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6, 구당서 토번전(상)- 4)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4) ※ 구당서 토번전(상)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구당서(舊唐書)卷196上 토번열전(吐蕃列傳) 第146上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舊唐書卷一百九十六上 19) 토번은 이전부터 군사의 강함을 믿고, 매번 표소(表疏)를 보내, 적례(敵禮:대등한 나라 사이에 행하는 예)를 구하고, 언사가 교만하니 황상(皇上)이 매우 분노했다. 봉선례(封禪禮)를 마치기를 기다려 중서령 장열(張說)이 상주하여 말하기를, “토번의 추악한 반역자들은 진실로 만 번을 베어야 마땅합니다만, 또다시 정벌함을 일삼게 되면, 실로 수고로움과 폐단이 됩니다. 또한 십 수 년 동안 감주(甘州: 감숙성 장액현), 양주(涼州), 하주(河州: 감숙성 임하현), 선주(鄯州)에서 징발하기를 끊이지 않았으니, 비록 연이어 이긴다하더라도 보충할 수 없습니다. 듣자하니 죄를 뉘우치고 화평을 청한다하니, 다만 폐하께서 사신을 보내 그들이 머리 숙여 내속하게 하여 변경의 소요를 그치게 한다면 모든 백성에게 크게 다행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상(皇上)이 말하기를, “나와 왕군착이 일을 도모하기를 기다려라.”라고 하였다. (장)열이 나와서 원건요(源乾曜)에게 말하길, “(왕)군착은 용맹스러우나 계략이 없고 항상 공을 세워 총애를 받을 생각만 하니, 양국이 화평한데, 무엇으로 공을 세우겠는가? 만약 [군착이] 들어와서 계책을 말한다면 내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군착(君㚟)이 입조하여 사정을 진술하면서 병사를 이끌고 토번 깊숙이 들어가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 吐蕃既自恃兵強,每通表疏,求敵國之禮,言詞悖慢,上甚怒之。及封禪禮畢,中書令張說奏言:「吐蕃醜逆,誠負萬誅,然又事征討,實為勞弊。且十數年甘、涼、河、鄯徵發不息,縱令屢勝,亦不能補。聞其悔過請和,惟陛下遣使,許其稽顙內屬,以息邊境,則蒼生幸甚。」上曰:「待吾與王君籌之。」說出,謂源乾曜曰:「君착勇而無謀,常思僥倖,兩國和好,何以為功?若入陳謀,則吾計不遂矣。」尋而君入朝奏事,遂請率兵深入以討之。 | 20) [개원] 15년(727) 정월에 (왕)군착이 병사를 이끌고 청해(靑海)의 서쪽에서 토번을 격파하고, [토번의] 군수품과 양, 말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이에 앞서 토번 대장 실낙라가 무리를 이끌고 들어와 대두곡을 공격하고, 이어서 감주(甘州)를 공격하여 시가지를 불태웠다. [당시] (왕)군착은 그 예봉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 싸우지 못했다. 폭설을 만나 적병 중 얼어 죽은 자가 많았으므로 적석군(積石軍: 청해성 귀덕현 동쪽)의 서쪽 길을 통해 귀환했다. (왕)군착은 사전에 사람들로 하여금 적의 변경에 잠입하게 하고 퇴로에 있는 목초를 불태웠다. 실낙라의 군대가 대비천(大非川)에 이르자 병사들은 갑옷을 풀고 말을 먹이려 했지만 말 먹일 목초가 소진되어 말 과반이 죽고 말았다. (왕)군착은 진주도독(秦州: 감숙성 천수시) 장경순(張景順) 등과 함께 무리를 이끌고 [적군의] 자취를 따라 습격하려 했는데, 청해의 서쪽에 이르렀을 때, 마침 청해의 물이 얼어붙어 병사들은 모두 얼음 위로 [청해를] 건널 수 있었다. 실낙라가 이미 대비천을 건넜을 때 군수 물자와 피로한 병사들은 여전히 청해 근처에 있었는데, (왕)군착은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들을 잡아 돌아왔다. 그 해 9월에 토번의 대장 실낙라공록과 촉룡망포지가 과주성(瓜州城: 감숙성 주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자사 전원헌(田元獻)과 왕군착의 아버지 (왕)수(壽)를 잡고 성 안의 군수품 및 식량을 모두 취한 뒤 성을 불태우고 갔다. 이어 옥문군(玉門軍: 감숙성 주천)및 상락현(常樂縣: 과주성 서북)으로 진공하였으나, 현령 가사순(賈師順)이 80일 동안 성을 굳게 지키니 적이 드디어 군대를 거두어 퇴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군착은 회흘(回紇)의 잔당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병부상서 소숭(蕭嵩)을 하서절도사에 임명하고, 건강군사(建康軍使), 좌금오장군 장수규(張守珪)를 과주자사로 삼아, 주(州)의 성곽을 축조하고 백성을 불러 모아 본업에 돌아가게 했다. 당시 실낙라공록의 위엄있는 명성이 드높았는데, 소숭이 토번 내부를 이간시킬 계책을 써서, 그가 중국과 몰래 통한다고 소문을 내자 찬보가 [실낙라공록을] 소환하여 죽였다. | 十五年正月,君착率兵破吐蕃于青海之西,虜其輜重及羊馬而還。先是,吐蕃大將悉諾邏率眾入攻大斗谷,又移攻甘州,焚燒市里。君착畏其鋒,不敢出戰。會大雪,賊凍死者甚眾,遂取積石軍西路而還。君착先令人潛入賊境,於其歸路燒草。悉諾邏軍還至大非川,將士息甲牧馬,而野草皆盡,馬死過半。君착與秦州都督張景順等率眾襲其後,入至青海之西,時海水冰合,將士並乘冰而渡。會悉諾邏已渡大非川,輜重及疲兵尚在青海之測,君착縱兵俘之而還。其年九月,吐蕃大將悉諾邏恭祿及燭龍莽布支攻陷瓜州城,執刺史田元獻及王君착之父壽,盡取城中軍資及倉糧,仍毀其城而去。又進攻玉門軍及常樂縣,縣令賈師順嬰城固守,凡八十日,賊遂引退。俄而王君착為迴紇餘黨所殺,乃命兵部尚書蕭嵩為河西節度使,以建康軍使、左金吾將軍張守珪為瓜州刺史,修築州城,招輯百姓,令其復業。時悉諾邏恭祿威名甚振,蕭嵩乃縱反間於吐蕃,云其與中國潛通,贊普遂召而誅之。 | 21) 그 이듬해(728) 가을에 토번 대장 실말랑이 다시 무리를 이끌고 과주를 공격하니, (장)수규가 출병하여 격퇴했다. 농우절도사, 선주도독 장충량(張忠亮)이 병사를 이끌고 청해(靑海) 서남쪽 갈파곡에 이르러 토번과 접전하고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석군(積石軍), 막문군(莫門軍: 황하와 시집하의 합류점에 위치) 두 군의 군대가 함께 와서 (장)충량과 합세하고 [적군을] 토벌하였는데, 대막문성(大莫門城: 청해성 서녕시 서쪽 200리 지점)을 함락시켜, [적군] 천여 명을 포로로 잡고, 말 천 필, 이우(犛牛:야크) 오백 두, 그리고 병기, 장비 및 옷감, 식량 등을 노획한 뒤 낙타교(駱駝橋)를 불태우고 돌아왔다. 8월에 소숭이 다시 부장 두빈객(杜賓客)을 보내 노수(弩手) 사천 명을 인솔하고 기련성(祁連城: 감숙성 장액현 소재) 아래에서 토번과 교전하게 하였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모이고 흩어지다가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고, 전투 중에 토번의 부장 한 사람을 베었다. 적이 패하자 산으로 흩어져 달아났는데 우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당초 황상은 토번이 여러 차례 노략질하러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근신에게 말하기를, “토번이 교만하고 흉폭하여 힘을 믿고 쳐들어 왔으니, 짐이 지금 지도를 보고 상황을 자세히 살핀 후, 친히 장수를 임명하면 반드시 토번을 격파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몇일 후에 첩보가 당도했다. | 明年秋,吐蕃大將悉末朗復率眾攻瓜州,守珪出兵擊走之。隴右節度使、鄯州都督張忠亮引兵至青海西南渴波谷,與吐蕃接戰,大破之。俄而積石、莫門兩軍兵馬總至,與忠亮合勢追討,破其大莫門城,生擒千餘人,獲馬一千匹、犛牛五百頭,器仗衣資甚眾,又焚其駱駝橋而還。八月,蕭嵩又遣副將杜賓客率弩手四千人與吐蕃戰于祁連城下,自辰至暮,散而復合,賊徒大潰,臨陣斬其副將一人。賊敗,散走投山,哭聲四合。初,上聞吐蕃重來入寇,謂侍臣曰:「吐蕃驕暴,恃力而來,朕今按地圖,審利害,親指授將帥,破之必矣。」數日而露布至。 | 22) [개원] 17년(729) 삭방대총관 신안왕 (이)의(禕)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농우(隴右)에 가서 석보성(石堡城: 청해호 동남안, 적령의 동남쪽에 위치)을 함락시키고, 4백여 급을 참수하고, 이백여 명을 포로로 잡은 뒤, 석보성에 진무군(振武軍)을 두고, 포로들을 태묘에 바쳤다. 이때 토번에서 자주 사신을 보내 화평을 청했는데, 충왕(忠王: 숙종 리형)의 우(友) 황보유명(皇甫惟明)이 상주한 일로 인하여 [현종을] 직접 배알하고 강화의 편리함을 아뢰었다. 황상(皇上)이 말하기를, “토번의 찬보는 과거에도 일찍이 짐에게 서신을 보낸 적이 있는데, 교만하고 무례하여 짐이 토벌하기를 뜻하였으니 어찌 강화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황보)유명이 말하기를, “개원 초, 찬보의 나이 아직 어렸는데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반드시 변경 군대의 장수가 단번에 공을 세우고자 거짓 편지를 꾸며 폐하를 격노하게 한 것입니다. 양국이 전쟁을 벌여, 군대를 일으키고 백성을 움직이니, [장수들이] 이를 기회 삼아 공공연히 도적질을 하고 거짓으로 공장(功狀)을 만들어 훈작(勳爵)을 바랬으나 막대한 손해를 끼쳤을 뿐 나라에 무슨 이득이 되었습니까! 지금 하서(하서 4군: 돈황, 주천, 장액, 무위 일대), 농우(隴右: 농산의 서쪽)의 백성들이 피로하고 힘이 다한 것은 모두 이로 인해서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사신을 보내 금성공주를 만나게 하고, 이로 인해 찬보와 직접 만나 강화를 약속한 뒤, 그로 하여금 머리 숙여 신하가 되게 하여 영원히 변경의 소요를 종식시킨다면, 이는 대대로 백성을 편하게 하는 계책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상이 그 말이 그럴 듯하다 여기고, 이로 인해 (황보)유명(惟明) 및 내시 장원방(張元方)을 사신으로 임명하여, 토번에 가서 문안하게 했다. (황보)유명과 (장)원방 등이 토번에 이르러 찬보와 공주를 만나 황상의 뜻을 모두 아뢰었다. 찬보 등이 흔쾌히 강화를 청하면서, 정관(貞觀) 이래 전후의 모든 칙서를 꺼내어 유명 등에게 보여 주었으며, 중신(重臣) 명실렵에게 명하여, (황보)유명 등을 따라 [당에] 입조하게 하고 [찬보가]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외생(外甥)인 저는 장인이신 선대 황제(中宗)의 오랜 친척이며, 또한 금성공주와 혼인하는 은혜를 입어, 드디어 화목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한 집안을 이루었으니, 천하 백성이 모두 안락하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장현표(張玄表), 이지고(李知古) 등이 동서 두 방향에서 먼저 군사를 움직여 토번을 침공하였으므로 변경의 장수들이 서로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틈이 있게 된 것입니다. 외생은 선대 문성공주와 지금의 금성공주로 인해 존귀하고 비천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데, 어찌 감히 예를 모른다 하겠습니까! 또한 나이가 어린 연유로 변경 장수의 거짓에 넘어가 어지러이 싸움을 일으켜 장인으로 하여금 원망하게 하였습니다. 엎드려 빌건대 [사정을] 자세히 살피시어 추궁하시고 또 용서해 주신다면 죽어도 족할 것입니다. 이전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려 하였으나, 모두 변경의 장수들에게 허락되지 못해, 감히 스스로 주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작년 겨울 공주가 사인(使人) 누중실약으로 하여금 장계를 가지고 입조하려고 했는데, [지금] 사신이 파견되어 공주를 보러 왔으니, 외생은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삼가 논명실렵과 부사(副使) 압아장군 낭사흘야실렵을 입조하게 하여 장래의 일을 논의하고 처분을 따르고자 주청합니다. 양국과 관련된 모든 사안은 실렵(悉獵)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외생은 토번 땅에서 이미 변경의 장수들을 처분하고, 침략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만약 한인(漢人)이 와서 투항하면 바로 송환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장인이신 황제께서 제 충심을 멀리서 살피시어 전처럼 화평하기를 허락하시면 백성들이 오랫동안 즐겁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성은을 입는다면 천년만세 동안 외생은 끝내 감히 먼저 맹서를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금호병(金胡瓶) 한 점, 금반(金盤) 한 점, 금완(金碗) 한 점, 마뇌배(馬腦杯) 한 점, 영양삼단(零羊衫段) 한 점을 바치어 작은 나라의 예의에 충당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금성공주가 다시 별도로 금압반잔(金鴨盤盞)과 여러 종류의 물건 등을 진헌하였다. [개원] 18년(730) 10월에 명실렵(名悉獵) 등이 서울(장안)에 이르자, 황상이 선정전에 행차하시고, 우림장을 진열하여 이들을 접견하였다. (명)실렵은 자못 서적과 문장에 익숙하여, 앞서 금성공주를 마중하러 장안에 왔을 때, 당시 조정에서는 모두 그의 언변이 재능 있다고 칭찬했다. 이때 황상이 그를 안쪽에 마련된 소규모 연회에 불러 환담을 나누며 예우하고, 자포(紫袍), 금대(金帶) 및 어대(魚袋)와 시복(時服), 증채(繒彩), 은반(銀盤), 호병(胡瓶)을 주었으며, 또한 별관에서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 (명)실렵은 자포, 금대와 여러 기물은 받았으나 어대를 물려 사양하며 말하기를, “본국에는 이러한 장복(章服)이 없으니, 감히 이런 특별한 상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황상이 가상하게 여겨 이를 허락했다. 어사대부 최림(崔琳)을 불러 사신에 임명하고 토번에 답례를 행하게 했다. 또한 적령(赤嶺: 일월산)에 각자 경계를 표시한 비석을 세워 다시는 서로 침공하지 않기를 서약했다. | 十七年,朔方大總管信安王禕又率兵赴隴右,拔其石堡城,斬首四百餘級,生擒二百餘口,遂於石堡城置振武軍,仍獻其俘囚于太廟。於是吐蕃頻遣使請和,忠王友皇甫惟明因奏事面陳通和之便。上曰:「吐蕃贊普往年嘗與朕書,悖慢無禮,朕意欲討之,何得和也!」惟明曰:「開元之初,贊普幼稚,豈能如此。必是在邊軍將務邀一時之功,偽作此書,激怒陛下。兩國既鬬,興師動眾,因利乘便,公行隱盜,偽作功狀,以希勳爵,所損鉅萬,何益國家。今河西、隴右,百姓疲竭,事皆由此。若陛下遣使往視金城公主,因與贊普面約通和,令其稽顙稱臣,永息邊境,此永代安人之道也。」上然其言,因令惟明及內侍張元方充使往問吐蕃。惟明、元方等至吐蕃,既見贊普及公主,具宣上意。贊普等欣然請和,盡出貞觀以來 前後敕書以示惟明等,令其重臣名悉獵隨惟明等入朝,上表曰:外甥是先皇帝舅宿親,又蒙降金城公主,遂和同為一家,天下百姓,普皆安樂。中間為張玄表、李知古等東西兩處先動兵馬,侵抄吐蕃,邊將所以互相征討,迄至今日,遂成釁隙。外甥以先代文成公主、今金城公主之故,深識尊卑,豈敢失禮。又緣年小,枉被邊將讒搆鬬亂,令舅致怪。伏乞垂察追留,死將萬足。前數度使人入朝,皆被邊將不許,所以不敢自奏。去冬公主遣使人婁眾失力將狀專往,蒙降使看公主來,外甥不勝喜荷。謹遣論名悉獵及副使押衙將軍浪些紇夜悉獵入朝,奏取進止。兩國事意,悉獵所知。外甥蕃中已處分邊將,不許抄掠,若有漢人來投,便令却送。伏望皇帝舅遠察赤心,許依舊好,長令百姓快樂。如蒙聖恩,千年萬歲,外甥終不敢先違盟誓。謹奉金胡瓶一、金盤一、金椀一、馬腦盃一、零羊衫段一,謹充微國之禮。金城公主又別進金鵝盤盞雜器物等。十八年十月,名悉獵等至京師,上御宣政殿,列羽林仗以見之。悉獵頗曉書記,先曾迎金城公主至長安,當時朝廷皆稱其才辯。及是上引入內宴,與語,甚禮之,賜紫袍金帶及魚袋,并時服、繒綵、銀盤、胡瓶,仍於別館供擬甚厚。悉獵受袍帶器物而却進魚袋,辭曰:「本國無此章服,不敢當殊異之賞。」上嘉而許之。詔御史大夫崔琳充使報聘。仍於赤嶺各豎分界之碑,約以更不相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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