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52, 신당서 돌궐전-4)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 신당서 돌궐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新唐書 卷215 돌궐전(突厥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新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五上, 突厥上 번 역 문 | 원 문 | 사성 원년(684년)과 수공 원년(685) 사이에 [돌궐이] 이어 삭[주]와 대[주]를 노략질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잡아갔다. 좌옥금위중랑장 순우처평이 양곡도총관이 되어 적을 총재산에서 공격해 흔주에 이르러 적과 만나 격전을 벌였으나 싸움이 불리해져 5천 명이나 죽었다. 다시 천관상서 위대가를 연연도대총관으로 삼아 [돌궐을] 토벌하게 했다. 이듬해(686) [돌궐이] 창평[현]에 쳐들어오자 우응양위대장군 흑치상지가 공격해 격퇴했다. 다시 [돌궐이] 삭주 땅으로 들어오자 [흑치]상지가 황화퇴(黃花堆: 지금 산서성 응현 서북 30리 황화령에 있었다)에서 그들과 싸워 돌궐을 패배시켰고 도망가는 것을 40리나 쫓아가자 고비를 지나 달아났다. 우감문위중랑장 찬보벽이 쫓는 일을 맡았는데, 돌궐을 바로 깨뜨려 요행으로 공을 얻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서 바로 첩자를 불러 모아 장성 밖에 2천 리까지 내보냈으며 첩자가 돌궐의 대비가 없다고 하자 바로 습격했다. 도착하려고 할 때 군에 말이 새서 돌궐이 백성을 정리해 나오자 모두 싸우다 죽고 패했는데, [찬]보벽만이 도망쳐왔고 전군은 몰살을 당했다. 무후(武后)가 화가 나서 [찬]보벽을 죽이고, 골돌록을 불졸록(不卒祿)이라고 했다. 얼마 있다가 [아사덕]원진이 돌기시를 공격해 싸우다 죽었다. 천수 년간(690~691) 초기에 [아사나]골돌록이 죽자 그의 아들이 어려서 즉위하지 못했다. | 嗣聖、垂拱間,連寇朔、代,掠吏士。左玉鈐衞中郎將淳于處平為陽曲道總管,將擊賊總材山,至忻州與賊遇,鏖戰不利,死者五千人。更以天官尚書韋待價為燕然道大總管討之。明年,入昌平,右鷹揚衞大將軍黑齒常之擊卻之。復入朔州地,常之與戰黃花堆,虜敗,追奔四十里,遯過磧。右監門衞中郎將爨寶璧當追,意虜即破,欲幸取功,乃募諜出塞二千里,間虜無備,趨襲之。將至,漏言于軍,虜得整眾出,皆死戰,大敗,寶璧跳還,舉軍沒。武后怒,誅寶璧,改骨咄祿曰不卒祿。俄而元珍攻突騎施,戰死。天授初,骨咄祿死,其子幼, 不得立。 | 묵철이 스스로 즉위해 가한이 되었고, [가한의] 자리를 뺏은 지 몇 년이 지나자 비로소 영주를 공격해 병사와 백성들을 많이 죽이고 잡아갔다. 무후가 설회의를 삭방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내사(內史) 이소덕을 행군장사로 삼고, 봉각란대평장사 소미도를 사마로 삼아 삭방도총관 계필명(계필하력의 아들), 안문도총관 왕효걸, 위화도총관 이다조, 풍안도총관 진령영, 한해도총관 진양명 등 대저 18명의 장군과 병사를 거느리고 장성을 나아가 중국[華]과 다른 족속[蕃] 보병과 기병을 뒤섞어 공격했으나 돌궐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무후가] 얼마 있다가 [왕]효걸을 삭방도행군총관으로 삼아 변경을 방비하라고 명령했다. | 默啜自立為可汗,篡位數年,始攻靈州,多殺略士民。武后以薛懷義為朔方道行軍大總管,內史李昭德為行軍長史,鳳閣鸞臺平章事蘇味道為司馬,率朔方道總管契苾明、鴈門道總管王孝傑、威化道總管李多祚、豐安道總管陳令英、瀚海道總管田揚名等凡十八將軍兵出塞,雜華蕃步騎擊之,不見虜,還。俄詔孝傑為朔方道行軍總管備邊。 | 거란 이진충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묵철이 적을 공격해 스스로 [당을 위해] 일하겠다고 청했고, [황제가] 조칙을 내려 그렇게 하라고 했다. [묵철에게] 좌위대장군 귀국공을 제수하고, 좌표도위장군 염지미를 [돌궐] 부락에 보내 [묵철을] 천선가한(遷善可汗)으로 책봉했다. 묵철이 바로 군대를 이끌고 거란을 공격했는데, 마침 [이]진충이 죽자 송막 부락을 습격해 손만영 처자와 군수 물자를 모두 얻었고 추장들도 무너뜨렸다. [무]후가 그가 [거란을] 공격한 것을 좋게 여겨 다시 조칙을 내려 [염]지미에게 부절을 갖고 가서 묵철을 특진 힐질리시대선우 입공보국가한에 책봉하게 했다. 명령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돌궐이] 바로 영[주]와 승주를 공격해 마음대로 죽이고 약탈했다가 지키고 있던 장군에게 패배했다. [묵철이] 다시 사자를 보내 사죄하며 [무]후의 아들이 되기를 청하고 딸이 있어 왕에게 [시집보낼 것을] 청하면서 또 여섯 주(州)의 항호(降戶)를 달라고 했다. 이전에 돌궐에서 안으로 들어온 자를 나뉘어 풍[주]·승[주]·영[주]·하[주]·삭[주]·대[주] 사이에 살도록 했는데, [이들을] 하곡(河曲: 황하강이 구부러지는 지역) 여섯 주의 항복한 사람이라 한 것이다. 묵철이 또 곡식과 씨앗 10만 곡, 농기구 3천 구, 무쇠 수만 근을 달라고 하자 [무]후가 허락해주지 않았고 재상 이교 역시 할 수 없다고 했다. 묵철이 화를 내며 방자한 말을 하며 [당나라의] 사자 사빈경 전귀도를 잡아두었다. 이에 납언 요숙 등이 [보내] 줄 것을 건의하자 바로 곡식과 농기구, 항복한 백성 수천 장을 돌려보냈는데, 이로 인해 돌궐이 마침내 강성하게 되었다. | 契丹李盡忠等反,默啜請擊賊自效,詔可。授左衞大將軍、歸國公,以左豹韜衞將軍閻知微即部冊拜遷善可汗。默啜乃引兵擊契丹,會盡忠死,襲松漠部落,盡得孫萬榮妻子輜重,酋長崩潰。后美其攻,復詔知微持節冊默啜為特進、頡跌利施大單于、立功報國可汗。未及命,俄攻靈、勝二州,縱殺略,為屯將所敗。又遣使者謝,請為后子,復言有女,願女諸王,且求六州降戶。初,突厥內屬者分處豐、勝、靈、夏、朔、代間,謂之河曲六州降人。默啜又請粟田種十萬斛,農器三千具,鐵數萬斤,后不許,宰相李嶠亦言不可。默啜怨,為慢言,執使者司賓卿田歸道。於是納言姚璹等建請與之,乃歸粟、器、降人數千帳,繇是突厥遂彊。 | [무후가] 조칙을 내려 회양왕 무연수(武延秀)에게 그의 딸을 맞이해 왕비로 삼으라고 하고, 임시 춘관상서 [염]지미에게 사빈경 양난장과 함께 부절을 갖고 호송하라고 했다. [이에] 묵철이 함부로 말했다. “내가 딸을 당나라 천자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지금 [무]후 집안의 아들이 웬 말인가! 또 내가 대대로 당나라에 귀부했는데, 지금 듣자하니 그 아들과 자손은 두 사람만 남아 있다고 하니 내가 마땅히 [당나라 황제로] 즉위를 해야겠다.” 바로 [무]연수 등을 잡아 두고 망령되게 [염]지미를 불러 가한이라고 하며 몸소 10명의 기병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해 정난[군](靜難軍: 지금 섬서성 수덕현 서쪽)과 평적[군](平狄軍: 지금 산서성 삭주시 동북쪽으로 30리 떨어진 마읍촌), 청이군(淸夷軍: 지금 하북성 회래현 동남의 옛 회래) 등의 군진을 공격하자 정난군사(靜難軍使) [좌옥검위장군] 모용현즉(慕容玄崱)이 병사 5천 명을 데리고 항복했고, [그 다음] 돌궐이 들어와 규[주]와 단[주]를 포위하자 [무]후가 사속경 무중규를 천병중도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위장군 사타충의(沙吒忠義)를 천병서도총관으로 삼고, 유주도독 장인단을 천병동도총관으로 삼아 군대 약 30만 명으로 공격했으며 우우림대장군 염경용과 이다조를 천병서도후군총관으로 삼으니 군대가 또한 15만 명이었다. 묵철이 울주 비호현을 격파하고 나아가 정주에 해를 가했으며 [정주]자사 손언고를 죽이고 집들을 불살라 향리의 촌락들이 텅비게 되었다. [무]후가 화가나서 조칙을 내려 묵철을 죽이는 사람을 왕으로 삼고 현상금을 준다고 하며 [그의] 이름을 바꿔 참철(斬啜)이라고 불렀다. 돌궐이 조주를 둘러싸자 [조주]장사 당파약이 응전했으나 [돌궐이] 들어와 [조주]자사 고예를 죽이고 나아가 상주(相州)까지 공격했다. [무후가] 조칙을 내려 사타충의를 하북도전군총관, 이다조를 후군총관, 장군 우이공 복부순을 기병총관(奇兵總管)으로 삼아 돌궐을 공격하게 했다. 이 때 중종(中宗)이 방릉[현]에서 돌아와 황태자가 되자 [무후가] 행군대원수를 배(拜: 부여)하고, 납언 적인걸을 부[원수], 문창우승(文昌右丞) 송현상을 장사로, 좌숙정대어사중승 곽헌가를 사마로, 우숙정대어사중승 길욱을 감군사(監軍使)로, 장군 부여문선(扶餘文宣) 등 여섯 사람을 자총관(子總管)으로 삼았다. 아직 [당조의 군대가 출정]하지 않자 묵철이 [이런 소식을] 듣고 조[주]와 정[주]를 뺏어 남녀 8, 9만 명을 잡아 모두 땅에 묻고 오회도를 빠져나가 물러났는데, 지나가는 곳의 사람과 가축, 금폐, 자녀 모두를 빼앗아 차지했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바라만 보고 감히 싸우지 못했고, 오직 적인걸만이 군대를 이끌고 추격했다가 미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 詔淮陽王武延秀聘其女為妃,詔知微攝春官尚書,與司賓卿楊鸞莊持節護送。默啜猥曰:「我以女嫁唐天子子,今乃后家子乎!且我世附唐,今聞其子孫獨二人在,我當立之。」即囚延秀等,妄號知微為可汗,自將十萬騎南向擊靜難、平狄、清夷等軍,靜難軍使慕容玄崱以兵五千降。虜入圍媯、檀,后詔司屬卿武重規為天兵中道大總管,右武威衞將軍沙吒忠義為天兵西道總管,幽州都督張仁亶為天兵東道總管,兵凡三十萬擊之;右羽林大將軍閻敬容、李多祚為天兵西道後軍總管,兵亦十五萬。默啜破蔚州飛狐,進殘定州,殺刺史孫彥高,焚廬舍,鄉聚為空。后怒,下詔購斬默啜者王之,更號曰斬啜。虜圍趙州,長史唐波若應之,入殺刺史高叡,進攻相州。詔沙吒忠義為河北道前軍總管,李多祚為後軍總管,將軍嵎夷公福富順為奇兵總管,擊虜。時中宗還自房陵,為皇太子,拜行軍大元帥,以納言狄仁傑為副,文昌右丞宋玄爽為長史,左肅政臺御史中丞霍獻可為司馬,右肅政臺御史中丞吉頊為監軍使,將軍扶餘文宣等六人為子總管。未行,默啜聞之,取趙、定所掠男女八九萬悉阬之,出五回道去,所過人畜、金幣、子女盡剽有之,諸將皆顧望不敢戰,獨狄仁傑以兵追之,不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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