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년 (AD 491) : 문자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문자명왕(文咨明王)<또는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하였다.>의 이름은 나운(羅雲)이고 장수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왕자이며 고추대가인 조다(助多)인데,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궁중에서 기르면서 대손(大孫)으로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만에 죽자 이어서 즉위하였다.
1 년 (AD 492) : 3월에 위 효문제가 사신을 보내
[번역문]
원년(492) 봄 3월에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가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으로 임명하고,
의관·복물(服物)·거기(車旗)의 장식을 주었다.
또 왕에게 『세자를 보내 입조케 하라.』고 명하였으나, 왕은 병을 이유로 거절하고,
종숙(從叔)인 승천(升千)을 보내 사신을 따라 입궐하게 하였다.
여름 6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 년 (AD 493) :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번역문]
2년(493)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3 년 (AD 494) : 봄 정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
[번역문]
3년(494) 봄 정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부여왕과 처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왔다.
가을 7월에 우리 군사는 신라 사람들과 살수(薩水) 들판에서 싸웠다.
신라 사람들이 패하고 견아성(犬牙城)을 지키자 우리 군사가 이를 포위하였으나,
백제가 군사 3천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으므로 우리 군사가 후퇴하였다.
제(齊)나라 황제가 왕을 사지절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영평이주(都督營平二州) 정동대장군 낙랑공으로 책봉하였다.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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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문자명왕 원년(492)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가 사신을 보내 문자명왕을 무엇으로 봉했다는 말은
사신을 보내 문자명왕이 왕위에 즉위한 것을 축하한, 축하 사절입니다.
※『원년(492) 봄 3월에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가 사신을 보내,...』이하의 기사는 위서 열전 고구려전에 있는 기사하고,
같은 내용이 있는 자치통감 남북조 제기4 무제 영명 10년(492년) 3월 신사일(25일)조를 섞어서 삼국사기에 전재한 것입니다.
2) 즉위 축하 대가로 세자를 보내달라고 하니 거절하고 종숙(아버지의 사촌 형제. 당숙)을 보냅니다.
위나라는 고구려와 교류를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조공이란 사신을 보내어 물자교류, 물자교역을 한 것입니다.
4) 문자명왕 3년(494) 2월 ‘부여왕과 처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왔다.’고 한 것으로
부여(동남부여)가 완전히 고구려에 들어 온 것입니다.
5) 제나라 황제라는 사람이 고구려 왕을 무엇에 봉했다는 얘기가 또 나오는데, 이때(494년) 제나라는
폐제(廃帝)가 둘씩이나 나오는 등 제나라 황제가 셋이나 바뀌었을 정도로 제나라 자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는데도
이런식으로 말하니, 책봉이라는 것의 실체를 또한번 알 수 있으며,
중국식 허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6) 문자명왕 본기는 5회에 걸쳐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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