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49, 신당서 돌궐전-1)

상 상 2015. 2. 23. 17:33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49, 신당서 돌궐전-1)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신당서 돌궐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新唐書 卷215 돌궐전(突厥)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五上, 突厥上

번 역 문

원 문

[정관 13(639)] 황제가 [이전에] 구성궁에 갔는데, 돌리[가한]의 동생 [아사나]결사솔이 낭장숙위로 있다가 몰래 종족 사람[種人]들과 결탁해 모반을 계획하고 [아사나]하라골을 을러 북쪽으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그의 무리들에게 말했다. “내가 진왕(晉王: 당태종)이 사경(四更: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의장을 갖추고 나갈 것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기회를 틈타 갑자기 나가면 행궁을 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 저녁 큰 바람 불고 어두워져 []왕이 나가지 않자 [아사나]결사솔은 계획이 새어나갔다고 걱정해 중영(中營)에 활을 쏘고 시끄럽게 하면서 사람을 죽였는데, 위사 등이 모두 반격하자 바로 도망가면서 마굿간지기를 죽이고 말을 훔쳐 위[]를 건너고자 했으나 순찰병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고, [아사나]하라골은 사면되어 영외(嶺外)로 유배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다시 돌궐을 중국에 두는 것에 대한 정당함과 부당함에 대해 말하자 황제 역시 걱정을 했고, 바로 아사나 사마(阿史那思摩)를 세워 을미니숙사리필가한(乙彌泥孰俟利苾可汗)으로 삼아 이씨 성을 내리고 아장을 하북에 세워 돌궐을 모두 옮겨 옛 땅으로 돌아가 살게 했다.

帝幸九成宮突利弟結社率以郎將宿衞陰結種人謀反劫賀邏鶻北還謂其黨曰:「我聞晉王丁夜得辟仗出我乘間突進可犯行在。」是夕大風冥王不出結社率恐謀漏即射中營譟而殺人衞士等共擊之乃走殺廄人盜馬欲度渭徼邏禽斬之赦賀邏鶻投嶺外於是羣臣更言處突厥中國非是帝亦患之乃立阿史那思摩為乙彌泥孰俟利苾可汗賜氏李樹牙河北悉徙突厥還故地

사마라는 자는 힐리(가한)()족인이다. 시필(가한)과 처라(가한)은 그 용모가 호인과 유사하고 돌궐과 같지 않아 아사나()의 부족 무리가 아닌지 의심 받았기 때문에 처라(가한)과 돌리(가한)의 시기에는 늘 협필 특근이었음에도 끝내 군대를 관장하는 설이 되지 못했다. 무덕 초기(618년 부근)(사마가) 여러차례 조공하러 오자, 고조가 (사마를) 화순군왕에 책봉하였다. 그 나라가 어지럽게 되자 여러 부락이 대다수 중국에 귀순하였는데 오직 사마만이 힐리(가한)을 쫒아갔다가 끝내 그와 함께 생포되었다. 태종이 그의 충성스러움을 가상스럽게 여겨 우무후대장군화주도독을 제수하고 힐리(가한)의 옛 부락을 하남의 땅에서 통솔하도록 명하고, 얼마후 회화군왕으로 고쳐 책봉하였다. 그런데 [그가 하북으로] 옮겨가려고 할 때 [부락] 안에서 설연타를 무서워해서 감히 변경을 나가려 하지 않았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사농경 곽사본에게 부절을 들고 설연타에게 편지를 주라고 했는데,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은 예의[를 지키는 나라]로 일찍이 다른 나라를 없앤 적이 없었고, [단지] 힐리[가한]만이 포악하고 잔인했기 때문에 정벌해서 잡은 것이지 그 땅과 사람을 탐낸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항복한 부락들을 하남에 살게 했고, [그곳의] 좋은 풀과 아름다운 샘은 목축에 이로워 백성들이 날로 늘어나니 지금 다시 [아사나]사마를 가한으로 삼아 그 옛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한다. []연타가 먼저 [가한으로] 책봉을 받았고 돌궐보다 나으므로, 고비 북쪽 모두를 []연타가 맡고 그 남쪽은 돌궐이 갖도록 하라. 각자 경계를 지키며 서로 침범하지 말 것이고, 약속을 저버리면 짐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할 것이다.”

[아사나]사마가 이에 [하북으로] 간다고 하자 황제가 주연을 베풀며 [아사나]사마를 앞으로 당겨와 말했다. “한 포기 풀과 한 그루의 나무도 심어 그것이 무성하게 되는 것을 보면 기쁜데, 어찌 짐이 너의 부락 사람을 기르고 너의 말과 양을 기르는데 이전보다 줄일 수 있겠느냐! 너의 부모 묘소가 하북에 있고 지금 다시 옛 조정을 회복했기 때문에 잔치를 열어 가는 것을 위로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사나]사마가 울면서 잔을 들어 만세를 축수하고 또 말했다. “망하고 남은 것을 폐하가 옛 고향에 뼈를 묻을 수 있게 해주시니 자손만대로 당나라를 섬겨 두터운 덕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이에 (예부상서) 조군왕 []효공, 홍려경 유선인을 [아사나]사마 부락에 가게 해서 황하 가에 제단을 쌓고 책문에 절하고 받게 하고 북과 독[]을 내려주었으며 또한 조칙을 내려 좌둔위장군 아사나 충(阿史那忠: 아사나 소니실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고, 좌무위장군 아사나 니숙(阿史那泥孰)을 우현왕으로 삼아 보좌하게 했다.

思摩頡利族人也父曰咄六設啟民奔隋磧北諸部奉思摩為可汗啟民歸國乃去可汗號性開敏善占對始畢處羅皆愛之然以貌似胡疑非阿史那種故但為夾畢特勒而不得為設武德初數以使者來高祖嘉其誠封和順郡王及諸部納款思摩獨留與頡利俱禽太宗以為忠授右武候大將軍化州都督統頡利故部居河南徙懷化郡王及是將徙內畏薛延陀不敢出塞帝詔司農卿郭嗣本持節賜延陀書:「中國禮義未始滅人國以頡利暴殘伐而取之非貪其地與人也故處降部於河南薦草美泉利其畜牧眾日孳蕃今復以思摩為可汗還其故疆延陀受命在前長於突厥舉磧以北延陀主之其南突厥保之各守而境無相鈔犯有負約我自以兵誅之。」思摩乃行帝為置酒引思摩前曰:「蒔一草一木見其滋廡以為喜況我養爾部人息爾馬羊不減昔乎爾父母墳墓在河北今復舊廷故宴以慰行。」思摩泣下奉觴上萬歲壽且言:「破亡之餘陛下使存骨舊鄉願子孫世世事唐以報厚德。」於是趙郡王孝恭鴻臚卿劉善就思摩部築壇場河上拜受冊賜鼓纛又詔左屯衞將軍阿史那忠為左賢王左武衞將軍阿史那泥孰為右賢王相之

설연타는 태종이 사마를 보내 황하 북쪽으로 건너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그 부락이 오히려 적북에 붙으려 한다고 생각하고경기병을 모아 놓고도착하는 것을 엿본 다음 공격하였다. 태종이 칙서를 보내 말하였다.:「멋대로 서로 침략하는 자는나라에 일정한 형벌이 있다.()연타가 말하였다.:「지존이 (사신)을 보내 서로 침략하고 노략질 하지 말라고 하였으니어찌 감히 조칙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돌궐은 번복하여 믿기 어렵고그들이 깨지기 전에는해마다 중국인을 죽인 게천만을 헤아렸습니다. 지존이 돌궐을 깨고마땅히 노비로 거두어장차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했는데오히려 자식같이 길렀으나결사솔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으니이런 짐승 같은 마음을 가진 무리는믿을 수 없습니다신이 받은 은혜는 심히 깊으나지존을 위해 (그들을) 죽이기를 청합니다.

[정관] 15(641)[아사나]사마가 백성 10여만과 정예병사[勝兵] 4, 9만 필을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옛 정양성에 아장을 설치했는데, 그 땅은 남쪽으로 황하에 접하고 북쪽으로 백도[]에 닿았으며 가축을 기르는 곳이 넓어 북쪽 땅[龍荒]에서도 최고의 땅이었기 때문에 돌궐[과 설연타]가 이익을 다투게 되었다. [아사나]사마가 [당조에] 사신을 보내 감사하며 말했다. “[황제 폐하의] 은덕을 입어 부락의 추장이 되니 대대로 []나라의 한 마리 개가 되어 천자의 북쪽 문을 지키고자 하는데, 만약 []연타가 침입을 하고 핍박을 하게 되면 장성 안에 들어가 []기를 원합니다.” [이에 황제가] 조칙을 내려 허락해주었다.

薛延陀聞突厥之北恐其眾奔亡度磧勒兵以待及使者至乃謝曰:「天子詔毋相侵謹頓首奉詔然突厥酣亂翻覆其未亡時殺中國人如麻陛下滅其國謂宜收種落皆為奴婢以償唐人乃養之如子而結社率竟反此不可信明甚後有亂請終為陛下誅之。」十五年思摩帥眾十餘萬勝兵四萬馬九萬匹始度河牙於故定襄城其地南大河北白道畜牧廣衍龍荒之最壤故突厥爭利之思摩遣使謝曰:「蒙恩立為落長實望世世為國一犬守吠天子北門有如延陀侵逼願入保長城。」詔許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