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본기- 2)

상 상 2012. 1. 13. 19:07

23 년 (AD 435) : 6월에 왕은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번역문]

23년(435) 여름 6월에 왕은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또 그 나라의 휘(諱)를 [알려줄 것을] 청하였다.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실의 계보와 휘를 적어서 주게 하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삼았다. 가을에 왕은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은하였다.

 

위나라 사람들이 연(燕)나라를 자주 쳤으므로, 연나라가 날로 위급해지게 되자,

연나라 왕 풍홍(馮弘)이 “만약 사태가 급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의지하다가 후에 일어나기를 도모하겠다.”고 하고,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몰래 보내 우리에게 맞이해 줄 것을 청하였다.

 

24 년 (AD 436) : 연나라 왕이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

[번역문]

24년(436)에 연나라 왕이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시자(侍子)를 보내겠다고

청하였으나, 위나라 왕이 허락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토벌하려 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와 [그 뜻을] 통고하였다.

 

여름 4월에 위나라가 연나라의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왕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을 보내 무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으로 가서 연나라 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성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명하여 헤진 옷을 벗게 하고,

연나라의 무기 창고에서 예리한 무기를 가져다가 나누어 주었으며, 성 안을 많이 약탈하였다.

 

5월에 연나라 왕이 용성(龍城)에 거주하는 가호(家戶)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웠는데,

불은 열흘이 되도록 꺼지지 않았다.

부인들은 갑옷을 입고 가운데 있게 하고, 양이 등은 정예군을 통솔하며 바깥에 서게 하고,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대열의 맨 뒤에 섰다.

[그들은] 벌린 대열을 하고 나아갔는데 앞뒤가 80여 리나 되었다.

 

위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보내 연나라 왕을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려서, 마땅히 풍홍과 함께 왕의 가르침을 받들 것이라고 핑계[稱]하였다.

위나라 왕이 명령을 어겼다고 해서 공격할 것을 의논하여, 농우(隴右)의 기병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유결(劉絜)과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간하자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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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23년(435) 여름 6월에 왕은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고,...』이하의 기사는

위서 열전 고구려전 중에서 ‘세조(世祖) 때에 쇠(釗)의 증손...’의 기록 일부와

같은 내용이 있는 자치통감 남북조 송기4 문제 원가 12년(435년) 6월 병오일(20일)조를 전재한 것입니다.-번역서 13권

(여기서 나오는 위나라는 역사에서 북위라고 부르고, 세조는 북위 세조 태무제 탁발도를 말합니다.)

 

2) 위 기록을 보면, 서기 435년에 북위 세조(태무제 탁발도)가 장수왕을 무엇무엇으로 책봉했다는 말도 동진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즉, 북위 왕이 고구려왕을 책봉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북위와 외교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그 증거로 그 아래 기록을 보면 북연왕 풍홍이 고구려로 피난 왔을때

북위왕이 북연왕 풍홍을 북위로 보내라고 했으나 고구려 장수왕은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 장수왕이 북위의 세조가 봉한 왕, 북위 세조의 명령을 받는 왕이 아님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이 일로 북위가 고구려를 공격할 수 없었음을 볼 때

고구려는 북위가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북위의 복속국가, 속국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또한번 고구려 장수왕은 북위의 세조가 봉한 왕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북위의 세조가 장수왕을 무엇 무엇으로 봉했다는 말도 중국식 허풍이며 그 얘기의 진실은 ‘외교관계를 맺었다’입니다.

 

3) 이때 북연 왕이 풍홍으로 바뀌고 있는데 이것의 전말을 보면...

 

서기 409년 10월13일, 이반과 도인이 북연왕 고운(모용운)을 시해하니,

풍발의 부하 이상(李桑)과 장태가 이반과 도인을 다시 죽이고, 무리들이 풍발을 주군으로 추대하여 풍발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자치통감 번역본 12권 진기37 안제 의희 5년(409년) 10월 13일조)

 

이어서, 서기 430년 9월, 무장한 풍홍이 장수와 병사 수십명을 이끌고 병으로 사망 직전의 풍발 궁전에 뛰어들어

궁녀 한명을 사살하자 풍발도 놀라 죽고 풍홍이 북연 왕으로 올랐습니다.(자치통감 번역본 남송 문제 원가 7년<430년>)

 

※후연의 계통(모용수→모용보:모용수의 아들→모용성:모용보의 아들→모용희:모용수의 아들→모용운:모용보의 양자, 고운)

※ 북연: 고운부터 북연이 시작되었다는 측이 있고, 풍발부터 북연이라고 부르는 측이 있음

삼국사기는 고운부터 북연 왕으로 부르고 있음 (고운→풍발→풍홍: 풍발의 동생, 북연 멸망)

 

4) 『위나라 사람들이 연(燕)나라를 자주 쳤으므로, 연나라가 날로 위급해지게 되자,..』

이하의 기록도 자치통감에 있는 기록을 약간 간추려 전재한 것입니다

(남북조 송기4 문제 원가 12년<435년> 11월 병자일(23)일 이하의 기록- 번역본 13권)

 

이것을 보면 연나라의 선비족은 고구려와 친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선비 모묭부가 원래 고구려에서 종살이를 200년 가량했기 때문이며

원래 고구려에서 도망가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즉, 고구려는 선비 묘용부에게 있어서 고향 같은 곳입니다.

따라서 위험에 처하니 고구려에 의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5) 『24년(436)에 연나라 왕이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고...』이하의 기록도

자치통감에 있는 기록을 전재한 것입니다(남북조 송기5문제 원가 13<436년> 2월 무자일(6일- 번역본 13권)

 

6) 『여름 4월에 위나라가 연나라의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이겼다....』이하의 기록도

자치통감의 기록을 간추려 전재한 것입니다.(남북조 송기5문제 원가 13<436년> 여름 4월조- 번역본 13권)

 

※ (번역 원문)

『여름4월에 위의 아청, 고필이 연의 백랑성(요녕성 객랄심좌익현의 서남쪽)을 공격하여 그곳에서 승리하였다.

고려(고구려)가 장군 갈로 맹광을 파견하여 무리 수만명을 거느리고 양이를 따라와서 화룡(북연의 수도로서 요녕성 조양시)에 도착하여

연왕을 영접하였다. 고려는 임천(화룡의 동쪽)에 주둔하였다.

연의 상서령 곽생이 백성들이 옮겨가기를 꺼리는 것을 이용하여 성문을 열어서 위의 군사를 받아들이려 하였지만,

위인(魏人)들이 그것을 의심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곽생이 마침내 군대를 챙겨서 연왕을 공격하였으나, 왕이 고려의 군대를 이끌고 동문으로 들어와서 곽생과 궁궐 아래에서 싸웠는데,

곽생이 떠도는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 갈로 맹광이 성에 들어오자, 군사들에게 해진 군복을 벗도록 명령하고,

연의 무기고에 있는 날카로운 병장기를 가져다가 조고 성안에서 크게 약탈하였다.

 

5월 을묘일(5일)에 연왕이 용성(수도 화룡의 도성으로 요녕성 조양시)에 있는 현재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우니, 불이 10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부인들도 갑옷을 입고 안에서 거주하게 하고, 양이 등이 정예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행영 밖에 있었고,

갈로 맹광이 기병을 거느리고 뒤쪽에 있었는데, 방궤(방진)로 나아가니 앞과 뒤 사이의 거리가 80여리나 되었다.

 

고필의 부장인 고구자가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려고 하였지만, 고필이 술에 취하여 칼을 뽑아서 그를 제지하니,

 그러므로 연왕은 도망칠수 있었다. 위의 주군이 소식을 듣고 화가나서 함거로 고필과 아청을 불러들였고,

평성(북위의 수도로서 산서성 대동시)에 도착하자 모두 내쳐져서 문졸(門卒)로 삼았다.

무오일(8일)에 위의 주군이 산기상시 봉발을 파견하여 고려 사신으로 가게해서 연왕을 보내라고 하였다.』

 

7) 『 위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보내...』이하의 기사는

위서 열전 고구려전의 기사를 조금 고쳐 옮겨 쓴 것입니다.

(위서 열전을 볼 수 있는 곳: 중국정사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