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 13년(639)] 황제가 [이전에] 구성궁에 갔는데, 돌리[가한]의 동생 [아사나]결사솔이 낭장숙위로 있다가 몰래 종족 사람[種人]들과 결탁해 모반을 계획하고 [아사나]하라골을 을러 북쪽으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그의 무리들에게 말했다. “내가 진왕(晉王: 당태종)이 사경(四更: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의장을 갖추고 나갈 것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기회를 틈타 갑자기 나가면 행궁을 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 저녁 큰 바람 불고 어두워져 [진]왕이 나가지 않자 [아사나]결사솔은 계획이 새어나갔다고 걱정해 중영(中營)에 활을 쏘고 시끄럽게 하면서 사람을 죽였는데, 위사 등이 모두 반격하자 바로 도망가면서 마굿간지기를 죽이고 말을 훔쳐 위[수]를 건너고자 했으나 순찰병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고, [아사나]하라골은 사면되어 영외(嶺外)로 유배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다시 돌궐을 중국에 두는 것에 대한 정당함과 부당함에 대해 말하자 황제 역시 걱정을 했고, 바로 아사나 사마(阿史那思摩)를 세워 을미니숙사리필가한(乙彌泥孰俟利苾可汗)으로 삼아 이씨 성을 내리고 아장을 하북에 세워 돌궐을 모두 옮겨 옛 땅으로 돌아가 살게 했다. | 帝幸九成宮,突利弟結社率以郎將宿衞,陰結種人謀反,劫賀邏鶻北還,謂其黨曰:「我聞晉王丁夜得辟仗出,我乘間突進,可犯行在。」是夕,大風冥,王不出,結社率恐謀漏,即射中營,譟而殺人,衞士等共擊之,乃走,殺廄人盜馬,欲度渭,徼邏禽斬之,赦賀邏鶻,投嶺外。於是羣臣更言處突厥中國非是,帝亦患之,乃立阿史那思摩為乙彌泥孰俟利苾可汗,賜氏李,樹牙河北,悉徙突厥還故地。 |
사마라는 자는 힐리(가한)의 (친)족인이다. 시필(가한)과 처라(가한)은 그 용모가 호인과 유사하고 돌궐과 같지 않아 아사나(씨)의 부족 무리가 아닌지 의심 받았기 때문에 처라(가한)과 돌리(가한)의 시기에는 늘 협필 특근이었음에도 끝내 군대를 관장하는 설이 되지 못했다. 무덕 초기(618년 부근)에 (사마가) 여러차례 조공하러 오자, 고조가 (사마를) 화순군왕에 책봉하였다. 그 나라가 어지럽게 되자 여러 부락이 대다수 중국에 귀순하였는데 오직 사마만이 힐리(가한)을 쫒아갔다가 끝내 그와 함께 생포되었다. 태종이 그의 충성스러움을 가상스럽게 여겨 우무후대장군、화주도독을 제수하고 힐리(가한)의 옛 부락을 하남의 땅에서 통솔하도록 명하고, 얼마후 회화군왕으로 고쳐 책봉하였다. 그런데 [그가 하북으로] 옮겨가려고 할 때 [부락] 안에서 설연타를 무서워해서 감히 변경을 나가려 하지 않았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사농경 곽사본에게 부절을 들고 설연타에게 편지를 주라고 했는데,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은 예의[를 지키는 나라]로 일찍이 다른 나라를 없앤 적이 없었고, [단지] 힐리[가한]만이 포악하고 잔인했기 때문에 정벌해서 잡은 것이지 그 땅과 사람을 탐낸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항복한 부락들을 하남에 살게 했고, [그곳의] 좋은 풀과 아름다운 샘은 목축에 이로워 백성들이 날로 늘어나니 지금 다시 [아사나]사마를 가한으로 삼아 그 옛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한다. [설]연타가 먼저 [가한으로] 책봉을 받았고 돌궐보다 나으므로, 고비 북쪽 모두를 [설]연타가 맡고 그 남쪽은 돌궐이 갖도록 하라. 각자 경계를 지키며 서로 침범하지 말 것이고, 약속을 저버리면 짐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할 것이다.” [아사나]사마가 이에 [하북으로] 간다고 하자 황제가 주연을 베풀며 [아사나]사마를 앞으로 당겨와 말했다. “한 포기 풀과 한 그루의 나무도 심어 그것이 무성하게 되는 것을 보면 기쁜데, 어찌 짐이 너의 부락 사람을 기르고 너의 말과 양을 기르는데 이전보다 줄일 수 있겠느냐! 너의 부모 묘소가 하북에 있고 지금 다시 옛 조정을 회복했기 때문에 잔치를 열어 가는 것을 위로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사나]사마가 울면서 잔을 들어 만세를 축수하고 또 말했다. “망하고 남은 것을 폐하가 옛 고향에 뼈를 묻을 수 있게 해주시니 자손만대로 당나라를 섬겨 두터운 덕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이에 (예부상서) 조군왕 [이]효공, 홍려경 유선인을 [아사나]사마 부락에 가게 해서 황하 가에 제단을 쌓고 책문에 절하고 받게 하고 북과 독[纛]을 내려주었으며 또한 조칙을 내려 좌둔위장군 아사나 충(阿史那忠: 아사나 소니실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고, 좌무위장군 아사나 니숙(阿史那泥孰)을 우현왕으로 삼아 보좌하게 했다. | 思摩,頡利族人也,父曰咄六設。始,啟民奔隋,磧北諸部奉思摩為可汗,啟民歸國,乃去可汗號。性開敏,善占對,始畢、處羅皆愛之。然以貌似胡,疑非阿史那種,故但為夾畢特勒,而不得為設。武德初,數以使者來,高祖嘉其誠,封和順郡王。及諸部納款,思摩獨留,與頡利俱禽,太宗以為忠,授右武候大將軍、化州都督,統頡利故部居河南,徙懷化郡王。及是將徙,內畏薛延陀,不敢出塞。帝詔司農卿郭嗣本持節賜延陀書,言:「中國禮義,未始滅人國,以頡利暴殘,伐而取之,非貪其地與人也。故處降部於河南,薦草美泉,利其畜牧,眾日孳蕃,今復以思摩為可汗,還其故疆。延陀受命在前,長於突厥,舉磧以北,延陀主之;其南,突厥保之。各守而境,無相鈔犯,有負約,我自以兵誅之。」思摩乃行,帝為置酒,引思摩前曰:「蒔一草一木,見其滋廡以為喜,況我養爾部人,息爾馬羊,不減昔乎!爾父母墳墓在河北,今復舊廷,故宴以慰行。」思摩泣下,奉觴上萬歲壽,且言:「破亡之餘,陛下使存骨舊鄉,願子孫世世事唐,以報厚德。」於是趙郡王孝恭、鴻臚卿劉善就思摩部,築壇場河上,拜受冊,賜鼓纛,又詔左屯衞將軍阿史那忠為左賢王,左武衞將軍阿史那泥孰為右賢王,相之。 |
설연타는 태종이 사마를 보내 황하 북쪽으로 건너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 부락이 오히려 적북에 붙으려 한다고 생각하고,경기병을 모아 놓고,도착하는 것을 엿본 다음 공격하였다. 태종이 칙서를 보내 말하였다.:「멋대로 서로 침략하는 자는,나라에 일정한 형벌이 있다.」(설)연타가 말하였다.:「지존이 (사신)을 보내 서로 침략하고 노략질 하지 말라고 하였으니,어찌 감히 조칙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돌궐은 번복하여 믿기 어렵고,그들이 깨지기 전에는,해마다 중국인을 죽인 게,천만을 헤아렸습니다. 지존이 돌궐을 깨고,마땅히 노비로 거두어,장차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했는데,오히려 자식같이 길렀으나,결사솔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으니,이런 짐승 같은 마음을 가진 무리는,믿을 수 없습니다。 신이 받은 은혜는 심히 깊으나,지존을 위해 (그들을) 죽이기를 청합니다.」 [정관] 15년(641)에 [아사나]사마가 백성 10여만과 정예병사[勝兵] 4만, 말 9만 필을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옛 정양성에 아장을 설치했는데, 그 땅은 남쪽으로 황하에 접하고 북쪽으로 백도[천]에 닿았으며 가축을 기르는 곳이 넓어 북쪽 땅[龍荒]에서도 최고의 땅이었기 때문에 돌궐[과 설연타]가 이익을 다투게 되었다. [아사나]사마가 [당조에] 사신을 보내 감사하며 말했다. “[황제 폐하의] 은덕을 입어 부락의 추장이 되니 대대로 [당]나라의 한 마리 개가 되어 천자의 북쪽 문을 지키고자 하는데, 만약 [설]연타가 침입을 하고 핍박을 하게 되면 장성 안에 들어가 [살]기를 원합니다.” [이에 황제가] 조칙을 내려 허락해주었다. | 薛延陀聞突厥之北,恐其眾奔亡度磧,勒兵以待。及使者至,乃謝曰:「天子詔毋相侵,謹頓首奉詔。然突厥酣亂翻覆,其未亡時殺中國人如麻,陛下滅其國,謂宜收種落皆為奴婢,以償唐人。乃養之如子,而結社率竟反,此不可信明甚。後有亂,請終為陛下誅之。」十五年,思摩帥眾十餘萬、勝兵四萬、馬九萬匹始度河,牙於故定襄城,其地南大河,北白道,畜牧廣衍,龍荒之最壤,故突厥爭利之。思摩遣使謝曰:「蒙恩立為落長,實望世世為國一犬,守吠天子北門,有如延陀侵逼,願入保長城。」詔許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