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57, 신당서 돌궐전-9) 끝.

상 상 2015. 3. 13. 17:07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57, 신당서 돌궐전-9) .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신당서 돌궐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新唐書 卷215 돌궐전(突厥)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五, , 突厥

번 역 문

원 문

좌살은 판궐특륵 이었는데, 마침내 비가가한의 [다른] 아들을 추대하나 얼마 있다가 [그마저] 골돌[]엽호에게 살해되었고, 그의 동생을 세웠으나 바로 골돌[]엽호가 다시 살해하고 스스로 가한이 되었다. 천보 년간 초기(743)에 그의 큰 부락인 회흘, 갈라록, 발실밀이 함께 일어나 [골돌록]엽호를 공격해 죽이고 발실밀의 추장을 힐질이시가한으로 삼았으니, 이에 회흘과 갈라록이 스스로 좌엽호(左葉護)와 우엽호(右葉護)가 되었으며, 또한 사자를 보내 [이런 사실을 당조에] 알렸다. 나라 사람들이 판궐특륵의 아들을 오소미시가한으로 삼고, 그의 아들 갈랍치를 서살로 삼았다. 황제가 사자로 하여금 [오소미시가한을] 회유해 내부하게 했으나 오소[미시가한]이 듣지 않고 그 부하들 역시 따르지 않았는데, 발실밀 등 세 부락이 모두 오소미시[가한]을 공격하자 [오소]미시[가한][남쪽으로] 도망갔다. 서엽호(西葉護) 아포사[힐리발]과 갈랍치가 이끄는 5천 장이 항복하자 갈랍치를 회은왕(懷恩王)으로 삼았다.

左殺者判闕特勒也遂立毗伽可汗子俄為骨咄葉護所殺立其弟旋又殺之葉護乃自為可汗天寶初其大部回紇葛邏祿拔悉蜜並起攻葉護殺之尊拔悉蜜之長為頡跌伊施可汗於是回紇葛邏祿自為左右葉護亦遣使者來告國人奉判闕特勒子為烏蘇米施可汗以其子葛臘哆為西殺帝使使者諭令內附烏蘇不聽其下不與拔悉蜜等三部共攻烏蘇米施米施遁亡其西葉護阿布思及葛臘哆率五千帳降以葛臘哆為懷恩王

[천보] 3(744) 발실밀 등이 오소미시[가한]을 죽이고 그 머리를 경사에 전하자 태묘에 바쳤다. 그의 동생 백미특륵 골롱복이 즉위해 백미가한(白眉可汗)이 되었다. 이에 돌궐이 크게 어지러워져 나라 사람들이 발실밀의 추장을 추대해 가한으로 삼았고, [황제의] 조칙으로 삭방절도사가 그 혼란을 기회로 병력을 일으켜 살하내산(薩河內山)에서 [그들과] 맞닥뜨려 그 좌부의 아파달간의 11부락을 공격해 격파했으나 다만 그 우부만을 격파하지 못하였으며, 회흘, 갈라록이 발실밀 가한을 죽이고 회흘의 골력배라를 받들어 그 나라를 안정시키니 이가 골돌록비가궐가한이었다. 이듬해(745) [회흘의 골력배라가] 백미가한을 죽여 그의 머리를 [경사에] 전하자 [이를 태묘에] 바쳤다. [돌궐] 비가가한의 아내 골돌록파복가돈이 백성을 이끌고 스스로 귀부하자 천자가 화악루(花萼樓)에서 친히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어 그 일을 시로 찬미했으며 [골돌록파복]가돈을 빈국부인(賓國夫人)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식가루 20만 전어치를 주었다.

三載拔悉蜜等殺烏蘇米施傳首京師獻太廟其弟白眉特勒鶻隴匐立是為白眉可汗於是突厥大亂國人推拔悉蜜酋為可汗詔朔方節度使王忠嗣以兵乘其亂抵薩河內山擊其左阿波達干十一部破之獨其右未下而回紇葛邏祿殺拔悉蜜可汗奉回紇骨力裴羅定其國是為骨咄祿毗伽闕可汗明年殺白眉可汗傳首獻毗伽可汗妻骨咄祿婆匐可敦率眾自歸天子御花萼樓宴羣臣賦詩美其事封可敦為賓國夫人歲給粉直二十萬

일찍이 돌궐이 후위(後魏: 북위) 대통 년간에(552) 나라를 세웠다가 이에 이르러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조공을 할 때 모두 옛 부락 9(九姓: 돌궐 9)이라고 했으나 그 땅은 [실제로] 다 회흘에 [병합되어] 들어갔다.

이전에 그 [아사나] 족속이 나뉘어 서쪽에 나라를 세운 것을 서돌궐(西突厥)이라고 한다.

始突厥國於後魏大統時至是滅後或朝貢皆舊部九姓云其地盡入回紇始其族分國於西者曰西突厥

서돌궐은 그 조상이 눌도륙[]의 손자 토무(吐務)로 대엽호(大葉護)라 불렸다. 큰 아들을 토문[이라고 했는데, 가한으로 즉위한 이후에] 이리가한이라고 했고, 둘째 아들을 실점밀이라고 하기도 했는데 달리 슬제미라고도 했다. 슬제미의 아들을 달두가한이라고 하기도 했고, 또한 보가가한이라고 했다. 이전에 동돌궐(東突厥)과 오손(烏孫)의 옛 땅을 나누어 가져 동쪽으로는 돌궐, 서쪽으로는 뇌저해(雷翥海), 남쪽으로는 소륵, 북쪽으로는 한해(瀚海)[경계로] 경사에서 북쪽으로 7천 리가 떨어져 있었는데, 언기(焉耆)로부터는 서북쪽으로 이레를 가면 남쪽 아정[南庭]에 이르고, 북쪽으로 [다시] 여드레를 가면 북쪽 아정[北庭]에 도착했으며, 도륙, 노실필, 가라록, 처월, 처밀, 이오[와 같은] 여러 족속이 섞여 있었다. 그 풍속은 대체적으로 돌궐과 같았고, 말만 조금 달랐다.

西突厥其先訥都陸之孫吐務號大葉護長子曰土門伊利可汗次子曰室點蜜亦曰瑟帝米瑟帝米之子曰達頭可汗亦曰步迦可汗始與東突厥分烏孫故地有之東即突厥西雷翥海南疏勒北瀚海直京師北七千里由焉耆西北七日行得南庭北八日行得北庭與都陸弩失畢歌邏祿處月處蜜伊吾諸種雜其風俗大抵突厥也言語少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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