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년 (AD 300) : 미천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미천왕(美川王)<또는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하였다.>의 이름은 을불(乙弗)<혹은 우불(憂弗)이라고도 썼다.>이고
서천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이전에 봉상왕이 아우 돌고가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여 그를 죽이니, 아들 을불은 살해당할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처음에는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모(陰牟)의 집에 가서 고용살이를 하였는데,
음모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일을 매우 고되게 시켰다.
그 집 곁의 늪에서 개구리가 울면, 을불을 시켜 밤에 기와조각과 돌을 던져 그 소리를 못내게 하고,
낮에는 나무하기를 독촉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였다.
[을불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일년만에 그 집을 떠나,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장사를 하였다.
배를 타고 압록에 이르러 소금을 내려 놓고 강 동쪽 사수촌(思收村) 사람의 집에서 기숙하였다.
그 집의 할멈[老嫗]이 소금을 청하므로 한 말쯤 주고, 다시 청하는 것을 주지 않았더니,
그 할멈은 원망하고 노하여 소금 속에 몰래 신을 넣어 두었다.
을불은 알지 못하고 짐을 지고 길을 떠났는데,
할멈이 쫓아와 신을 찾아내어서 을불이 신을 숨겼다고 꾸며 압록재(鴨淥宰)에게 고소하였다.
압록재는 신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할멈에게 주고 볼기를 때리고 놓아 주었다.
이리하여 [을불은] 얼굴이 야위고 옷이 남루하여 사람들이 보고도 그가 왕손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이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려고 먼저 북부의 조불(祖弗)과 동부의 소우(蕭友) 등을 보내 산과 들로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이] 비류하 가에 이르렀을 때 한 장부가 배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용모는 비록 초췌하였으나 몸가짐이 보통사람과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짐작하고 나아가 절을 하며 말하였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므로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할 것을 몰래 꾀하고 있습니다.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여 사람들을 사랑하셨으므로 선왕의 업을 이을 수 있다고 하여,
저희들을 보내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을불은 의심하여
“나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찾아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소우 등이 말하였다.
“지금의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여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매우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 청컨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마침내 [을불을] 받들어 모시고 돌아왔다.
[창]조리가 기뻐하며 조맥(鳥陌) 남쪽 집에 모셔두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가을 9월에 왕은 후산(侯山) 북쪽으로 사냥나갔는데,
국상 창조리가 따라가며 여러 사람들에게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고 하고,
갈대잎을 관에 꽂으니 여러 사람들도 모두 꽂았다.
[창]조리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같은 것을 알고,
마침내 [그들과] 함께 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어 군사로 주위를 지키게 하고,
이윽고 왕손을 맞이하여 옥새를 바치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누런 안개가 끼어 사방이 막혔다.
11월에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불어와서 6일 동안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12월에 살별[星孛]이 동쪽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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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미천왕이 돌고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신경쓸 것이 없는데 돌고가‘고추가(古鄒加)’라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하겠습니다.
돌고는 서천왕(13대 왕)의 아들이며 봉상왕(14대 왕)의 동생입니다. 그리고 봉상왕이 자살을 시킨 사람입니다.
따라서‘고추가(古鄒加)’라는 명칭은 무슨 벼슬명칭이 아니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자임을 알수 있습니다.
(조선조에서 말하는 대군大君)
2) 미천왕의 이름은 을불이고 을불이 숨어다닐 때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개구리 이야기, 소금 이야기 등등...
여기에서 고구려 때 우리민족의 사회상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민족의 사회사(社會史)를 말할 때 몇 않되는 귀중한 사료가 되겠습니다.(단재선생의 지적임)
고구려 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사회상이 어떠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생활사 사료(史料)입니다.
① 먼저 고구려에 고용살이 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미천왕인 을불이 수실촌 음모의 집에 고용살이(용작-傭作) 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② 고용살이(용작-傭作)는 매우 일을 매우 고되게 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음모가 일을 밤낮없이 매우 고되게 시켰다는 기록)
③ 서기 300년 당시 고구려에 기와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기와가 있었다는 것은 기와집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때 기와집도 있었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알 수 있습니다)
④ 나무를 하는 풍습이 고구려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과 마을이 산과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마을은 산과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
⑤ 을불이 소금장사를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서기 300년 당시에 고구려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그것을 유통하는 상인 조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⑥‘압록재(鴨淥宰)에게 고소하였다’는 기록으로 서기 300년 당시에 지방 조직과 지방관이 있었다는 사실과
고소를 하는 법률행위가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고구려에 법률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⑦‘압록재는 신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할멈에게 주고 볼기를 때리고 놓아 주었다.’는 기록은 그 당시 고구려의 법이 어떠했는지를
알수 있으며 우리민족의 형벌인 곤장(볼기 때리기)이 고구려 때부터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⑧ 아울러 신발 가지고 이런 일을 꾸몄음을 볼때 서기 300년 당시 고구려에 신발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값이 소금보다 비쌌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국상 창조리는 먼저 왕이 될 사람을 찾아놓고 봉상왕을 폐위 시킵니다.
4) 창조리가 봉상왕을 어떤 방법으로 왕위에서 몰아내는지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고 말로 한 다음
자기가 먼저 갈대잎을 관에 꽂고 여러 사람들도 모두 꽂는 것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행동에 나섭니다.
5)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왕을 폐위시키고 별실에 가두어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한 다음, 왕손 을불을 맞아하여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사냥을 나갔을 때 정변을 일으킨 것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운 것은 고구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것을 보면 고구려는 왕의 절대 권력 체제가 아니고 벌족공화(閥族共和) 체제라고 말씀하신 단재선생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6) 미천왕 본기는 3회에 걸쳐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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