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년 (AD 292) : 봉상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봉상왕(烽上王)의 이름은 상부(相夫)<혹은 삽시루(歃矢婁)라고도 썼다.>이고 서천왕의 태자이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서천왕이 [재위] 23년에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1 년 (AD 292) : 봄 3월에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번역문]
원년(292) 봄 3월에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왕은 달가가 아버지 형제[諸父]의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어서 백성들이 우러러 보게 되자, [그를] 의심하여 음모로써 죽였다.
나라 사람들이 말하였다.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양맥, 숙신의 난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지금 그가 죽으니 장차 누구에게 의탁할 것인가?”
눈물을 뿌리고 서로 문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9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 년 (AD 293) : 가을 8월에 모용외가 침입하여
[번역문]
2년(293) 가을 8월에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여 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행차가 곡림(鵠林)에 이르렀을 때, 모용외는 왕이 도망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따라잡게 되었으므로,
왕은 두려워하였다.
그때 신성 재(新城宰)인 북부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적을 만나
그들을 힘껏 치니, [모용]외의 군대가 패하고 물러갔다.
왕은 기뻐하고 고노자에게 작위를 더하여 대형(大兄)으로 삼고, 겸하여 곡림을 식읍으로 주었다.
9월에 왕은 그 아우 돌고(咄固)가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돌고에게 죄가 없었으므로 애통해 하였다.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은 들판으로 달아났다.
3 년 (AD 294) : 창조리(倉助利)를 국상(國相)으로 임명
[번역문]
3년(294) 가을 9월에 국상 상루가 죽었다. 남부의 대사자(大使者) 창조리(倉助利)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올려 대주부(大主簿)로 삼았다.
5 년 (AD 296) : 가을 8월에 모용외가 침입하여
[번역문]
5년(296) 가을 8월에 모용외가 침입하여 와서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는데,
인부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생기고, 또 구덩이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을까 두려워 곧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모용씨가 군대가 날래고 강하여 우리 영토를 거듭 침범하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국상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 또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사람이 없습니다.”
왕은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았다.
[그는] 선정을 베풀어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 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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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봉상왕도 역시 제일 먼저 한 일이 자기 혈육을 없애는 일을 합니다.
안국군 달가를 음모로 죽입니다.
달가는 작은 아버지(숙부)로 봉상왕의 부왕인 서천왕 때 숙신을 물리쳐 나라를 구한 국가의 기둥입니다.
그러나 산상왕 연우가 시작한 친족간 모반이 염려되어 죽인 것입니다.(내분)
2) 그 다음의 사건이 모용외 침입사건입니다.
모용외는 선비족입니다.
선비족은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 때, 고구려의 속국이 된 이래 고구려에 복속해 왔으나,
10대 왕인 산상왕 때에 ‘고구려가 요동을 잃고 약해지자 고구려를 배반하고 떨어져 나가 한(漢)에 붙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를 인용한 글)
이후 선비족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었고,
‘서기250년 경에 선비는 우문씨, 모용씨, 단씨, 탁발씨의 4부로 나뉘어 서로 자웅을 다투었는데 모용씨 중에 모용외란 자가 용맹하고
교활하여 부족이 가장 강성하였으며 창려 태극성-지금의 동몽고 땅 특묵우익 부근-을 근거지로 하여 사면으로 쳐들어가서 약탈하였다.’
(출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
여기에 나오는 모용외는 전연을 세운 모용황의 아버지로 전연은 나중에 북경으로 천도하고 이후 선비 모용부는 서연, 후연, 남연,
북연으로 중국을 흔들더니, 그 다음 선비 탁발부가 북위를 세워 북중국(양자강 이북)을 통일하고,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나뉘고,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이어지며 (북주는 선비의 또 다른 부족인 우문씨가 세운 나라)
북주의 대승상이고 북주의 마지막 황제 정제의 외할아버지 양견(선비족)이 수나라를 세워 극심한 혼란의 시대인 5호 16국,
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합니다.
극심하게 혼란스러운 중국을 통일한 것은 결국 선비족입니다.
우리민족의 종살이나 했던 선비족이 요서와 북중국을 떠돌더니 결국 혼란스러운 중국을 통일하고 중국의 주인노릇을 한 것입니다.
3) 모용외의 침입사건은 고노자라는 영웅이 막습니다
서천왕 때 숙신의 난에는 달가라는 영웅이 나타나고 봉상왕 때 모용외의 난에는 고노자라는 영웅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우리민족에게는 항상 인물이 있습니다.
4) 모용외의 침입사건이 일단락되자
봉상왕은 또다시 자기 혈육을 죽이는 일을 벌입니다. 아우인 돌고가 배반할 마음이 있다고 몰아서 자살을 시킵니다.
형제간에 죽고 죽이는 일 이게 다 산상왕 연우가 시작한 일입니다.
5)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은 들판으로 달아나 생명을 보존할수 있었는데 이 을불이 바로 다음 왕(15대 왕)인 미천왕입니다
6) 산상왕 연우의 잘못으로 선비족을 놓아 주었으니 연우왕의 잘못만 없었더라면
우리민족은 중국 주인의 주인 노릇을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산상왕 연우는 자기의 잘못으로 요동를 중국에 떼어주었고, 선비족을 놓아 주었으며 고구려 내분의 씨앗을 뿌려 놓았으니,
고구려가 잘못되고 나아가 우리민족이 잘못된 것은 모두 산상왕 연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7) 봉상왕의 기록은 2회에 걸쳐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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