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50, 신당서 돌궐전-2)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 신당서 돌궐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新唐書 卷215 돌궐전(突厥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新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五上, 突厥上 번 역 문 | 원 문 | [정관] 15년(641)에 [아사나]사마가 백성 10여만과 정예병사[勝兵] 4만, 말 9만 필을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옛 정양성에 아장을 설치했는데, 그 땅은 남쪽으로 황하에 접하고 북쪽으로 백도[천](白道川)에 닿았으며 가축을 기르는 곳이 넓어 북쪽 땅[龍荒]에서도 최고의 땅이었기 때문에 돌궐[과 설연타]가 이익을 다투게 되었다. [아사나]사마가 [당조에] 사신을 보내 감사하며 말했다. “[황제 폐하의] 은덕을 입어 부락의 추장이 되니 대대로 [당]나라의 한 마리 개가 되어 천자의 북쪽 문을 지키고자 하는데, 만약 [설]연타가 침입을 하고 핍박을 하게 되면 장성 안에 들어가 [살]기를 원합니다.” [이에 황제가] 조칙을 내려 허락해주었다. [변경의 북방에서] 3년을 살았으나 그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그 부하들이 대부분 배반을 하게 되자 [아사나]사마가 부끄러워하며 조정에 들어와 숙위로 남기를 원하자, [황제 역시 그에게] 다시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를 제수해주었다. [그 이후에] 요[동](遼東)정벌에 따라갔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자 황제가 피를 빨아줄 만큼 그를 두터이 생각한 것이 이러했다. 돌아와 경사에서 죽자 병부상서 하주도독(夏州都督)으로 추증하고, 소릉(昭陵)에 배장하며 봉분을 백도산(白道山)의 모양으로 쌓았고 그의 노고를 기록하기 위해 화주(化州)에 비석을 세웠다. | 十五年,思摩帥眾十餘萬、勝兵四萬、馬九萬匹始度河,牙於故定襄城,其地南大河,北白道,畜牧廣衍,龍荒之最壤,故突厥爭利之。思摩遣使謝曰:「蒙恩立為落長,實望世世為國一犬,守吠天子北門,有如延陀侵逼,願入保長城。」詔許之。 居三年,不能得其眾,下多攜背,思摩慚,因入朝願留宿衞,更拜右武衞將軍。從伐遼,中流矢,帝為吮血,其顧厚類此。還,卒京師,贈兵部尚書、夏州都督,陪葬昭陵,築墳象白道山,為刊其勞,碑於化州。 | 우현왕 아사나 니숙은 [아사나]소니실의 아들이었다. [그가] 이전에 나라에 귀순했을 때 종실의 딸을 아내로 주고 충(忠)이라고 이름을 내려주었다. [아사나]사마를 따라 변경으로 나갔으나 중국을 생각하고 그리워해 사자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조정에 들어와 [황제를] 모실 것을 원하자 허락했다. | 右賢王阿史那泥孰,蘇尼失子也。始歸國,妻以宗女,賜名忠。及從思摩出塞,思慕中國,見使者必流涕求入侍,許之。 | [아사나]사마가 이미 나라를 통솔할 수 없게 되자 남아 있는 백성들이 점차 남쪽으로 [황]하를 건너오자 [조정에서 이들을] 나누어 승[주]과 하[주] 두 주에 살게 했다. 황제가 요[동]을 정벌하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돌궐을 하남에 두면 경사와 가까우니 동쪽으로의 원정을 하지 말 것을 주청했다. [하지만] 황제가 말했다. “무릇 임금 된 자가 어찌 이반할 것을 의심할 수 있겠느냐! [상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이 [하나라의] 걸[왕]과 [상나라의] 주[왕]의 백성을 교화하여 착하게 되지 않음이 없었고, 수나라는 무도해 천하가 모두 반란을 일으켜서 [반란 세력이] 비단 이적에만 그치지 않았다. 짐이 돌궐이 망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하남에 들어오게 해서 먹을 것을 주었더니, 그들이 가까운 [설]연타에게 도망가지 않고 멀리 있는 짐에게 귀순한 것은 짐에 대해 품은 생각이 깊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짐이 50년 동안 중국에 돌궐의 걱정을 없앤 계책인 것이다.” [아사나]사마의 백성들이 남하해 온 뒤 [을주]차비가한 이 바로 그 땅을 훔쳐 차지하였다. | 思摩既不能國,殘眾稍稍南度河,分處勝、夏二州。帝伐遼,或言突厥處河南,邇京師,請帝無東。帝曰:「夫為君者,豈有猜貳哉!湯、武化桀、紂之民,無不遷善,有隋無道,舉天下皆叛,非止夷狄也。朕閔突厥之亡,內河南以振贍之,彼不近走延陀而遠歸我,懷我深矣,朕策五十年中國無突厥患。」思摩眾既南,車鼻可汗乃盜有其地。 | 차비(車鼻) 역시 아사나[씨]의 족속으로 돌리[가한] 부락 사람이었는데, 이름이 곡발로 대대로 소가한이었다. 힐리[가한]이 패하자 여러 부락이 모두 [그를] 군장으로 삼고자 했는데, 마침 설연타가 가한을 칭하자마자 바로 귀순했다. 그 사람됨이 사려 깊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지략을 갖고 있어 백성들이 많이 귀부했는데, [설]연타가 위협하고 핍박하면서 죽이려고 하자 바로 그 부락을 이끌고 도망갔고, [설연타가] 수 천기로 [그를] 쫓았으나 이기지 못했다. 금산의 북쪽에 숨었는데, [그곳은] 세 면이 모두 끊겼고 오직 한 면만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정도였지만 땅은 평탄하고 넓었다. [차비가한이 이곳을] 차지하고, 정예병사 3만을 거느리고 을주차비가한이라 스스로 칭했는데, 장안으로부터 거리가 만리였고 서쪽으로 갈라록, 북으로 결골을 모두 통솔하며 때때로 [설]연타의 백성과 가축을 약탈하기도 했다. [설]연타가 이후에 약해지자 차비[가한]의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 | 車鼻,亦阿史那族,而突利部人也,名斛勃,世為小可汗。頡利敗,諸部欲共君長之,會薛延陀稱可汗,乃往歸焉。其為人沈果有智數,眾頗便附,延陀畏逼,將殺之,乃率所部遯去,騎數千尾追,不勝。竄金山之北,三垂斗絕,惟一面可容車騎,壤土夷博,即據之,勝兵三萬,自稱乙注車鼻可汗,距長安萬里,西葛邏祿,北結骨,皆幷統之,時時出掠延陀人畜。延陀後衰,車鼻勢益張。 | [정관] 21년(647) [차비가한이] 아들 사발라 특륵을 보내 토산품을 바치고 또한 몸소 조정에 들어오기를 청했다. 황제가 운휘장군 안조차와 우둔위랑장 한화를 보내 맞이하게 했는데, [그들이] 도착했는데도 차비[가한]이 전혀 조정에 들어올 뜻이 없자 [한]화가 갈라록과 모의를 해 같이 공격하려고 했고, 차비[가한]이 [이런 모의를] 눈치 채 [한]화가 차비[가한]의 아들 척필특륵과 싸우다 죽고 [안]조차도 죽임을 당했다. [정관 23년(649)에] 황제가 화를 내며 우효위랑장 고간(高侃)을 보내 회흘, 복골의 군대를 동원해 공격하자 그 [차비가한의] 대추장 가라록니숙궐사리발과 [발새복]처목곤막하돌 사근 등이 이어서 항복했다. [고]간의 군대가 아식산을 공격했는데, [차비가한의] 부락이 싸우려고 하지 않자 차비[가한]이 애첩을 끼고 수백 명의 기병과 함께 도망갔고, [고간이 그를] 쫓아 금산까지 가서 사로잡아 경사에 바쳤다. 고종이 질책하여 말했다. “힐리[가한]이 패할 때 네가 돕지 않은 것은 친족 간의 [정이] 없기 때문이고, [설]연타에게 졌는데 네가 도망한 것은 충성스러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짐이 선제께서 사로잡은 추장을 반드시 풀어주셨던 것을 보아, 네 죽음[에 마땅한 죄]를 용서한다.” 바로 포승을 풀어주며 몇 명의 포로만을 종묘사직에 제사하고 또한 소릉에 바쳤다. [차비가한을] 좌무위장군에 제수하고 저택을 내려주며 그 백성을 울독군산에 살게 하고 조칙을 내려 낭산도독부를 두어 통제하도록 했다. 이전에 그의 아들 갈만타가 울면서 [차비]가한에게 간하며 당나라로 귀부할 것을 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갈만타가 그의 아들 암삭을 보내 조정에 들어왔다가 이후에 와서 항복을 하자 좌둔위장군에 제수하고 신려주(지금 몽골공화국 서북부)를 두어 그의 백성을 통솔하도록 했다. 이에 돌궐이 모두 중국[封疆]의 신하가 되었다. 비로소 [인덕(麟德) 원년(664)]에 선우[대]도호부를 두어 낭산, 운중, 상건 [등] 세 곳의 도독[부]와 소농[주] 등 24곳 의 [자사]주를 통제하고, 한해도호부를 두어 금미, 신려 등 7곳의 도독[부]와 선악주, 하란주 등 8곳의 [자사]주를 통제하게 했다. 그리고 추장을 발탁해 도독(都督) 과 자사로 삼았다. 인덕 연간(664~665) 초기에 연연[도호부]를 한해도호부로 바꾸어 회흘을 통제하게 했고, 과거 한해도호부를 옛 운중성으로 옮겨 운중도호부라고 부르며 고비 이북의 번주(蕃州)를 모두 한해[도호부]에, 안쪽은 운중[도호부]에 속하게 했다. 운중[도호부]는 의성공주가 살던 곳으로 힐리[가한]이 망한 이후에 이정이 돌궐의 패배한 수백 장을 옮겨 살게 하며 아사덕[씨](阿史德氏) [출신의 인물을] 추장으로 삼았는데, 백성들이 점차 늘어나자 [친]왕 중의 하나를 가한으로 삼아서 [자신들을] 통솔하게 해달라는 의견을 올렸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지금의 가한은 과거 선우이다.” 이에 [인덕 원년(664)에] 운중[도독]부를 바꾸어 선우대도호부라 하고 은왕 [이]욱륜을 선우도호로 삼았다. 황제가 봉선을 가는데 도독 갈라록질리 등 30여 명이 모두 태산(泰山) 아래까지 따라갔고, 봉선이 끝나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봉선비에 그들의 이름을 새기도록 했다고 한다. 대저 30년 동안 북방에서 전투를 경계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 二十一年,遣子沙鉢羅特勒獻方物,且請身入朝。帝遣雲麾將軍安調遮、右屯衞郎將韓華往迎之,至則車鼻偃然無入朝意,華謀與葛邏祿共劫之,車鼻覺,華與車鼻子陟苾特勒鬬死,調遮被殺。帝怒,遣右驍衞郎將高偘發回紇、僕骨兵擊之,其大酋長歌邏祿泥孰闕俟利發、處木昆莫賀咄俟斤等以次降。偘師攻阿息山,部落不肯戰,車鼻攜愛妾,從數百騎走;追至金山,獲之,獻京師。高宗責曰:「頡利敗,爾不輔,無親也;延陀破,爾遯亡,不忠也。而罪當死,然朕見先帝所獲酋長必宥之,今原而死。」乃釋縛,數俘社廟,又見昭陵。拜左武衞將軍,賜居第,處其眾鬱督軍山,詔建狼山都督府統之。初,其子羯漫陀泣諫車鼻,請歸國,不聽。乃遣子菴鑠入朝,後來降,拜左屯衞將軍,建新黎州,使領其眾。於是突厥盡為封疆臣矣。始置單于都護府領狼山雲中桑乾三都督、蘇農等二十四州,瀚海都護府領金微新黎等七都督、仙萼賀蘭等八州。即擢領酋為都督、刺史。麟德初,改燕然為瀚海都護府,領回紇,徙故瀚海都護府於古雲中城,號雲中都護府,磧以北蕃州悉隸瀚海,南隸雲中。雲中者,義成公主所居也,頡利滅,李靖徙突厥羸破數百帳居之,以阿史德為之長,眾稍盛,即建言願以諸王為可汗,遙統之。帝曰:「今可汗,古單于也。」乃改雲中府為單于大都護府,以殷王旭輪為單于都護。帝封禪,都督葛邏祿叱利等三十餘人皆從至泰山下,已封,詔勒名於封禪碑云。凡三十年北方無戎馬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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