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4, 구당서 토번전(상)- 2)

상 상 2014. 11. 3. 17:25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4, 구당서 토번전()- 2)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구당서(舊唐書)196토번열전(吐蕃列傳) 146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舊唐書卷一百九十六上

7)()고종이 계위했다. (기종)농찬에게 부마도위를 제수하고, 서해군왕에 봉했으며, () 2천 단()을 주었다. (기종)농찬은 이로 인하여 사도 장손무기 등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새로 즉위하셨는데, 만약 불충한 마음을 가진 신하가 있다면,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겠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금은보화 15종을 헌상하여, 태종의 영좌(靈座) 앞에 놓기를 청하였다. 고종이 이를 가상하다여겨, 종왕에 봉하고, 잡채(雜綵) 3천 단()을 주었다. 이로 인하여 잠종(蠶種) 및 술, 맷돌, 종이, 먹을 만드는 장인을 청하였는데 모두 허락하였다. 곧 그의 모습을 닮은 석상을 만들어 소릉(昭陵)입구 아래에 배열하였다.

高宗嗣位授弄讚為駙馬都尉封西海郡王賜物二千段弄讚因致書于司徒長孫無忌等云:「天子初即位若臣下有不忠之心者當勒兵以赴國除討。」并獻金銀珠寶十五種請置太宗靈座之前高宗嘉之進封為賨王賜雜綵三千段因請蠶種及造酒墨之匠並許焉乃刊石像其形列昭陵玄闕之下

8)영휘 원년(650) (기종)농찬이 죽었다. 고종이 그를 위해 애도를 표하는 예를 거행하고, 우무후장군 선우신제를 보내 부절(符節)을 지니고 새서을 지참하게 하여 조문했다. 농찬의 아들이 일찍 죽었으므로 그 손자가 자리를 이었는데, 칭호는 다시 찬보라 하였다. 이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나라 일은 모두 녹동찬에게 위임했다. 녹동(祿東)의 성은 설씨인데, 비록 글자는 몰랐으나 품성이 총명하고 과감성이 있으며 엄중하여 군대를 훈련시킴에 절제가 있었으므로, 토번이 여러 강족을 아우르고, 본토에서 패권을 누린 것은 대개 그의 지모 때문이었다. 당초 태종이 문성공주와의 혼인을 허락했을 때 찬보는 녹동찬으로 하여금 가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황제가 그를 만나 몇 가지 질문을 할 때, 그의 응대함이 [태종의] 뜻에 부합되므로 태종이 그를 예우함이 다른 번()과 달랐다. 이에 녹동찬을 우위대장군으로 삼고, 낭야장공주의 외손녀 단씨를 처로 삼게 했다. 녹동찬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신은 본국에 부인이 있는데 부모가 짝지어 주었으며, 인정상 차마 배반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찬보가 아직 공주를 만나지 못했는데, 그를 모시는 신하가 어찌 감히 먼저 아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종이 이를 가상하게 여기고, 두터운 은혜로 그를 위무하고자 하였는데, 비록 그의 대답이 기특하다고는 여겼지만, 그의 청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녹동찬은 아들이 다섯 있었는데, 장자는 찬실약이고 일찍 죽었다. 그 다음이 흠릉이고, 그 다음이 찬파, 그 다음이 실다간 그 다음이 발론이었다. 녹동찬이 죽자 흠릉 형제가 다시 그 나라를 장악했다.

永徽元年弄讚卒高宗為之舉哀遣右武候將軍鮮于臣濟持節賫璽書弔祭弄讚子早死其孫繼立復號贊普時年幼國事皆委祿東贊祿東姓蒆氏雖不識文記而性明毅嚴重講兵訓師雅有節制吐蕃之并諸羌雄霸本土多其謀也太宗既許降文成公主贊普使祿東贊來迎召見顧問進對合旨太宗禮之有異諸蕃乃拜祿東贊為右衞大將軍又以琅邪長公主外孫女段氏妻之祿東贊辭曰:「臣本國有婦父母所聘情不忍乖且贊普未謁公主陪臣安敢輒娶。」太宗嘉之欲撫以厚恩雖奇其答而不遂其請祿東贊有子五人長曰贊悉若早死次欽陵次贊婆次悉多干次勃論及東贊死欽陵兄弟復專其國

 

9) 뒤에 토욕혼과 사이가 좋지 못해, 용삭(661~663), 인덕(664~666) 연간에 번갈아 서로 표()를 올려 각자의 옳고 그름을 논하였는데, 서로의 주장이 달라 조정에서 빨리 처결하지 못했다. 이에 토번은 원망하고 분노하여 병력을 이끌고 토욕혼을 공격했는데 토욕혼이 크게 패하니 하원왕 모용 낙갈발과 홍화공주는 피신하여 양주(涼州)로 도망가서 사신을 보내 급함을 알렸다.

함형 원년(670) 4월 우위위대장군 설인귀를 라사도 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좌위원외대장군 아사나 도진과 우위장군 곽대봉을 부장으로 삼아 무리 10여 만을 이끌고 토벌하게 했다. 군대가 대비천(大非川)에 이르렀을 때, 토번의 대장 논흠릉에게 패배하여, ()인귀 등은 모두 죄를 물어 제명되었다. 토욕혼은 전국이 모두 함락되었는데, 오로지 모용 낙갈발과 그를 따르는 무리 수천 장()이 귀부하여, 영주(靈州:영하성 영무현)에 사민 하였다. 이때부터 토번은 매년 변경을 노략질했고, 당주(當州: 사천성 송반현 누계영 서북), 실주(悉州: 사천성 송반현 서남) 등지의 여러 강족(羌族)은 모두 그에게 항복했다.

後與吐谷渾不和龍朔麟德中遞相表奏各論曲直國家依違未為與奪吐蕃怨怒遂率兵以擊吐谷渾吐谷渾大敗河源王慕容諾曷鉢及弘化公主脫身走投涼州遣使告急咸亨元年四月詔以右威衞大將軍薛仁貴為邏娑道行軍大總管左衞員外大將軍阿史那道真右衞將軍郭待封為副率眾十餘萬以討之軍至大非川為吐蕃大將論欽陵所敗仁貴等並坐除名吐谷渾全國盡沒唯慕容諾曷鉢及其親信數千帳來內屬仍徙於靈州自是吐蕃連歲寇邊悉等州諸羌盡降之

 

10)상원 3(676)에 선주(鄯州: 청해성 서녕시 낙도현), 곽주(廓州: 서녕시 남쪽 180) 등지를 침범하여, 백성과 관리를 죽이고 노략질하니, 고종은 상서좌복야 유인궤에게 명하여, 조하군(洮河軍: 감숙성 임담현 부근)에 가서 진을 치고 지켜서 그를 막게 했다.

의봉 3(678) 또 중서령 이경현에게 명하여 선주도독을 겸하게 하고, 가서 ()인궤를 대신하여 조하(洮河)에서 진을 치고 지키게 하였다. 이윽고 관내(關內), 하동 및 여러 주()에서 용맹한 자들을 소집하여 맹사(猛士)로 삼았으니, 이전에 어떠한 역()에 종사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일찍이 문무 관리를 역임한 자는 황제가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고, 가서 토번을 격퇴하게 했다. 또한 익주장사 이효일, 휴주도독 척왕 ()봉 등에 명하여 검남, 산남에서 병사를 모아 토번을 격퇴하게 했다. 그 해 가을, ()경현이 공부상서 유심례와 군대를 이끌고, 토번과 청해에서 싸웠으나, 관군이 크게 패하고 ()심례는 적진에서 전사하니, ()경현은 군사를 멈추고 감히 구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를 수습하여 철병하다가 승풍령에 잠시 머물렀는데, 진흙 구덩이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니, 적병은 높은 언덕에 머무르며 압박해 왔다. 편장좌령군원외장군 흑치상지가 결사대 5백여 명을 이끌고 적의 군영을 야습하니, 적진에 혼란이 일어 서로 짓밟다가 3백여 명이 죽었다. ()경현은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선주(鄯州)에 이르렀으나, 죄를 물어 형주자사로 삼았다. 이전에 검남에서 병사를 모아 무주(茂州: 사천성 무현 일대)의 서남쪽에 안융성을 쌓고 적의 경계를 압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강(生羌)이 토번의 길잡이가 되어 그 성을 공격해 함락하고 병사를 이끌고 와서 이를 지켰다. 당시 토번은 양동(羊同), 당항 및 여러 강족의 땅을 모두 점령했으니, 동쪽으로는 양주(涼州), 송주, 무주, 휴주 등지와 서로 접했고, 남쪽으로는 파라문(婆羅門: 인도)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 또한 구자 소륵 등 (안서) 4개의 진()을 점령했고, 북쪽으로 돌궐과 맞닿아, 땅이 만여 리에 이르니, (), () 이래 서융(西戎)의 번성함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上元三年進寇鄯廓等州殺掠人吏高宗命尚書左僕射劉仁軌往洮河軍鎮守以禦之儀鳳三年又命中書令李敬玄兼鄯州都督往代仁軌於洮河鎮守仍召募關內河東等諸州驍勇以為猛士不簡色役亦有嘗任文武官者召入殿庭賜宴遣往擊之又令益州長史李孝逸巂州都督拓王奉等發劍南山南兵募以防禦之其年秋敬玄與工部尚書劉審禮率兵與吐蕃戰于青海官軍敗績審禮沒于陣敬玄按軍不敢救俄而收軍却出頓于承風嶺阻泥溝不能動賊屯於高岡以壓之偏將左領軍員外將軍黑齒常之率敢死之士五百人夜斫賊營賊遂潰亂自相蹂踐死者三百餘人敬玄遂擁眾鄯州坐改為衡州刺史往劍南兵募於茂州之西南築安戎城以壓其境俄有生羌為吐蕃鄉導攻陷其城遂引兵守之時吐蕃盡收羊同党項及諸羌之地東與涼巂等州相接南至娑羅門西又攻陷龜茲疏勒等四鎮北抵突厥地方萬餘里自漢魏已來西戎之盛未之有也

11)고종이 ()심례 등이 패하여 적진에서 전사하였음을 듣고, 시신(侍臣)을 불러 토번을 진압할 대책을 물었는데, 중서사인 곽정일이 말하기를, “토번이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킨 것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헛되이 병사와 군마(軍馬)만 수고스럽게 하고 식량만 낭비하였으니, 깊숙이 토벌해 들어가지 않는다면 군대의 위엄만 손상시킬 뿐이고, 깊숙이 들어가도 소굴을 모두 소탕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병력 동원을 줄이시고 점차 군대를 보내 변경의 방어에 힘쓰되 봉화대를 정돈한다면 토번의 침략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라의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 민심을 화합하기를 수년간 지속한다면, 일거에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급사중 유제현, 황보문량 등은 모두 엄히 지킴이 편하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흑치상지가 토번 대장 찬파 및 소화귀를 양비천(良非川)에서 격파하고, 2천여 급을 죽여 얻으니, 토번은 드디어 군대를 거두어 물러갔다. 황제는 조()를 내려 (흑지)상지를 하원군사로 삼아 진수하도록 하였다.

高宗聞審禮等敗沒召侍臣問綏禦之策中書舍人郭正一曰:「吐蕃作梗年歲已深命將興師相繼不絕空勞士馬虛費糧儲近討則徒損兵威深入則未窮巢穴望少發兵募且遣備邊明烽堠勿令侵抄使國用豐足人心叶同寬之數年可一舉而滅。」給事中劉齊賢皇甫文亮等皆言嚴守之便尋而黑齒常之破吐蕃大將贊婆及素和貴於良非川殺獲二千餘級吐蕃遂引退詔以常之為河源軍使以鎮禦之

 

12)의봉 4(679) 찬보가 죽었다. 그 아들 기노실롱이 자리를 잇고 다시 칭호를 찬보라고 하였다. 이때 나이가 여덟 살이어서, 국정은 다시 ()흠릉(欽陵)에게 위임하였다. 그는 대신 논한조방을 보내 [찬보의] 죽음을 알리고, 화평하기를 청했다. 고종은 낭장 송령문을 토번에 보내 장례에 참가하게 했다.

영륭 원년(680) 문성공주가 죽자, 고종은 다시 사신을 보내 조문했다.

儀鳳四年贊普卒其子器弩悉弄嗣位復號贊普時年八歲國政復委於欽陵遣其大臣論寒調傍來告喪且請和高宗遣郎將宋令文入蕃會葬永隆元年文成公主薨高宗又遣使弔祭之

 

13)측천(則天:무후)이 조정을 맡자, 문창우상 위대가를 안식도대총관으로 삼고, 안서대도호 염온고를 부장으로 삼았다.

영창 원년(689) 군대를 거느리고 토번 정벌에 나섰으나 지지부진하니, ()대가의 죄를 물어, 포주에 유배되었고, ()온고는 처형되었다. ()대가는 본래 군대를 통솔할만한 재주가 없었는데 이때 낭패를 보아, 사졸은 기근에 고생하다 모두 죽고 그 시신이 구덩이를 전전했다. 그 다음해, 문창우상 잠장천을 무위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토번을 토벌하게 했는데, 그는 도중에 돌아오고 군대는 끝내 출발하지 않았다.

여의 원년(692) 토번의 대수령(大首領) 갈소(曷蘇)가 그 수하와 귀천부락을 이끌고 항복하길 청하니, 측천(則天)이 우옥검위대장군 장현우로 하여금 정예 병사 2만을 이끌고 가서, 안무사가 되어 이들을 받아들이게 했다. 부대가 대도수(大渡水)에 머물렀을 때, 갈소의 일이 누설되어 본국(토번)에 사로잡혔다. 또한 대수령 잠추가 강족 부락 8천여 명을 이끌고 ()현우를 만나 귀부하였고, 이에 ()현우는 그 부락을 엽천주(葉川州: 사천성 청계현 서남?)에 두고, 잠추를 자사로 삼았으며, 이윽고 대도서산에 비석을 세워 공을 새기고 돌아왔다.

장수 원년(692) 무위군총관 왕효걸이 토번의 무리를 크게 파하고, 구자, 우전, 소륵, 쇄엽 등 4개의 진()을 수복했는데, 이윽고 구자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내어 이를 지키게 하였다.

만세등봉 원년(695) 왕효걸이 다시 숙변도대총관이 되어, 부총관 누사덕을 거느리고 토번의 장군 논흠릉, 찬파와 소라한산에서 싸웠는데, 관군(당나라군)이 패배하니, ()효걸은 죄를 입어 면직되었다.

만세통천 원년(696) 토번 4만의 무리가 갑자기 양주성(涼州城) 아래에 이르렀는데, 도독 허흠명은 처음에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경무장한 부대를 이끌고 순찰하다가 적을 만나 오래 싸웠으나 힘이 다하여 전사했다. 이때 토번은 다시 사자를 보내 화평을 구하니

측천(則天)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윽고 논흠릉이 안서의 4개 진에서 철군할 것을 청하고, [서돌궐] 10(十姓)의 땅을 분할해 달라고 했으나, 측천(則天)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則天臨朝命文昌右相韋待價為安息道大總管安西大都護閻溫古為副永昌元年率兵往征吐蕃遲留不進待價坐流繡州溫古處斬待價素無統禦之才遂狼狽失據士卒饑饉皆轉死溝壑明年又命文昌右相岑長倩為武威道行軍大總管以討吐蕃中路退還軍竟不行如意元年吐蕃大首領曷蘇率其所屬并貴川部落請降則天令右玉鈐衞大將軍張玄遇率精卒二萬充安撫使以納之師次大渡水曷蘇事洩為本國所擒又有大首領昝捶率羌蠻部落八千餘人詣玄遇內附玄遇以其部落置葉川州以昝捶為刺史仍於大度西山勒石紀功而還長壽元年武威軍總管王孝傑大破吐蕃之眾克復龜茲于闐疏勒碎葉等四鎮乃於龜茲置安西都護府發兵以鎮守之萬歲登封元年孝傑復為肅邊道大總管率副總管婁師德與吐蕃將論欽陵贊婆戰于素羅汗山官軍敗績孝傑坐免官萬歲通天元年吐蕃四萬眾奄至涼州城下都督許欽明初不之覺輕出按部遂遇賊拒戰久之力屈為賊所殺時吐蕃又遣使請和則天將許之論欽陵乃請去安西四鎮兵仍索分十姓之地則天竟不許之