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철이 승리에 취해 중국을 가볍게 여기며 교만한 뜻을 갖게 되었고, [이 무렵 돌궐은] 대체적으로 병력이 힐리[가한]시기와 거의 비슷했으며 땅이 가로 세로로 만 리나 되었고 여러 족속들이 모두 와서 명령을 받들었다. 다시 돌실복을 좌찰(左察) 로 삼고, 골돌록의 아들 묵구를 우찰(右察)로 삼아 모두 병력을 2만 명씩 통솔하게 했고, 아들 복구는 소가한으로 삼아 두 찰의 위에 두어 처목곤 등 10성(十姓: 서돌궐을 구성하는 10개 족속, 또는 10개 부락) 병력 4만을 통솔하게 해 척서가한이라고 불렀다. 해마다 변경에 쳐들어와 수자리 서는 병사들이 쉴 수가 없게 되자 이에 고선(高選) 위원충 검교병주자사를 천병군대총관으로 삼고 누사덕을 부[총관]으로 삼아 둔영을 살피며 대기하게 했다. 또한 [위]원충을 영무도행군대총관으로 옮겨 돌궐에 대비하게 했다. | 默啜負勝輕中國,有驕志,大抵兵與頡利時略等,地縱廣萬里,諸蕃悉往聽命。復立咄悉匐為左察,骨咄祿子默矩為右察,皆統兵二萬;子匐俱為小可汗,位兩察上,典處木昆等十姓兵四萬,號拓西可汗。歲入邊,戍兵不得休,乃高選魏元忠檢校幷州長史為天兵軍大總管,婁師德副之,按屯以待。又徙元忠靈武道行軍大總管,備虜。 |
[구시(久視) 원년(700)에] 묵철이 농우(隴右) 목장의 말 만 필을 노략질해 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변경을 도둑질 하자 [무후가] 조칙을 내려 안북대도호 상왕(相王)을 천병도대원수로 삼아 병주장사 무유의(武攸宜)와 하주도독 설눌을 이끌고 [위]원충과 함께 돌궐을 공격하게 했는데, 군대가 출발하기도 전에 묵철이 돌아가 버렸다. 이듬해 [돌궐이] 염[주]와 하[주]를 약탈하고 양과 말 10만 마리를 잡아갔으며 석령[관]을 공격하고 결국 병주마저 포위했다. 옹주장사 설계창을 지절산동방어대사로 삼아 창[주], 영[주](瀛州: 지금 하북성 하간시), 유[주], 이[주](易州: 지금 하북성 이현-易縣), 긍[주](恆州), 정[주](定州), 규[주](嬀州), 단[주](檀州), 평[주](平州: 치소, 지금 하북성 노룡현 북쪽 반장진 침장 일대)등 9주의 군대를 통제하게 했고, 영주도독(瀛州都督) 장인단에게 여러 주와 청이[군]과 장새군(障塞軍)의 병력을 통제하게 해서 [설]계창과 호응하며 상왕(相王)을 안북도행군원수(安北道行軍元帥)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감독하게 했으나 [상]왕이 [경사에] 머무르며 가지 않았다. [반면] 돌궐은 대[주]와 긍[주]로 쳐들어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 默啜剽隴右牧馬萬匹去,俄復盜邊,詔安北大都護相王為天兵道大元帥,率幷州長史武攸宜、夏州都督薛訥與元忠擊虜,兵未出,默啜去。明年,寇鹽、夏,掠羊馬十萬,攻石嶺,遂圍幷州。以雍州長史薛季昶為持節山東防禦大使,節度滄、瀛、幽、易、恆、定、媯、檀、平等九州之軍,以瀛州都督張仁亶統諸州及清夷、障塞軍之兵,與季昶掎角,又以相王為安北道行軍元帥,監諸將,王留不行。虜入代、忻,仍殺略。 |
장안 3년(703)에 [묵철이] 사자 막하달간을 보내 [그의] 딸을 바쳐 황태자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것을 청하자 [무]후가 평은군왕 [이]중준과 의흥군왕 [이]중명으로 하여금 옷을 잘 갖추어 입게 하고 조당에 서 있게 했다. 묵철이 다시 대추(大酋) 이력탐한을 보내 말 천 필을 바치며 혼인을 허락한 것에 감사하자 [무]후가 후한 예로 그 사자를 접대했다. 중종이 막 즉위하자 [묵철이] 쳐들어와 [영주] 명사현을 공격하자 이에 영무군대총관 사탁충의가 [그들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해 죽은 사람이 몇 만 명이나 되었으며 [승세를 탄] 적이 마침내 원[주](原州)와 회[주](會州)까지 들어와 기르는 말을 많이 잡아갔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혼인을 끊으라고 하고 묵철을 베는 자를 국왕(國王)에 봉하고 제위(諸衛: 장안을 지키며 숙위했던 군사조직을 총칭)의 대장군으로 임명한다는 현상금을 걸었다. 묵철이 우리(당나라)의 사자인 홍려경 장사언을 죽이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좌둔위대장군 장인단을 삭방도대총관으로 삼아 변경에 주둔하게 하고 그 이듬해 마침내 세 곳의 수항성을 황하 밖에 쌓아 공격의 통로를 막게 했다. 얼마 있다가 당휴경을 [장인단을] 대신해 주둔하게 했다. 예종(睿宗) 즉위 초에 [묵철이] 다시 화친을 청하자 조칙을 내려 송왕(宋王) [이]성기의 딸을 데려다 금산공주로 삼아 [돌궐에] 시집보내라고 했다. 마침 좌우림[위]대장군 손전 등이 해(奚)와 냉형[산]에서 전투를 벌였다가 해에게 잡혀 여럿이 묵철에게 보내졌고, 묵철이 [이들을] 죽여버리자 [조정에서] 다시 형부상서 곽원진으로 하여금 [당]휴경을 대신하게 했다. | 長安三年,遣使者莫賀達干請進女女皇太子子,后使平恩郡王重俊、義興郡王重明盛服立諸朝。默啜更遣大酋移力貪汗獻馬千匹,謝許婚,后渥禮其使。中宗始即位,入攻鳴沙,於是靈武軍大總管沙吒忠義與戰,不勝,死者幾萬人,虜遂入原、會,多取牧馬。帝詔絕昏,購斬默啜者王以國、官諸衞大將軍。默啜殺我行人鴻臚卿臧思言,詔左屯衞大將軍張仁亶為朔方道大總管屯邊,明年,始築三受降城於河外,障絕寇路。久之,以唐休璟代屯。睿宗初立,又請和親,詔取宋王成器女為金山公主下嫁。會左羽林大將軍孫佺等與奚戰冷陘,為奚所執,獻諸默啜,默啜殺之,更以刑部尚書郭元振代休璟。 |
(당)현종(玄宗: 양귀비의 남편)이 즉위하자(712년) [돌궐과] 화친을 끊었다. [하지만] 묵철이 바로 아들 양아지특륵을 보내 숙위로 들여보내며 진정으로 결혼을 구하자 촉왕(蜀王)의 딸 남화현주를 시집보내는 편지를 내려 [묵철]가한을 위로했다. 이듬해에(713) 아들 이녈가한을 시켜 동아특륵과 화발힐리발 석[아]실필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북정[도호부]를 공격하게 했는데, 도호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 곽건관이 격퇴하고 동아[특륵]을 성 아래에서 베자 돌궐이 도망가 흩어졌다. 화발[힐리발]이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처자를 데리고 [당나라로] 도망쳐 오자 좌무위대장군 연산군왕(燕山郡王)으로 삼고 그의 아내를 금산공주라고 하며 재물을 아주 후하게 내려주었다. 양아지[특륵]이 죽자 종친(宗親) 중에 3등 이상을 그의 집에 가서 조문하게 했다. 이때 다시 돌궐이 편지를 올려 혼인을 원했으나 황제가 답을 하지 않았다. | 玄宗立,絕和親。默啜乃遣子楊我支特勒入宿衞,固求昏,以蜀王女南和縣主妻之,下書諭尉可汗。明年,使子移涅可汗引同俄特勒、火拔頡利發石失畢精騎攻北庭,都護郭虔瓘擊之,斬同俄城下,虜奔解。火拔不敢歸,攜妻子來奔,拜左武衞大將軍、燕山郡王,號其妻為金山公主,賜賚優縟。楊我支死,詔宗親三等以上弔其家。是時突厥再上書求昏,帝未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