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본기- 5)

상 상 2012. 1. 16. 19:08

54 년 (AD 466) :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번역문]

54년(466) 봄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위나라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의 육궁(六宮)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므로 왕에게 교서를 내려 왕녀를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표를 올려 “딸이 이미 출가하였으니 아우의 딸로써 응하겠습니다.”고 하였다.

[태후가] 허락하고 이에 안락왕(安樂王) 진(眞), 상서 이부(李敷) 등을 보내 국경에까지 폐백을 보내왔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권하여 말하였다.

“위(魏)나라는 예전에 연나라와 혼인하고도 얼마 안 되어 [연나라를] 정벌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신을 통해서 그 나라 지형의 평탄하고 험함을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전례가 멀지 않으니, 적당한 구실로 거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왕은 마침내 글을 올려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핑계하였다.

 

위나라는 그 말이 거짓이라고 의심하고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심히 꾸짖으며

“[아우의] 딸이 참으로 죽었다면, 종실의 딸을 다시 뽑아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만약 천자께서 이전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명령을 받들어 따르겠습니다.”고 하였으나, 마침 현조가 죽자 중지하였다.

 

55 년 (AD 467) :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번역문]

55년(467)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6 년 (AD 468) :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았다.

[번역문]

56년(468) 봄 2월에 왕은 말갈(靺鞨) 군사 1만 명으로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쳐서 빼앗았다.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7 년 (AD 469) :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번역문]

57년(469)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백제군이 남쪽 변경으로 쳐들어 왔다.

 

58 년 (AD 470) :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번역문]

58년(470)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

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장수왕 54년 (AD 466) ‘위나라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이하의 기사는 위서 열전 고구려전에 있는 것을 전재한 것입니다.

(위서 열전을 볼수 있는 곳: 중국정사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2) 장수왕 54년(466년) 북위에서 사돈을 맺자고 높은 왕공과 대신을 보내 국경에까지 예물을 보냅니다만 고구려는 거절합니다.

화북을 통일해서 중국에서는 거대한 강대국 노릇을 하는 북위도 이렇게 예의를 다한 혼담을 거절하는 모욕을 당해도

고구려를 제재하거나 보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강력한 국력을 알수 있으며 북위가 고구려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음을 또한 알 수 있고,

따라서 북위가 고구려 왕을 신하 왕으로 책봉했다는 말은 다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장수왕 56년(468년)에 장수왕은 말갈(靺鞨) 군사 1만 명으로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쳐서 빼앗습니다.

   이것으로 말갈은 고구려가 군사로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장수왕 57년(469년) ‘가을 8월에 백제군이 남쪽 변경으로 쳐들어 왔다.’는 기록은 여전히 남쪽 국경에 말썽이 나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5) 여기서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조공이니 하는 이야기를 중국사서에서 그대로 베껴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간 메꾸기식의 별 의미도 없는 이야기를 중국사서에서 그대로 베껴썼기 때문에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고 욕을 먹는 것이고,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의 산물이라고 매도 당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