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광개토왕비문 번역문 비교(1)

상 상 2012. 1. 9. 19:24

남쪽과 북쪽의 번역문을 언뜻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이 보이나

거기에 담겨진 역사적 의미나 역사적 배경, 역사 해석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다

 

광개토왕비문과 관련된 논쟁은 매우 많으나 본인은 대표적인 것 두 개만 우선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가 신묘년 기사이고 둘째가 17세손 기사이다.

오늘은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신묘년 기사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신묘년 기사는 광개토왕의 업적을 쓴 부분에 있는데 광개토왕의 업적은 연도별로 나열되어 있다.

 

즉,

1) 영락 5년 을미년(395년) 기사

2) 신묘년(391년) 기사

3) 6년 병신년(396년) 기사

4) 8년 무술년(398년) 기사

5) 9년 기해년 기사

6) 10년 경자년 기사

7) 14년 갑진년 기사

8) 17년 정미년 기사

9) 20년 경술년 기사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영락은 광개토왕의 연호이고(이는 재위 몇 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음),

이 영락이라는 연호는 제일 처음 기사 즉, 영락 5년에만 쓰여 있고, 6년 8년 9년 10년 14년 17년 20년에는 영락이라는 연호가 없는데

이는 생략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은 다 몇 년, 몇 년, 몇 년이라는 년도가 있느나 신묘년 기사에만 (영락) 몇 년이라는 년도가 없다.

이것은 광개토왕의 즉위 이전에(광개토왕의 부왕인 고국양왕 때)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를 연구한 학자들의 결론이다.

이정도 기초지식을 가지고 신묘년의 번역문을 비교해 보자.

 

 

1) 신묘년(391년) 기사

 

① (남한: 노태돈, 서울대)

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391년)에 건너와 백잔(百殘)을 파(破)하고 (2字缺) 신라(新羅)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판독문: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② (북한)

백잔(백제)과 신라(新羅)는 옛적에 속민(屬民)이였고 그전부터 조공을 바쳐왔던 것이다.

그런데 왜가(백제의 꾀임으로) 신묘년에 왔기에 (패수를) 건너서 백잔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초유-타일러)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판독문: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浿破百殘東▨新羅以爲臣民)

 

 

2) 의미해설

 

① 노태돈의 해석문:

백제와 신라가 옛날에는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써 조공을 바치던 관계였는데

신묘년에 왜가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도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즉 신묘년에는 왜가 백제와 신라를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묘년 기사는 그 이하 기사의 전제가 되는 문장이다.

즉, 그래서 (영락)6년 병신년(396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치고, (영락)10년 경자년에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하였다는 것이다.

(노태돈 해석문에서 주어는‘왜’이다.: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왜’이다))

 

② 북한의 해석문:

백제와 신라가 옛날에는 속민(屬民)으로써 조공을 바치던 관계였는데

왜가(백제의 꾀임으로) 신묘년(391년)에 왔기에, 신묘년(391년) 이후 고구려가 패수를 건너(왜를 끌어들인 바 있는) 백제를 격파했고

또 신라를 타일러서(초유-招諭) 신민으로 삼았다.

그리고 신묘년 기사는 독립된 문장이다.

(북한 해석문에서 주어는‘고구려’이다.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고구려’이다)

 

 

- 신묘년 기사를 설명한 북한 책을 간추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광개토왕릉비문연구’(북한 사회과학원,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년 5월 18일 발행)

 

『 2) 신묘년조-고구려, 백잔, 신라, 왜 관계 기사에서

 

(1) 비문구조에서 신묘년조가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문제

 

지난 시기 일부 학자들은 신묘년조 기사를 6년 병신조 기사에 부속된 하나의 전치문으로 보았으며

또 그와 동시에 17년 정미조 기사까지의 대전치문으로 보았다.

그러나 신묘년조 기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대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 신묘년조가 대전치문으로 된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가 없다.

그것은 8년 무술조 기사는 왜, 백제, 신라와는 관계없는 기사이기 때문이며 또 17년 정미조 기사에는 왜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2) 백잔, 신라가 옛날 고구려의《속민》이였다는 문제(생략: 본인이 생략하였음)

 

(3) 신묘년조에 영락 년호가 보이지 않는 리유

    왜가 침범한 것이 광개토왕 즉위 이전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선행 연구자들이 밝힌바 있다.

 

(4) 《왜이신묘년래 도패파백잔 동□신라이위신민(倭以辛卯年來渡浿破百殘東▨新羅以爲臣民)》해석문제

신묘년조 기사를 가장 력사적 사실에 가깝게 해석하기 위해서는《삼국사기》등의 기재내용과 부합되게 해석해야 한다.

즉, 391년(신묘년) 이후 고구려가 패수를 건너(왜를 끌어들인 바 있는) 백제를 격파했고 또 신라를 타일러서(초유-招諭)

실성을 볼모로 보내게 한 사실을 두고《신민으로 삼았다》고 써 놓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

 

 

3) 본인의 생각

노태돈의 번역문은 말이 않된다.

왜냐하면 신묘년(391년)에 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놓고

(영락) 9年(399년) 기해(己亥)년에 또다시 신라를 왜의 신민으로 삼으려 한다고 하니 이는 모순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391년에 이미 신민으로 삼았는데 399년에 또 신민으로 삼으려 한다는게 말이 되는가?

 

그리고 기본적으로 광개토왕의 비문은 광개토왕(혹은 그 부왕)의 업적, 자랑을 쓴 글인데

거기에‘왜’가 한 일, 왜의 자랑을 쓸 이유가 있는가.

왜가 한 일을 쓰려고 그 거대한 비석을 세웠다는 말인가?

왜가 저질러 놓은 일을 청소했다고 그 커다란 비석을 세웠다는 말인가?

그래 겨우 왜가 해 놓을 일을 청소했다고 한 것이 광개토왕의 자랑이 되는가 말이다.

그당시 왜는 통일된 나라도 없이 몇몇개의 조그만 쪼가리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북서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북동쪽으로 숙신을 정벌하며 남서쪽으로 백제를 아우르고, 남동쪽으로 신라를 노객으로 삼은 

대정복 군주의 비문에 조그만 왜가 한 일을 뒤치닥꺼리 했다는게 자랑이 되는가 말이다. 그게 거대한 비석에 써 놓을 일인가 말이다.

하여튼 정신없는 식민지사관의 개들이 아직도 살아서 버젓이 개수작을 벌이고 있다.

 

따라서, 신묘년(391년) 기사는 다른 여러 학자들이 지적한대로 광개토왕의 부왕인 고국양왕의 치적이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즉, 신묘년의 기사는 다른 어느 학자가 번역한 대로 다음과 같이 번역한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백제(百濟)와 신라(新羅)는 예전의 속국(屬國)백성이었으므로 와서 조공(朝貢)을 바쳐왔다. 그러나 이후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선왕인 고국양왕은) 신묘년(辛卯年, 서기391년)에 백제를 쳐부수고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판독문: 百殘新羅舊是屬民, 由□(未,來)朝貢. 而□(後,倭)以辛卯年, 不□(貢)□(因), 破<百殘>□□<新羅>以爲臣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