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51, 신당서 돌궐전-3)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 신당서 돌궐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新唐書 卷215 돌궐전(突厥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新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五上, 突厥上 번 역 문 | 원 문 | 조로 초에 선우[도호]부의 대추(大酋)인 [아사덕] 온부(溫傅)와 [아사덕]봉직(奉職)의 두 부락 이 이반해 아사나 니숙복을 가한으로 삼으니 24주의 추장들이 모두 반발해 응수를 했다. 이에 홍려경 선우대도호부 장사(長史) 소사업과 좌령군위장군 원대지, 우천우위장군 이경가(李景嘉)가 토벌을 하려고 했는데, [당군이] 승리만 믿고 대비를 갖추지 않았다가 마침 비와 눈이 내려 군사들의 손발이 얼어 터지고 오히려 돌궐에게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해 죽거나 잡힌 것이 만여 명이 되자 [원]대지 등이 나머지 병졸을 거두어 싸워가며 후퇴해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소]사업은 계주(桂州) 로 유배되었고, 나머지는 연루되어 면관(免官) 되었다. 다시 예부상서 배행검(裴行儉)을 정양도행군대총관으로 제수하여, 태복소경 이사문(李思文), 영주도독(營州都督) 주도무, 서군(西軍) 정무정(程務挺), 동군(東軍) 이문간과 군졸 약 30만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자를 잡기 위해 공격[하게] 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우금오위장군 조회순을 정형[현]에, 우무위[위]장군 최헌을 강[현]과 용문[현]에 주둔하게 했다. 이듬해(680) [배]행검이 흑산에서 싸워 [돌궐을] 크게 격파하자 그 부하가 [아사나]니숙복을 죽여 그 머리를 갖고 항복하면서 [아사덕]온부와 [아사덕]봉직마저 잡아 귀순하자 나머지 백성들이 낭산에 숨었다. 아직 돌궐이 평정되지 않았을 때 탈구[鵽:새의 이름]가 울며 떼를 지어 날아 장성 안으로 들어오자 관리가 [이런 징조를 해석해] 말했다. “[이 새들은] 소위 탈구[鵽]로 [만약 이것들이] 남쪽으로 날아오면 돌궐[胡]이 반드시 온다는 뜻입니다.” 봄이 되어 [새들이] 돌아갔다가 모두 영[주]와 하[주] 사이에 떨어졌는데 [살펴보니] 모두 머리가 없었고, [이런 징조와 맞아 떨어져 아사나]니숙[복]이 과연 패망했다. 낭산에 있던 백성들이 운주를 약탈하자 도독 두회철과 우령군중랑장 정무정이 쫓아냈다. | 調露初,單于府大酋溫傅、奉職二部反,立阿史那泥孰匐為可汗,二十四州酋長皆叛應之。乃以鴻臚卿單于大都護府長史蕭嗣業、左領軍衞將軍苑大智、右千牛衞將軍李景嘉討之,恃勝不設備,會雨雪,士皸寒,反為虜襲,大敗,殺略萬餘人,大智等收餘卒,行且戰,乃免。於是嗣業流桂州,餘坐免官。更拜禮部尚書裴行儉為定襄道行軍大總管,率太僕少卿李思文、營州都督周道務、西軍程務挺、東軍李文暕,士無慮三十萬,捕擊反者。詔右金吾將軍曹懷舜屯井陘,右武衞將軍崔獻屯絳、龍門。明年,行儉戰黑山,大破之,其下斬泥孰匐,以首降,禽溫傅、奉職以還,餘眾保狼山。始虜未叛,鳴鵽羣飛入塞,吏曰:「所謂突厥雀者,南飛,胡必至。」比春還,悉墮靈、夏間,率無首,泥孰果亡。狼山眾掠雲州,都督竇懷哲、右領軍中郎將程務挺逐出之。 | 영융 년간에 [아사덕]온부의 부락 [사람들]이 다시 힐리[가한] 족속의 아들인 [아사나]복념(阿史那伏念)을 하주(夏州)에서 맞아들여 황하를 건너 도망가서 추대해 가한으로 삼자 여러 부락이 호응했다. 이듬해(681)에 [돌궐이] 마침내 원[주](原州)과 경[주](慶州: 지금 감숙성 경양현) 두 주를 약탈하자 [황제가] 다시 조칙을 내려 [배]행검을 대총관으로, 우무위[위]장군 조회순, 유주도독 이문간을 부[총관]으로 삼으라고 했다. 첩자가 [아사나]복념과 [아사덕]온부가 흑사[성]에 있는데 기근이 심해 경장 기병만으로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속여 말했다. [조]회순만이 [이 말을] 믿고 경장한 군사를 이끌고 빠른 길로 흑사[성]에 갔으나 돌궐을 보지 못하고 설연타의 남은 부락만을 잡아 항복시켰을 뿐이었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장성 인근에 왔다가 [아사덕]온부를 만나 싸웠는데 서로 죽인 것이 비슷했다. [배]행검이 군대를 대[주]의 경구(陘口)에 주둔시키고 [돌궐 내부를] 이간하는 계책을 썼기 때문에 [아사나]복념과 [아사덕]온부가 서로 틈이 생기자 [아사덕온부가] 군대를 보내 [아사나]복념을 공격해 패배시켰다. [아사나]복념이 도망하다가 [조]회순과 만나 또 싸움을 하루 동안 벌였는데, [조회순은 아사나]복념에게 [끝내] 패배해 군대를 버리고 운중으로 도망갔다. 돌궐에게 쫓겨 죽은 병사들이 셀 수 없었는데, 모두의 머리가 남쪽으로 엎드려 있었다. [조]회순은 희생 재물을 잡아 [아사나]복념과 결맹을 하고서야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아사나]복념이 거듭 패하자 군수 물자와 처자를 금아산에 두고, 경장 기병을 거느리고 [조]회순을 공격했는데, 마침 [배]행검이 부장을 보내 [돌궐의] 군수 물자를 빼앗아 바로 돌아오자 돌아갈 곳이 없게 되어 [아사나복념이] 바로 북쪽의 세사(細沙)로 도망가 숨었다. [배]행검이 선우도호부의 병사들에게 추격을 명령했는데, [아사나]복념이 당나라 군대가 멀리까지 오지 못할 것이라고 방비를 갖추지 않았다가 군대가 오자 놀라 싸워보지도 못하고, 결국 사자를 샛길로 보내 [배]행검에게 와서 [아사덕]온부를 잡아 항복하니, [배]행검이 [아사나복념을] 사로잡아 경사로 보내서 동시(東市) 에서 목을 벴다. | 永隆中,溫傅部又迎頡利族子伏念於夏州,走度河,立為可汗,諸部響應。明年,遂寇原、慶二州。復詔行儉為大總管,以右武衞將軍曹懷舜、幽州都督李文暕副之。諜者紿言伏念、溫傅保黑沙,飢甚,可輕騎取也。懷舜獨信之,輕兵倍道至黑沙,乃不見虜,得薛延陀餘部,降之;引還至長城,遇溫傅與戰,所殺相當。行儉兵壁代之陘口,縱反間,故伏念、溫傅相貳,因遣兵擊伏念,敗之。伏念走,與懷舜遇,行且戰一日,為伏念所破,棄軍奔雲中,士為虜所乘,死不可算,皆南首仆。懷舜殺牲與伏念盟,乃免。伏念益北,留輜重妻子保金牙山,以輕騎將襲懷舜,會行儉遣部將掩得其輜重,比還,無所歸,乃北走保細沙。行儉縱單于鎮兵躡之,伏念意王師不能遠,不設備,及兵至,惶駭不得戰,遂遣使間道詣行儉,執溫傅降,行儉虜之,送京師,斬東市。 | 영순(永淳) 원년(682)에 [아사나]골돌록이 또 반란을 일으켰다. | 永淳元年,骨咄祿又反。 | [아사나]골돌록은 힐리[가한]의 친척으로 운중도독 사리원영(舍利元英) [휘하] 부락의 추장으로 대대로 토둔(吐屯)을 세습했다. [아사나]복념이 패하자 바로 도망해 흩어진 [부락 백성을] 불러 모아 총재산(總材山)에 숨어서 다시 흑사성을 수리했는데, 백성이 5천 명으로 9성(九姓: 철륵 9성의 준말) 의 가축과 말을 도둑질하여 점차 강하고 커지게 되자 바로 스스로 즉위해 가한이 되었고, 동생 묵철(黙啜)을 살(殺), [다른 동생] 돌실복을 엽호(葉護)로 삼았다. 이때 선우[도호]부 항호 부락을 검교(檢校) 하던 아사덕원진이 장사 왕본립에게 잡혀 있었다. 마침 [아사나]골돌록이 와서 노략질을 하자 [아사덕]원진이 여러 부락이 돌아가도록 설득함으로써 죄를 대신하겠다고 청하니 [왕본립이] 허락했다. [그런데 아사덕원진은] 가서 [아사나]골돌록에게 항복하고 그와 함께 모의해 마침내 아파달간이 되어 모든 병력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우[도호부]의 북부를 노략질하고 마침내 병주까지 공격해 남주자사 왕덕무를 죽이고, [군대를] 나누어 정주를 약탈하자 북평자사 곽왕원(霍王元)이 타격해 물러나게 했다. 또 규주(嬀州)를 공격해 선우도호부를 포위하고 사마 장행사(張行師)를 죽였으며 울주를 공격해 자사 이사검을 죽이고 풍주도독 최지변을 사로잡았다. [무측천이]조칙을 내려 우무위[위]장군 정무정을 선우도안무대사로 삼아 변경을 수비하게 했다. | 骨咄祿,頡利族人也,雲中都督舍利元英之部酋,世襲吐屯。伏念敗,乃嘯亡散,保總材山,又治黑沙城,有眾五千,盜九姓畜馬,稍彊大,乃自立為可汗,以弟默啜為殺,咄悉匐為葉護。時單于府檢校降戶部落阿史德元珍者,為長史王本立所囚。會骨咄祿來寇,元珍請諭還諸部贖罪,許之。至即降骨咄祿,與為謀,遂以為阿波達干,悉屬以兵。乃寇單于府北鄙,遂攻幷州,殺嵐州刺史王德茂,分掠定州,北平刺史霍王元軌擊卻之。又攻媯州,圍單于都護府,殺司馬張行師,攻蔚州,殺刺史李思儉,執豐州都督崔知辯。詔右武衞將軍程務挺為單于道安撫大使備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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