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53, 신당서 돌궐전-5)

상 상 2015. 3. 4. 17:42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53, 신당서 돌궐전-5)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신당서 돌궐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新唐書 卷215 돌궐전(突厥)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五上, 突厥上

번 역 문

원 문

묵철이 승리에 취해 중국을 가볍게 여기며 교만한 뜻을 갖게 되었고, [이 무렵 돌궐은] 대체적으로 병력이 힐리[가한]시기와 거의 비슷했으며 땅이 가로 세로로 만 리나 되었고 여러 족속들이 모두 와서 명령을 받들었다. 다시 돌실복을 좌찰(左察) 로 삼고, 골돌록의 아들 묵구를 우찰(右察)로 삼아 모두 병력을 2만 명씩 통솔하게 했고, 아들 복구는 소가한으로 삼아 두 찰의 위에 두어 처목곤 등 10(十姓: 서돌궐을 구성하는 10개 족속, 또는 10개 부락) 병력 4만을 통솔하게 해 척서가한이라고 불렀다. 해마다 변경에 쳐들어와 수자리 서는 병사들이 쉴 수가 없게 되자 이에 고선(高選) 위원충

검교병주자사를 천병군대총관으로 삼고 누사덕을 부[총관]으로 삼아 둔영을 살피며 대기하게 했다. 또한 []원충을 영무도행군대총관으로 옮겨 돌궐에 대비하게 했다.

默啜負勝輕中國有驕志大抵兵與頡利時略等地縱廣萬里諸蕃悉往聽命復立咄悉匐為左察骨咄祿子默矩為右察皆統兵二萬子匐俱為小可汗位兩察上典處木昆等十姓兵四萬號拓西可汗歲入邊戍兵不得休乃高選魏元忠檢校幷州長史為天兵軍大總管婁師德副之按屯以待又徙元忠靈武道行軍大總管備虜

[구시(久視) 원년(700)] 묵철이 농우(隴右) 목장의 말 만 필을 노략질해 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변경을 도둑질 하자 [무후가] 조칙을 내려 안북대도호 상왕(相王)을 천병도대원수로 삼아 병주장사 무유의(武攸宜)와 하주도독 설눌을 이끌고 []원충과 함께 돌궐을 공격하게 했는데, 군대가 출발하기도 전에 묵철이 돌아가 버렸다. 이듬해 [돌궐이] []와 하[]를 약탈하고 양과 말 10만 마리를 잡아갔으며 석령[]을 공격하고 결국 병주마저 포위했다. 옹주장사 설계창을 지절산동방어대사로 삼아 창[], [](瀛州: 지금 하북성 하간시), [], [](易州: 지금 하북성 이현-易縣), [](恆州), [](定州), [](嬀州), [](檀州), [](平州: 치소, 지금 하북성 노룡현 북쪽 반장진 침장 일대)9주의 군대를 통제하게 했고, 영주도독(瀛州都督) 장인단에게 여러 주와 청이[]과 장새군(障塞軍)의 병력을 통제하게 해서 []계창과 호응하며 상왕(相王)을 안북도행군원수(安北道行軍元帥)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감독하게 했으나 []왕이 [경사에] 머무르며 가지 않았다. [반면] 돌궐은 대[]와 긍[]로 쳐들어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默啜剽隴右牧馬萬匹去俄復盜邊詔安北大都護相王為天兵道大元帥率幷州長史武攸宜夏州都督薛訥與元忠擊虜兵未出默啜去明年寇鹽掠羊馬十萬攻石嶺遂圍幷州以雍州長史薛季昶為持節山東防禦大使節度滄平等九州之軍以瀛州都督張仁亶統諸州及清夷障塞軍之兵與季昶掎角又以相王為安北道行軍元帥監諸將王留不行虜入代仍殺略

장안 3(703)[묵철이] 사자 막하달간을 보내 [그의] 딸을 바쳐 황태자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것을 청하자 []후가 평은군왕 []중준과 의흥군왕 []중명으로 하여금 옷을 잘 갖추어 입게 하고 조당에 서 있게 했다. 묵철이 다시 대추(大酋) 이력탐한을 보내 말 천 필을 바치며 혼인을 허락한 것에 감사하자 []후가 후한 예로 그 사자를 접대했다. 중종이 막 즉위하자 [묵철이] 쳐들어와 [영주] 명사현을 공격하자 이에 영무군대총관 사탁충의가 [그들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해 죽은 사람이 몇 만 명이나 되었으며 [승세를 탄] 적이 마침내 원[](原州)와 회[](會州)까지 들어와 기르는 말을 많이 잡아갔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혼인을 끊으라고 하고 묵철을 베는 자를 국왕(國王)에 봉하고 제위(諸衛: 장안을 지키며 숙위했던 군사조직을 총칭)의 대장군으로 임명한다는 현상금을 걸었다. 묵철이 우리(당나라)의 사자인 홍려경 장사언을 죽이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좌둔위대장군 장인단을 삭방도대총관으로 삼아 변경에 주둔하게 하고 그 이듬해 마침내 세 곳의 수항성을 황하 밖에 쌓아 공격의 통로를 막게 했다. 얼마 있다가 당휴경을 [장인단을] 대신해 주둔하게 했다. 예종(睿宗) 즉위 초에 [묵철이] 다시 화친을 청하자 조칙을 내려 송왕(宋王) []성기의 딸을 데려다 금산공주로 삼아 [돌궐에] 시집보내라고 했다. 마침 좌우림[]대장군 손전 등이 해()와 냉형[]에서 전투를 벌였다가 해에게 잡혀 여럿이 묵철에게 보내졌고, 묵철이 [이들을] 죽여버리자 [조정에서] 다시 형부상서 곽원진으로 하여금 []휴경을 대신하게 했다.

長安三年遣使者莫賀達干請進女女皇太子子后使平恩郡王重俊義興郡王重明盛服立諸朝默啜更遣大酋移力貪汗獻馬千匹謝許婚后渥禮其使中宗始即位入攻鳴沙於是靈武軍大總管沙吒忠義與戰不勝死者幾萬人虜遂入原多取牧馬帝詔絕昏購斬默啜者王以國官諸衞大將軍默啜殺我行人鴻臚卿臧思言詔左屯衞大將軍張仁亶為朔方道大總管屯邊明年始築三受降城於河外障絕寇路久之以唐休璟代屯睿宗初立又請和親詔取宋王成器女為金山公主下嫁會左羽林大將軍孫佺等與奚戰冷陘為奚所執獻諸默啜默啜殺之更以刑部尚書郭元振代休璟

()현종(玄宗: 양귀비의 남편)이 즉위하자(712) [돌궐과] 화친을 끊었다. [하지만] 묵철이 바로 아들 양아지특륵을 보내 숙위로 들여보내며 진정으로 결혼을 구하자 촉왕(蜀王)의 딸 남화현주를 시집보내는 편지를 내려 [묵철]가한을 위로했다. 이듬해에(713) 아들 이녈가한을 시켜 동아특륵과 화발힐리발 석[]실필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북정[도호부]를 공격하게 했는데, 도호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 곽건관이 격퇴하고 동아[특륵]을 성 아래에서 베자 돌궐이 도망가 흩어졌다. 화발[힐리발]이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처자를 데리고 [당나라로] 도망쳐 오자 좌무위대장군 연산군왕(燕山郡王)으로 삼고 그의 아내를 금산공주라고 하며 재물을 아주 후하게 내려주었다. 양아지[특륵]이 죽자 종친(宗親) 중에 3등 이상을 그의 집에 가서 조문하게 했다. 이때 다시 돌궐이 편지를 올려 혼인을 원했으나 황제가 답을 하지 않았다.

玄宗立絕和親默啜乃遣子楊我支特勒入宿衞固求昏以蜀王女南和縣主妻之下書諭尉可汗明年使子移涅可汗引同俄特勒火拔頡利發石失畢精騎攻北庭都護郭虔瓘擊之斬同俄城下虜奔解火拔不敢歸攜妻子來奔拜左武衞大將軍燕山郡王號其妻為金山公主賜賚優縟楊我支死詔宗親三等以上弔其家是時突厥再上書求昏帝未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