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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구당서[舊唐書] 북적열전(北狄列傳)
차 례
1. 말갈(靺鞨) 2. 발해말갈(渤海靺鞨) 3. 찬자평(撰者評)
구당서(舊唐書)(2) 卷 199 북적열전(北狄列傳) 第 149 북적열전(北狄列傳)[註001]
1. 말갈(靺鞨)[註002]
1) ○ 말갈(靺鞨)은 곧 숙신(肅愼)의 땅이니, 후위(後魏)때에는 이를 물길(勿吉)이라 하였다.[註003] 경사(京師)에서 동북으로 6천여리 밖에 있다.[註004]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突厥)과 접하며, 남쪽은 고려(高[구,句]麗)와 경계하고, 북쪽은 실위(室韋)와 인접해 있다.[註005] 그 나라는 모두 수십부(部)나 되는데, 각각 추수(酋帥)가 있어 더러는 고려(高[구,句]麗)에 부용(附庸)되어 있고, 더러는 돌궐(突厥)에 신속(臣屬)되어 있다.[註006] 그런데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가장 북방에 있으면서 제일 강성하여 늘 그 용맹을 과시하므로 항상 이웃 부족의 걱정거리가 되었다.[註007]
2) ○ 풍속(風俗)은 모두 머리를 땋는다. 성격이 사나워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없으며, 젊은 자는 귀(貴)하게 여기고 늙은 자는 천시(賤視)한다.[註008] 집이 없고 모두 산간이나 물가에 의지하여 움을 파고 그 위에 나무를 걸쳐서 흙으로 덮는데, 모양은 마치 중국(中國)의 무덤과 같으며, 한곳에 모여서 산다. 여름에는 수초(水草)를 따라 나오고, 겨울에는 움 속으로 들어가 산다.[註009]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군장(君長)을 세습한다.[註010] 습속(習俗)에 문자(文字)가 없다.[註011] 병기(兵器)로는 각궁(角弓) 및 고시(楛矢)가 있다.[註012] 가축은 돼지가 많아 부유한 집은 수백마리가 되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지어 입는다.[註013] 죽은 자는 땅을 파고 묻는데, 시신(屍身)을 그대로 흙에 묻으므로 관렴(棺斂)의 도구가 없으며, 그가 타던 말을 잡아서 주검 앞에 놓고 제사한다.[註014]
3) ○ 추수(酋帥)인 돌지계(突地稽)라는 자가 수말(隋末)에 그 부족(部族) 1천여명을 거느리고 내속(內屬)해오니, 영주(營州)에 거주시키고 양제(煬帝)는 돌지계(突地稽)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요서태수(遼西太守)로 삼았다.[註015] 무덕(武德)(A.D.618~626; 高句麗 榮留王 1~9)초에 밀사(密使)를 파견하여 조공(朝貢)을 바치니, 그 부락(部落)에 연주(燕州)를 설치하고 돌지계(突地稽)로 총관(總管)을 삼았다. 유흑달(劉黑闥)[註016]의 반란에 돌지계(突地稽)가 그의 부족을 이끌고 정주(定州) [註017]에 와서 태종(太宗)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와 절도(節度) 벼슬을 청하니, 전공(戰功)의 보답으로 시국공(蓍國公)에 봉하였다. 또 그 부락(部落)을 유주(幽州)의 창평성(昌平城)[註018]으로 옮겼다. 마침 고개도(高開道)[註019]가 돌궐(突厥)[병(兵)]을 이끌고 와서 유주(幽州)를 공격하므로, 돌지계(突地稽)가 군병을 거느리고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4) ○ 정관(貞觀)(A.D.627~649; 高句麗 營留王 10~寶藏王 8)초에 우위장군(右衛將軍)을 제수(除授)하고 이씨(李氏)의 성(姓)을 내렸다. 얼마 아니되어 [돌지계(突地稽)가] 죽었다. 아들 근행(謹行)이 [뒤를 이어 받으니,] 위모(偉貌)와 무력(武力)이 남보다 뛰어났다. 인덕(麟德) 연간(A.D.664~665; 高句麗 寶藏王 23~24)에 영주도독(營州都督)[註020]으로 옮겼다. 그 부락(部落)의 가동(家僮)이 수천이나 되고 재력(財力)이 변방에서 가장 좋아 오랑캐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여러번의 승진으로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에 배수(拜授)되고, 적석도경략대사(積石道經略大使)[註021]가 되었다. 토번(吐蕃)의 논흠릉(論欽陵)[註 022] 등이 무리 십만명을 거느리고 황중(湟中)[註023]에 침입하였을 적에는 근행(謹行)의 병사(兵士)는 땔나무를 모으고 있어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으나, 갑자기 적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깃발을 꽂고 북을 울리며 성문(城門)을 열어 놓고 기다렸다. 토번(吐蕃)의 [군대는] 복병(伏兵)이 있을 것으로 의심을 하여 마침내 진입하지 못하였다.
5) ○ 상원(上元) 3년(A.D.676; 新羅 文武王 16) 에 또 토번(吐蕃)의 수만무리를 청해(靑海)에서 무찌르니, [고종(高宗)은] 새서(璽書)를 내려 격려해 주었다. 거듭해서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행우위대장군(行右衛大將軍)을 제수(除授)하여 연국공(燕國公)에 봉하였다. 영순(永淳) 원년(A.D. 682; 新羅 神文王 2)에 죽으니, 유주도독(幽州都督)을 추증하고 건릉(乾陵)에 배장(陪葬)하였다. 그 뒤로부터 더러는 추장이 직접 오고 더러는 사신(使臣)을 보내와서 조공(朝貢)을 바쳤는데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6)○ 그 가운데 백산부(白山部)는 본래 고려(高[구,句]麗)에 부용(附庸)되었는데,[註024] 평양(平壤)[성(城)]이 함락된 뒤에 많은 무리들이 중국(中國)으로 들어 왔다. 골돌(汨咄)·안거골(安居骨)· 호실(號室) 등의 부족(部族)도 고려(高[구,句]麗)가 함락된 뒤로는 뿔뿔이 흩어지고 미약하여져 뒤에는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註025] 더러는 [고구려의] 유민(遺民)과 함께 발해(渤海)에 편입되었다. 오직 흑수부(黑水部)만이 강성하여 [땅을] 16부(部)로 나누고, 또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구분하여 일컬었다.[註026]
7)○ 개원(開元) 13년(A.D.725; 新羅 聖德王 24)에 안동도호(安東都護) 설태(薛泰)가 흑수말갈(黑水靺鞨)안에 흑수군(黑水軍)을 두자고 청하였다. 이를 변경하여 가장 큰 부락으로 흑수부(黑水府)를 삼고 그 추장(酋長)으로 도독(都督)을 삼아 다른 여러 부(部)의 자사(刺史)를 예속시켰다. 중국(中國)에서는 장사(長史)를 두어 그 부락(部落)들을 감령(監領)케 하였다. [개원(開元)] 16년(A.D.728; 新羅 聖德王 27)에 그 도독(都督)에게 이씨(李氏)의 성(姓)과 헌성(獻誠)이라는 이름을 내리는 한편,[註 027] 운휘장군(雲麾將軍) 겸흑수경략사(兼黑水經畧使)를 제수(除授)하고, 이어서 유주도독(幽州都督)을 그의 압사(押使)로 삼았다. 이로부터 조공(朝貢)이 끊이지 않았다.[註028]
2. 발해말갈(渤海靺鞨)[註001]
1)○ 발해(渤海)[註002]말갈(靺鞨)[註003]의 대조영(大祚榮)[註004]은 본래 고려(高[구,句]麗)의 별종(別種)[註005]이다. 고려(高[구,句]麗)가 멸망하자 조영(祚榮)은 가속(家屬)을 이끌고 영주(營州)[註006]로 옮겨와 살았다. 만세통천(萬世通天) 연간(A.D.696; 新羅 孝昭王 5)에 거란(契丹)[註007]의 이진충(李盡忠)[註008]이 반란을 일으키니, 조영(祚榮)은 말갈(靺鞨)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각 [그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망명하여 요해지(要害地)를 차지하여 수비를 굳혔다. 진충(盡忠)이 죽자, 측천(則天)[무후(武后)][註009]가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여당(餘黨)을 토벌케 하니, [해고(楷固)는] 먼저 걸사비우(乞四比羽)를 무찔러 베고, 또 천문령(天門嶺)[註010]을 넘어 조영(祚榮)을 바짝 뒤쫓았다. 조영(祚榮)이 고려(高[구,句]麗)·말갈(靺鞨)의 무리를 연합하여 해고(楷固)에게 항거하자, 왕사(王師)는 크게 패하고 해고(楷固)만 탈출하여 돌아왔다. [이때] 마침 거란(契丹)과 해(奚)[註011]가 모두 돌궐(突厥)[註012]에게 항복을 하므로 길이 막혀서 측천(則天)[무후(武后)]는 [그들을] 토벌할 수 없게 되었다. 조영(祚榮)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가서 계루(桂婁)[부(部)]의 옛 땅[註013]을 차지하고, 동모산(東牟山)[註014]에 웅거하여 성(城)을 쌓고 살았다.
2)○ 조영(祚榮)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用兵)을 잘 하자, 말갈(靺鞨)의 무리 및 고려(高[구,句]麗)의 여당(餘黨)이 점점 모여 들었다. 성력(聖曆) 연간(A.D.698~699; 新羅 孝昭王 7~渤海 高王 1)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註015]에 올라 돌궐(突厥)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통교(通交)하였다. 그 땅은 영주(營州) 동쪽 2천리 밖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新羅)와 서로 접하고 있다. 월희말갈(越憙靺鞨)[註016]에서 동북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註017]에 이르는데, 사방이 2천리이며, 편호(編戶)는 십여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명이다. 풍속은 고려(高[구,句]麗) 및 거란(契丹)과 같고, 문자(文字) 및 전적(典籍)도 상당히 있다.
3)○ 중종(中宗)[註018]이 즉위하여,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을 보내어 초위(招慰)하니, 조영(祚榮)이 아들을 보내어 입시(入侍)시켰다. 이때 책립(册立)을 하려 하는데, 마침 거란(契丹)과 돌궐(突厥)이 해마다 변경을 침입하므로 사명(使命)이 전달되지 않았다. 예종(睿宗) 선천(先天) 2년(A.D.713; 渤海 高王 15)에[註019] 낭장(郎將) 최흔(崔訢)을 보내어[註020] 조영(祚榮)을 책봉하여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고, 아울러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註 021]로 삼아서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직(職)을 더 주었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4)○ 개원(開元) 7년(A.D.719; 渤海 武王 1)에 조영(祚榮)이 죽으니, 현종(玄宗)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이어서 그의 적자(嫡子) 계루군왕(桂婁郡王) 대무예(大武藝)를 책립(冊立)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註022] 발해군왕(渤海郡王)[註023]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삼았다.
5)○ [개원(開元)] 14년(A.D.726; 渤海 武王 8)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공(朝貢)하므로 [현종(玄宗)은] 조칙(詔敕)으로 그 땅을 흑수주(黑水州)로 삼아 장사(長史)를 두고, 사신을 보내어 진압(鎭押)케 하였다. 무예(武藝)가 부하들에게, “흑수(黑水)가 우리 국경을 거쳐서 처음으로 당(唐)과 서로 통하였다. 지난날 돌궐(突厥)에게 토둔(吐屯)[註024]을 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리고 함께 갔었다. 이제 뜻밖에 바로 당(唐)에게 벼슬을 청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당(唐)과 공모를 하여 앞뒤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친아우 대문예(大門藝) 및 그의 구(舅) 임아(任雅)를 시켜 군대를 이끌고 가서 흑수(黑水)를 치게 하였다. 문예(門藝)는 일찍이 볼모로 경사(京師)에 왔다가 개원(開元)(A.D.713~741; 渤海 高王 15~文王 5) 초년에 본국에 돌아갔으므로, 이 때 무예(武藝)에게, “흑수(黑水)가 당(唐)의 벼슬을 청하였다 하여 그를 바로 치고자 한다면 이는 당(唐)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당(唐)은 사람의 많음과 군사의 강함이 우리의 1만배가 되는데, 하루아침에 원수를 맺는다면 스스로 멸망을 부를 뿐입니다. 지난날 고려(高[구,句]麗)가 전성(全盛)할 적에 강병(强兵) 30만으로 당(唐)과 맞서서 복종을 하지 않다가, 당병(唐兵)이 한번 덮치매 땅을 쓴듯이 다 멸망하였습니다. 오늘날 발해(渤海)의 인구가 고려(高[구,句]麗)의 몇분의 일도 못되는데, 그래도 당(唐)을 저버리려 하니, 이 일은 결단코 옳지 못합니다.”하였으나, 무예(武藝)는 듣지 않았다.
6)○ 문예(門藝)의 군사가 국경에 이르렀을 적에 또 글을 올려 굳이 간하자, 무예(武藝)는 화를 내어 종형(從兄)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문예(門藝)를 대신하여 군사를 통괄하게 하고, 문예(門藝)는 불러다 죽이려 하였다. 문예(門藝)가 마침내 그의 무리를 버리고 사잇길로 도망쳐 오니, [현종(玄宗)은] 조칙(詔敕)으로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을 제수(除授)하였다. 얼마후 무예(武藝)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치고, 이어서 표문(表文)을 올려 문예(門藝)의 죄상을 극력 말하고 죽여 주기를 청하였다. 현종(玄宗)은 몰래 문예(門藝)를 안서(安西)[註025]로 보내고 무예(武藝)에게는, “문예(門藝)가 먼 곳에서 귀순해 왔으므로 의리상 죽일 수가 없었소. 이제 영남(嶺南)[註026]으로 유배(流配)하였는데 벌써 길을 떠났오.”라고 회보하는데, 그의 사신(使臣) 마문궤(馬文軌)와 총물아(葱勿雅)는 머물러 있게 하고, 따로 사신(使臣)을 파견하여 회보케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곧 누설한 자가 있어서 무예(武藝)는 또 글을 올려, “대국(大國)은 남에게 신의(信義)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거짓을 일삼는단 말입니까? 이제 들으니, 문예(門藝)가 영남(嶺南)으로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앞서 청한대로 죽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홍려소경(鴻驢少卿)[註027] 이도수(李道邃)와 원복(源復)은 관속(官屬)을 독찰(督察)하지 못하여 일을 누설시킨 죄로, 도수(道邃)는 조주자사(曹州刺史)로 좌천되고 복(復)은 택주자사(澤州刺史)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문예(門藝)를 잠시 영남(嶺南)으로 보내고서 [무예(武藝)에게] 회보하였다.
7)○ [개원(開元)] 20년(A.D.732; 渤海 武王 14)에 무예(武藝)가 그의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해적(海賊)을 거느리고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공격하였다. [현종(玄宗)은] 문예(門藝)를 파견하여 유주(幽州)에 가서 군사를 징발하여 이를 토벌케 하는 동시에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註028]을 시켜 신라(新羅)에 가서 병(兵)을 징발하여 발해(渤海)의 남경(南境)을 치게 하였다.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 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으니, 전공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왔다. 무예(武藝)가 원한을 풀지 못하여 몰래 동도(東都)[註029]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자객(刺客)을 빌어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문예(門藝)를 저격케 하였으나, 문예(門藝)는 자객(刺客)들을 물리쳐서 죽지 않았다. [현종(玄宗)은] 하남부(河南府)에 명하여 그 적(賊)들을 모두 잡아다 죽였다.
8)○ [개원(開元)] 25년(A.D.737; 渤海 文王 1)에 무예(武藝)가 병으로 죽으니, 그의 아들 흠무(欽茂)가 왕위(王位)에 올랐다. [현종(玄宗)은] 내시(內侍) 단수간(段守簡)을 보내어 흠무(欽茂)를 책봉하여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는 동시에 그의 아버지를 뒤이어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삼았다. 흠무(欽茂)는 조명(詔命)을 받들고 경내(境內)에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한편, 수간(守簡)의 편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入朝)하고 공헌(貢獻)하였다.
9)○ 대력(大曆) 2년(A.D.767; 渤海 文王 31)에서 10년(A.D.775; 渤海 文王 39)에 이르기까지 혹은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공(朝貢)하고, 혹은 해를 걸러 오기도 하였으며, 한해에 두 세번 오기도 하였다. [대력(大曆)] 12년(A.D.777; 渤海 文王 41) 1월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일본국(日本國)의 무녀(舞女) 11명 및 방물(方物)을 바쳤다.[註030] 4월과 12월에 사신(使臣)이 다시 왔다. 건중(建中) 3년(A.D.782; 渤海 文王 46) 5월과 정원(貞元) 7년(A.D.791; 渤海 文王 55) 1월에도 모두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근(朝覲)하니, 그 사신(使臣) 대상정(大常靖)을 위위경동정(衛尉卿同正)[註031]에 제수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8월에 그의 왕자(王子) 대정한(大貞翰)이 내조(來朝)하여 숙위(宿衛)할 것을 청하였다.
10)○ [정원(貞元)] 10년(A.D.794; 渤海 成王 2) 1월에 내조(來朝)한 왕자(王子) 대청윤(大淸允)을 우위장군(右衛將軍)[註032] 동정(同正)으로 삼고, 그 아래 30여명에게도 차등을 두어 벼슬을 주었다. [정원(貞元)] 11년(A.D.795; 渤海 康王 1) 2월에 내상시(內常侍)[註033] 은지섬(殷志贍)을 보내어 대숭린(大嵩璘)[註034]을 책봉하여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다.
11)○ [정원(貞元)] 14년(A.D.798; 渤海 康王 4)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註035] 검교사공(檢校司空)[註036]을 가수(加授)하고,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진봉(進封)하였다. 숭린(嵩璘)의 아버지 흠무(欽茂)는 개원(開元) 연간(A.D.713~741; 渤海 高王 15~文王 5)에 아버지 위(位)를 세습하여 군왕(郡王) 및 좌금오대장군(左金吾大將軍)[註037]이 되고, 천보(天寶) 연간(A.D.742~755; 渤海 文王 6~19)에는 누차에 걸쳐 특진(特進)[註038] 태자첨사 (太子詹事) 빈객(賓客)[註039]이 가수(加授)되었으며, 보응(寶應) 원년(A.D.762; 渤海 文王 26)에 국왕(國王)에 진봉(進封)되고, 대력(大曆) 연간 (A.D.766~779; 渤海 文王 30~43)에는 계속하여 사공(司空) 태위(太尉)[註040]를 더 제배(除拜)하였다. 숭린(嵩璘)이 습위(襲位)할 적에 다만 군왕(郡王)과 장군(將軍)만을 제수(除授)하자, 숭린(嵩璘)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도리상 [그럴 수 없음을] 피력하므로, 다시 책명(冊命)을 더 내렸다. 11월에 왕(王)의 조카 대능신(大能信)을 좌효위중랑장(左驍衛中郞將)[註041] 노후(虜侯) 누번장(婁蕃長)으로 삼고, 도독(都督) 여부구(茹富仇)를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註042]으로 삼아 방환(放還)하였다. [정원(貞元)] 21년(A.D.805; 渤海 康王 11)에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 순종(順宗)은 숭린(嵩璘)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註043] 검교사공(檢校司空)을 가수(加授)하였다.
12)○ 원화(元和) 원년(A.D.806; 渤海 康王 12) 10월에 검교태위(檢校太尉)로 더 올려 주었다. 12월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원화(元和)] 4년(A.D.809; 渤海 定王 1) 숭린(嵩璘)의 아들 원유(元瑜)[註044]를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비서감(檢校秘書監)[註045]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삼고, 종전대로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삼았다. [원화(元和)] 5년(A.D.810; 渤海 定王 2)에 두 번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다. [원화(元和)] 7년(A.D.812; 渤海 定王 4)에 또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공(朝貢)을 바쳤다. [원화(元和)] 8년(A.D.813; 渤海 僖王 1) 1월에 원유(元瑜)의 아우 권지국무(權知國務)[註046] 언의(言義)[註047]를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비서감(檢校秘書監) 도독 (都督) 발해국왕(渤海國王)에 제수(除授)하였는데, 내시(內侍) 이중민(李重旻)을 책봉사(冊封使)로 파견하였다. [원화(元和)] 13년(A.D.818; 渤海 宣王 1)에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공(朝貢)하고, 또 [언의(言義)의] 죽음을 알렸다. 5월에 지국무(知國務) 대인수(大仁秀)[註048]를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비서감(檢校秘書監) 도독(都督)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삼았다. [원화(元和)] 15년(A.D.820; 渤海 宣王 3) 윤정월(閏正月)에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공(朝貢)을 바치니, 대인수(大仁秀)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사공(檢校司空)을 가수(加授)하였다. 12월에 다시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공(朝貢)을 바쳤다.
13)○ 장경(長慶) 2년(A.D.822; 渤海 宣王 5) 1월에 사신(使臣)을 보내 왔다. 4년(A.D.824; 渤海 宣王 7) 2월에 대예(大叡) 등 다섯사람이 내조(來朝)하여 숙위(宿衛)할 것을 청하였다. 보력(寶曆) 연간(A.D.825~826; 渤海 宣王 8~9)에는 해마다 조공(朝貢)하였다.
14)○ 대화(大和) 원년(A.D.827; 渤海 宣王 10)·4년(A.D.830; 渤海 彝震 1)에도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공(朝貢)을 바쳤다. [대화(大和)] 5년(A.D.831; 渤海 彝震 2)에 대인수(大仁秀)가 죽으니, 권지국무(權知國務) 대이진(大彝震)[註049]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비서감(檢校秘書監) 도독(都督)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삼았다. [대화(大和)] 6년(A.D.832; 渤海 彝震 3)에 왕자(王子) 대명준(大明俊) 등을 파견하여 내조(來朝)하였다. [대화(大和)] 7년(A.D.833; 渤海 彝震 4) 1월에 동중서우평장사(同中書右平章事)[註050] 고보영(高寶英)을 보내와 책명(冊命)을 사례하고, 이어서 학생(學生) 세사람을 보영(寶英)의 편에 보내와 상도(上都)에 가서 공부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때] 먼저 보내온 학생(學生) 세사람이 공부가 거의 이루어져서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므로 허락해 주었다. 2월에 왕자(王子) 대선성(大先晟) 등 여섯사람이 내조(來朝)하였다. 개성(開成)(A.D.836~840; 渤海 彝震 7~11) 이후에도 중단없이 직공(職貢)을 닦았다.
3. 찬자평(撰者評) ○ 사신(史臣)은 말한다.
북적(北狄)은 중국(中國)과 아주 가까워서 변방 침입이 예로부터 있어 왔다. 동이(東夷)는 영해(瀛海)[註051] 밖에 떨어져 있어서 분경(紛梗)을 일으켰다는 것은 듣기 드문 일이다. 이는 형세상 그러할 뿐만 아니라 아마 타고난 성격도 그러한 듯 하다. 태평지(太平地)의 사람은 어질고 공동산(空峒山)[註052]의 사람은 억세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수(隋) 양제(煬帝)가 만족을 모르는 끝없는 욕망으로 요좌(遼左)[註053]에 군사를 일으킬 적에 터질 듯한 욕망을 단번에 채우려는 야심이 여기에서 발단되었다. 그러나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들에게 구실을 주게 되어 스스로 제 몸을 불사르고 드디어는 나라까지 망치고 말았다. 우리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친히 융차(戎車)를 몰고 동으로 고려(高[구,句]麗)를 정벌한 것도 성공은 하였으나 잃은 바가 또한 많았다. 개선하여 돌아오던 날에 좌우(左右)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짐(朕)에게 위징(魏徵)[註054]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번의 정행(征行)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태종(太宗)도] 출사(出師)를 후회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찌하여서일까? 이적(夷狄)의 나라란 돌밭과 같아서 얻어도 보탬이 안되고, 잃어버린들 무엇이 손상될 것인가? 반드시 허명(虛名)을 힘써 추구하므로 [단지] 수고로움에나 쓸모가 있을 뿐이다. 다만 마땅히 문덕(文德)을 닦아서 이를 오게 하고, 성교(聲敎)를 입혀서 이를 복종시키며, 신실한 신하(왕,王)를 가려 이를 무마하고, 변경의 수비를 단속하여 방어해야 된다. 그리고 통역(通譯)을 거쳐서 조정에 오게 하고, 바다를 건너서 들어와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2) ○ 찬(贊)한다. 동이(東夷)의 사람과 북적(北狄)의 풍속은 『주관(周官)』[註055]에 상고하여 보면 바로 ‘만복(蠻服)’[註056]이라 일컬었다. 얻지 않아도 괜찮은데, 얻어서는 무엇하겠는가? 그저 회유(懷柔)에 힘써야 할 뿐이니, 이것을 ‘기속(覊束)’이라 한다. ===================================================================================================================== 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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