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고구려 제15대 미천왕(美川王) 본기- 2

상 상 2011. 12. 26. 19:38

3 년 (AD 302) :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

[번역문]

3년(302) 가을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 명을 붙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 년 (AD 311) :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번역문]

12년(311)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14 년 (AD 313) : 낙랑군을 침략하여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번역문]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 년 (AD 314) :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

[번역문]

15년(314)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16 년 (AD 315) : 봄 2월에 현도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번역문]

16년(315) 봄 2월에 현도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 8월에 살별[星孛]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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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미천왕은 왕위에 오르자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입니다.

현도군을 치고 8천 명을 붙잡아 그 당시 서울인 평양으로 옮깁니다. 또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지합니다.

(여기서 명백히 기록 되었듯이 서안평은 요동입니다- 압록강 어구가 아님)

 

서안평은 태조대왕(太祖大王) 94년(서기 146년) 가을 8월에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쳤다는 기록과

동천왕 16년(242) 서안평을 쳐서 깨드렸다는 기록에 이어서

이번에 세 번째 미천왕12 년 (AD 311)때 요동 서안평을 쳐서 완전히 차지한 것입니다.

 

2) 낙랑군을 쳐서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습니다.

여기서 명백하게 알수 있는 것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는게 아니고 요동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천왕 때 서울은 위에서 보듯이 평양입니다. 따라서 낙랑군을 쳤다는 말은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요동에 있는 낙랑군입니다.

위 기록의 문맥상으로 보아도 현도군 요동 서안평에 이어서 낙랑군이 나오므로 낙랑군은 요동(군)입니다.

 

3) 15년(314)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는 말은 대방군이 낙랑군의 남쪽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4) 16 년 (AD 315) : 봄 2월에 현도성을 공격하여 깨뜨립니다.

 

이로써 산상왕(연우) 때 요동을 공손씨에게 넘겨 줌으로써 고구려가 요동을 잃어버렸는데

미천왕이 현도, 낙랑, 대방을 쳐서 차지함으로써 요동을 다시 수복한 것입니다.

 

5) 이는 3대왕(3大王: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시절을 다시 보는 듯합니다.

 

① 태조대왕(太祖大王)때 요동을 공략한 일을 보면

태조대왕 69년(서기 121년) 12월에 현도성을 포위 공격한 일이 있었고

70년(서기 122년)년에 태조대왕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친 일이 있었으며,

태조대왕(太祖大王) 94년(서기 146년) 가을 8월에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친 일이 있었습니다.(이때는 대방군이 없었음)

 

② 3대왕(大王) 시절을 계속 잘 이어 나갔으면 관구검의 치욕도 없었는데 그만 생각하기도 싫은 연우가 못된 욕심을 내는 바람에

내란이 나고 나라가 쪼개지며, 형이라는 발기는 억울하다고 외국세력을 끌여들여 자기 나라를 치다가 동생 계수에게 패하고

자기나라를 쳐들어왔냐는 동생의 꾸지람을 듣고 부끄러워 죽는 시절을 겪으면서 고구려가 쇠잔해졌습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는데

이제 미천왕이 왕위에 오르자 활발한 고구려의 기상을 다시 드높혀 다시 요동을 수복하였습니다.

 

6) 산상왕(연우) 이후에 계속해서 혈육(형제, 삼촌)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는데

미천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러한 참상도 없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