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올린 삼국사기 미천왕 본기 3편 20년(AD 319)조에 나오는 ‘진(晉)나라 평주자사 최비가 도망쳐 왔다.’는 기록은
자치통감의 기록을 간추려 삼국사기에 실을 것인데 자치통감에 나오는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자치통감 번역본(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도서출판 삼화, 2007년 6월 27일 출판)
자치통감 진기13 원제 태흥 2년(319년) 12월 을해일(9일)
평주(요녕성과 한반도 북부) 자사 최비가 스스로 중주(중원지역)에서 명망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요동지역을 진무하였는데
병사와 백성들이 대부분 모용외에게 귀부하자 마음이 평안하지 아니하였다.
자주 사자를 보내어 그들을 불러오려 했으나, 모두 오지않자 속으로 모용외가 그들을 억지로 머물러 있게 한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몰래 고구려, 단씨(段氏), 우문씨(宇文氏)에게 유세하여 함께 그를 공격하게 하고 모용외를 멸망시키면
그 땅을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최비와 친하게 지내는 발해사람 고첨(高瞻)이 힘써 간하였으나, 최비가 좇지 않았다.
삼국이 군사를 합하여 모용외를 정벌하자 제장들이 그들을 반격하자고 청하니 모용외가 말하였다.
“저들은 최비에게 유혹되어 모든 이익을 얻으려고만 하고 있다. 군사세력이 처음으로 합쳐져서 그 칼끝이 아주 예리할 것이니
그들과 싸우는 것은 옳지 않으며 마땅히 굳게 지키면서 그들을 좌절시켜야 할 것이다.
저들은 까마귀가 모여서 오는 것과 같아 이미 하나로 통일된 것이 없으니 서로 복종하지 못할 것이고,
오래되면 반드시 두가지 문제를 갖게 될 것인데 그 하나는 내가 최비와 더불어 그들을 속여서 뒤엎어 버리려한다고 의심할 것이고,
두 번째는 세나라가 스스로 서로 시기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두 개로 흩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그들을 공격하면
격파할 것이 분명하다.”
세 나라가 나아가서 극성(요녕성 금주시 서북쪽)을 공격하니 모용외는 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고 사자를 파견하여 소고기와 술로
우문씨에게만 주면서 위로하니 나머지 두나라에서는 우문씨와 모용외가 모의한 것이 있다고 의심하고 각기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大人)인 우문실독관이 말하였다.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가 버렸지만 우리는 마땅히 홀로라도 이것을 빼앗아야 한다.”
우문씨의 사졸들이 수십만명이어서 군영이 40리에 이어있었다.
모용외의 사자가 그의 아들 모용한을 도하(요녕성 금주시)에서 오도록 불렀다. 모용한이 사자를 파견하여 모용외에게 말하엿다.
“우문실독관이 나라 전체를 들어서 침략하였으니 저들의 숫자는 많고 우리는 적어서 계책을 세워 격파하는 것은 쉬워도 힘으로
승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성안에 있는 무리는 충분히 침략을 방어할 수 있으니 저 모용한이 청컨대 밖에서 기습병이 되어서
그들의 큼을 보다가 치게하며, 안팎에서 모두 분발하여 저들을 놀라게하여 방비할 곳을 알지 못하게 하면 그들을 깨드리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병사들을 합쳐서 하나로하면 저들은 오로지 성을 공격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다른 걱정을 다시 하지 않아도
되게하는 것은 계책 가운데 제대로 된 것은 아닙니다. 또 많은 무리들에게 겁먹은 것을 보이는 것은 싸우지 않고도 사기가
먼저 상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모용외는 오히려 이를 의심하였다. 요동사람 한수가 모용외에게 말하였다.
“우문실독관은 상대방을 능멸하는 뜻을 갖고 있어서 장군은 교만하고 졸병은 게으르며 군사는 단잔하거나 조밀하지 않으니
만약에 기습하는 병사를 갑자기 일으켜서 그들이 아무런 방비가 없는 곳 한쪽씩을 잡아당기는 것이 반드시 격파할 계책입니다.”
모용외는 마침내 모용한을 도하에 머물러 있도록 허락하였다.
우문실독관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모용한은 평소 날래고 과감하다는 면성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 성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여 혹 화가 될수도 있겠으니 마땅히 먼저
그것을 빼앗아야 할 것이고 성은 걱정할 것이 못 된다.”
마침내 수천 기병을 나누어 파견하여 모용한을 공격하였다. 모용한이 이를 알고 거짓으로 단씨의 사자가 되어 길에서
그들을 맞이하여 말하였다.
“모용한은 오랫동안 나의 걱정거리였는데 듣건데 그들을 마땅히 치려고 하신다 하여 내가 이미 군사를 엄히 다스려 기다리고 있으니
의당 속히 나가십시오.”
사자는 이미 떠났는데 모용한도 바로 성을 나와서 군사를 매복시켜놓고 그들을 기다렸다.
우문씨의 기병이 사자를 보자 크게 기뻐하며 말을 달려갔고 또다시 방비 대책을 세우지 않고 매복한 지역 안으로 들어갔다.
모용한이 분발하여 쳐서 그들을 다 잡고 이긴 기세를 타고 지름길로 진격하면서 간사를 파견하여 모용외에게 말하여
군사를 내보내어 크게 싸우게 하였다.
모용외는 그의 아들 모용황과 장사 배억에게 정예의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하고 스스로 대병을 거느리고 뒤를 이었다.
우문실독관은 처음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다가 모용외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모든 무리를 내보내어 싸우게하였다.
선봉에 섰던 군사가 싸움을 시작하자 모용한은 1천 기병을 거느리고 옆에서 곧장 그들의 진영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멋대로 불을 지르니 무리들이 당황하여 소란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고,
드디어 대패하였으며 우문실독관은 겨우 몸만 죽음을 면하였다.
모용외가 그의 무리를 전부 포로로 잡았고 황제의 옥새 세 개를 얻었다.
최비가 이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그의 조카 최도에게 극성으로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였다.
마침 세나라의 사자가 또한 도착하여 화의를 청하며 말하였다.
“우리의 본래 뜻이 아니며 최평주(최비)가 우리를 교사한 것일 뿐입니다.”
모용외가 이것을 최도에게 보여주면서 무기를 들이대니 최도가 두려워서 스스로 자복하였다.
모용외가 마침내 최도를 돌려보내어 최비에게 말하였다.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이 최하의 계책이다.”
군사를 인솔하고 그 뒤를 쫓았다.
최비는 수십 기병과 더불어 집을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고 그의 무리들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는 그의 아들 모용인을 정로(征虜) 장군으로 삼아 요동지역을 진무하니 관부, 시가지는 옛날처럼 안정되게 하였다.
고구려의 장수 여노자가 우하성(요녕성 요녕시 동북쪽)을 점거하니 모용외는 장군 장통(張統)을 파견하여 습격하여
그들을 사로잡고 그의 무리 1천여호를 포로로 잡고 최도 고첨 한항 석종을 극성으로 돌아가게 하여 손님에 대한 예의로
대우하여 주었다. 한항은 안평(하북성 안평현) 사람이고, 석종은 석감의 손자이다.
.......(중략).........
고구려가 자주 요동을 침략하니 모용외는 모용한과 모용인을 파견하여 그들을 쳤고 고구려왕 을불리(乙弗利: 미천왕 을불)가
거꾸로 와서 맹약을 맺자고 청하였으므로 모용한과 모용인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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