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년 (AD 343) : 아우를 연(燕)나라에 보내 조회하고,
[번역문]
13년(343)봄 2월에 왕은 그의 아우를 연(燕)나라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나라 왕 [모용]황이 이에 따라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었으나, 그 어머니는 여전히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왕은]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성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木覓山) 가운데에 있다.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15 년 (AD 345) : 연나라 모용각이 쳐들어와서
[번역문]
15년(345)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 쳐들어와서 남소(南蘇)를 함락시키고 수자리 군사를 두고
돌아갔다.
19 년 (AD 349) : 전 동이호군 송황을 연나라로 보냈다.
[번역문]
19년(349)에 왕은 전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나라로 보냈다.
연나라 왕 [모용]준(雋)이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活)이라 바꾸고 중위(中尉)로 임명하였다.
25 년 (AD 355) : 왕자 구부(丘夫)를 왕태자로 세웠다.
[번역문]
25년(355)봄 정월에 왕자 구부(丘夫)를 왕태자로 세웠다.
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刁龕)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39 년 (AD 369) : 군사 2만 명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번역문]
39년(369)가을 9월에 왕은 군사 2만 명으로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치양(雉壤)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40 년 (AD 370) : 진나라의 왕맹이 연나라를 정벌
[번역문]
40년(370)에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정벌하여 깨뜨렸다.
연나라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도망쳐 왔는데, 왕은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41 년 (AD 371) : 백제왕이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번역문]
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죽었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魏)나라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었다.』고 하였으나 지나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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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고국원왕 13년(343년) 모용황이 고국원왕의 왕비와 어머니, 아버지 시신을 가지고 물러나니 고국원왕은 모욕을 당합니다.
칭신하고 물건을 바쳐서 겨우 돌려받은 게 아버지의 시신입니다.(어머니는 계속 잡혀있고)
※ 이 기사 역시 자치통감에 있는 것을 추려 재단(오려)하여 편집한 것인데
원문은 진기19 강제 건원 원년(343년) 봄 2월 조에 있습니다.
2) 고국원왕 13년(343), 고국원왕은 환도성이 파괴되니 평양으로 되돌아옵니다.
고구려가 서울(수도)을 옮긴 역사를 다시한번 보면
① 졸본(시조 주몽때, 고구려 최초의 서울)
② 국내(2대 유리왕때)
③ 환도(10대 산상왕)
④ 평양(11대 동천왕)
⑤ 환도(16대 고국원왕)
⑥ 황성(평양 동쪽: 16대 고국원왕)입니다.
3) 고국원왕 13년(343) 서울을 다시 평양으로 옮긴 고국원왕은 한편으로 진나라(전진: 부견이 세운 나라)과 외교관계를 맺습니다.
전진은 연나라(전연)와 대치하고 있었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모용황의 전연은 부견의 전진에게 대패합니다.
4) ‘가을 7월에 [왕은]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겨 거처하였다.’는 기사에서
단재 선생께서는 평양 동황성이 아니라 평양 동쪽 ‘황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원문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秋七月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이 원문의 앞부분은 ‘가을 7월 평양 동쪽 황성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이렇게 해석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문장을 보면 ‘성은 지금 서경(평양) 동쪽 목멱산 가운데 있다.’
이렇게 되어 있으니 ‘평양 동쪽 황성’이라는 단재 선생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서울을 옮긴 것이 20대 장수왕 때인데 평양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평양 동황성이라면 평양에서 평양으로 옮겼다는 것이니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국원왕 13년(343년) 가을 7월에 서울을 옮긴 곳은 황성(평양 동쪽)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5) ‘15년(AD 345) : 연나라 모용각이 쳐들어와서’기사도 자치통감의 기사를 옮겨 쓴 것입니다.
(진기19 목제 영화 원년-345년, 겨울 10월 조 - 11권)
6)‘19년(AD 349) : 전 동이호군 송황을 연나라로 보냈다.’는 기사도 자치통감의 기사를 옮겨온 것입니다.
( 진기20 목제 영화 5년-349년, 끝 부분: 아마 12월?- 11권)
7) 고국원왕 25년(355)에 어머니를 돌려받기 위해 인질과 조공을 바치니
모용준은 어머니를 보내주면서 무슨 누구를 무엇에 봉한다느니 이런 소리도 합니다.
호기를 부릴대로 부린 것입니다.(전연은 머지않아 멸망함)
이런 것을 두고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선비족은 서기전 9년부터 서기 197년까지 206년간 고구려의 속국으로 노예 노릇하다가,
산상왕 연우로 인한 고구려의 내분이 일어났을 때 요동으로 도망가서 독립한 뒤 세력을
키워서 전연을 세워 고구려의 태후를 인질로 잡고 고구려 왕을 무엇에 봉한다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구려 역사상 이때에 처음 이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고구려 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한다는 이야기)
어머니를 돌려받기 위한 굴욕적인 조약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고국원왕 25년(355) 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이하의 기사도 자치통감의 기사를 옮겨 쓴 것입니다. 진기20 목제 영화 11년<355년> 12월조)
이때 모용준은 이미 후조(後趙)가 어지러운 때를 틈타 계성(북경)을 함락시키고
북경에 도읍을 옮겼으며, 이어 염민을 멸망시키고 하북(河北) 일대를 평정하여 황제에(352년) 올랐던 것입니다.
8) 고국원왕 39년(369), 북쪽으로는 못나가니 남쪽으로 군사를 돌려 백제를 정벌하나 패합니다.
9) 고국원왕 40년(370) 진(秦-전진)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정벌하여 깨뜨립니다.
이때 전연과 전진이 싸워 전진이 승리하고 화북을 통일합니다.(전연 멸망)
모용평이 고구려로 도망오자 잡아서 전진으로 보냅니다.
(‘40년(370)에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정벌하여 깨뜨렸다.’ 이하의 기사는
자치통감 진기24 해서공 태화 5년<370년> 가을 7월에서부터 11월 10일까지의 기사를 간단하게 추려서 삼국사기에 쓴 것입니다.
'연나라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도망쳐 왔는데, 왕은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냈다.'는 기사도 역시 위와 같은
11월 10일 기사 중에 있습니다.
'11월 정축일<6일> 모용환이 선비족 5천명을 인솔하고 용성으로 도망하고 무인일<7일>에 연의 산기시랑 여울이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상당의 인질 500여명을 인솔하고 밤에 업의 북쪽 문을 열고 진의 병사들을 받아들이니 연의 주군 모용위와
상용왕 모용평 낙안왕 모용장 정양왕 모용연 좌위장군 맹고 전중장군 애랑 등이 용성으로 달아났다.
신사일<10일>에 진왕 부견이 업에 있는 궁전으로 들어갔다.'(자치통감 번역본 원문)의 기사를 간단하게 추려 옮겨 온 것임
(그리고 이어서 '잡아가지고 진왕 부견에게 데리고 가니 부견이 그가-후연 황제 모용위, 항복하지 않고 도망간 상황을 힐문하자
대답하였다.
"여우도 죽을 때는 언덕으로 머리를 대고 있으니-수구지심, 먼저 돌아가신 분들의 무덤으로 돌아가 죽으려고 하였을 뿐이오"
이러한 말은 용성이 선비 모용부의 본 고장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모용평(慕容評)은 실권을 잡고 난 뒤 부패한 정치를 하면서 전연의 국력을
쇠퇴하게 한 장본인이며, 동진(東晋) 항온의 군대를 격파하여 공을 세운 모용수를 핍박하여
전진으로 망명하게 한 사람이며 전진과의 전쟁에서 전진의 왕맹에게 패하여 전연을 망하게 한 직접적인 장본인입니다
10) 고국원왕 41년(371) 이번에는 거꾸로 백제가 평양성을 공격해 옵니다. 이 싸움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합니다.
11) 역시 장사지낸 곳(고국의 들-故國之原)의 이름을 따서 왕호(고국원왕)를 짓습니다.
장사지낸 곳의 이름을 따서 왕호를 삼는 것은
고구려의 전통입니다. 이러한 풍습은 제4대 민중왕 때부터 시작되어, 5대 모본왕, 9대 고국천왕으로 점철 되다가
12대 중천왕에서 부터는 13대 서천왕, 14대 봉상왕, 15대 미천왕, 16대 고국원왕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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