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년 기해년(399년) 기사 >
1) 번역문(남)
영락(永樂) 9年(399년)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國境)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倭)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2) 번역문(북)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더불어 화의를 맺고 통하였다. 왕이 돌아보면서 평양으로 내려오니
(또는 아래《남》평양을 돌아보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여 아뢰기를,
왜인이 그 나라 경계 지방에 가득 차서 성들을 무너뜨리고 있는데 노객(신라왕)은 (태왕의) 신민으로서
왕에게로 와서 지시를 주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와 그의 충성함을 칭찬하고 사신을 보내였으며 또 비밀계획을 알려주게 하였다.
3) 해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번역은‘노객(奴客)’과 ‘민(民)’이다.
남쪽의 번역문을 보면‘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이렇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왜(倭)가 노객(신라왕)을 신민(臣民)으로 삼으려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비해 북쪽의 번역문을 보면‘노객(신라왕)은 (태왕의) 신민으로서’이렇게 되어있다.
어느 번역이 맞을까?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남쪽의 번역은 틀렸다.
왜냐하면 같은 남쪽의 번역문 중에서‘신묘년(391년)’기사를 보면 그때에 이미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신묘년(391년)에 이미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놓고 8년이 지난 후, 또다시 기해년(399년)에 신민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번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쪽의 번역문은 앞뒤가 맞는 얘기다.
신묘년(391년)에 (고구려가) ‘신라를 초유하여(타일러)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므로,
8년이 지난 후, 기해년(399년)에‘노객(신라왕)은 (태왕의) 신민으로서’이라는 말은
앞뒤가 맞는 번역이기 때문이다.(판독 원문은 동일함)
남쪽의 번역문은 끝까지 광개토왕의 비문을 왜의 자랑찬 업적비로 해석하려고 하고 있음을 볼때
식민지 사관의 개들이 아직도 제 버릇 못 버리는 행태를 그대로 볼수 있다.
'고구려 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본기- 2) (0) | 2012.01.13 |
|---|---|
|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본기- 1) (0) | 2012.01.12 |
| 광개토왕비문 번역문 비교(2) (0) | 2012.01.10 |
| 광개토왕비문 번역문 비교(1) (0) | 2012.01.09 |
| 광개토왕비문(남한 번역문과 북한 번역문) (0) | 2012.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