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년 (AD 478) :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번역문]
66년(478)에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의 연신(燕信)이 항복해 왔다.
67 년 (AD 479) :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번역문]
67년(479) 봄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8 년 (AD 480) : 남제 태조가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
[번역문]
68년(480) 여름 4월에 남제(南齊)의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이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남제에 조빙하게 하였는데, 위나라 광주(光州)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위나라] 대궐로 보냈다.
위나라 고조가 왕에게 조서를 보내 책망하였다.
『[소]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강남에서 [황제의] 칭호를 도용하였다. 짐은 망한 나라를 옛땅에서 다시 일으켜,
끊긴 대를 유씨(劉氏)에게 잇게 하려 한다. [그런데] 경은 우리 국경을 넘어 외국과 교섭하고, 찬탈한 도적과 멀리 통교하니,
이것이 어찌 번신(蕃臣)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하고 하겠느냐? 이제 한번의 잘못으로 경의 이전의 정성을 덮을 수 없어 사신을 돌려 보내니,
그 용서함에 감사하고 잘못을 새겨 법도를 받들어 지킬 것이며, 그대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동정을 보고하라.』
69 년 (AD 481) : 사신을 남제(南齊)에 보내 조공하였다.
[번역문]
69년(481)에 사신을 남제(南齊)에 보내 조공하였다.
72 년 (AD 484) : 10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번역문]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73 년 (AD 485) :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번역문]
73년(485)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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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책봉의 의미에 대한 증언
『장수왕 68년(480) 여름 4월에 남제(南齊)의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이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남제에 조빙하게 하였는데, .....』 이하의 기사를 보면 책봉의 진실을 또한번 확실히 알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위나라 고조가 하는 말이 “[그런데] 경은 우리 국경을 넘어 외국과 교섭하고, 찬탈한 도적과 멀리 통교하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 책봉이라는 것이 외국과의 교섭과 통교임을 위나라 고조가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제서 동남이열전을 보면
『 [그들은(고구려)] 위(魏) 오랑캐에게도 사신을 보냈지만 세력이 강성하여 [남제(南齊)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라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고구려가 남제의 밑에 있는 국가, 명령을 받는 국가가 아님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즉, 강성한 고구려는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북위와 남제 모두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남제가 제멋대로 ‘책봉’ 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번 말하지만 중국사서에 쓰인 ‘책봉’이란 것의 실체는 ‘외교 관계를 맺었다’입니다.
위에서 말한 남제서 동남이열전을 계속 보면
『[魏]오랑캐는 여러 나라의 사신 관저를 두었는데, 齊나라 사신의 관저를 제일 큰 규모로 하고 고[구]려는 그 다음가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니 고구려와 (남)제가 국력이 대등한데 무슨 남제가 고구려 왕을 책봉한다는 말입니까?
책봉의 실체를 또한번 알수 있는 대목이겠습니다.
또한 남제서 동남이열전을 계속 보면
『 영명(永明) 7년(A.D.489)에 평남참군(平南參軍) 안유명(顔幼明)과 용종복사(冗從僕射) 유사효(劉思斅)가
[위(魏)] 오랑캐에 사신으로 갔더니, 오랑캐의 원회(元會)에서 고[구]려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니
위나라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고구려와 남제의 국력이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남제가 고구려를 신하로 책봉했다는 것이 제 마음대로 한 말이며, 일방적으로 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위 1)에서 『왕은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남제에 조빙하게 하였는데,...』이하의 기사는
위서 열전 고구려전에 있는 것을 삼국사기에 옮겨 쓴 입니다.
3) 위나라 고조가 뭐라고 한 것은 고구려가 제와 위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하니 못 마땅해서 한 소리입니다.
4) 이렇게 480년에 북위의 고조가가 남제로 가는 고구려 사신을 억류하고 남제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해 왔을 때에도
고구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 이듬해 다시 사신을 남제에 보냅니다. 그래도 위나라는 어떻게 할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았을때 위나라에서 책봉 운운 한 것도 제멋대로 한 말이며 아무런 효과도 없는 중국식 허풍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72 년 (AD 484) : 10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이하의 기사는
남제서 동남이열전 3년조를 전재한 것이며 똑같은 내용인 자치통감 남북조 제기2 무제 영명 2년(484년) 겨울 10월조에 있는 것을
전재한 것입니다.
-번역본 제15권 번역 원문:
(고구려 왕 고련이 사신을 파견하여 위에 들어와서 조공하였는데, 또 제에게도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그때 바양흐로 강하여졌으므로
위는 여러 사신의 숙소를 둘 때 제 사신의 것을 첫째로 하고 고구려의 것을 다음으로 하였다.)
오히려 위나라 사람들은 고구려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제나라 다음으로 고구려의 사신을 숙소에 둔 것을 보면
고구려의 위상을 알 수있습니다. 이렇게 고구려의 국력이 제나라와 비슷한데 남제의 소도성이 고구려 왕을 책봉했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며 중국식 허풍이고 제멋대로, 일방적으로 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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