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가한 묵극련은 본래 “소살(小殺)”이라고 불리던 인물로 성격이 인자하고 우애가 있었으며 자신이 즉위한 것이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아우] 궐특륵에게 양보하고자 했으나 [궐]특륵이 감히 받으려고 하지 않자 결국 [가한의] 지위를 잇게 되었는데, [이것이] 실제로 개원 4년(716)의 일이었다. [비가가한은 궐]특륵을 좌현왕으로 삼아 병력을 모두 통솔하게 했다. 이전에 묵철이 죽자 궐특륵이 그를 모시던 신하마저 모두 죽였는데, 오직 돈욕곡(暾欲谷)만이 [그의] 딸 파복(婆匐)이 묵극련의 가돈이라 홀로 [죽음을] 면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부락에 돌아가 있었다. 이후에 돌기시 소록(蘇祿)이 스스로 가한이 되면서 돌궐의 부락들이 많이 이반하자 묵극련이 바로 돈욕곡을 불러 그와 나라[의 일]을 모의했는데, [이 때 나이가] 70여 세라 백성들이 존중하고 무서워했다. | 毗伽可汗默棘連,本謂「小殺」者,性仁友,自以立非己功,讓於闕特勒,特勒不敢受,遂嗣位,實開元四年。以特勒為左賢王,專制其兵。初,默啜死,闕特勒盡殺其用事臣,惟暾欲谷者以女婆匐為默棘連可敦,獨免,廢歸其部。後突騎施蘇祿自為可汗,突厥部種多貳,默棘連乃召暾欲谷與謀國,年七十餘,眾尊畏之。 |
얼마 있다가 협질사태 등이 하곡(河曲)에서 [돌궐로] 귀순했다. 이전에 항호(降戶)가 남쪽에 내려오자 선우부도호 장지운이 그의 병기를 모두 거두어들였기 때문에 돌궐 사람들이 원망하며 화를 냈다. 그런데 강회(姜晦)가 순변사가 된 뒤 [돌궐 사람들이] 활과 화살[을 쓰는 것]을 금지해 사냥으로 살 수 없다고 호소하자 [강]회가 모두 돌려주었다. 그러자 [항호들이 강회와] 함께 장지운을 공격해 사로잡아 [그를] 돌궐로 보내려고 했는데, 삭방행군총관 설눌과 장군 곽지운(郭知運)이 추격해 백성들이 죽이자 [결국에는 장]지운을 풀어주었다. [협질]사태 등이 두 개의 부대로 나뉘어 북쪽으로 도망을 가자 왕준이 다시 그의 좌측 부대를 격파했다. | 俄而跌思太等自河曲歸之。始,降戶之南也,單于副都護張知運盡斂其兵,戎人怨怒;及姜晦為巡邊使,遮訴禁弓矢無以射獵為生,晦悉還之。乃共擊張知運,禽之,將送突厥;朔方行軍總管薛訥、將軍郭知運追之,眾潰,釋知運去。思太等分為二隊北走,王晙又破其左隊。 |
묵극련이 이미 항복한 호[인](胡人)을 얻고 남쪽으로 [당나라의] 요새를 노략질하려고 하자 돈욕곡이 말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은 [당나라] 천자가 뛰어나고 용맹하며 백성들이 화합해 해마다 풍년이 들어 [빈] 틈이 없기 때문이고, 또한 우리 군대는 새로 모였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묵극련이 또한 성채를 [세워] 도읍을 삼고, 불교 사원과 도관을 세우려고 하자 돈욕곡이 말했다. “돌궐의 백성은 당나라의 백분의 일도 되지 못하는데, 대적을 할 수 있는 것은 물과 풀을 따라 사냥을 하고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으며 싸우는 일을 익혀 강하면 나아가서 뺏고 약하면 달아나 엎드리니 당나라 군대가 비록 많아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성채에 살게 되어 싸워서 한 번이라도 지게 된다면 반드시 그들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은 사람을 어질고 약하게 만들고 힘을 강하게 하는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묵극련이 그의 책략이 올바르다고 하며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하지만] 황제는 진심이 아니라고 여겨 답을 하되 [화친은] 허락해주지 않았다. 바로 조칙을 내려 정벌하라고 하자 발실밀(종족 명칭), 우효위대장군 금산도총관 처목곤집미철과 견곤도독 우무위대장군 골돌록비가가한, 거란도독(都督) 이실활(李失活), 해도독(奚都督) 이대보, 돌궐묵철의 아들 좌현왕 묵특륵, 좌[무]위위장군 우현왕 아사나비가특륵, 연산군왕 화발석실필 등 다른 종족과 중국의 병사가 모두 출발하는데 대저 [군대가] 30만이었고, 어사대부 삭방도대총관 왕준이 [이를] 통제해 [개원] 8년(719) 가을 계락수(稽落水)부근에서 모이기로 약속을 하고 발실밀, 해, 거란을 시켜 길을 나눠 [돌궐의] 아장을 공격해 묵극련을 잡게 했다. 묵극련이 크게 두려워하자 돈욕곡이 말했다. “발실밀은 북정(도호부: 지금 신강 유오이 자치구 길목살이현 25리 떨어진 파성자이다)에 있어 [다른] 두 종족과 서로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분명 모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왕]준과 장가정의 사이가 좋지 않아 반드시 서로 의견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역시 올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모두 올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마땅히 사흘 전에 모든 백성들을 북쪽으로 옮긴다면 그들은 양식이 떨어져 스스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발실밀은 가벼이 이익을 밝혀 반드시 먼저 올 것이니 공격을 해서 잡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얼마 있다가 과연 발실밀이 백성들을 이끌고 돌궐의 아장을 핍박하나 [그들은 왕]준 등이 오지 못한 것을 알고 바로 물려 물러나려고 했는데, 돌궐이 공격하려고 하자 돈욕곡이 말했다. “[발실밀의] 군대는 천 리나 멀리서 나왔기 때문에 병사들이 죽기로 싸울 것이니 날카로운 기세를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뒤를 밟지 못한다면 가까이에서 공격해서 잡아야만 할 것입니다.” 북정까지의 거리가 2백 리인데, 바로 군대를 나눠 다른 길로 [가서 먼저] 그 성을 빼앗고, 바로 발실밀을 급히 공격한다면 병사들이 북정으로 도망갔다가 돌아갈 곳이 없게 되어 모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돌궐이] 적정(赤亭)을 돌아 나와 양주를 약탈할 때 [양주]도독 양경술이 관속인 [부장(副將)] 노공리와 [판관(判官)] 원징을 시켜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해 잡으려 하자 돈욕곡이 말했다. “[양]경술이 만약 성을 지키고 있다면 당연히 [그와] 강화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 [그가] 병사들을 낸다면 우리도 역시 결전을 벌여야만 반드시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원]징이 군대에 명령을 내려 말했다. “쇠뇌의 활을 당겨 밖으로 향하라.” [하지만] 마침 날씨가 추워 살이 터져 병사들의 손이 활을 당길 수 없었기 때문에 크게 패하고 원징이 도망을 가자 [양]경술이 이에 연좌되어 평민 신분으로 양주의 일을 임시로 살피게 되었고, 돌궐은 마침내 크게 [기세를] 떨치며 모든 묵철의 남은 백성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 默棘連既得降胡,欲南盜塞,暾欲谷曰:「不可,天子英武,人和歲豐,未有間,且我兵新集,不可動也。」默棘連又欲城所都,起佛、老廟,暾欲谷曰:「突厥眾不敵唐百分一,所能與抗者,隨水草射獵,居處無常,習於武事,彊則進取,弱則遁伏,唐兵雖多,無所用也。若城而居,戰一敗,必為彼禽。且佛、老教人仁弱,非武彊術。」默棘連當其策,即遣使者請和。帝以不情,答而不許。俄下詔伐之,乃以拔悉蜜右驍衞大將軍金山道總管處木昆執米啜、堅昆都督右武衞大將軍骨篤祿毗伽可汗、契丹都督李失活、奚都督李大酺、突厥默啜子左賢王墨特勒、左威衞將軍右賢王阿史那毗伽特勒、燕山郡王火拔石失畢等蕃漢士悉發,凡三十萬,以御史大夫、朔方道大總管王晙統之,期八年秋並集稽落水上,使拔悉蜜、奚、契丹分道掩其牙,捕默棘連。默棘連大恐,暾欲谷曰:「拔悉蜜在北庭,與二蕃相距遠,必不合。晙與張嘉貞有隙,必相執異,亦必不能來。即皆能來,我當前三日悉眾北徙,彼糧竭自去。拔悉蜜輕而好利,當先至,擊之可取也。」俄而拔悉蜜果引眾逼突厥牙,知晙等不至,乃引卻,突厥欲擊之,暾欲谷曰:「兵千里遠出,士殊死鬬,鋒不可當也。不如躡之,邀近而取之。」距北庭二百里,乃分兵由它道襲拔其城,即急擊拔悉蜜,眾走趨北庭,無所歸,悉禽之。還出赤亭,掠涼州,都督楊敬述使官屬盧公利、元澄等勒兵討捕,暾欲谷曰:「敬述若城守,當與和。如兵出,吾且決戰,必有功。」澄令于軍曰:「臝臂持滿外注。」會大寒裂膚,士手不能張弓矢,由是大敗,元澄走,敬述坐以白衣檢校涼州事,突厥遂大振,盡有默啜餘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