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년 (AD 342) :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번역문]
12년(342)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에 [왕은] 환도성으로 옮겨서 거처하였다.
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였다.
건위장군(建威將軍) [모용]한(翰)이,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후에 우문(宇文)씨를 멸망시키고 그 후에 중원을 차지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도(北道)는 평탄하고 넓은데 남도(南道)는 험하고 좁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북도로 가려고 하였다.
[모용]한이 말하였다.
“적은 상식으로 헤아려 반드시 대군이 북도로 올 것이라 여겨서, 당연히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은 소홀히 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정예군을 거느리고 남도로 가 그들을 쳐서,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때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환도(丸都)는 족히 취할 것도 못됩니다. 따로 적은 군사를 북도로 보내면 비록 차질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몸체가 이미 무너지면 사지(四肢)는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따랐다.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와서,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㝢) 등을 보내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서 침략해 왔다.
왕은 아우 무(武)를 보내 정예군 5만 명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 왔다.
왕은 말 한 필을 몰고 도망가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다.
[연나라] 장군 모여니(慕輿埿)가 쫓아가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이때, 왕우 등이 북도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인해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쫓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가지 않았다.
[모용]황이 장차 돌아가려 할 때 한수가 말하였다.
“고구려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이 도망하고 백성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어있으나,
대군이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나머지 무리를 모아 오히려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그의 친 어머니를 잡아가십시다. 그가 스스로 몸을 묶어 항복해 오기를 기다려 그 후에 돌려주고
은덕과 신뢰로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좇아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의 여러 대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그 궁실을 불지르고, 환도성을 허물고는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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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고국원왕이 환도성을 수리하고 환도성으로 옮겨서 거처를 합니다.(평양에 있다가)
그렇다면 서울을 옮긴 것인데 고구려가 서울(수도)을 옮긴 역사를 보면
① 졸본(시조 주몽때, 고구려 최초의 서울) - 비류수(沸流水) 가장자리
② 국내(2대 유리왕때)
③ 환도(10대 산상왕)
④ 평양(11대 동천왕)
⑤ 환도(16대 고국원왕)입니다.
2) 고국원왕이 환도성으로 옮겨서 거처한 것은 장차 북벌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를 알고 모용황이 저들의 서울을 극성에서 서북쪽으로 더 먼 곳인 용성으로 옮깁니다. 고구려 공격을 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올린 모용황에 대한 기사 전체가 자치통감의 내용을 추려 재단하여(오려) 편집한 것인데 그 원문및 전문은
자치통감 진기 19 성제 함강 8년(342년) 겨울 10월 조에 있습니다.)
3) 그 다음 선비 우문씨와 고구려중에서 어느 곳을 먼저 공격할까 의논하다가 고구려를 먼저 친 다음 우문(宇文)씨를 멸망시키고
그 후에 중원을 차지하자고 모용한이 건의하자 모용황이 이를 받아드려 고구려를 공격한 것입니다.
4) 여기 모용황의 침입은 고구려 역사상 두 번째 치욕입니다.
첫번째는 관구검의 침입사건이고, 두 번째가 바로 모용황 침입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모용황의 침입사건이 더 뼈아픈 것은 선비족 자체가 고구려의 속국으로 우리민족의 종살이를 했던 종족인데
우리끼리 내분을 일으켜 우리가 힘이 없어져서 선비족이 빠져나갔던 것이고,
종살이를 했던 선비에게 주인인 고구려가 당했다는 점입니다.
5) 선비가 우리 고구려에서 종살이를 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지형과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선비 모용부가 고구려 내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선비 모용씨에게 당한 것입니다.
6) 여기에서 또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저 연우 산상왕이 형을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하는 욕심만 안부렸다면,
형인 발기가 요동과 주민 3만을 들어 공손도에 항복을 하지 않았으며,
공손도에게 그 대가로 군사 3만을 빌어 모국 고구려를 치는 일도 없었고,
이러한 내분으로 힘이 없어져 선비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漢)으로 가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랬다면 이번과 같은 종에게 치욕을 당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한사람의 헛된 욕심으로 이와같이 민족역사가 뒤틀렸으니
한사람의 잘못된 욕심이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치는지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참..., 연우의 헛된 욕심만 없었더라면 우리역사가 얼마나 좋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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