳大德)[註050]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어] 노고에 답하는 한편,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다. 대덕(大德)이 그 나라에 들어가 방비하는 관리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실정을 샅샅이 파악하고, 중국 유민들을 만나 친척들의 존망(存亡)을 말해주니,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사녀(士女)들이 길 양옆에 나와 구경하였다.
8) ○ 건무(建武)가 사자(使者)에게 열병(列兵)을 성대히 하여 보였다. 대덕(大德)이 귀국하여 [이를] 아뢰자, 태종(太宗)이 기뻐하였다. 대덕(大德)이 또, “고창(高昌)[註051]이 섬멸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의 대대로(大對盧)가 세 번이나 관사에 찾아와 축하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태종(太宗)은, “고(高)[구(句)]려(麗)의 땅은 4군(郡) 뿐이다. 우리가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요동(遼東)을 공격하면 다른 여러 성(城)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이다. [이때] 우리가 주사(舟師)를 동원하여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平壤)으로 들어간다면 아주 쉬울 것이다. 그러나 천하(天下)가 겨우 평정되었는데, 또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는 않다.” 라고 하였다.[註052]
9) ○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者)가 있는데, 혹은 개금(蓋金)[註053]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씨(泉氏)[註054]이며, 자신이 물 속에서 태어 났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아버지는 동부(東部)[註055] 대인(大人)[註056] 대대로(大對盧)[註057]이다. [그가] 죽자, 개소문(蓋蘇文)이 위(位)를 이어 받아야 했지만,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서 이어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섭직(攝職)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합당하지 않으면 그 때는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뭇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신(大臣)이 건무(建武)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蓋蘇文)이 [이를] 알아차리고 제부(諸部)의 [병(兵)을]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열병(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신(大臣)들의 임석(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명이나 되었다. 또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建武)를 죽여서 시체를 찢어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건무(建武) 아우의 아들인 장(藏)[註058]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 자신은 막리지(莫離支)[註059]가 되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막리지(莫離支)란]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 중서령(中書令)에 해당하는 직위라고 한다. 용모가 걸출하고 준수하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관복(冠服)은 모두 금으로 장식하였다. 다섯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는데, 주위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귀인(貴人)을 시켜 땅에 엎드리게 한 다음에 밟고 말을 타며, 출입(出入)할 때는 군사를 벌려 놓고, 큰 소리로 [행인(行人)을] 엄격히 금하므로, 길가는 사람들이 두려워 도망하여 갱곡(坑谷)에 뛰어들기까지 한다.
10) ○ 태종(太宗)은 건무(建武)가 부하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사자(使者)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어 조제(弔祭)하였다. 어떤 이가 태종(太宗)에게 [고구려(高句麗)를] 토벌 하자고 권유하였으나, 태종(太宗)은 상(喪)을 기회로 하여 남을 치고 싶지 않았다.[註060] 이에 장(藏)을 요동군왕(遼東郡王) 고려왕(高麗王)에 배수(拜授)하였다.[註061] 태종(太宗)이, “개소문(蓋蘇文)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았으므로, 짐(朕)이 공취(攻取)하기는 쉽다. 그러나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원하지 않는다, 어찌해야 겠는가?” 하자,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註062]은, “폐하(陛下)의 군사가 용기와 힘이 남아도는 데도 접어두고 쓰지 않는 것은 이른바 ‘‘지과위무(止戈爲武)’[註063]라는 것이옵니다.” 라고 하고 사도(司徒) 장손무기(長孫无忌)는, “고(高)[구(句)]려(麗)가 한번도 어려움을 호소해온 적이 없었으므로, 조서(詔書)를 내려 위안하고 환난(患難)을 불쌍히 여기며 생존한 자를 어루만져 준다면, 그들도 마땅히 명(命)을 받아들일 것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太宗)은 ‘[무기(无忌)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11) ○ 이때에 신라(新羅)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글을 올려, “고(高)[구(句)]려(麗)와 백제(百濟)가 연화(聯和)하여 침범을 받을 것 같습니다. 삼가 천자(天子)께 귀명(歸命)합니다.” 라고 말하였다.[註064] 태종(太宗)이, “어떻게 하면 면할 수 있겠는가?” 묻자, 사자(使者)는, “계책이 없습니다. 바라건데 폐하(陛下)께서는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였다. 태종(太宗)이, “우리가 일부 군사로 거란(契丹)[註065]·말갈(靺鞨)을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들어 간다면, 그대의 나라가 한해는 조용할 수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계책이다. 우리가 강포(絳袍)와 단치(丹幟) 수천벌을 그대 나라에 내려 주어서 군진(軍陣)에 꽂아 둔다면, 두나라가 [이를] 보고 우리 군사가 도착한 것으로 여겨서 반드시 달아날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계책이다. 백제(百濟)가 바다를 믿고 군비(軍備)를 하지 않았으니 우리가 주사(舟師) 수만을 이끌어 공격하고, 또 그대 나라는 여군(女君)이기 때문에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았으니, 우리가 종실(宗室)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을 삼았다가 안정이 된 뒤에 스스로 지키게 하는 것이 세 번째 계책이다. 사자(使者)는 계책 중에 어느 것을 취하겠는가?”고 하자, 사자(使者)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12) ○ 이에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註066]에게 새서(璽書)를 주어 보내어 고(高)[구(句)]려(麗)를 나무라고, 또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 사자(使者)가 채 이르기 전에 개소문(蓋蘇文)이 벌써 신라(新羅)의 두성(城)을 탈취하였다. 현장(玄獎)이 태종(太宗)의 유지(諭旨)를 알리자, 답변하기를, “지난 날 [우리가] 수(隋)의 침략(侵略)을 받았을 적에 신라(新羅)는 그 틈을 타 우리 땅 5백리를 빼앗아갔소.[註067] 지금 그 땅을 다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을 중지할 수 없소.” 라고 하였다. 현장(玄獎)이, “지나간 일을 논할 것이 있겠소? 요동(遼東)은 본시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이지만, 천자(天子)께서는 그래도 취하지 않으시었소. 고(高)[구(句)]려(麗)가 어찌 조명(詔命)을 어길 수 있겠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13) ○ 현장(玄獎)이 돌아 와서 [사실대로] 아뢰자, 태종(太宗)은, “막리지(莫離支)가 임금을 죽이고 [용형(用刑)을] 함정과 같이 하여 아랫사람을 너무 포학하게 다루니, 원망의 소리가 길에 넘치고 있다. 우리가 출사(出師)하는 데 명분이야 없겠는가?” 하였다.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褚遂良)[註068]이, “폐하(陛下)의 군사가 요하(遼河)를 건넜다가 승리를 거둔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오나, 만에 하나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군사를 써야 하고, 다시 군사를 쓰게 된다면 그 때에는 안위(安危)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니, 병부상서(兵部尙書) 이적(李勣)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날 벽연타(薜延陀)[註069]가 변방에 침입하여[註070] 폐하(陛下)께서 추격(追擊)하려 하실 적에 위징(魏徵)이 하도 간(諫)하여서 그만 두었습니다. 만약 추격하였더라면 한필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였을 것인데, 뒤에 다시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한(恨)이 되고 있습니다.”[註071] 고 하였다. 이에 태종(太宗)은, “진실로 그러하다. 다만 한번의 실수를 가지고 그를 원망한다면, 이후에 누가 나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겠는가?” 하였다.
14) ○ 신라(新羅)가 계속 원병(援兵)을 청하자,[註072] 이에 오선(吳船) 4백척에 군량을 실어 보내고,[註073]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註074] 등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유(幽)(주州)·영(營)(주州)의 군사 및 거란(契丹)· 해(奚)[註075]· 말갈(靺鞨) 등을 거느리고 토벌(討伐)케 하였다. 마침 요수(遼水)가 넘쳐서 군사가 돌아 왔다. 막리지(莫離支)가 두려워하여 사자(使者)를 보내 백금(白金)을 [바쳤으나] 태종(太宗)은 받아들이지 않았다.[註076] 사자(使者)가 또, “막리지(莫離支)가 숙위(宿衛)를 시키기 위하여 관원 50명을 보내 왔습니다.” 고 말하자, 태종(太宗)은 화를 내며 사자(使者)에게, “너희들은 고무(高武)에게 [몸을 의탁하여] 처음 벼슬하였는 데도 절의(節義)를 바쳐 죽지 않았으며, 또 역자(逆子)를 위하여 계책을 꾸미니 용서할 수 없다.” 고 꾸짖고, 모두 감옥에 가두었다.
15) ○ 이에 태종(太宗)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고자 장안(長安)의 기로(耆老)를 불러 모아 위로하며, “요동(遼東)은 옛 중국(中國) 땅이며, 도적 막리지(莫離支)가 그 군주(君主)를 죽였으므로, 짐(朕)이 친히 경략(經略)하려 한다. 그러므로 부로(父老)들과 약속을 하겠는데, 나를 따라 나서는 아들이나 손자들은 내가 잘 보살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하고, 곧 포(布)· 속(粟)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註077] 군신(君臣)들이 모두 황제(皇帝)는 떠나지 말기를 권하자, 태종(太宗)은, “나도 [그 이유를] 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취하며,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으로 가는 이 세 가지는 좋지 못한 일로서 고(高)[구(句)]려(麗)를 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개소문(蓋蘇文)이 군주(君主)를 시해하고, 또 대신(大臣)을 죽여 [제 야심을] 충족시키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구원해 주기를 목을 늘여 기다리고 있다. 의자(議者)들은 아직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군량을 북으로는 영주(營州)에 수송하여 쌓고, 동으로는 고대인성(古大人城)[註078]에 [수송하여] 쌓게 하였다.
16) ○ 태종(太宗)은 낙양(洛陽)에 거동하여[註079] 장량(張亮)을 평양도(平壤道)[註080]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상하(常何)· 좌난당(左難當)을 부총관(副總管)으로, 염인덕(冉人德)· 유영행(劉英行)· 장문간(張文幹)· 방효태(龐孝泰)· 정명진(程名振)을 총관(總管)으로 삼아서, 강(江)· 오(吳)· 경(京)· 낙(洛)에서 모은 군사 4만과 오(吳)의 전선(戰船) 5백척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평양(平壤)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을 부총관(副總管)으로, 장사귀(張士貴)[註081]· 장검(張儉)· 집실사력(執失思力)· 계필하력(契苾何力)[註082]·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 강덕본(姜德本)· 국지성(麴智盛)· 오흑달(吳黑闥)을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삼아 예속시켜서, 기사(騎士) 6만을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칙(詔敇)을 내리기를, “짐(朕)이 들리는 곳에 진영(陣營)을 꾸미지 말며, 음식을 사치스럽게 하지 말라. 건널 수 있는 물에는 다리를 놓지 말며, 행재소(行在所)에서 가깝지 않은 주(州)· 현(縣)에서는 학생(學生)과 기로(耆老)의 영알(迎謁)을 금지하라. 짐(朕)이 지난날 창을 잡고 난(亂)을 평정할 적에는 한달 먹을 양식도 없었지만, 그래도 가는 곳마다 바람처럼 휩쓸었다. 오늘날은 다행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오직 운반하는 수고로움이 염려될 뿐이다. 그런 까닭에 소와 양을 몰아다 군사들을 먹이려 한다. 그리고 짐(朕)이 반드시 승리를 거둘 조건이 다섯이 있다. 우리의 대(大)로써 저들의 소(小)를 치고, 우리의 순(順)으로써 저들의 역(逆)을 치며, 우리의 안(安)으로써 저들의 난(亂)을 치고, 우리의 일(逸)로써 저들의 노(勞)를 치고, 우리의 열(悅)로써 저들의 원(怨)을 치고 있다.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또 거란(契丹)· 해(奚)· 신라(新羅)· 백제(百濟)의 여러 군장(君長)의 군사를 징발하여 모이게 하였다.
17) ○ [정관(貞觀)] 19년(A.D.645; 高句麗 藏藏王 4) 2월에 태종(太宗)이 낙양(洛陽)에서 정주(定州)로 옮겨 가서,[註083] 주위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지금 천하가 다 평정되었으나, 오직 요동(遼東)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그의 후사(後嗣)가 사마(士馬)의 강성(强盛)함을 믿고 신하들과 모의하여 싸움을 유도하므로, 전쟁은 바야흐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짐(朕)이 친히 그를 쟁취하여 후세의 걱정을 없애려 한다.” 고 하였다. 태종(太宗)이 성문(城門)에 앉아서 지나가는 군사를 일일이 위로하여 주고, 질병이 있으면 친히 살펴 보아서 주(州)· 현(縣)에 명하여 치료하게 하니,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장손무기(長孫无忌)가 상주(上奏)하여, “천하(天下)의 부어(符魚)[註084]가 다 따르고 있으나, 궁관(宮官)은 열사람 뿐이니, 세상 사람들이 제위(帝位)를 경시(輕視)하겠습니다.” 라고 아뢰자, 태종(太宗)은 “요하(遼河)를 건너는 십만의 군사가 모두 집안을 버리고 떠나 왔다. 짐(朕)은 열사람이 따르는 것만도 오히려 많다고 부끄러워하고 있으니, 공(公)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몸소 고방(櫜房)을 메고 두개의 전통(箭筒)을 안장에 달았다.
18) ○ [정관(貞觀)]19년(645) 4월에 [이(李)]적(勣)이 요수(遼水)를 건너니,[註085] 고(高)[구(句)]려(麗)가 모두 성(城)을 에워싸고 지켰다. 태종(太宗)은 군사를 크게 호궤(犒饋)한 다음 유쥬(幽州) 남쪽에 장막을 치고, 장손무기(長孫无忌)에게 조서(詔書)하여 서사(誓師)를 행한 뒤,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이(李)]적(勣)이 개모성(蓋牟城)[註086]을 쳐 함락시켜 2만호(戶)와 식량 1십만석(石)을 얻고, 그 땅을 개주(蓋州)로 삼았다. 정명진(程名振)은 사비성(沙卑城)[註087]을 공격하는데, 밤에 그 서쪽으로 침입하자 성(城)이 궤멸(潰滅)되었다. 8천명을 사로 잡아, 군사를 이끌고 압록수(鴨淥水) 위에서 대기 하고 있었다. [이(李)]적(勣)이 드디어 요동성(遼東城)을 포위하였다. 태종(太宗)은 요택(遼澤)에 머물며, 조서(詔書)를 내려 [들판에] 널려 있는 수(隋)나라 전사(戰士)의 해골(骸骨)들을 묻게 하였다. 고(高)[구(句)]려(麗)가 신성(新城)[註088]과 국내성(國內城)의 기병(騎兵) 4만을 동원하여 요동(遼東)[성(城)]을 구원하였다. 도종(道宗)이 장군예(張君乂)를 거느리고 역격(逆擊)하는데, [장(張)]군예(君乂)가 퇴각하였다. 도종(道宗)이 기병(騎兵)을 [이끌고] 달려가자, 노병(虜兵)이 놀라서 퇴주(退走)하였다. 이에 그들의 다리를 빼앗고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바라보다가, 고(高)[구(句)]려(麗)의 진열(陣列)이 소란한 것을 보고 재빨리 습격하여, 이를 쳐부수고 천여명의 목을 베었다. [장(張)]군예(君乂)의 목을 베어 [군영(軍營)에] 돌렸다.
19) ○ 태종(太宗)은 요수(遼水)를 건너자, 다리를 철거하여 군사들의 결의를 다지게 하였다. 마수산(馬首山)에 진영(陣營)을 설치한 뒤, 태종(太宗)은 성(城)밑에 이르러 군사들이 흙을 져다 참호를 메우는 것을 보고, 무거운 짐을 나누어 말 위에 싣고 가니, 여러 신하들이 놀랍고 송구스러워 앞을 다투어 흙덩이를 날랐다. 성(城)안에 주몽사(朱蒙祠)가 있는데, 그 사당에 보존하고 있는 소갑(銷甲)과 섬모(銛矛)를 전연(前燕) 때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는 망령된 말이 있었다. 한창 [성(城)이] 포위되어 다급해지자, 미녀(美女)를 꾸며 여신(女神)으로 만들어 두고는, 주몽(朱蒙)이 기뻐하고 있으니 성(城)은 반드시 온전할 것이라고 속이기도 하였다. [이(李)]적(勣)이 포차(抛車)를 벌려 놓고 큰 돌을 3백보(百步) 이상 날려 보내자, [돌에] 맞는 곳은 다 무너졌다. 적들은 나무를 쌓아 누각을 만들고 그물을 이어 [막아] 보았으나 되지 않았다. 다시 충차(衝車)로 성벽(城壁)과 성루(城樓)를 때려 부수었다.
20) ○ 이때에 백제(百濟)가 금휴개(金髤鎧)를 바치고, 또 현금(玄金)으로 산오문개(山五文鎧)를 만들어 [보내와,] 사졸(士卒)들이 [그것을] 입고 종군(從軍)하였다.[註089] 태종(太宗)과 [이(李)]적(勣)의 [군사가] 모이자 갑옷이 햇빛에 번쩍거렸다. 마침 남풍이 거세게 불어서 군사들이 서남쪽으로 불을 놓자, 불길이 성(城) 안으로 번져서 집은 거의 다 탔으며, 불에 타 죽은 사람은 1만여명이나 되었다. 사졸(士卒)들이 성벽(城壁)에 오르자 적들은 방패로 막았다. 사졸(士卒)들이 장모(長矛)를 들고 돌격하자 돌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성(城)이 드디어 무너지자, 군사 1만· 호구(戶口) 4만· 군량 5십만석(石)을 노획하고, 그 땅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당초 태종(太宗)은 태자(太子)가 있는 곳(정주,定州)에서 [요동(遼東)]행재소(行在所)까지 3십리 간격으로 봉화(烽火)를 설치하고, 요동(遼東)이 함락되는대로 봉화(烽火)를 들기로 약속하였다. 이 날 봉화(烽火)를 들게 하여 새(塞)안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21) ○ 백애성(白崖城)[註090]을 진공(進功)하는데, 성(城)이 산을 등지고 물가에 연해 있어 매우 험하였다. 태종(太宗)이 성벽(城壁)의 서북쪽에 [주둔하고 있는데,] 노추(虜酋) 손벌음(孫伐音)이 몰래 항복하기를 빌었다. 성중(城中)의 [많은 사람들을] 일치시킬 수 없으므로, 태종(太宗)은 기(旗)를 주며, “만약 항복을 하겠다면 신호로 [이 기(旗)를] 성첩(城堞)에 꽂으라.” 고 하였다. 조금 후에 그 기(旗)가 꽂히자, 성중(城中)의 사람들은 모두 당병(唐兵)이 올라온 것으로 여기고 항복하였다. [손(孫)]벌음(伐音)이 중도에 후회를 하자, 태종(太宗)은 노(怒)하여 [성(城)을 함락시키면] 모든 포로를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다가 손벌음(孫伐音)이 다시 항복하려 하여 이를 취소하자,] 이 때 이적(李勣)은,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싸우는 것은 노획물을 탐내서입니다. 이제 성(城)이 막 함락되려 하는데, 항복을 허락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저버려서는 아니됩니다.” 하였다. 태종(太宗)은,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군사를 풀어 살육(殺戮)을 자행하고, 남의 처자식을 사로 잡는 일을 짐(朕)은 차마 못하겠소. 장군의 휘하에 공이 있는 자에게는 짐(朕)이 [내탕(內帑)]고(庫)의 물품으로 상을 줄 수 있으니, 장군으로부터 성(城) 하나를 살까 하오.” 하였다. 남녀 1만명과 군사 2천명을 노획하였다. 그 땅을 암주(巖州)로 삼고 [손(孫)]벌음(伐音)을 자사(刺史)에 배수(拜授)하였다.
22) ○ 막리지(莫離支)는 가시(加尸) 사람 7백명을 [보내어] 개모(蓋牟)[성(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李)]적(勣)이 이들을 사로 잡았다. [이들이 함께 종군(從軍)하여] 충성(忠誠)을 다할 것을 청하자, 태종(太宗)은, “너희들의 집이 가시(加尸)에 있으니, [너희가] 우리를 위하여 싸운다면 [집안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한집안을 없애가며 한사람의 힘을 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고, 모두 놓아 보냈다. [태종(太宗)이] 안시(安市)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에 고(高)[구(句)]려(麗)의 북부녹살(北部傉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녹살(南部傉薩) 고혜진(高惠眞)[註091]이 [그들의] 군대 및 말갈(靺鞨)의 무리 15만을 이끌고 와서 [안시성(安市城)을] 구원하였다. 태종(太宗)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들이 만약 군사를 정비하여 안시(安市)[성(城)]과 연합을 하여 성벽(城壁)을 쌓고, 높은 산에 의거하여 성중(城中)의 곡식을 날라다 먹으면서, 말갈(靺鞨)의 무리를 풀어 우리의 우마(牛馬)를 약탈하여 간다면, [우리가] 공격을 하여도 함락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상책(上策)이다. 성중(城中)의 무리를 이끌고 밤에 도망가는 것이 중책(中策)이다. 우리와 싸움을 벌이면 사로 잡힐 것이다.”
23) ○ [고구려(高句麗)의] 어떤 대대로(大對盧)[註092]가 [고(高)]연수(延壽)에게, “내가 들으니 중국(中國)이 어지러우면 영웅(英雄)들이 모두 일어난다고 한다. 진왕(秦王)은 총명하고 용감하여 무너지지 않는 적(敵)이 없고 싸움에 상대할 적이 없으므로, 드디어 천하(天下)를 평정하고 황제(皇帝)의 자리에 군림하니, 북적(北狄)이나 서융(西戎)에서 칭신(稱臣)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은 온 나라를 쓸어 와서 모신(謀臣)· 중장(重將)이 다 [이곳에] 몰려 있으니, 그 예봉(銳鋒)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군사를 돈좌시켜 날짜를 끄는 한편, 몰래 기병(奇兵)을 보내어 그들의 양도(饟道)를 끊는 것보다 더 나은 계책이 없다. 한달이 못되어 군량이 떨어져 싸우려 하여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하여도 길이 없게 되니, 그때에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계책을 세워 주었으나, [고(高)]연수(延壽)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안시(安市)[성(城)]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다.
24) ○ 태종(太宗)은 ‘오랑캐가 나의 계책에 빠져 들었다’ 하고,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尔)에게 명하여 돌궐(突厥)의 기병(騎兵) 1천을 이끌고 가서 유인하게 하였다. 고구려가 늘 말갈(靺鞨)의 예병(銳兵)을 앞세우므로, 사이(社尔)의 군사가 싸우다가 패하여 달아났다. [고(高)]연수(延壽)는 ‘당(唐)[병(兵)]은 상대하기가 쉽다’ 하고 30리[註093] 진격하여 산기슭에 진을 쳤다. 태종(太宗)이, “내가 너의 나라에 강폭(强暴)한 신하(臣下)가 있어 제 임금을 죽였기에 그 죄를 물으러 왔은즉, 교전(交戰)을 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니, [고(高)]연수(延壽)도 그렇다 하며 행동을 멈추고 기다렸다. 태종(太宗)이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이적(李勣)으로 하여금 보(步)· 기병(騎兵) 1만 5천을 거느리고 서쪽 산고개에 진을 쳐서 적(賊)과 대적케 하였다. 장손무기(長孫无忌)와 우진달(牛進達)로 하여금 정병(精兵) 1만을 거느리고 [고(高)]구려(句麗)의 후면 협곡(狹谷)으로 나가게 하였다. 태종(太宗) [자신은] 기병(騎兵) 4천을 이끌고 깃발을 눕히고 고(高)[구(句)]려(麗) [진영(陣營)의] 북쪽 산 위로 올라 갔다. 그리고 모든 군사에게 ‘고각(鼓角) 소리가 들리면 돌격하라’고 하였다. 이어 조당(朝堂)에다 장막을 설치하고 말하기를, “내일 한낮에 이곳에서 오랑캐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고(高)]연수(延壽)의 진영에 유성(流星)이 떨어졌다.
25) ○ 이튿날 고구려가 [이(李)]적(勣)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바로 싸움을 벌였다. 태종(太宗)은 [장손(長孫)]무기(无忌)의 군사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바라보고, 고각(鼓角)을 불고 병치(兵幟)를 사방에서 함께 들게 하였다. 고구려가 당혹하여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무리가 이미 어지러워졌다. [이(李)]적(勣)은 창을 든 보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그들을 무너뜨리고, 무기(无忌)는 그 후미를 쳤다. 태종(太宗)이 산에서 달려 내려오니, 고구려군은 크게 와해되어 2만급의 머리를 베었다. [고(高)]연수(延壽)는 남은 무리들을 수습하여 산을 등지고 굳게 지켰다. 무기(无忌)와 적(勣)은 [군대를] 합세하여 포위하고, 냇물의 다리를 철거하여 귀로(歸路)를 차단하였다. 태종(太宗)은 말고삐를 잡고 고구려의 영루(營壘)를 살펴 보고, “고(高)[구(句)]려(麗)가 온 나라를 기울여서 왔으나, [대장기(大將旗)를] 한번 흔들어 깨뜨렸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다.” 하고, 말에서 내려 하늘에 두번 절을 올려 감사하였다. [고(高)]연수(延壽) 등이 사세(事勢)가 궁함을 헤아리고 바로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원문(轅門)에 들어 와서 무릎으로 기어 앞에 나아가 절을 올리고 命을 청하였다. 太宗이, “이 뒤에도 감히 천자(天子)와 싸우겠는가?” 하자, 두려워서 땀을 흘리며 대답을 못하였다.
26) ○ 태종(太宗)은 추장(酋長) 3천 5백명을 가려내어 모두 벼슬을 주어서 내지(內地)로 들여 보내고, 나머지 3만명은 [그 나라로] 돌려 보냈다. 말갈(靺鞨) 사람 3천여명은 목을 베었다. 노획물은 우마(牛馬) 십만필과 명광개(明光鎧) 1만벌이었다.[註094] 고(高)[구(句)]려(麗)가 크게 놀라서 후황(后黃)과 은(銀)의 두 성(城)[註095]이 스스로 빠져 달아나니, 수백리에 인가(人家)의 연기가 끊겼다. 이에 역(驛)을 통하여 태자(太子)에게 [소식을] 전하고, 아울러 여러 신하들에게 글을 내려, “짐(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니 이와 같다. 어떻게 보는가?” 하였다. 거동하였던 산을 주필산(駐蹕山)이라 이름하고, 파진도(破陣圖)를 그렸으며, 전공을 기념하는 글을 돌에 새겼다. 그리고 [고(高)]연수(延壽)에게는 홍려경(鴻臚卿)을 제수하고, [고(高)]혜진(惠眞)에게는 사농경(司農卿)을 제수하였다. 척후(斥候)를 하던 기병(騎兵)이 [고구려(高句麗)의] 첩자(諜者)[註096]를 잡아 왔는데, 태종(太宗)은 그 포박을 풀어 주었다. 그가 사흘동안 밥을 먹지 못하였다고 하자, 밥을 먹여 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신발까지 주어서 보내며, “돌아가거든 막리지(莫離支)에게 전하라. 만약 군사의 동정을 알려거든 부디 내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 가라.”고 하였다. 태종(太宗)은 모든 영루(營壘)에 참호를 파지 않고 척후(斥候)만 근엄히 할 뿐이었으나, 군사들이 군량을 운반할 적에 비록 단기(單騎)일지라도 고구려는 감히 약탈을 하지 못하였다.
27) ○ 태종(太宗)이 [이(李)]적(勣)과 공격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태종(太宗)이, “내가 들으니 안시(安市)[성(城)]은 지세가 험하고 무리들이 사나워 막리지(莫離支)가 공격하였지만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안시성(安市城)은 그대로 두자. 건안(建安)[성(城)][註097]은 험절(險絶)함을 믿고 있는데, 군량은 많으나 군사가 적으므로, 만약 불의에 나아가 친다면 서로 구원해 주지 못할 것이다. 건안(建安)[성(城)]을 차지하면 안시(安市)[성(城)]은 우리 뱃속에 있게 될 것이다.” 라고 하자, [이(李)]적(勣)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동(遼東)에 군량을 쌓아 두고 서쪽으로 건안(建安)[성(城)]을 친다면, 적들이 장차 우리의 귀로(歸路)를 막을 것이므로 안시(安市)[성(城)]을 먼저 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太宗)은 ‘좋다’ 하고, 드디어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는데, 함락시킬 수 없었다. [고(高)]연수(延壽)와 [고(高)]혜진(惠眞)이, “오골성(烏骨城)[註098]의 녹살(傉薩)은 이미 늙었으므로 아침에 치면 저녁에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오골(烏骨)[성(城)]을 탈취한다면 곧 평양(平壤)도 탈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는 계책을 냈다. 또 여러 신하들도 장량(張亮)의 군대가 사성(沙城)에 있으니 불러 온다면 하룻밤에 도착할 것이요, 만약 오골(烏骨)[성(城)]을 탈취한다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그들의 심장부를 죌 수 있으므로, 이것은 좋은 계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기(无忌)가, “천자(天子)가 군사를 움직임에 있어 요행수는 쓰지 않는다. 안시(安市)[성(城)]의 십만 무리가 우리 뒤에 있으니,[註099] 그들을 먼저 쳐부수고 이어서 남으로 진주하는 것이 만전의 형세이다.” 하므로, 그만두었다.
28) ○ 성중(城中) 사람들이 태종(太宗)의 깃발을 볼 때마다 반드시 성벽에 올라가 [북치고] 소리질렀다. 태종(太宗)이 노하자, [이(李)]적(勣)은 성(城)을 함락하는 날에 남자들을 다 죽이자고 청하였다. 고구려인들은 [이 말을] 듣고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거인(距闉)[註100]을 쌓아 동남쪽을 공격하니, 고구려는 성첩(城牒)을 더 높이 쌓아 올리고 수비하였다. [이(李)]적(勣)은 그 서쪽을 공격하여 당차(撞車)로 [성(城)을] 무너뜨렸으나, [성에서는] 무너지는 즉시 울짱을 꿰어 누각을 만들었다. 태종(太宗)은 성중(城中)의 닭· 돼지의 울음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포위된지 오랫동안 굴뚝에 검은 연기가 나지 않았었다. 이제 닭 ·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리니, [이는] 반드시 [그것들을] 죽여 군사를 호궤(犒饋)하는 것이다. 오랑캐가 밤이면 [성(城)을] 나올 것이다.” 하고, 군사들에게 경계를 삼엄히 펴라고 명하였다. 병야(丙夜)에 수백명의 고구려가 밧줄을 타고 내려 오는 것을 모두 사로 잡았다. 도종(道宗)은 나뭇가지로 흙을 싸다 [거인(距闉)을] 쌓아 올렸다. 거인(距闉)이 완성되자, 성마루에 몇 길도 못될만치 바짝 육박하였다. 과의도위(果毅都尉) 부복애(傅伏愛)에게 수비하게 하였는데, [토산(土山)이] 자연 높아져서 그 성(城)을 밀어냈다. 성(城)이 막 무너지는데, 복애(伏愛)가 [이때] 사사로이 제 부서를 떠나고 없어서 오랑캐 군사는 무너진 성(城) 틈으로 빠져 나와 [거인(距闉)을] 점거하여 참호를 파서 길을 차단한 다음, 불을 놓고 방패를 둘러 쳐서 수비를 굳혔다. 이에 태종(太宗)은 노하여 복애(伏愛)의 목을 베고 모든 장수에게 공격을 명하였는데, 사흘 동안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9) ○ 반사(班師)를 명하여 함락시킨 요주(遼州)· 개주(蓋州)의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 왔다. 군대가 성 밑을 지나자 성중(城中)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깃대를 눕혔으며, 성주(城主)[註101]는 성 위에 올라가 재배(再拜)하였다. 태종(太宗)은 그들이 [성(城)을] 잘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백필을 내려 주었다. 요주(遼州)는 속(粟)이 아직 십만 곡(斛)이 남아 있고, 군사들도 다 모을 수 없을 정도였다. 태종(太宗)이 발착수(渤錯水)[註102]에 이르렀을 때 진창에 막혀서 8십리 정도가 수레와 말이 다니지 못하였다. 장손무기(長孫无忌)· 양사도(楊師道) 등이 1만 여명을 거느리고, 나무를 베어다 길을 쌓고 수레를 연결하여 다리를 놓으니, 태종(太宗)은 말위에서 나무를 져다 날라 역사를 도왔다. 10월에 군사들이 마지막으로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는데, 눈이 매우 많이 내려, 조서(詔書)를 내려 [군사들이 다] 건널 때까지 횃불을 들고 기다려 주라고 명하였다.
30) ○ 처음 떠날 적에는 병사가 1십만·말이 1만 필이었다. 돌아올 때에는 사람은 겨우 1천명 죽었으나 말은 열에 여덟은 죽었다. 선사(船師)는 7만 명 중 역시 수백 명이 죽었다. 조서(詔書)를 내려 전사(戰死)한 시체를 거두어 유성(柳城)에 장사하는데 태뢰(太牢)로 제사하였다. 태종(太宗)이 임곡(臨哭)하니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태종(太宗)이 비기(飛騎)를 거느리고 임유관(臨渝關)에 들어가자, 황태자(皇太子)가 길 옆에서 맞이하였다. 당초 태종(太宗)은 태자(太子)와 작별할 적에 갈포(褐袍)를 입으며, “너를 보고 나서 갈아 입을 것이다.” 하였다. 두 계절이 바뀌도록 갈아입지 않아서 [갈포(褐袍)에] 구멍이 뚫렸다. 여러 신하들이 갈아 입기를 청하였으나, 태종(太宗)은, “군사들은 모두 해진 옷을 입고 있는데, 나만이 새 옷을 입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 [갈아 입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태자(太子)가 깨끗한 옷을 올리자, 드디어 갈아 입었다.
31) ○ 항복한 요(遼)[동(東)] 사람 1만 4천명은 모두 적몰하여 노비(奴婢)로 삼아 먼저 유주(幽州)에 집결하여 놓고 장사(將士)들에게 상품으로 나누어주려 하였다. 태종(太宗)이 부모(父母)· 처자(妻子)가 서로 분산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유사(有司)에게 조명(詔命)을 내려 포백(布帛)으로 속(贖)을 받고 용서하여 백성으로 만들어 주게 하니, [그들이] 줄을 서서 절을 올리고, 기뻐서 춤을 추기를 사흘동안 그치지 않았다. [고(高)]연수(延壽)는 항복을 하고 나서 근심으로 [병이 나서] 죽고, 홀로 [고(高)]혜진(惠眞)만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이듬해 봄에 장(藏)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올리고 또 사죄(謝罪)를 하였다. 두 미녀(美女)를 바치자, 태종(太宗)은 돌려 보내라고 조명(詔命)을 내리고, 사자(使者)에게, “미녀(美色)이란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친척을 떠나와서 마음 아파하는 것이 불쌍하여 내가 취하지 않겠다.” 고 하였다. 지난번 반사(班師) 때에 태종(太宗)이 개소문(蓋蘇文)에게 궁복(弓服)을 내려 주었는데, [개소문(蓋蘇文)은] 이것을 받고도 사자(使者)를 보내어 사례하지 않았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조공(朝貢)을 깎아 버리라고 하였다.
32) ○ 또 이듬해 3월에 조서(詔書)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대총관(靑丘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副總管)으로 삼아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게 하였다.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손이랑(孫貳朗)과 우둔위대장군(右屯衛大將軍) 정인태(鄭仁泰)를 부총관(副總管)으로 삼아 영주도독(營州都督)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성도(新城道)를 거쳐 진군(進軍)하게 하였다. [이적(李勣)의 군대는] 남소(南蘇)[성(城)][註103]· 목저(木底)[성(城)][註104]에 진주하였을 때에 오랑캐 병(兵)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들의 외성(外城)만을 불태웠다. 7월에 [우(牛)]진달(進達) 등이 석성(石城)을 탈취하고 적리성(積利城)으로 진격하여 수천급의 머리를 베고 모두 돌아왔다. 장(藏)이 아들 막리지(莫離支) 고임무(高任武)를 보내와서 조근(朝覲)하며 사죄(謝罪)하였다.
33) ○ [정관(貞觀)] 22년(A.D.648; 高句麗 寶藏王 7)에 조서(詔書)를 내려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 설만철(薜萬徹)을 청구도행군대총관(靑丘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副總管)으로 삼아 해도(海道)로부터 들어가게 하였다.[註105] 부장(部將) 고신감(古神感)이 고구려와 갈산(曷山)에서 싸웠는데, 고구려가 궤멸(潰滅)하였다. 어둠을 틈 타 배를 습격해 온 고구려 군사를 또 복병(伏兵)으로 쳐부수었다.[註106] [설(薜)]만철(萬徹)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서 박작성(泊灼城)[註107]에 진주(進駐)하여 40리 밖에 진을 쳤다. 고구려 군사가 두려워서 모두 성(城)을 버리고 달아났다. 대추(大酋) 소부손(所夫孫)이 저항하여 싸웠으나, 만철(萬徹)이 격퇴시켜 그의 목을 베고, 드디어 성(城)을 포위하여 원병(援兵) 3만명을 무찌르고 돌아왔다.[註108]
34) ○ 태종(太宗)이 장손무기(長孫无忌)와 계획하기를, “고(高)[구(句)]려(麗)는 우리 군사의 침입에 지쳐서 호구(戶口)가 줄고 수확(收穫)이 없는데도, 개소문(蓋蘇文)이 성책(城柵)만 증설하여 하민(下民)들은 굶주려서 구렁텅이에 쓰러져 죽으니, 그 피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년에 3십만 군대를 징발하고 공(公)이 대총관(大總管)이 된다면, 한번의 출전(出戰)으로 전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註109] 이어서 검남(劍南)[도(道)]에 조명(詔命)을 내려 많은 배를 만들게 하였다.[註110] 한편 촉인(蜀人)이 재화(財貨)를 강남(江南)으로 수송하기를 원하므로, 그 액수를 계산하여 배를 만들되, 배 한척당 비단 1천 2백필을 받아 들였더니, 파(巴)· 촉(蜀)이 크게 소란하고, 공주(邛州)[註111]· 미주(眉州)[註112]· 아주(雅州)[註113] 등 3주(州)의 요(獠)[註114]가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농서(隴西)[註115]와 협내(峽內)[註116]의 군사 2만을 동원하여 평정하였다.
35) ○ 일찍이 태종(太宗)이 고구려(高句麗)를 공취(攻取)하기로 결정하고, 협주자사(陜州刺史) 손복가(孫伏伽)와 내주자사(萊州刺史) 이도유(李道裕)[註117]에게 명하여 군량과 병기를 삼산포(三山浦)와 오호도(烏胡島)[註118]에 비축하게 하는 한편, 월주도독(越州都督)[부(府)]에 명하여 거선(巨船)과 우방(偶舫)을 만들어 대기하게 하였다. 마침 태종(太宗)이 죽자,[註119] 모두 중단되었다. [고(高)]장(藏)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위(弔慰)하였다.
36) ○ 영휘(永徽) 5년(A.D.654; 高句麗 寶藏王 13)에 [고(高)]장(藏)이 말갈병(靺鞨兵)을 이끌고 거란(契丹)을 공격하여, 신성(新城)에서 싸웠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화살이 모두 되돌아오자, 거란(契丹)이 이틈을 타서 [공격해] 크게 패하였다. 거란(契丹)이 들판에 불을 놓고 다시 싸우니, [고구려(高句麗)]병(兵)이 서로 엉켜 죽었으므로 시체를 쌓아 묻었다. [거란(契丹)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승리하였음을 알리자, 고종(高宗)은 조정(朝廷)에서 이를 포고(布告)하였다.[註120] [영휘(永徽)] 6년(A.D.655; 高句麗 寶藏王 14)에 신라(新羅)가 고(高)[구(句)]려(麗)와 말갈(靺鞨)이 36성(城)을 빼앗아갔음을 호소하고, 천자(天子)께서 불쌍히 여겨서 구원해 줄 것을 빌었다.[註121] 조서를 내려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신성(新城)에 이르러 고(高)[구(句)]려병(麗兵)을 무너뜨리고 외성(外城) 및 촌락(村落)에 불을 놓고 돌아왔다.[註122]
37) ○ 현경(顯慶) 3년(A.D.658; 高句麗 寶藏王 17)에 다시 [정(程)]명진(名振)을 보내어 설인귀(薜仁貴)[註123]를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를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註124] 2년 뒤에 천자(天子)가 백제(百濟)를 평정하였다. 이에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에게 명하여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패강(浿江)· 요동(遼東)· 평양도(平壤道)로 각각 진군하여 고구려(高句麗)를 치게 하였다.[註125]
38) ○ 용삭(龍朔) 원년(A.D.661; 高句麗 寶藏王 20)에 많은 군사를 모으고 여러 장수를 임명하여,[註126] 천자(天子)가 친히 [정벌(征伐)에] 나서려 하였는데, 울주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가, “고(高)[구(句)]려(麗)와 같은 소추(小醜)에게 무엇 때문에 중국(中國)의 힘을 기울여서 [정벌을] 나갈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고(高)[구(句)]려(麗)를 멸(滅)하고 나면 반드시 군사를 파견하여 지켜야 하는데, 군사를 적게 파견하면 위엄이 떨치지 않고, 군사를 많이 파견하면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 할 것이니, 이로써 천하(天下)가 군비에 피폐하게 됩니다. 신(臣)이 보건데, 고구려(高句麗)를 치는 것은 치지 않은 것만 못하고, 고구려(高句麗)를 멸하는 것은 멸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라고 건의 하였다. 또 마침 [측천(則天)]무후(武后)[註127]의 심한 반발이 있어서 고종(高宗)은 그만 두었다. 8월에 [소(蘇)]정방(定方)이 패강(浿江)에서 고구려(高句麗) 군대를 쳐부수어 마읍산(馬邑山)[註128]을 빼앗고, 드디어 평양(平壤)[성(城)]을 포위하였다.[註129] 이듬해에 방효태(龐孝泰)가 영남병(嶺南兵)을 거느리고 사수(蛇水)에 진주(進駐)하였다가, 개소문(蓋蘇文)의 공격을 받아 온 부대가 몰살을 당하였다.[註130] [소(蘇)]정방(定方)은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註131]
39) ○ 건봉(乾封) 원년(A.D.666; 高句麗 寶藏王 25)에 장(藏)이 아들 남복(男福)을 보내어 천자(天子)의 태산(泰山)의 봉선(封禪)에 참여하고 돌아갔다.[註132] [그때 마침] 개소문(蓋蘇文)이 죽고,[註133] 아들 남생(男生)이 대신하여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남건(男建)· 남산(男産) 두 아우가 있어 서로 사이가 나빴다. 남생(男生)이 국내성(國內城)을 점거하고 아들 헌성(獻誠)을 보내어 입조(入朝)하여 구원을 청하니, 개소문(蓋蘇文)의 아우 정토(淨土)도 역시 땅을 베어 항복할 것을 청해 왔다.[註134]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안무대사(遼東道安撫大使)로 삼고, 좌금오위장군(左金吾衛將軍) 방동선(龐同善)과 영주도독(營州都督) 고간(高偘)을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삼는 한편,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설인귀(薜仁貴)와 좌감문장군(左監門將軍) 이근행(李謹行)[註135]을 후속 부대로 떠나 보냈다.
40) ○ [건봉(乾封) 원년(元年: 666)] 9월에 [방(龐)]동선(同善)이 고(高)[구(句)]려병(麗兵)을 쳐부수니 남생(男生)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합류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남생(男生)에게 특진(特進) 요동대도독(遼東大都督) 겸(兼) 평양도안무대사(平壤道安撫大使)를 제수(除授)하고, 현도군공(玄菟郡公)에 봉하였다. 또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 겸(兼) 안무대사(安撫大使)로 삼아 계필하력(契苾何力)· 방동선(龐同善)과 협력케 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독고경운(獨孤卿雲)을 압록도행군총관(鴨淥道行軍總管)으로, 곽대봉(郭待)封을 적리도행군총관(積利道行軍總管)으로, 유인원(劉仁願)을 필렬도(畢列道)[註136]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김대문(金待問)을 해곡도(海谷道)[註137]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각각 삼고, [이(李)]적(勣)에게 절도(節度)[사(使)]를 주는 한편, 연(燕)· 조(趙)에 있는 군량을 요동(遼東)에 날라다 쌓게 하였다. 이듬해 1월에 [이(李)]적(勣)이 [제(諸)]도(道)를 이끌어 신성(新城)에 진주(進駐)하고, 여러 장수들을 모아 계획하기를, “신성(新城)은 적(賊)의 서쪽 변경의 요충이므로 [신성(新城)을] 먼저 함락시키지 않으면, 다른 성(城)도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서남쪽 산에 올라가서 성(城)에 바짝 닿아 성벽(城壁)을 [쌓자,] 성중(城中) 사람이 추장(酋長)을 묶어 가지고 나와서 항복하였다.[註138] [이(李)]적(勣)은 계속 진격하여 16성(城)을 빼앗았다. 한편 곽대봉(郭待封)은 주사(舟師)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평양(平壤)으로 향하였다.
41) ○ [건봉(乾封)] 3년(A.D.668; 高句麗 寶藏王 27) 2월에 [이(李)]적(勣)이 [설(薜)]인귀(仁貴)를 이끌고 가서 부여성(扶餘城)을 빼앗으니, 다른 30성(城)이 모두 항복하였다.[註139] [방(龐)]동선(同善)과 [고(高)]간(偘)은 신성(新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남건(男建)이 군대를 보내어 습격하였다. [설(薜)]인귀(仁貴)는 [고(高)]간(偘)을 구원하느라 금산(金山)[註140]에서 싸움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고(高)[구(句)]려군(麗軍)이 북을 울리며 진군(進軍)하는데, 예봉(銳鋒)이 날카로왔다. 인귀(仁貴)가 측면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어 머리 5만급을 베었다.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蒼岩)[註141]의 3성(城)을 빼앗아 군사를 이끌고 땅을 점령한 다음 [이(李)]적(勣)과 합류하였다.[註142]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군사작전 관계로 [요동(遼東)에서] 돌아왔다. 고종(高宗)이 군중(軍中)의 상황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지난날 선제(先帝)께서 문죄(問罪)할 적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오랑캐에게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軍)에 내응(內應)하는 자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서라(군무매軍無媒, 중도회中道回)’고 하였습니다. 오늘 날 남생(男生)의 형제가 집안 싸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인도하여 주고 있으니, 우리는 오랑캐의 내부사정을 다 알 수 있으며, 장수들은 충성을 다하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臣은 반드시 이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高)[구(句)]려(麗)의 비기(秘記)에 ‘9백년[註143]이 못되어 80대장에게 멸망한다(불급구백년不及九百年, 당유팔십대장멸지當有八十大將滅之)’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漢)나라때부터 나라가 있은지 지금 9백년이 되고, [이(李)]적(勣)의 나이가 또 80입니다. 고구려는 기근(飢饉)이 거듭되어 사람들은 서로 약탈하여다 팔고, 지진(地震)으로 땅이 갈라지며, 낭호(狼狐)가 성중(城中)에 들어가고 두더지가 성문(城門)에 굴을 뚫어, 인심(人心)이 불안에 떨고 있으므로, 이번 걸음에 다시는 출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남건(男建)이 군사 5만으로 부여(扶餘)[성(城)]을 습격하자, [이(李)]적(勣)은 살하수(薩賀水) 위에서 그를 쳐부수어 5천급((千級)의 머리를 베고, 3만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기계(器械)와 우마(牛馬)도 이에 맞먹었다. 진격하여 대행성(大行城)[註144]을 탈취하였다. 유인원(劉仁願)이 [이(李)]적(勣)과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뒤늦게 도착하였다. 소환(召還)하여 마땅히 목을 벨 것이나, 용서하여 요주(姚州)로 귀양보냈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은 [이(李)]적(勣)의 군대와 압록(鴨淥)에서 합류하여 욕이성(辱夷城)[註145]을 탈취한 다음, 모든 군사를 이끌고 평양(平壤)[성(城)]을 포위하였다.
42) ○ [건봉(乾封) 3년(668)] 9월에 [고(高)]장(藏)이 남산(男産)에게 수령(首領) 1백명을 주어 보내며 흰 깃발을 세워 항복을 청하는 한편, 입조(入朝)도 청하므로 [이(李)]적(勣)이 예의를 갖추어 맞아들였다. 그러나 남건(男建)은 오히려 [성(城)을] 굳게 지키며 나와 싸웠으나, 여러번 패하였다. 대장(大將)인 승(僧) 신성(信誠)이 첩자를 보내와 내응(內應)을 약속하였다. 닷새만에 성문이 열렸다. 군사들이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며 들어가서 성문에 불을 놓아 화염(火焰)이 사방에서 치솟으니, 남건(男建)은 다급한 나머지 스스로 몸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이에 [고(高)]장(藏)· 남건(男建) 등을 사로잡고 5부(部)의 1백 76성(城)과 69만호(戶)를 몰수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이(李)]적(勣)에게 지름길을 택하여 소릉(昭陵)에 헌부(獻俘)하고, 개선(凱旋)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43) ○ [건봉(乾封) 3년(668)] 12월에 고종(高宗)이 함원전(含元殿)에 앉아서 [이(李)]적(勣) 등을 인현(引見)하고 조정(朝廷)에서 포로를 헌상(獻上)받았다. [고(高)]장(藏)은 평소에 [개소문(蓋蘇文)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여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으로 삼고, 남산(男産)은 사재소경(司宰少卿)으로 삼았다. 남건(男建)은 검주(黔州)로 귀양을 보내고, 백제왕(百濟王) 부여융(扶餘隆)은 영외(嶺外)로 귀양을 보냈다. 헌성(獻誠)은 사위경(司衛卿)으로 삼고, 신성(信誠)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았다. 남생(男生)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삼고, [계필(契苾)]하력(何力)은 행좌위대장군(行左衛大將軍)으로 삼았다. [이(李)]적(勣)은 겸태자태사(兼太子太師)로 삼고, [설(薜)]인귀(仁貴)는 위위대장군(威衛大將軍)으로 삼았다. 그 나라의 땅을 9도독부(都督府)· 42주(州)· 1백현(縣)으로 분할하였다. 다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추호(酋豪) 가운데 공(功)이 있는 자를 뽑아서 도독(都督)· 자사(刺史)· 영(令)에 각각 제수(除授)하여, 화관(華官)과 더불어 [백성을] 참치(參治)하게 하였다. [설(薜)]인귀(仁貴)를 [안동(安東)]도호(都護)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진무(鎭撫)케 하였다. 이 해에 교제(郊祭)를 지냈는데, 고(高)[구(句)]려(麗)를 평정한 것에 대해 하늘에 성사(成事)를 사례하였다.
44) ○ 총장(總章) 2년(A.D.669; 新羅 文武王 9)에 고(高)[구(句)]려민(麗民) 3만명을 강회(江淮)와 산남(山南)으로 옮겼다.[註146] 고(高)[구(句)]려(麗)의 대장(大長) 겸모잠(鉗牟岑)[註147]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註148] [고(高)]장(藏)의 외손(外孫) 안순(安舜)[註149]을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註150] 고간(高偘)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總管)으로 삼고,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벌케 하였다.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양방(楊昉)을 보내어 도망치고 남은 무리를 불러들이게 하였다. [안(安)]순(舜)이 겸모잠(鉗牟岑)을 죽이고 신라(新羅)로 달아 났다. [고(高)]간(偘)은 도호부(都護府)의 치소(治所)를 요동주(遼東州)로 옮기고, 반란군을 안시(安市)[성(城)]에서 격파하고, [註151] 또 천산(泉山)에서 쳐부수고 신라(新羅)의 원병(援兵) 2천명을 사로잡았다.[註152] 이근행(李謹行)은 그들을 발로하(發盧河)[註153]에서 쳐부수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참수(斬首)한 수가 1만(萬)에 이르렀다. 이에 평양(平壤)[성(城)]의 패잔병(敗殘兵)들은 다시 군열(軍列)을 정비할 수 없게 되자, 함께 어울려 신라(新羅)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무려 4년만에 평정되었다.[註154] 지난날 [이(李)]근행(謹行)이 아내 유씨(劉氏)를 시켜 벌노성(伐奴城)을 수비케 하였는데, 고구려가 공격해 오자, 유씨(劉氏)는 갑옷을 입고 대오(隊伍)를 정렬하여 수비하였다. 그리하여 적(賊)들이 물러났다. 고종(高宗)은 이를 가상히 여겨 연군부인(燕郡夫人)에 봉(封)하였다.
45) ○ 의봉(儀鳳) 2년(A.D.677; 新羅 文武王 17)에 [고(高)]장(藏)에게 요동도독(遼東都督)을 제수(除授)하고,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여[註155] 요동(遼東)에 돌아가 남은 백성을 안무(安撫)케 하였다. 이에 앞서 내주(內州)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僑民)을 모두 용서하여 돌려 보내고,[註156]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겼다.[註157] [고(高)]장(藏)이 말갈(靺鞨)과 반란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소환하여 공주(邛州)로 추방하고, 나머지 교민(僑民)들은 하남(河南)과 농우(隴右)로 옮겼다. 노약(老弱)하고 빈곤(貧困)한 자는 안동(安東)에 머물러 두었다. [고(高)]장(藏)이 영순(永淳)(A.D.682; 新羅 神文王 2)초년에 죽으니,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여 힐리(頡利)[가간(可汗)]의 묘 왼쪽에 장사하고 비석을 세워 주었다. 예전의 성(城)들은 왕왕 신라(新羅)에 편입되었다. 유민(遺民)들은 흩어져 돌궐(突厥)과 말갈(靺鞨)로 달아났다. 이로 말미암아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은 모두 끊겼다.
46) ○ 수공(垂拱) 연간(A.D.685~688; 新羅 神文王 5~8)에 [고(高)]장(藏)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았다. 성력(聖曆)(A.D.698~699; 新羅 孝昭王 7~8)초에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에 진수(進授)시키고,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에 봉(封)하여 안동구부(安東舊部)를 통섭(統攝)시키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이듬해에 [고(高)]장(藏)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安東都督)으로 삼으니, 이뒤로 조금씩 나라의 틀이 잡혀갔다. 원화(元和)(A.D.806~820; 新羅 哀莊王 7~憲德王 12) 말(末)에 이르러 사자(使者)를 보내어 악공(樂工)을 헌상(獻上)하였다고 한다
2. ○ 백제(百濟)[註001]
1) ○백제(百濟)는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이다.[註002] 경사(京師)에서 동쪽으로 6천리 남짓한[註003] 바닷가 양지쪽에 위치해 있다. 서쪽은 월주(越州),[註004] 남쪽은 왜(倭), 북쪽은 고려(高[구,句]麗)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모두 바다를 건너야 간다. 그 나라의 동쪽은 신라(新羅)이다. 왕(王)은 동(東)· 서(西)의 2성(城)에 산다.[註005] 관(官)[註006]으로는 내신좌평(內臣佐平)이 있어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고, 내두좌평(內頭佐平)은 재정(財政)을 관장하며, 내법좌평(內法佐平)은 예(禮)를 주관하고, 위사좌평(衛士佐平)은 위병(衛兵)을 관장하며, 조정좌평(朝廷佐平)은 형옥(刑獄)을 주관하고, 병관좌평(兵官佐平)은 외병(外兵)을 관장한다.[註007] 6방(方)을 두어 1방(方)이 10군(郡)을 통섭케 하였다.[註008] 대성(大姓)으로는 사씨(沙氏)· 연씨(燕氏) · 이씨(劦氏)· 해씨(解氏)· 정씨(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일씨(䒤氏)의 여덟이 있다.[註009]
2) ○ 그 나라의 법(法)은 반역(反逆)한 자는 목을 베고 그 가속은 적몰(籍沒)한다. 사람을 죽인 자는 세명의 노비(奴婢)를 보내어 속죄케 한다. 관리(官吏)가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하면 [그 물건의] 세배로 갚게 하고 종신(終身)토록 금고(禁錮)시킨다. [註010] 풍속은 고려(高[구,句]麗)와 같다.[註011] 세 곳의 섬에서 황칠(黃漆)이 나는데, 6월에 나무에 구멍을 뚫어 진을 모으면 색이 금빛과 같다. 왕(王)은 소매가 큰 자포(紫袍)에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흰 가죽띠에 까만 가죽신을 신으며, 오라관(烏羅冠)에 금꽃으로 장식한다. 군신(群臣)들은 붉은 옷을 입고 관(冠)은 은꽃으로 장식한다. 서민(庶民)에게는 자색(紫色)이나 붉은색의 옷이 금지된다.[註012] 문적(文籍)이 있고,[註013] 년(年)· 월(月)을 기록하는 것은 중국(中國) 사람과 같다.[註014]
3) ○ 무덕(武德) 4년(A.D.621; 百濟 武王 22)에 왕(王) 부여장(扶餘璋)이 처음으로 사신(使臣)을 보내어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註015] 이로부터 조공(朝貢)을 자주 바쳐 오니,[註016] 고조(高祖)는[그를] 책봉하여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註017] 5년 뒤에 명광개(明光鎧)[註018]를 바치고, 또 고려(高[구,句]麗)가 조공(朝貢)의 길을 막는다고 호소하였다.[註019]
4) ○ 태종(太宗) 정관(貞觀)(A.D.627~649; 百濟 武王 28~義慈王 9)초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두나라 사이의] 원한을 풀게 하였다.[註020] 또한 신라(新羅)와 대대로 원수가 되어 자주 서로 침공하였다.[註021] 태종(太宗)은, “신라(新羅)는 짐(朕)의 번신(藩臣)이며 왕(王)의 인국(鄰國)이오. 들으니 두나라가 자주 침공한다 하는 지라, 짐(朕)이 이미 고려(高[구,句]麗)와 신라(新羅)에 조서(詔書)를 내려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을 당부하였으니, 왕(王)은 부디 지난날의 원한을 잊어버리고 짐(朕)의 본의(本意)를 알아 주기 바라오.” 라는 새서(璽書)를 내렸다.[註022] [부여(扶餘)]장(璋)이 표문(表文)을 올려 사죄하였다. 그러나 싸움은 역시 그치지 않았다. 다시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근(朝覲)하고, 철갑(鐵甲)과 조부(雕斧)를 바치니, 태종(太宗)은 그들을 융숭히 대접하고 명주 3천단(段)을 내려주었다.[註023] [정관(貞觀)]15년(A.D.641; 百濟 義慈王 1)에 장(璋)이 사(死)하니,[註024] 사자(使者)가 소복(素服)을 하고 와서, “군(君)의 외신(外臣) 백제왕(百濟王) 부여장(扶餘璋)이 졸(卒)하였습니다.” 라는 표문(表文)을 올렸다. 태종(太宗)은 현무문(玄武門)에서 거애(擧哀)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였으며, 부물(賻物)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註025] 사부랑중(祠部郞中)[註026] 정문표(鄭文表)에게 명하여 그의 아들 의자(義慈)를 책봉하여 주국(柱國)으로 삼고, 왕위(王位)를 계승하게 하였다.[註027] 의자(義慈)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깊으니,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註028]로 불리었다.
5) ○ 이듬해에 고려(高[구,句]麗)와 연화(連和)하여 신라(新羅)를 쳐서 40여성(城)을 탈취하고,[註029] 군사를 보내어 수비하였다. 또 당항성(棠項城)[註030]을 탈취하여 [신라(新羅)의] 조공(朝貢)길을 막고자 하였다. 신라(新羅)가 다급함을 알려 오자, 태종(太宗)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에게 조서(詔書)를 주어 보내어 화해하라고 설득하였다.[註031] 태종(太宗)이 새로 고려(高[구,句]麗)를 토벌한다는 소문을 듣고[註032] 그 틈을 타 신라(新羅)의 일곱성(城)[註033]을 탈취하였다. 얼마후 또 십여성(城)[註034]을 빼앗고, 그로 인하여 조공하지 않았다.[註035]
6) ○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사신(使臣)을 보내왔다. 고종(高宗)은 의자(義慈)에게 조서(詔書)를 내려,[註036] “해동(海東)의 세 나라는 개국한 지가 오래이고, 지형이 본래 견아(犬牙)의 형세처럼 들쭉날쭉 서로 닿아 있소. 근래에 와서 국경을 다투고 침공하여 편안한 해가 없더니, 이제는 신라(新羅)의 높은 성(城)과 요해처의 진(鎭)을 모두 왕(王)이 병탄(幷吞)하였소. [신라왕(新羅王)은] 자신이 곤궁(困窮)하게 됨을 나에게 알리고, 왕(王)이 그 땅을 돌려 줄 것을 원하였소. 옛날 제환공(齊桓公)은 일개 제후(諸侯)였지만 오히려 망하여 가는 나라를 보존하여 주었소.[註037] 하물며 짐(朕)은 만방(萬方)의 군주인데, 그들의 위태함을 구제해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王)은 병탄(幷吞)한 [신라(新羅)의] 성(城)을 마땅히 돌려 주어야 하며, 신라(新羅)도 사로잡아 간 포로를 왕(王)에게 돌려 보내야 할 것이오. 조명(詔命)을 따르지 않는다면 왕(王)과 결전(決戰)할 것이오. 짐(朕)은 거란(契丹) 제국(諸國)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수(遼水)를 건너서 깊이 침입(侵入)할 것이니, 왕(王)은 잘 생각하여 후회가 없게 하오.” 라고 하였다. 영휘(永徽) 6년(A.D.655; 百濟 義慈王 15)에 신라(新羅)가 백제(百濟)· 고려(高[구,句]麗)· 말갈(靺鞨)이 북쪽 국경의 30성(城)을 빼앗아 갔다고 호소하여 왔다.[註038]
7) ○ 현경(顯慶) 5년(A.D.660; 百濟 義慈王 20) 에 이에 조서하여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우무위대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태(龐孝泰)를 거느리게 하고, 신라병(新羅兵)을 출동시켜 백제(百濟)를 치게 하였다. [정방(定方)의 군대는] 성산(城山)[註039] 에서 바다를 건넜다. 백제(百濟)는 웅진구(熊津口)를 지키고 있었는데, 정방(定方)이 공격하자, 오랑캐가 대패(大敗)하였다. 왕사(王師)는 다시 조수(潮水)를 타고 배로 진도성(眞都城)[註040]에 30리[註041] 가까이 진주(進駐)하였다. 오랑캐가 모든 무리를 다 동원하여 방어를 하였으나, 또 쳐부수어 1만여급(級)의 머리를 베고 그 성(城)을 탈취하였다. 의자(義慈)가 태자(太子) 융(隆)[註042]과 함께 북쪽 변방[註043]으로 도망치니, 정방(定方)은 이를 포위하였다.[註044]
8) ○ 둘째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王)의 자리에 올라 무리를 거느리고 수비(守備)를 굳히자, 의자(義慈)의 손자 문사(文思)[註045]는, “아직 왕(王)과 태자(太子)께서 건재하여 있는데 숙부(叔父)께서 스스로 왕(王)이 되었으니, 만약 당병(唐兵)이 포위를 풀고 물러간다면 우리 부자(父子)는 어찌될 것인가?” 하고, 측근들과 함께 밧줄을 타고 [성(城)을] 나왔다. 백성들이 모두 따라나서자, 태(泰)는 제지하지 못하였다.
9) ○ [소(蘇)]정방(定方)이 군사에게 명하여 성첩(城堞)에 뛰어 올라 깃발을 꽂게 하니, 태(泰)가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정방(定方)은 의자(義慈)· 융(隆)과 소왕(小王) 효연(孝演)[註046] 및 추장(酋長) 58명을 사로잡아 경사(京師)로 보내고, 그 나라 5부(部)[註047]·37군(郡)[註048]·2백성(城)[註049]76만호(戶)를 평정하였다. 이에 [땅을 다시] 나누어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도독부(都督府)[註050]를 설치하여 추장(酋長)을 뽑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백제성(百濟城)[註051]을 지키게 하고, 좌위낭장(左衛郞將)[註052]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9월에 [소(蘇)]정방(定方)이 모든 포로를 이끌고 알현(謁見)하니,[註053] 조서(詔書)를 내려 죽이지 말고 놓아주라고 명하였다. 의자(義慈)가 병으로 죽자,[註054]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고 구신(舊臣)들의 부곡(赴哭)을 허락하였다. 손호(孫皓)· 진숙보(陳叔寶)의 묘(墓) 왼쪽에 장사하라고 명하고, 융(隆)에게는 사가경(司稼卿)[註055]을 제수하였다. [왕(王)]문도(文度)가 바다를 건너가서 죽으니, 유인궤(劉仁軌)로 대신케 하였다.
10) ○ [부여(扶餘)]장(璋)의 조카 복신(福信)은 일찍이 군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때에 승(僧) 도침(道琛)과 함께 주유성(周留城)[註056]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왜(倭)[국(國)]에서 고왕자(故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 왕(王)으로 삼으니, 서부(西部)가 다 호응하여[註057] 군사를 이끌고 [유(劉)]인원(仁願)을 포위하였다.[註058]
11) ○ 용삭(龍朔) 원년(A.D.661; 新羅 文武王 1)에 [유(劉)]인궤(仁軌)가 신라병(新羅兵)을 동원시켜 구원을 가게 하니, 도침(道琛)은 웅진강(熊津江)에다 두개의 성벽(城壁)을 세웠다. 인궤(仁軌)가 신라병(新羅兵)과 함께 양쪽에서 공격하니, [백제병(百濟兵)은]성벽(城壁) 안으로 쫓겨 들어 가는데, 앞을 다투어 다리를 건너다가 빠져 죽은 사람이 1만명에 달하였다.[註059] 신라병(新羅兵)은 돌아갔다.[註060] 도침(道琛)은 임존성(任存城)[註061]을 보루로 삼아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福信)은 상령장군(霜岺將軍)이라 일컬으며 인궤(仁軌)에게 고하기를, “당(唐)이 신라(新羅)와 약속하기를 백제(百濟)를 쳐부수면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다 죽인 다음에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 준다고 들었소. 우리가 죽음을 당할 바에야 [어찌] 싸우다 죽으려 하지 않겠소?” 하였다. 이에 인궤(仁軌)는 사자(使者)를 시켜 답장을 보냈다. 도침(道琛)은 거만하게 사자(使者)를 외관(外館)에 머무르게 하고, 업신여기는 말투로, “사자(使者)의 벼슬이 낮구나. 나는 일국의 대장(大將)이니만큼 예의상 만나 볼 수 없다.” 하고 그냥 돌려 보냈다. 인궤(仁軌)는 군사가 적으므로 군사를 쉬게 하며 훈련을 쌓고, 신라(新羅)[병,兵]과 연합하여 쳐부술 것을 청하였다. 얼마 아니되어 복신(福信)이 도침(道琛)을 죽이고 그의 군병을 병합하니, [부여(扶餘)]풍(豊)도 제지하지 못하였다.[註062]
12) ○ [용삭(龍朔)]2년(A.D.662; 新羅 文武王 2)7월에 인원(仁願) 등이 웅진(熊津)[註063]에서 백제군(百濟軍)을 무찌르고 지라성(支羅城)[註064]을 탈취한 다음, 밤에 진현(眞峴)[성(城)]으로 육박하여 날이 밝을 무렵에 안으로 쳐들어 가서 머리 8백급(級)을 베니, 신라(新羅)의 군량수송로가 비로소 열렸다.[註065] 인원(仁願)이 증원병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조서(詔書)를 내려 [註066]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웅진도행군총관(熊津道行軍總管)으로 삼아 제병(齊兵)[註067] 7천명을 징발하여 보냈다. 복신(福信)은 국권을 장악하고 [부여(扶餘)]풍(豊)을 죽일 것을 꾀하였다. 풍(豊)은 친히 심복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복신(福信)을 베고, 고려(高[구,句]麗) 및 왜(倭)와 연화(連和)하였다.[註068] 인원(仁願)은 제병(齊兵)을 증원받고 나서 사기가 진작되었다. 이에 신라왕(新羅王) 김법민(金法敏)과 함께 보병·기병을 이끌고, 유인궤(劉仁軌)로 하여금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가게 하여 웅진성(熊津江)에서 동시에 진군(進軍)하여 주류성(周留城)으로 육박하였다. 풍(豊)의 무리는 백강(白江) 어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을 사면에서 공격하여 다 이기고, 4백 척의 배를 불사르니, 풍(豊)은 도망쳐 자취를 감추었다. [註069] 위왕자(僞王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부여(扶餘)]충지(忠志)가 남은 군사와 왜인(倭人)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니, 다른 여러 성(城)들이 모두 따라 항복하였다.[註070] 이에 인원(仁願)은 군대를 정비하여 돌아오고, 인궤(仁軌)는 뒤에 남아서 대신 수비하였다. 고종(高宗)은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아가서 신라(新羅)와 묵은 감정을 풀고, [백제(百濟)의]유민(遺民)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註071]
13) ○ 인덕(麟德) 2년(A.D.665; 新羅 文武王 5)에 [부여융(扶餘隆)이] 신라왕(新羅王)과 웅진성(熊津城)에서 만나 백마(白馬)를 잡아 놓고 맹약하였다.[註072] 맹사(盟辭)는 인궤(仁軌)가 작성하였다. “지난날 백제(百濟)의 선왕(先王)이 역리(逆理)와 순리(順理)의 이치를 돌아보지 않아 이웃과 우호가 돈독치 못하였고 친척[註073]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였으며, 고려(高[구,句]麗)· 왜(倭)와 함께 신라(新羅)에 침입하여 성읍(城邑)을 쳐부수고 도륙하였다. 천자(天子)께서 백성(百姓)이 무고(無辜)하게 [고통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으라고 명하였으나, 선왕(先王)은 [지세가] 험하고 [도로가] 먼 것만 믿어 [조명(詔命)을] 멸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제(皇帝)께서 이에 분노하시어 이들을 쳐서 평정하기로 하셨다. 그러나 망하는 것을 일으켜 주고 끊어지는 것을 이어주는 것이 왕자(王者)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전태자(前太子) 융(隆)을 세워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제사(祭祀)를 받들게 하는 것이다. 신라(新羅)에 의지하여 길이 동맹의 나라가 되어서 지난 날의 원한을 잊어버리고 다시 우호를 다져라. 천자(天子)의 명을 공손히 받들어 영원한 번신(藩臣)이 될지어다.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劉)]인원(仁願)이 이 맹서에 친림(親臨)하였으니, 신의를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동원한다면, 신명(神明)이 이를 보고 온갖 재앙을 내려 자손이 번창하지 못하여 사직(社稷)을 지킬 자가 없게 될 것이니, 세세영원(世世永遠)토록 삼가 저버림이 없으라.” 이에 금서철계(金書鐵契)를 만들어 신라(新羅)의 종묘(宗廟)에 간직하였다. 인원(仁願) 등이 돌아 오자, 융(隆)은 [백제(百濟)의] 유민(遺民)들이 분산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역시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14) ○ 의봉(儀鳳) 연간(A.D.676~678; 新羅 文武王16~18)에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승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무렵 신라가 강성하자, 융(隆)은 감히 구국(舊國)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려(高[구,句]麗)에 의탁하고 있다가 죽었다.[註074] [측천(則天)]무후(武后) 때 또 그 손자 [부여(扶餘)]경(敬)으로 왕위(王位)를 승습케 하였으나, 이때 그 땅은 이미 신라(新羅)·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어, 백제(百濟)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註075]
3. ○ 신라(新羅)[註001]
1) ○신라(新羅)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다.[註002] 한대(漢代)의 낙랑(樂浪)[군(郡)] 땅에 위치하니,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동쪽은 장인(長人)[국(國)][註003]에 닿고, 동남쪽은 일본(日本), 서쪽은 백제(百濟), 남쪽은 바다에 연해 있으며, 북쪽은 고려(高[구,句]麗)와 [접해 있다.] 왕(王)은 금성(金城)에 사는데 그 둘레는 8리이며 위병(衛兵)은 3천명이다. 성(城)을 침모라(侵牟羅)라 부르며, 그 읍(邑)이 [침모라(侵牟羅)의] 안에 있는 것은 훼평(喙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邑勒)이라 한다. 훼평(喙評)은 6군데, 읍륵(邑勒)은 52군데 있다. 조복(朝服)은 흰 빛을 숭상하고,[註004] 산신(山神)에게 제사하기를 좋아한다.[註005] 8월 보름날에는 벼슬아치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 주고 활쏘기를 시킨다.[註006]
2) ○ 그 나라의 관제(官制)는 [왕(王)의] 친속(親屬)으로 상관(上官)을 삼으며, 족명(族名)은 제(第)1골(骨)과 제(第)2골(骨)로 자연히 구별된다. 형제의 딸이나 고모·이모·종자매(從姊妹)를 다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다. 왕족(王族)은 제(第)1골(骨)이며, 아내도 역시 그 족(族)으로, 아들을 낳으면 모두 제(第)1골(骨)이 된다 [또 제(第)1골(骨)은] 제(第)2골(骨)의 여자에게 장가를 가지 않으며,[註007] 간다 하더라도 언제나 잉첩으로 삼는다. 관리(官吏)로는 재상(宰相)· 시중(侍中)[註008]· 사농경(司農卿)[註009]· 태부령(太府令)[註010] 등 모두 17등급이 있는데,[註011] 제(第)2골(骨)이 이 관직을 맡는다. [국가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결정하는데, 이를 ‘화백(和白)’이라 하며,[註012] 한사람의 이의(異議)만 있어도 중지하였다. 재상(宰相)의 집에는 녹(祿)이 끊어지지 않으며, 노비(奴婢)가 3천명이나 되고, 갑병(甲兵)과 우(牛)· 마(馬)· 돼지도 이에 맞먹는다. 가축은 해중(海中)의 산(山)에 방목(放牧)을 하였다가 필요할 때에 활을 쏘아서 잡는다. 곡식을 남에게 빌려 주어서 늘리는데, 기간 안에 다 갚지 못하면 노비(奴婢)로 삼아 일을 시킨다.[註013]
3) ○ 왕(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귀인(貴人)의 성(姓)은 박씨(朴氏)이며,[註014] 백성에게는 성(姓)은 없고 이름만 있다. 식기(食器)는 버드나무로 만든 배(杯)를 사용하는데, 구리나 질그릇을 쓰기도 한다. 정월 초하룻날은 서로 축하하며,[註015] 이날에는 일월신(日月神)에게 절을 올린다. 남자는 갈고(褐袴)를 입는다. 여자는 긴 유(襦)를 입는데,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꿇어 앉아 손을 땅에 짚고 공손히 절한다.[註016] 분을 바르거나 눈썹을 그리지 않고, 모두 치렁치렁한 머리를 틀어 올려 구슬과 비단으로 꾸민다. 남자는 머리를 깎아 팔고 검은 모자를 쓴다. 시장(市場)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은 모두 부녀(婦女)들이 한다. 겨울에는 집 안에 부엌을 만들고, 여름에는 음식물을 얼음 위에 둔다. 가축 가운데 양(羊)은 없고, 나귀와 노새는 적으며, 말은 많다. 말의 몸집은 크지만 잘 달리지를 못한다.
4) ○ 장인(長人)은 그 키가 거의 세길이나 되고, 톱니 이빨에 갈퀴 손톱에다 검은 털이 온 몸을 덮고 있다. 화식(火食)을 하지 아니하여 새나 짐승을 날로 물어뜯으며, 간혹 사람을 잡아 먹기도 한다. 부인(婦人)을 얻으면 의복(衣服)이나 만들게 한다. 그 나라의 산은 수십리씩 연결되어 있는데, 입구의 골짜기에 튼튼한 쇠문짝을 만들어 달고 관문(關門)이라 한다. 신라(新羅)는 이 곳에 항상 노사(弩士) 수천명을 주둔시켜 지킨다.
5) ○ 일찍이 백제(百濟)가 고려(高[구,句]麗)를 칠 적에 [신라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자, [신라(新羅)는]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백제(百濟)를 쳐부수었다. 이로부터 서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 뒤 또 백제왕(百濟王)을 사로잡아 죽이자 원한은 더욱 깊어졌다.[註017] 무덕(武德) 4년(A.D.621; 新羅 眞平王 43)에 [신라(新羅)]왕(王) 진평(眞平)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입조(入朝)하니,[註018] 고조(高祖)는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郞) 유문소(庾文素)에게 조서하여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답을 전하게 하였다. 3년 뒤에 주국(柱國)을 제수(除授)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에 봉하였다.
6) ○ 정관(貞觀) 5년(A.D.631; 新羅 眞平王 53)에 2명의 여악공(女樂工)을 바쳤다. 태종(太宗)은, “근간에 임읍(林邑)에서 바친 앵무새도 고향이 그립다는 말을 하며 돌려 보내 주기를 빌었다.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랴?” 하고, 사자(使者)의 편에 돌려보냈다. 이 해에 진평(眞平)이 죽었는데,[註019] 아들이 없어서 딸 선덕(善德)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註020] 대신(大臣) 을제(乙祭)가 권력을 잡았다.[註021] 조서(詔書)를 내려 진평(眞平)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물(賻物) 2백단(段)을 하사하였다. [정관(貞觀)] 9년(A.D.635; 新羅 善德女王 4)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선덕(善德)을 책봉하여 부(父)의 봉작(封爵)을 세습케 하니, 나라 사람들은 [그녀를] 성조황고(聖祖皇姑)라 불렀다. [정관(貞觀)] 17년(A.D.643; 新羅 善德女王 12)에 고려(高[구,句]麗)와 백제(百濟)의 침공을 받고 사자(使者)를 보내와 군사를 청하였다. 이때는 마침 태종(太宗)이 친히 고려(高[구,句]麗)를 치던 중이라 조서를 내려 군사를 이끌고 노(虜)의 세력을 흐트러뜨리라고 하였다. 선덕(善德)은 군사 5만명으로 고려(高[구,句]麗)의 남쪽 경계에 침입하여 수구성(水口城)을 탈취한 뒤 [이 사실을] 알려 왔다. [정관(貞觀)] 21년(A.D.647; 新羅 眞德女王 1)에 선덕(善德)이 죽으니,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그의] 여동생 진덕(眞德)으로 왕(王)을 세습케 하였다. 이듬 해에 [그의] 아들 문왕(文王)[註022]과 아우 이찬(伊贊)의 아들 춘추(春秋)를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 문왕(文王)에게는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제수(除授)하고, 춘추(春秋)에게는 특진(特進)을 제수(除授)하였다. 이어서 복장(服章)을 고쳐 중국(中國)의 제도를 따르기를 청하므로 궁중의 진복(珍服)을 내어 주었다. 또 국학(國學)에 보내어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보게 하고, 태종(太宗)은 손수 지은『진서(晋書)』를 내려 주었다. 돌아갈 적에는 칙명(敕命)으로 3품(品)이상의 관원을 교외(郊外)에 내보내어 전송하게 하였다.
7) ○ 고종(高宗) 영휘(永徽) 원년(A.D.650; 新羅 眞德女王 4)에 백제(百濟)를 쳐서 깨뜨린 뒤, 춘추(春秋)의 아들 법민(法敏)을 보내어 조근(朝覲)하였다. 진덕(眞德)이 송(頌)을 지어 비단에 짜서 바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당(大唐)이 큰 왕업(王業)을 연 것은 외외(巍巍)하신 황제(皇帝)의 훌륭한 지모(智謀). 간과(干戈)를 멈추어 세상은 큰 평정을 이루고 문치(文治)를 일으켜 백왕(百王)을 계승하였어라. 천하(天下)을 통솔함에는 은혜를 높이 숭상하고 만물(萬物)을 다스림에는 공을 내세우지 않네. 깊은 인덕(仁德)은 일월(日月)과 짝할만 하고 대운(大運)을 타고 일어남은 도당(陶唐)의 세(世)를 초월하였네. 번기(幡旗)가 혁혁(赫赫)하던 그 날 정고(鉦鼓)는 어이 그리 굉굉(鍠鍠)하였던가. 외이(外夷)로 명(命)을 어긴 자는 천앙(天殃)을 입어 복멸(覆滅)하였네. 순박한 풍속이 유명(幽明)에 같이 엉기니 원근(遠近)에서 앞다투어 정상(呈祥)을 하네. 사시(四時)의 절기(節氣)는 옥촉(玉燭)처럼 순조롭고 칠요(七耀)의 빛이 만방(萬方)에 고루 돈다. 오직 제후(諸侯)라야 재보(宰輔)를 천거하고 오직 황제(皇帝)만이 충량(忠良)을 등용하는 법.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덕(德)을 한덩어리로 하여 우리 당(唐)나라 밝게 빛내리.[註023]
고종(高宗)은 그 뜻을 좋게 여겨 법민(法敏)을 태부경(太府卿)에 발탁하였다.
8) ○ 영휘(永徽) 5년(A.D.654; 新羅 武烈王 1)에 진덕(眞德)이 죽으니, 고종(高宗)이 거애(擧哀)하였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채단(綵段) 3백필을 내려 주었다. 태상승(太常丞) 장문수(張文收)에게 명하여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조제(弔祭)하게 하고, 춘추(春秋)로 왕(王)을 승습케 하였다. 이듬해에 백제(百濟)· 고려(高[구,句]麗)· 말갈(靺鞨)이 협력하여 신라(新羅)의 30성(城)을 벌취(伐取)하자, 사자(使者)가 와서 구원병을 청하였다.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그들을 토벌케 하고, 춘추(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아서 마침내 백제(百濟)를 평정(平定)하였다. 용삭(龍朔) 원년(A.D.661; 新羅 文武王 1)에 [춘추(春秋)가] 죽으니, 법민(法敏)으로 왕(王)을 승습케 하였다. 그 나라를 계림주대도독부(鷄林州大都督府)로 삼아 법민(法敏)에게 도독(都督)을 제수하였다.
9) ○ 함형(咸亨) 5년(A.D.674; 新羅 文武王 14)에 [신라(新羅)에서] 고려(高[구,句]麗)의 항거하는 무리들을 받아들여 [옛]백제(百濟) 땅을 점령하여 지키게 하였다.[註024] 고종(高宗)이 노하여 조서를 내려 [법민(法敏)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그의 아우 우효위원외대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김(金)]인문(仁問)을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아[註025] 경사(京師)에서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조서(詔書)를 내려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總管)으로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을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가서 힘을 다하여 치라고 하였다.
10) ○ 상원(上元) 2년(A.D.675; 新羅 文武王 15)2월에 [유(劉)]인궤(仁軌)가 칠중성(七重城)에서 그들을 쳐부수고, 말갈병(靺鞨兵)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공략(攻略)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註026] 조서(詔書)를 내려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매초성(買肖城)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노(虜)가 모두 패배하였다.[註027] 법민(法敏)이 사신(使臣)을 보내 입조(入朝)하여 사죄를 하는데, 공물(貢物)의 짐바리가 줄을 이었다. 인문(仁問) 또한 [신라(新羅)에서] 돌아와 왕위(王位)를 내놓으므로, 조서(詔書)를 내려 법민(法敏)의 관작(官爵)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신라(新羅)는] 백제(百濟)의 땅을 많이 차지하고, 드디어는 고려(高麗)의 남부까지 점령하였다.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의 9주(州)를 설치하고,[註028] 주(州)에는 도독(都督)을 두어[註029] 10군(郡) 내지 20군(郡)을 통솔하게 하였다. 군(郡)에는 태수(太守)를, 현(縣)에는 소수(小守)를 두었다.[註030]
11) ○ 개요(開耀) 원년(A.D.681; 新羅 神文王 1)에 [법민(法敏)이] 죽고, 아들 정명(政明)이 왕위(王位)를 세습하였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근(朝覲)하고, 『당례(唐禮)』및 기타의 문사(文辭)를 요구하므로, [측천(則天)]무후(武后)는 『길흉례(吉凶禮)』와 함께 [이름난] 문장(文章) 50편을 내려 주었다. [정명(政明)이] 죽고, 아들 이홍(理洪)이 왕위(王位)를 세습하였다. [이홍(理洪)이] 죽고, 아우 흥광(興光)[註031]이 왕위(王位)를 세습하였다.
12) ○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A.D.713~741; 新羅 聖德王 12~孝成王 5) 에 자주 입조(入朝)를 하여 과하마(果下馬)· 조하주(朝霞紬)· 어아주(魚牙紬)· 해표피(海豹皮)를 바쳤다.[註032] 또 두 명의 여자를 바쳤는데, 현종(玄宗)은, “여자들은 모두 왕(王)의 고모요 자매이다. 생소한 풍속에 부모· 친척과 떼어 놓는 것이니, 짐(朕)은 차마 머물게 하지 못하겠노라.” 하고, 많은 물품을 주어 돌려 보냈다. 또 자제(子弟)들을 보내어 태학(太學)에 입학시켜 경술(經術)을 배우게 하였다.[註033] 현종(玄宗)이 이따금씩 흥광(興光)에게 서문금(瑞文錦)·오색라(五色羅)· 자수문포(紫繡紋袍)· 금은(金銀)으로 정련(精鍊)한 기물(器物)을 내려주니, 흥광(興光)도 이구마(異狗馬)· 황금(黃金)· 미체(美髢) 등의 여러 물품을 바쳤다. 일찍이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등주(登州)를 노략질하였을 적에 흥광(興光)이 그들을 공격하여 물리치니, 현종(玄宗)은 흥광(興光)을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로 진수(進授)하여 말갈(靺鞨)을 치게 하였다.[註034]
13) ○ [개원(開元)] 25년(A.D.737; 新羅 孝成王 1)에 [흥광(興光)이] 죽으니, 현종(玄宗)은 매우 슬퍼하며,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추증하였다. 형도(邢璹)를 홍려소경(鴻臚少卿)에 임명하여 [신라(新羅)에 가서] 조제(弔祭)하고, 아들 승경(承慶)이 왕위(王位)를 세습토록 하였다. [형(邢)]도(璹)에게, “신라(新羅)는 군자(君子)의 나라로 불리며, 『시경(詩經)』·『서경(書經)』을 안다. 경(卿)은 신실한 선비이기 때문에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는 것이니, 마땅히 경전(經典)의 뜻을 잘 펴서 대국(大國)의 융성함을 알려 주도록 하라.” 는 조명(詔命)을 내렸다. 또 그 나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 하여 조서를 내려 솔부병조참군(率府兵曹參軍) 양계응(楊季鷹)을 부사(副使)로 삼아 보냈다. 그 나라의 바둑은 수가 높다는 자도 계응(季鷹)보다는 한수 아래였다. 그리하여 사자(使者)에게 많은 금보(金寶)를 주어 보냈다. 얼마 안있어 그의 아내 박씨(朴氏)를 책봉하여 왕비(王妃)로 삼았다. 승경(承慶)이 죽으니, 조서를 내려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그의 아우 헌영(憲英)을 왕(王)으로 삼았다. [이때에] 현종(玄宗)은 촉(蜀)에 가 있었는데, [양자(揚子)]강(江)을 건너 성도(成都)에 사신(使臣)을 보내 하정례(賀正禮)에 참가하였다.
14) ○ 대력(大曆)(A.D.766~779; 新羅 惠恭王 2~15)초에 헌영(憲英)이 죽었다. 아들 건운(乾運)이 왕위(王位)에 올랐으나, 아직 어리므로 김은거(金隱居)을 보내 입조(入朝)하여 책명(冊命)을 기다렸다. 조서(詔書)를 내려 창부랑중(倉部郞中) 귀숭경(歸崇敬)을 보내어 조상(弔喪)을 하는 한편, 감찰어사(監察御史) 육정(陸珽)과 고음(顧愔)을 부사(副使)로 보내어 왕(王)으로 책봉하여 주고, 아울러 어머니 김씨(金氏)를 태비(太妃)로 삼았다. 이 무렵 재상(宰相)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 서로 공격하여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는데, 3년만에 비로소 안정되었다. 이 해에 내조(來朝)하여 공물(貢物)을 바쳤다. 건중(建中) 4년(A.D.783; 新羅 宣德王 4)에 [건운(乾運)이] 죽었다. 아들이 없자, 국인(國人)들이 함께 재상(宰相) 김양상(金良相)을 세워 [왕위(王位)를] 계승시켰다.[註035]
15) ○ 정원(貞元) 원년(A.D.785; 新羅 元聖王 1)에 호부낭중(戶部郞中) 개훈(蓋塤)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어 양상(良相)을 [왕(王)으로] 책봉(冊封)하였다. 이 해에 [양상(良相)이] 죽으니, 양상(良相)의 종부제(從父弟)인 경신(敬信)을 세워 왕위(王位)를 계승시켰다.[註036] [정원(貞元)] 14년(A.D.798; 新羅 元聖王 14)에 [경신(敬信)이] 죽었다. 아들이 없자, 맏손자 준옹(俊邕)을 [왕(王)으로] 세웠다. 이듬해에 사봉랑중(司封郞中) 위단(韋丹)에게 책명(冊命)을 주어보냈는데, 도착하기 전에 준옹(俊邕)이 죽자, 단(丹)이 그냥 돌아 왔다. 아들 중흥(重興)이 [왕위(王位)에] 오르니, 영정(永貞) 원년(A.D.805; 新羅 哀莊王 6)에 조서를 내려 병부랑중(兵部郞中) 원계방(元季方)에게 책명(冊命)을 주어 보냈다. 그 3년 뒤에 사자(使者) 김력기(金力奇)가 와서 사례를 하고 말하기를, “몇 해 전에 고주(故主) 준옹(俊邕)으로 왕(王)을 삼고, 어머니 신씨(申氏)로 태비(太妃)를 삼고, 아내 숙씨(叔氏)로 비(妃)를 삼아 주셨으나, 준옹(俊邕)이 죽어 그 책문(冊文)은 지금 [중서(中書)]성(省) 안에 있습니다. 신이 바라옵건대 [그 책문(冊文)을] 주셔서 [가지고]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또 재상(宰相) 김언승(金彥昇)· 김중공(金仲恭)과 왕(王)의 아우 소금첨명(蘇金添明)의 문극(門㦸)을 요청함으로, 조서(詔書)를 내려 [이를] 다 들어 주었다. 그리고 재차 조공(朝貢)을 바쳤다.
16) ○ [원화(元和)] 7년(A.D.812; 新羅 憲德王 4)에 [중흥(重興)이] 죽고 언승(彥昇)이 [왕위(王位)에] 올라 상(喪)을 알려 왔다.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 최정(崔廷)을 보내어 조문(弔問)하는 한편 또 신왕(新王)을 책봉(冊封)하고 아내 정씨(貞氏)를 비(妃)로 삼았다. 장경(長慶)(A.D.821~824; 新羅 憲德王 13~16)· 보력(寶曆) 연간(A.D.825~826; 新羅 憲德王 17~興德王 1)에 두 번에 걸쳐 사자(使者)를 보내어 내조(來朝)하고 숙위(宿衛)하며 머물렀다.[註037] 언승(彥昇)이 죽고 아들 경휘(景徽)가 [왕위(王位)에] 올랐다. 대화(大和) 5년(A.D.831; 新羅 興德王 6)에 태자좌유덕(太子左諭德) 원적(源寂)으로 책봉(冊封)· 조문(弔問)을 예의(禮儀)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개성(開成)(A.D.836~840; 新羅 僖康王 1~文聖王 2)초에 아들 의종(義琮)을 보내어 사례하고 숙위(宿衛)를 원하므로 들어 주었다. 이듬해에 돌려 보냈다. [개성(開成)] 5년(A.D.840; 新羅 文聖王 2)에 홍려사(鴻臚寺)에 적(籍)을 둔 질자(質子)와 유학을 온 학생으로서 연한이 찬 사람 1백 5명을 모두 돌려 보냈다.
17) ○ 장보고(張保皐)[註038]· 정년(鄭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모두 싸움을 잘 하며 특히 창을 잘 쓴다. [정(鄭)]년(年)은 또 능히 바닷물 속에 잠겨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막히지 않으며, 용맹스럽고 굳건한 것은 보고(保皐)도 따르지 못한다. 연(年)은 보고(保皐)를 형(兄)이라 부르는데, 보고(保皐)는 나이를 내세우고 연(年)은 재주를 내세워 늘 서로 뒤지지 않으려 하였다. [두 사람이] 다 신라(新羅)에서 들어와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小將)이 되었다. 나중에 보고(保皐)는 신라(新羅)로 돌아가서 그 나라 왕을 알현하여, “온 중국(中國)이 신라(新羅) 사람으로 노비(奴婢)를 삼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데 청해(淸海)에 진(鎭)을 설치하여 해적(海賊)이 서방(西方)으로 사람을 사로 잡아가는 것을 막으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청해(淸海)는 해로(海路)의 요충지(要衝地)이다. 왕(王)은 보고(保皐)에게 군사 1만명을 주어서 지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화(大和)(A.D.827~835; 新羅 興德王 2~10)이후로는 해상(海上)에서 신라(新羅) 사람을 사고 파는 자가 없어졌다.
18) ○ [장(張)]보고(保皐)는 본국에서 부귀(富貴)를 누리고 있었으나 [정(鄭)]년(年)은 연수(漣水)에서 나그네로 궁색스럽게 살고 있었다. 하루는 수주(戍主) 풍원규(馮元規)에게, “나는 신라(新羅)로 돌아가 장보고(張保皐)에게 걸식(乞食)을 할까 하오.” 하였다. 원규(元規)가, “당신이 보고(保皐)를 저버린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찌하여 그의 손에 죽으려 하는가?” 하자, 연(年)은, “기한(飢寒)으로 죽는 것보다는 통쾌하게 싸우고 죽는 것이 낫다. 더구나 고향에 돌아가서 죽음에랴!” 하였다. 연(年)은 드디어 길을 떠났다. [정년(鄭年)이 청해(淸海)에] 이르러 [장(張)]보고(保皐)를 만나자, 보고(保皐)는 주연을 베풀고 극진히 환대하였다. 술자리를 채 마치기도 전에, 대신(大臣)이 왕(王)을 죽여서 나라는 어지럽고 왕(王)은 없는 [상황이라는 소식이] 들려 왔다. 보고(保皐)는 군사 5천명을 연(年)에게 나누어 주며, 연(年)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네가 아니고는 화난(禍難)을 평정할 수 없을 것일세.” 하고 말하였다. 연(年)은 그 나라에 이르러 반란자를 죽이고, 왕(王)을 세워 [은혜에] 보답하였다. 왕(王)은 드디어 보고(保皐)를 불러 들여 상(相)으로 삼고, 연(年)에게 [보고(保皐)를] 대신하여 청해(淸海)[진(鎭)]을 지키게 하였다. 회창(會昌) 연간(A.D.841~846; 新羅 文聖王 3~8)이후로 다시는 조공(朝貢)이 들어오지 않았다.
4. 찬자평(撰者評) ○ 찬(贊)한다.
두목(杜牧)이 이런 말을 하였다. “안사순(安思順)이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로 있을 적에 곽분양(郭汾陽)과 이임회(李臨淮)가 함께 그 아문(牙門)의 도장(都將)으로 있었다. 두사람은 서로 만만치 않아서 같은 밥상의 음식을 먹으면서도 늘 눈을 흘겨 보고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사이었다. [곽(郭)]분양(汾陽)이 [안(安)]사순(思順)을 대신하게 되자, [이(李)]임회(臨淮)는 도망갈까 망설이며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 열흘 뒤, 임회(臨淮)에게 분양(汾陽)의 군사를 반으로 나누어 동쪽 월(越)· 위(魏)로 떠나라는 조명(詔命)이 내려졌다. 임회(臨淮)가 [분양(汾陽)에게] 들어가서 ‘이 한몸의 죽음은 달게 받겠으나, 처자(妻子)만은 살려주오’ 하고 청하였다. 분양(汾陽)은 당하(堂下)로 쫓아 내려와 손을 잡고 당상(堂上)으로 올라가서, ‘지금 나라가 어지러워 주상(主上)이 파천(播遷)하고 있으니, 공(公)이 아니고는 동쪽을 토벌할 수가 없소. 어찌 사분(私忿)을 품고 있을 때이겠소’ 하였다. 길을 떠날 적에 손을 잡고 울면서 서로 충의(忠義)를 다짐하였다. 극렬하던 반란자를 끝내 평정한 것은 실로 두 사람의 힘이었다. 그 마음이 배반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 그 마음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요, 울분을 품으면 반드시 단점을 보기 마련인 데도, 그가 인재임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장(張)]보고(保皐)와 [곽(郭)]분양(汾陽)의 훌륭함이 동등하다. [정(鄭)]년(年)이 [장(張)]보고(保皐)를 찾아갈 적에는 반드시, ‘저는 귀하고 나는 천하니, 내가 항복을 한다면 지난날의 분(忿)만으로 해서 나를 죽이지는 않으리라’고 여겼다. 과연 보고(保皐)가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에서요, [이(李)]임회(臨淮)가 [곽(郭)]분양(汾陽)에게 죽음을 청한 것도 사람의 상정(常情)에서이다. [장(張)]보고(保皐)가 [정(鄭)]년(年)을 신임한 것은 자신의 생각에서 나왔고, [정(鄭)]년(年)도 기한(飢寒)에 시달려서 감동되기가 쉬웠다. [곽(郭)]분양(汾陽)과 [이(李)]임회(臨淮)는 평생 대립 상태였고, 임회(臨淮)를 내보내려는 지시는 천자(天子)에게서 나왔다. 보고(保皐)와 비교해 볼 때 분양(汾陽)이 더 훌륭하다. 이것이 바로 성현(聖賢)도 결정짓기 어려운 성패(成敗)의 갈림길이다. 세상에서 주공(周公)과 소공(邵公)을 일컬어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하나, 주공(周公)이 어린 아이를 옹립할 적에 소공(邵公)은 그를 의심하였다. 주공(周公)과 소공(邵公)은 같은 성현(聖賢)으로서 젊어서는 문왕(文王)을 섬기고 늙어서는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능히 천하(天下)를 태평케 하였으나, 그래도 소공(邵公)은 주공(周公)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 참으로 인의(仁義)의 마음이 있다 하여도 뚜렷이 드러내지 못하면 소공(邵公)과 같은 이도 오히려 의심을 품게 된다. 하물며 그 아래의 사람에게 있어서랴!” 아! 원한이 있어도 서로 봉공(奉公)함을 저해하지 않고, 국가의 근심을 앞세운 이로는 진(晋)나라 때는 기해(祁奚)가 있었고, 당(唐)나라 때에는 [곽(郭)]분양(汾陽)과 [장(張)]보고(保皐)가 있으니, 누가 이국(夷國)에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 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
'조선전, 동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 구오대사[舊五代史] 외국열전(外國列傳) (0) | 2012.02.06 |
---|---|
17. 신당서[新唐書] 북적열전(北狄列傳) (0) | 2012.02.06 |
15. 구당서[舊唐書] 북적열전(北狄列傳) (0) | 2012.02.06 |
14.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0) | 2012.01.29 |
13.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 (0) | 2012.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