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 본기- 3)

상 상 2012. 1. 6. 18:54

16 년 (AD 406) : 봄 2월에 궁궐을 증축 수리하였다.

[번역문]

16년(406) 봄 2월에 궁궐을 증축 수리하였다.

 

17 년 (AD 407) : 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번역문]

17년(407) 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宗族)[의 정]을 베풀자 북연왕 운(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갈래로서,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자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였을 때 운(雲)이 무예로써 동궁에 시위하였는데,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아 모용씨의 성을 내렸다.

 

18 년 (AD 408) : 여름 4월에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았다.

[번역문]

18년(408) 여름 4월에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禿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民戶)를 [그곳으로] 옮겼다.

8월에 왕은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22 년 (AD 412) :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번역문]

22년(412)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광개토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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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광개토왕 17년(407년) 후연왕 모용희가 그의 황후 부씨의 장례를 치를 때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모용희를 쫒아내고

모용운(고운)을 왕으로 추대하여 모용운이 왕위에 오릅니다(모용희는 사람들에게 잡혀 모용운이 죽입니다).

모용운은 왕위에 오르자 자기의 본래 성인 고씨로 회복합니다. 그리하여 고운이 됩니다.

 

(자치통감 번역본 12권, 진기36 안제 의희 3년(407년) 가을 7월 계해일(26일)

이중에 있는 기사를 하나보면

『풍발은 평소 모용운과 사이가 좋아서 마침내 모용운을 추대하여 주군으로 삼았다. 모용운이 병이 들었다 사양하자 풍발이 말하였다.

“하간(모용희를 말함)은 음란하고 포학하여 사람과 신이 함께 분노하니 이는 하늘이 그를 멸망하게 하는 때입니다.

공은 고씨(高氏)의 이름있는 가문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양자가 될수 있으며 얻기 어려운 운을 포기하려 하십니까?』

 

⇒ 이것을 보면 전연, 후연 당시에 고구려 왕가인 고씨는 중국에서도 이름 높은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전연, 후연은 선비 모용부(모용씨)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인데, 이들은 고구려에서 종노릇(속국)을 2백년간 하다가

발기의 난 때(산상왕 연우 사건, 서기 197년) 고구려의 내분을 틈 타 용성(요녕성 조양시)에 도망을 쳐 거기를 발판으로 커 나갔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인의 나라인 고구려의 왕가인 고씨는 이름 높은 가문임이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후연의 계통(모용수→모용보:모용수의 아들→모용성:모용보의 아들→모용희:모용수의 아들→모용운:모용보의 양자)

   (모용운을 후연왕으로 보는 측도 있고, 북연왕으로 측도 있습니다)

  

모용운은 그의 할아버지 고화(高和)이고 [고]구려의 갈래로, 원래 성은 고씨이며 고운이 본래 성과 이름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왕가와 같은 성씨이기 때문에 광개토왕이 종족(宗族)[의 정]을 베푼 것입니다.

 

※ 그런데 ‘17년(407) 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宗族)[의 정]을 베풀자

북연왕 운(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는 기사는 자치통감과 좀 다릅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고운(모용운)이 북연왕에 오른 것은 안제 의희 3년(서기 407년)

가을 7월 28일인데 삼국사기는 안제 의희 3년(서기 407년) 봄 3월에 이미 고운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치통감 번역본 12권, 진기36 안제 의희 3년(407년) 가을 7월 계해일(26일)

 

2) 왕이 죽자 왕호를 광개토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까지 써오던 장사지낸 곳의 이름을 따서 왕호로 삼는 관습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장사지낸 곳의 이름을 따서 왕호를 삼는 것은 고구려의 독특한 전통입니다.

 

이러한 풍습은 제4대 민중왕 때부터 시작되어, 5대 모본왕, 9대 고국천왕으로 점철 되다가

12대 중천왕에서 부터는 13대 서천왕, 14대 봉상왕, 15대 미천왕, 16대 고국원왕,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으로

계속 이어졌는데 19대 광개토왕은 이러한 전통을 따르지 않고 시호내지 존호를 붙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